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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상에 기록된 전자기파를 다시 어떻게 재생하느냐의 문제 이를 위한 중요한 하드웨어는 바로 우리의 뇌(골)이다. 현대 과학에서 아직,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에 대한 비밀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은... 우리의 뇌에서 기억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만물의 모든 움직임이 공간에 기록되어 진다면, 생명체는 굳이 자신의 몸 속에 또 다른 대용량의 기억장소를 둔 다는 것은 비용의 낭비다. 따라서 우주 그 진화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동물들을 보자 어미가 가르쳐 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그 기억들을 어떻게 떠올리는 것일까?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뇌가 기억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의 단서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럼 뇌의 용도는 무엇인가? 옛날 과학자들 중에는 뇌를 일종의 방열판으로 생각했다고 하던데, 그 밖에 어떤 용도로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뇌를 일종의 안테나로서의 역할로 보는 것이다. 즉, 이 안테나를 통해, 과거의 기억들을 수신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 물체의 움직임으로부터 발생하여, 공간에 수없이 돌아다니는 전파들을 잡아서 알게 해주는 역할이 바로 뇌가 아닐까? 그럴듯한 것이.... 뇌를 이루는 뇌신경 세포를 보면, 일종의 수많은 전기회로들이다. 텔레비전에 달린 동그랗거나 길다란 안테나를 보자. 그 안테나 주위로 전파가 지나가면 그 안테나에 전류가 발생하고, 그것은 결국, 전기 회로를 통해 화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뇌 속의 수많은 신경 회로들 주변으로, 과거 기억을 담고 있는 전자기파들이 지나간다면, 그 신경 회로에 전류가 흐를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설명이 맞다면, 또 다른 여러 주제들이 파생된다. 예를 들어, 그렇다면, 왜 내가 겪은 일들만을 기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왜 떠 오르지 않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들이다. 이 문제의 경우에는 주파수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간단히 말해서, 사람마다 발생하는 주파수가 달라서, 자신이 발생시킨 전자기파들은 자신과 같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어서, 잘 수신할 수 있는 반면에, 자신과 다른 주파수를 갖는 다른 사람들의 전자기파들은 잘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사람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 내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의 답을 알아 보기 전에, 주파수에 대해 더 살펴 보기로 한다. 주파수라는 말이 나오면, 보통 같이 등장하는 단어가 튜닝(Tuning; 동조)이라는 단어가 있다. 튜닝이란, 쉽게 말하자면, 라디오에서 원하는 방송의 주파수에 맞추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굳이 튜닝 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이 했던 일들로 만들어진 전파는 쉽게 수신하여 기억해 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파의 주파수는 지금 나의 주파수와 이미 같기 때문이다. 한편,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음먹기에 따라서, 튜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기억해 내기 위해, 고심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시험지에 답을 적으려고 고민하는 상태라던가, 무언가를 찾으려고 떠올리는 상태, 보통 이런 때에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우리가 튜닝 하는 때이다. 물론, 이때는 내가 한일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파수는 이미 맞추어져 있으므로, 증폭률을 올리는 것일 것이다. 즉, 그 전파의 수신 감도를 최대한 올리려고, 다른 방해 요소로부터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렇다면, 내가 하지 않은 일들은 어떻게 떠올릴 수가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그 일을 발생시킨 주체의 주파수로 나를 튜닝 하는 것일 것이다. 어떻게 그의 주파수로 맞출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그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과장하면, 내가 그것(또는 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것의 입장이 되어야 그것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자격이 된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애초에 너도 나도 다 나라면 해결이 된다. 그것을 우주심, 신, 인내천, 천상천하유아독존, 일체유심조 등 여러가지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별도로 긴 설명이 필요할 듯 하고, 어쨌든, 애초부터 나와 너의 구분이 원래 없는 것이라면, 너가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만, 그렇다 치더라도, 기술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즉, 어떻게 해야 내가 네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나만의 고정된 생각의 틀 (고정 관념)을 벗어나서, 그 또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고, 다양한 생각의 방법들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경험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 대상의 정보를 가지고, 집중을 하여 그의 입장으로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나의 뇌신경의 안테나들을 그의 입장에 맞게 튜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소에 몰랐던 그에 대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열린 마음이란,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는 텅 빈 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다양한 고민과 부딛힘을 통해서, 갈고 닦아 온 생각하는 관점의 자유로움이다. 생각하는 방식의 유연함이다. 남을 배려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이해심이며, 그로부터 갖추어진 매너이다. 이러한 능력은 곧 너그러움과 사려 깊은 인품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신비로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삶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과 진지함에서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이르니아의 세계에선 아카식이란 것이 존재한다. 아카식이란 쉽게말해 하나의 공간단위 이다. 여기서 공간단위란 시,구,동같은 명칭적 혹은 지리적 단위가 아닌, 공간 자체의 단위를 뜻한다. 아카식은 정념계의 부수적인 현상이며 효과이다. 왜냐하면 정념계의 수많은 영혼(정신 혹은 정념)들은 마치 블랙홀과 같은 강한 힘들에의해 뭉쳐져있으며 그 뭉쳐진 단위 하나하나를 아카식이라 정의하기 때문이다. 시공간이 없는 정념계에서 ‘뭉쳐진다’라는 행위가 가능한 것은 강한 힘들 덕분이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강한 힘에 의해 시공간의 왜곡될 수 있다. 그 실 예로, 비행기안에선 10억분의 1초씩 느리게 간다거나 지구궤도를 대략 7만4천KM의 속도로 돌고있는 우주비행사들은 시간이 더 느리게 간다 등이 있다. 각각의 아카식은 하나의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있다. 그 중 시간은 아카식 레코드에 정렬이 되어있다. 아카식 레코드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영혼들의 경험이 저장 되어 있는 레코드’라 할 수 있다. 즉, 영혼들의 경험들이 이 레코드에 기억되어 있는 것이다. 이르니아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실재론으로 본다. 시간과 공간은 이미 실재하는 것이고 그것에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운명(아카식 레코드)은 정해져있고 그것을 바꿀 순 없다. 예를 들자면, A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정념계의 A`라는 영혼과 연결되어있다. 어느날 A가 길을 가다가 바람에 의해 나무의 잎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 그렇다면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본 경험은 이미 아카식 레코드에 존재한다. 이유는 정념계에 시간의 개념이 없기때문이다. 사실 경험 이란 말 자체가 정념계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영혼들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할 수 도없는 것이고 당연히 어떤 사건이 먼저 일어났다 혹은 나중에일어났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모든 사건이 이미 정렬되 있는것 같이 아카식 레코드가 존재 하는 것이다. 아카식 하나에는 아카식 레코드가 하나씩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이 영혼들의 뭉침 단위 하나가 아카식이기 때문에 그 영혼무리 들의 경험이 곧 아카식 레코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 이상이 존재 할 수 없다. 사실 아카식 레코드를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아카식 레코드란? 단지 영혼들의 수많은 경험덩어리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카샤의 기록(Akashic Record)이란, ‘ 공간의 기록(Space Record)’ 이란 뜻으로서, 우주 속의 모든 것들의 움직임이 우주 공간(akasha) 자체에 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카샤(akasha)는 산스크리트(Sanscrit) 말로서, 공간(space)이란 뜻이다. 우주나 물질이나 원자나 모든 게 원자 입자를 이루고 있는 쿼크이고, 그 쿼크의 가느다란 띠 일종의 파동.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도 원래는 형체가 없고 이 쿼크 띠의 파동인 셈이죠. 그리고 아카샤란 그 쿼크의 파동을 기록하는 물질이랍니다.^^* 참말로, 모든 옛 일들이 공간에 기록 되어 있어서, 그것을 다시 읽을 수만 있다면, 내가 살지 않았던 때의 일들과 다른 사람들의 일들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이다. 여기서, 모든 옛 일들이 공간에 기록되는 것은 어쩌면 과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좀 쉬울 수 있지만, 그 기록을 다시 읽어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글에서, 그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물론, 정교하지 못한 가설일 뿐이다.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몸이라는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이루어져서, 둘은 각각 양성과 음성의 전하를 띤다. 따라서, 원자 주위에는 미약하나마, 핵과 전자에 의한 전기장이 형성되고, 전자나 핵이 활동하거나 원자가 움직이는 경우에는, 그에 따른 전자기파가 주위로 퍼져나간다. 이 공간으로 퍼져 나가는 전자기파는 곧 자신의 움직임을 공간에 전자기파의 형태로 기록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공간에 움직임을 기록을 하는 원리 이다. 물론, 퍼져 나가는 전자기파는 공간에서 멀어질수록, 그 힘이 줄어 들겠지만 말이다. 현상계의 본성은 파동이므로 소리가 음반위에 기록되듯이 물질우주속의 모든현상과사건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고스란히 아카샤라는 매질위에 기록된다고 한다. 아카샤란 '최초의 원시물질'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인데,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심과 같은 것으로, 이 근본질료는 우주 전체에 충만해 있으며 무한히 정교한 것이어서 자극에 매우 민감하고 우주 공간 어느 곳으로부터의 경미한 진동이라도 그 위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고 한다.아카식(The Akashic) 이란?
아카식 레코드(The Akashic Records) 란?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해 가기 위해 흘러간다.
그 무엇에 서 있는 것이 아닌 숨이 있는 그 무엇에
계속 거듭 반복해서 발견하게 나타나고 없어지는 세상이다.
따라서 경험이 채워지는 차원이 우리의 영입니다.
나의 전자 에너지 파동과 진동 차원에 있어야 성인입니다.
오직 지움으로 살아나고 다시
나타나는 재 지각의 반복이기에
몸(물질)은 기능하고 파동(성장)을 격도록 자체입니다.
우리의 다가오는 매 순간은
나 자신의 신성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습니다.
단지 생각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곳 마음이라는 의식입니다.
어떻게 파동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 생각과 행동이 좋으면 좋은 일이...
나쁘면 나쁜 일이 생깁니다.
안주하는 마음이 정체성으로 서있는 시간을 쓰게 살면
그 순간 마음은 시간과 멀어진 것,
무엇이든 어렵고 힘들어 안주하는 결핍
마음이 종교에 빠집니다.
만물과 함께하는 나선형 생명의 진행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 구성성분을 분자,
원자를 지나 소립자, 미립자 차원까지 들어가 보면
입자 또는 파동들이
보는자의 생각과 의지에 반응하여
출현.이동.변형.소멸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살아 있는 의식에 반응한다는 것은
그 역시 살아 있는 의식체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감옥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
그 감옥은 사회의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옮고 그름, 도덕과 비도덕,좋은 것과 니쁜 것,
건전과 불건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혼돈이 없는 영역이란 것을 만듭니다.
그렇게 인식한 믿음의 영역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그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평범하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놔듭니다.
하지만 일단 그 영역에서 한 발짝 나오면
그 땐 당신은 특이한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철인이 한일은
전 인류를 교도소 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누구라도 평범한 영역을 벗어나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밝아 버립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그 혼란이 없는 영역에서 조금 벗어나려고 활 때
당신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약 이렇게하면 사람들이 워라할까?
안돼..!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은 친척이나 직장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말 할까?
그 철인들이 만들어 한 일은
서로에게 규범을 부과하는
절대적인 군인들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절망스러운 환경의 세상을
창조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고요상태 제로 지점에서
각각 나선형 물체계에 중앙에 노여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저 모든 사람이
토로스 에너지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고요함을 중심에두고
우리모두가 서로 살아있는 우주
무한한 의식속으로 영결되어야 합니다.
세상이란!
따라서 몸은 죽임 뒤에도
영 그 "핵 원자"로 한결같이 살아 있는
전자의 실체로 생명인 것입니다
태양에 의한 에너지...
만물은 다 빛의 수호자입니다.
지극히 한정된 생을 반복으로 격고
자라는 지성체(전자) 입니다.
따라서 우린 몸속 자기 부정적 경험을 통하고
그 몸의 신성은 없어야 있어 나타나는 평창 입니다.
지구 생명체도 힘든 움직임을
좋와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원자이기에
전자의 파동에 숨쉬고 격도록 합니다.
반복의 힘은 빠르다의 발견의식
미리있는 과정에 평창하도록 자연 입니다.
계속 움직임을 여임으로서
경조억겹의 통로에 자연을
반복으로 격어 시간을 채워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재와 실체가 비물질에 의해 성장함에 따라
우리 자신이 만든 뇌의 환영이
어버이며 스승이 있는 겁니다.
인간이 천체 그 지성에 유지됨에 따라
인격이 채워지는 과정에 파동하는 몸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은 채우기 위해 베푸는 스승입니다.
움직임에 긴장하도록 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나선형 움직임으로 태어납니다.
우리실체는 핵원자며
전자 그 영 존재로 순간이동하는 윤회입니다.
태양이 반복하는 시간에
일백만년을 이천오백번 지나면서
움직임을 먹음는 빛의 찰나에 반복 했습니다.
자연이 펼처지는 일상에 움직이도록 도구로
실체는 지성체에 이르도록 영이 있습니다.
복사되고 돌게있는 진동이
빈 공간에 파동으로 언제나 있습니다.
죽음 뒤에도 나타나는 윤회 핵원자
현미경으로도 잘 나타낼 수없는
00000000000000000000.1 핵에너지,
실재는 실체로 왔다 갔다 찰나에 반복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없습니다
백만년이 2500번을 지나며
항성과 행성이 없어지고 나타나는 이유의 관계
빛 까지도 다스리는 암흑 물질이 있다는 것,
번복하는 평창 에너지라는 것,
불랙홀이 또다른 우주를 복사하는 것 처럼...
나도 태양도 지구도 홀로그램 콩알만한 우주입니다.
그렇게 평창하기위해 복사되는 실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지만
또 다른 우주 어느 곳에나 또 다르게 있고
이동하는 실재라는 것,
없어야 있는 능력 무에서 보도록 실재라는 것,
진동과 파장에 무에 맞춰진 그 광자대
우리에게는 힘든 날은 없습니다...
고로 죽음도 없습니다.
다 그런 날이 있도록 반복하는 일,
과정이 있을 뿐 입니다.
해서 각자 자신의 무게를 지니고 삽니다.
"노동이 없는 돈이 정신을 궁핍하게합니다"
끄러당김의 힘으로 부드러워지는 이유이지요.
우리의 엄청난 기회는 그렇습니다.
다 마련으로 차려진 것들에 있습니다.
000000000000000000000000.1
그 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각은
각기 다른 주장으로 여러 문재를 겪 습니다.
거듭하는 빈 공간의 개념.
사라짐을 반복하며 나타나는 힘
우리 몸 속에도 있고
지구에도 태양에도 우리 일상에도 있습니다.
빛이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닌 나'라는 느낌!
따라서
신을 위해 선량해 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성체인 나 자신을 위해 선량해지면
신들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나는 저절로 선량해 집니다.
한번 배우고 지워야 또 다시
재 지각을 반복 격도록 되는 지식입니다.
숨쉬는 것으로 살아왔고
계속 그렇게만 살도록 반복하는 생명입니다.
몸은 배풀기가 있어 채워지는 영의 도구입니다.
- 홀로그램 인생-
몸이 컴퓨터 본체라면
영은 기억장치 해드디스크 입니다.
덕은 인위적인 덕이 아닙니다.
최상의 덕은
덕을 의심하지 않음으로 덕이 있는 것이고
정도가 낮은 덕은 덕에 매여있기에 덕이 없는 것이다.
최상의 덕은 무위여서 자연스럽고
정도가 낮은 덕은 유위로서 부자연 스럽다.
인은 유위로 자연스럽고
의는 무위며 부자연 스럽습니다.
사회의 예는 유위이고 그 예는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 붙이라고도 예을 든다.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지면 무위자연의 덕이 나타나고
무위자연의 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데...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예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마음이 엷어진 것이며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미리 내어보려는
예와 지, 그 지식은
도의 알맹 없는 겉치레와 같은 것,
나 존재를 어지럽고 못나게 만들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사람은
예와 지를 버리고 도을 택하는 것입니다.
"도'의 길
도의 길은 하루하루를 게으르지않게 일하며
움직임으로 오는 복 그 돈을
나를 없애는 데 씁니다.
나눔의 경험이 채워질 때 "도"가옵니다.
없애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수치심도 이기고
또 이기면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결핍 덩어리였던 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어머니, 아버지, 가족 친지, 여러공동체,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여자,여자,여자,
결핍자아 바보의 성장 나에게
수치심을 견디고 참을 수 있도록 있었던 것은
모두다 공부가 되라는 과정이였습니다.
그토록 그렇게 고맙게
나를 아프도록 했던 것이 있었기에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이런 말도 전하게 됩니다.
이제 그동안의 인연 모든 분에게
진정한 인격의 가치를 세워 가겠습니다.
노동이 없는 돈 때문에
정신은 파멸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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