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590〉
■ 선운사 동구 (서정주, 1915~2000)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 1968년 시집 <동천 冬天> (민중서관)
*어제부터는 햇볕도 화창하고 공기도 부드러운 걸 보니, 꽃샘추위가 완전히 끝났나 봅니다. 아랫지방으로부터 본격적인 봄소식과 함께 화사한 봄꽃들의 축제가 시작되었음이 본격적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백꽃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고창의 선운사는 보통 3월 말부터 4월 초에 만개한다고 하는데 올해는 다소 이를 것 같다 하는군요. 가지는 못하더라도 대신 오래전 올렸던 이 詩를 다시 한번 읽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이 詩는, 고창 질마재가 고향인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이, 선운사의 유명한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꽃은 보지 못하고 옛날의 아련한 기억을 아쉬움으로 달래는 내용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 “남았습디다”라는 이색적인 멘트로 우리에게 아쉬운 여운과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詩 자체에서 구수한 육자배기 가락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요, 사실 미당에게는 이와 관련해서 숨은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
1942년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는 길목인 선운사 동구 주막집에서 마흔쯤 되는 주모와 술 대작을 하다가 주모가 육자배기 한 자락을 들려주었다는군요. 미당은 그 절창에 그만 주모(酒母)에게 홀딱 반했으나,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헤어졌다 합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서 다시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그 주모가 없었고, 6.25 전쟁 중에 빨치산에게 희생되었다는 얘기만 듣게 되었다니 감성이 풍부한 시인에게 이 멋진 詩가 나올 만도 하겠습니다 그려.
한편 절로 가는 동쪽 입구에는 1974년, 미당의 육필로 새겨진 이 <선운사 동구> 시비가 세워져 있으니 동백꽃을 보러 간다면 한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