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에 대한 오해
죄사함은 증명서가 아니다. 면허증처럼 한번 받으면 권리를 행사할 있는 라이센스가 아니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죄사함이 구원의 보증 수표도 아니다. 구원은 죽을 때까지 이루어가는 것이지 구속이 구원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죄사함이라는 말이 중세시대의 면죄부처럼 오해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이 단어가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문자로는 죄사함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의 의도를 깨닫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은 죄사함에 대한 문제만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함’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압헤시스(#859:명사)는 압히에미(#863:동사) 즉, ‘놓아주다’ ‘해방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놓임. 해방의 뜻이다. 그러므로 사함, 용서로 해석함에는 무리가 있다.
<마9:2>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들)가 놓임을 받았느니라
(-> 압히에미의 현재완료 수동태)
<엡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들)에서 놓임을 받았느니라
(-> 압헤시스의 목적격)
이번에는 뜻을 보다 분명하게 하기위해 죄와 연결해서 의미를 파악해 보자.
죄 사함을 말할 때에 죄(하말티아)는 복수로 사용되었다. 단수 죄와 복수인 죄들의 차이는 전혀 의미가 달라진다. 죄는 마귀의 인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혈육을 가진 인간은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에 죄의 속성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다. 사도 바울 일지라도 조금만 방심하여 은혜에서 떨어지면 육신의 생각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단수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죄(육=마귀)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하고 미워해야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복수로 표현되는 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예를 들어, 사람이 어제는 3번의 죄들을 저질렀고, 오늘은 4번의 죄들을 범했다 해서 ‘죄의 복수’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항상 현실 속에서 죄들을 생산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적으로 죄들을 양산하는 공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죄들이란 (하나님의 의도에서) 빗나간 총체적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죄 사함이라는 말을 의미대로 풀어 쓴다면 ‘빗나간 삶에서 놓임을 받음’이라 해야 한다. 하나님을 부정하며 자신의 양심껏 살아보려고 한 모든 행위, 또는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고 했던 모든 삶이, 이제 비로소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빗나간 삶이었음을 깨닫고 이제야 (흑암에서) 놓임을 받았으니, 앞으로는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죄에서 놓임 받은 자는 증명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의 바른 삶이 요구되는 것이다. 즉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으로서의 새로운 첫 출발인 것이다. 그는 이제 빚을 탕감 받은 자로서 그 은혜를 가슴에 품고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상태를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탕감에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는 빚을 변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을 채권자인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 주었으니 자신도 자기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조건부 탕감이니 가불해 준 것이다. 만일 위배시에는 취소다.
마18장의 이 비유의 원 뜻이 그러하다. 만일 주인이 진짜 탕감해 주었다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이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옥에 가두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탕감 안 해줌으로 다시 불러들여져서 일만 달란트 탕감을 취소한다고 할 때에 따지지 못했다. 일종의 가불이었던 것이다. 그는 미리 삯을 받았으니 주인의 농장에서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6:29). 즉 바른 교회생활을 통해 주님의 생명으로 자신을 채워가야 하며, 그 생명력으로 빚진 자들을 죄의 빚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죄 사함(빗나간 삶에서 놓임 받음)이란 수동적 어떤 상태나 신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미래적인 믿음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운운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쓰는 용어다. 산자들은 문자에 매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는가? 이것은 땅에서 매인 것을 푸는 권세요, 죄를 사하는 권세이요, 빚을 탕감하는 능력이다. 이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 온 땅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가불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라면 반드시 일해야 한다. 선택이 아니라 의무요 책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불의한 자를 용서한)를 만방에 선전해야 한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가불을 공제해 주옵시고...)
<마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게판에서만 보기에는 조금 아까운 내용의 글이라고 혼자 생각해봅니다. ^^
네~감사합니다....^^
귀한 내용입니다. 지성방에 모셔야 하겠네요.. 기독교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먹사들이 판치는 것은 교리에 헛점이 있다는 얘기지요..그 헛점이 있는 교리를 방패삼아 온갖짓을 다합니다 그려..
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