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2학년ㅡ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상여꾼이 되어서...)
(남석모의 추억수필집 ㅡ35편 )
*처음으로 상여꾼이 되었던 날
글 / 남석모
내가 살아오면서 간직하고 있는 여러 추억 중에
상여꾼이 처음 되었던 일은 많은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 하고 있다.
처음으로 상여꾼이 되었던 것이 고교 시절
어린 나이에 있었던 일이였기에
다른 추억에 비해 좀 색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어면 몇가지
장례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한 가지는 관을 영구차에 실어
화장장으로 옮겨 화장을 하는 방법과 또 한 가지는
관을 상여틀에 의해 장지로 옮겨져 매장 즉 땅에 묻는 방법이 있다.
이 장례법은 우리 고유의 전통장례법 이라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만 얘기하자면...)
내가 상여꾼이 처음 되었던 일이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고향마을 아랫동네에 사는 권후정누나네 집에
초상이 났는데 병을 앓고 계시던 후정이누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우리 마을은 아랫마을과 윗마을 둘로 나누어져 있는 집성촌이다.
아랫마을은 대게 권씨들이 많이 살고 윗마을은
남씨들이 많이 산다.
그 외 다른 성을 가진 집도 좀 있지만...
만일 아랫마을 어느 집에 초상이나면 윗마을
사람들이 상여를 메어야 한다.
우리 집에는 사과와 복숭아 과수농사
그리고 수박이나 참외 농사를 많이 하기에
여름이 되면 무척 바쁘다.
여름 방학이 되면 집에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과수원에서 부모님과 함께 일을 많이 도와야 한다.
그리고 대학교 다녔던 형도
방학이 되면 집으로 빨리 들어와야만 했다.
집에 와서는 밭농사 일을 거들고 어떤 날은
아침일찍 농약을 뿌리는 작업과
복숭아를 따서 도매상인이 몰고 온 트럭에 실어
올리는 작업도 해야 된다.
이렇게 온 가족이 과수원에 메달려야 하는
너무나 바쁜 여름이다.
그래도 부모님은 막내인 나에겐 형들이 있어
그렇게 일을 많이 시키지는 않았다.
이렇게 바쁜 여름날에 마을에 초상이 났기에
아버지는 형을 상여꾼으로 보내지 않고
나를 보고 석모야 오늘 무덥지만 인생공부도 할겸
초상집에 상여를 메로 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2년 여름은 다른
그 어느 여름보다 무더웠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렇게 무더운 날 그것도 난생 처음 상여를 메고
오라는 아버지 말씀에 걱정도 미칠지경이였다.
만일 우리집에서 한 사람도 안 가면 마을에 벌금
명목으로 궐돈 이라는 것을 내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집에 일도 바쁘기에 나는 그래도 안 가겠다고
말은 못 하고 형이 군에서 제대할 때 가져온 군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이른 아침 초상집으로 향했다.
여름이래도 장지가 높은 산이고 길이 험한 곳이라
신발도 튼튼한 것으로 신고 장갑도 껴야만 했다.
아침밥은 초상집에서 먹었다.
아침밥을 먹고나서 나는 상여가 나가기전 어떻게 일을 하는지 잘 모르기에
아무튼 그날 나와같이 상여꾼이 되신 어르신네들이나 청년들이 시키는대로 했었다.
상여꾼으로 첫번 째 할일이 이른 아침 민가에서
좀 떨어진 상엿집에 가서
상여장비를 챙겨오는 것이었다.
나는 어두스럼한 이른새벽이라 어린 마음에 겁도 좀 났었지만
어르신네들이 함께 있기에 큰 두려움은 없었다.
그 다음은 상여장비를 초상집에 바로 근처에서 상여틀을 조립하고
그 다음은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상여틀에 올리고
그리고 든든한 끈으로 묵는 일이었다.
나는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하면서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옮길 때는 좀 무섭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은 커녕 오히려 궁금한
것들과 호기심도 생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여틀을 다 짜고나면 마지막으로
종이로 만든 꽃으로 치장하고
그리고 상여꾼들은 상여를 초상집 근처 길 어귀에
잠시 두는 것이었다.
이 때 상여꾼들은 막걸리도 한 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였다.
삼배옷이나 하얀 소복을 상복을 입은 상주와
친척들이 장지로 떠나기전 고인에 대한 예를 표하며 절을 하면서 곡을 한다.
이때 상주들이 많이 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주와 상가집 친척들이 망자에 대한
예를 마친 뒤에는 상여꾼들은 일제히
상여에 달라붙어 상여를 어깨에 메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나와같이 상여꾼이 되었는 분들은 상여를 리더하는 상여소리꾼의 소리에
발을 맞추며 상여소리꾼이 부르는 가락을 따라하며
깊은 산속의 장지로 향했다.
이러한 전통장례와 상여소리는 상여꾼들의 고인이 되신 분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노래로 슬픔을 대신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며 참으로 감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처음이라 대충대충 따라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상여소리는 대게 북망산천이 어떻고 저떻고
그리고 오늘가면 언제 오나 어훠야 어훠야 라고 하는
망자를 위로하는 슬픔의 노래(?)와 같았다.
장지로 향하다가는 고인이 살아계실 적 연이
닿았던 곳도 간혹 들리기도 하며
그러면서 상여소리꾼(상여꾼대장?) 상주나 상주에게
가까운 친척분들로부터 노잣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럴 땐 돈을 많이 받으면 상여꾼들의 기분이
너무나 좋고 일할 힘도 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산비탈로 올라갈 때에는 상여와 상여꾼들의 몸이
많이 기울어져 매우 위험한 진짜 소름돋는 일도 경험했다.
정말 어린 나는 아찔하게 느껴졌다.
경험이 많은 어르신네들은 매우 침착하고 웃음을
짓는 여유까지 부리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상여꾼이 된 나
무덥고 힘들었지만 어린 나이에 이런 것도 좋은 경험이라 스스로 위로도 했다.
또 장지에 가서 상주들과 상여꾼들이 하는 발인하는
광경을 보는 것과 묘를 조성할 때 땅을 밟는 것이 내겐 좋은 경험이 되었던 것이였다.
특히 하관을 할때 하는 예를 취하는 방법을 보는 것은 나름 공부도 되었다.
(책을 펴고 공부하는 것만 공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풍수지리에 관한 얘기를 들을 때와 관위에 명정을
덮고 대나무를 깔고
상주가 취토하는 것을 눈여겨 볼만 했다.
그리고 장지에서 산역이 끝나고 평토제라는
예를 올리면 상여꾼들의 할일은
모두 끝나는 것이었다.
상여 선소리꾼(상여대장?)이 다른 상여꾼들과 함께
마을 회관으로 다시 모여서
회의를 하고 상여 멜 때나 묘지를 만들 때 상주나 친척들에게 받는 돈중에서
마을에 일정한 금액을 내고 남은 돈은 상여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내 기억으로 담배 열갑과 5만원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에도 대구에서 대학다닐 때 방학이 되어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하시는 과수원 일을 돕거나
회사 다니던 시절
주말이 낀 연휴나 휴가 때 집에 와서 쉬다가
고향 마을에 초상이나서 상여를 멜 일이
있으면 무릎이 좋지 않던 아버지 대신 상여꾼으로
나갔던 일이 몇번 있었는데
20년 전엔 한가위 명절에 고향에 갔었는데
추석 전날에도 상여를 메야 했는 일도 있었다.
다른 지방은 어떤지 자세히 몰라도 최근에 내 고향 친척집이나 친구네 집에
초상이나서 문상을 가 보면 장례제도가 좀 바뀐 것 같기도 했다.
이젠 의례 간소화로 장례제도가 변화가 되어가지만
그 옛날 유교적인 풍습의 희미한 명백만 이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근자에는 원형이 잘 보존된 상여집이 국가문화제로
지정할만큼 전통장례 방법도 많이 퇴보되고 바뀌는 것 같다.
내가 전통장례문화에 대하여 논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많이 보았고 상여에 대한 추억도
있기에 전통의례가 산업의 발전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너무나 간편하게 되는 것에
좀 아쉬울 뿐이다.
다행히
이러한 전통장례식에서의 상여소리가
각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는데 국가 무형문화제로
잘 보존된다고 하니 이러한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기쁘지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