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써놓았던 이야기, 월튼네 사람들과 전원일기는 소농과 산업농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월튼네 사람들은, 소설가가 되었던 존보이의 이야기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하는 존 보이의 눈을 통해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야기는 우울증과 전쟁, 성장, 학교, 구애, 결혼, 고용, 출생, 노화, 질병, 죽음을 통해 가족을 따라간다.
전원일기는, 농촌 마을의 유지인 김회장네 집과 복길네로 대표되는 그 이웃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진행되는 내용이다.
초기에는 흑백 화면이었으며, 오프닝에서 젊은 최불암이 지게를 지고 다니거나 마지막에 나레이션을 하기도 했지만 차차 없어졌다.
전원일기의 시작이 농어촌의 훈훈한 정서를 소개하는 다큐성 드라마였기 때문에 나레이션은 필수적이었는데 뒤로 갈수록 농촌 현실에 대한 고발을 주로 했던 탓에 없어지게 되었다.
두 이야기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80 년대 초반의 미국 대통령 레이건과 영국 수상 대처 때문이다.
레이거너즘과 대처리즘 즉, 그 전까지 유지되던 보호무역에서 벗어나 자유무역을 택한 탓이다.
보호무역이 유지 되던 미국에서도 가족농이 존재하면서 농촌의 정서가 살아있었다.
그러나, 농업이 기업화 되면서 가족농들은 살길이 막연해 전부 사라지고, 기업농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쌀농사 대신에 돈이 되는 환금 작물이 농업의 주축을 이루면서, 농업은 이제 본연의 의미가 아닌 제조업이 되고 말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미국 달러가 세계통화가 되고, 세계는 전쟁의 원인이었던 자유무역을 포기하고 보호무역을 한다.
그러나 레이건과 대처는 오트피낭스의 압력으로, 통화량을 극대화 하는 자유무역을 선택한다.
이른바, 무역자유화, 세계경제, 글로벌화,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한다.
그 중, 가장 피해를 본 것이 농업 분야다.
자유무역은, 각 나라의 농업을 희생 시키면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경험이 있던, 유럽 일부 선진 국가들은, 농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한 것은 한국이다. 미국은 농업의 기업화가 진행되었다.
더 이상 아름다운 농촌 공동체는 사라지게 되었다.
미국은 비행기가 비료를 뿌리고 농약을 뿌리고, 해외에 농업 기업들이 나타났다.
한국은 국가적으로 쌀 농사를 포기시켰다. 오로지 돈이 되는 환금작물 비닐하우스 작물만이 장려되었다.
쌀농사의 공동작업이 중심이 되는 한국 농촌 공동체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월튼네 가족들은, 제재소 수입과 농업소득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 해졌다.
한국과 미국의 농촌 사람들은, 종목을 바꾸거나 농지를 팔아서 도시를 떠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버지니아 블루리지 산맥에서 대공황 기간을 지나, 월튼 가족은 월튼스 산에 있는 제재소에서 소소한 수입을 올린다.
김회장네는 마을 사람이 점점 사라지게 되어 회장직을 유지 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적 원인은, 사회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공동체의 통제를 받던 농업 시장이, 세계경제라는 커다란 경쟁을 이길 수는 없었다.
농업 시장은, 경제와는 다른 의미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다. 정이고 사랑이다.
그래서, 전원일기와 월튼네 사람들은 사라진 것이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이 원인이다.
지금도 잘나가는 글로벌 경제다.
김영삼이 발음도 제대로 못한 ‘새개하’ 이다.
지금의 한국 농업은 제조업이 되었다. 1차 산업에서 진화 하여 2차 산업인 공업이 되었다.
쌀을 포기하면서도 쌀이 남아도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