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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어느날 아침 마쓰시타 고노스케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따르르릉 따르르릉”
마쓰시타: 여보세요?
이지자카: ㅎㅇㅎㅇ?
마쓰시타: 헐 이시자카 회장님께서 저에게 무슨일로?
이시자카: 그것이 아니라 내가 마쓰시타군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마쓰시타: 선배님의 부탁이라닏ㄷㄷ 일단 들어나 보겠습니다.
이시자카: 너님은 이미 경영의 신이잖음? 국철총재 VS 10억엔 받고 고자되기라면 뭘 할래?
마쓰시타: 그냥 제가 10억엔 받고 고자되는게 낫겠네요.
이지자카: ㅠ.ㅠ (왕자제지의 나카지마도 거부했고 다음은 누구지?) |
이시자카 다이조는 번번히 고배를 마십니다. 경제인 연합회의 회장이란 권위도 소용이 없었어요. 결국 이시자카 다이조가 선택한 건 동갑내기이자 오랜 친구였던 이시다 레이스케(石田禮助)였습니다. 이시자카는 오랜 친구인 만큼 엄청난 부담이 되는 국철총재의 자리를 그에게 제의하지 않으려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연락을 취했던 겁니다.
<고우즈 시에서 은퇴생활을 하던 이시다 레이스케. 그는 총재직을 단번에 수락합니다>
오랜 친구였던 이시다 레이스케는 미쓰이물산(현 미쓰이 스미모토그룹)에서 35년동안 근속했으며, 근속 연수 대부분인 28년을 일본 밖에서 보내 일본어보다는 영어에 더 능숙했을 정도로 해외영업의 본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회사생활 35년의 마지막 4년간은 사장으로 재직했고,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뒤에는 집에서 텃밭을 가꾸며 국철감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시다는 친구 이시다카의 어려운 부탁을 단번에 수락했습니다. 오히려 이시자카의 제의를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였지요. 국철감사위원회의 사무를 맡아 봤던 이와사키 유이치(岩崎雄一, 후에 일본교통공사(JTB)의 상무가 됨)의 증언에 따르면, 이시다카의 전화를 받고 나자 총리공관으로 빨리 향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78세의 노인인 이시다 레이스케는 그렇게 일본국철 제 5대 총재가 되었습니다. 심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だいこう出でずんばの心境である。(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맡겠는가의 심경이 든다.)
노인의 첫인사 - 粗にして野だが卑ではないつもり
팔순이 내일모레인 78세의 이시다 레이스케가 일본국유철도의 신임 총재가 되자, 일본 경제계의 반응은 ‘잘 맡았다’ (よくまあ引き受けたものだ)란 반응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오래 전 미국 뉴욕에서 그를 보좌했던 히로세 겐(弘世 現)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石田さんが引き受けられたと聞いて、とにかくびっくりしました。普通なら、悠々と余生をたのしむところでしよう。総裁になったところで、いいのは汽車に乗るのがタダになるぐらい。それなのに、総裁の仕事は容易なことじやない。石田さんはそれを読んでたはずなのに”
“이시다씨가 맡은 것을 듣고 어쨌든 놀랐습니다. 보통이라면 유유히 여생을 즐기는 곳으로 하겠지요. 총재가 되어 좋은 것은 기차를 타는 것이 공짜가 되는 정도. 그런데 총재의 일은 쉬운 게 아닙니다. 이시다씨는 그것을 읽고 있었을 텐데.”
<자택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이시다 레이스케>
즉, 오랜 해외 생활로 미국과 유럽의 합리주의가 몸에 밴 이시다가 맡았다는 건, 그에게 있어 분명 해볼만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겁니다. 얼마 후 이시다 레이스케는 국회의원들에게 취임인사를 하러 국회에 등원합니다. 국회의원과의 첫 대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粗にして野だが卑ではないつもり。 諸君、私は嘘は絶対つきません、知らぬことは知らぬと言うからどうかご勘弁を。諸君、 国鉄が今日のような過密スケジュールを余儀なくさ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 諸君のあなた方の責任でもある。
나는 변변치 않고 거칠게 살아왔지만, 나를 낮출 생각은 없다. 여러분, 나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으니 부디 양해해 줬으면 한다. 여러분, 일본국유철도가 오늘과 같은 과밀한 스케줄을 강요 받게 된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 문장들을 시작으로 이시다 레이스케는 제 5대 국철 총재로서의 포부를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시다 레이스케의 이러한 모습을 본 국회의원들은 충격을 받았는데요. 메이지 시대 일본 국회가 개원한 이후 이러한 일은 사상 최초였습니다. 국회의원의 나이가 자기보다 어리다고 해도 국회의원에게는 무조건 선생(先生)을 붙였던 것이 관례였거든요. 그런데 아랫사람 다루듯이 여러분(諸君)이라고 하대하다니 황당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미래가 불투명한 공기업의 수장이 된 78세의 늙은이가 첫인사에서 국회의원들에게 협조와 이해를 구하기는커녕 일본국철이 이렇게 된 이유가 너네 들 때문이라고 묵직한 돌직구를 날렸습니다. 역대 일본국철의 총재들은 국회의원만 보면 고양이 앞의 쥐 신세에,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유감입니다”란 말을 하기에 급급했는데 78세의 노인은 젊은이 못지 않은 배짱을 보인 것이지요. “뭐야 이 할아버지는!" (なんだ、この爺さんは)이라고 응수한 국회의원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할 말을 잊었습니다. 국회의원들도 사실 깨끗하진 못했거든요.
그런데 왜 이시다 레이스케가 이런런 배짱을 부렸을까요? 그의 세 가지 인생 철학이 확고했기에 국회의원들을 동업자로 보았고, 일본철도의 발전을 위한 허울 없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던 겁니다. 그의 인생 철학이란? 수많은 명언을 남겼지만 세 가지만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장사에서 충실하게 인생을 살고 나면, 세상을 위해 힘을 다한다. (商売に徹して生きた後は 世の中のために尽くす)
말이나 행동은 거칠지 모르나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은 결코 하지 않는다. (粗にして野だが卑ではないつもり)
인생의 만년은 공공서비스를 위하여. (人生の晩年はパブリック・サービスに当てるべきだ)
늙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은 젊은이 못지 않은 Young Soldier
신임 총재가 된 이시다 레이스케는 발빠르게 개혁 작업에 착수합니다. 일본 국철 출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 온 이시다를 보는 국철 내부의 시선은 곱지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낙하산’이었기 때문이지요.
낙하산 인사의 공통된 단점인 ‘무능력’ 이란 건 이시다에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28년간 해외에서 체득한 합리주의, 4년동안 미쓰이물산의 사장으로 재직하며 쌓은 리더쉽, 그리고 일본국철 감사위원회를 두번이나 연임하며 얻은 철도 전반에 대한 지식은 철도기업의 대표자가 되는 덴 나무랄 데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첫번째의 개혁조치는 “公職は奉仕すべきもの、したがって総裁報酬は返上する (공직은 봉사해야 하는 것. 따라서 국철총재의 보수는 반납한다.) 란 말과 함께 자신의 연봉을 0엔으로 한 것입니다. 임기 초에는 10만 엔으로 연봉을 삭감해 받았지만, 1963년 도카이도선 츠루미역에서 281명의 사상자를 낸 열차탈선 다중 충돌사고가 터지자, 국철 쇄신 차원에서 연봉을 받지 않기 시작한 거지요. 앞으로의 연봉을 모두 반납하는 대신 매년 싸구려 양주 한 병을 받기로 합니다.
동시에, 일본국철 총재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특권도 모두 버립니다. 일본국철 총재는 재임기간 중 일본국유철도의 철도노선, 여객선뿐만 아니라 사철회사까지 일본철도에서 존재하는 최고등급의 열차를 공짜로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대형 사철회사들이 평생 무임 패스를 총재에게 헌상했기 때문인데, 그는 이런 혜택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고위 임원들에게도 사철회사 이용 시 ‘정당한 대가를 지불’ 하게끔 지시합니다.
관용차 역시 반납. 출근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이시다 총재는 도카이도선 고즈 역에서 일본국철 본사가 있는 도쿄까지 1시간 30분의 전철 출퇴근을 했던 것인데, 역무원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처럼 통근용 정기권을 끊어 열차를 이용했습니다.
이시다 레이스케 총재의 이러한 파격적 행보는 일본국철에 불신을 가지고 있던 일본국민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고, 텃밭을 일구는 키 작은 노인은 이제 여론의 주목을 받는 엄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소통중시 경영을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들어오라고(だれでも、いつでも、自由に入りたまえ)라며 총재와의 복잡한 면담 절차를 간소화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총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총무과에 예약을 하고, 인터뷰 내용을 사전 검열 받았으며, 면담장소에는 비서가 늘 입회했기 때문에 진솔한 대화가 힘들었지요. 무엇보다 면담 기회를 잡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총재실의 문을 활짝 여는 한편, 적체되어 있던 국철의 인사구조에도 칼을 들이댔습니다. 능력만 있다면 학력이나 근속연수를 무시하고 2단계, 3단계 승진을 시켜준 것입니다. 기획력이 뛰어난 고졸 출신의 사원을 본사 홍보부장에 발탁하기도 하였고, 노조와의 갈등을 잘 조정한 중졸 출신의 시부사와 세이지(渋沢誠次)시메 탄광(志免炭鉱)소장을 도쿄 철도 관리국장에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시부사와 소장은 이시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능력을 발휘하여 이후 국철 상무이사까지 승진합니다.
그리고 일본국철 종업원들의 썩은 정신상태를 하나하나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持たせ切り를 금지한 것. 持たせ切り는 “갖다 대서 자른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는데요. 철도역에서 승차권을 개표하는 역무원들의 ‘근무태만’이 극에 달해, “나는 펀치를 들고 있을 테니, 고객님들이 들고 있는 승차권을 내가 들고 있는 펀치에 맞춰 주세요.”란 만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역무원들은 이렇게 펀치를 고정시키고, 손님들이 표를 갖다 대도록 했습니다. 일하기 싫었던 거지요.>
정상적인 개표는 역무원이 승차권을 고객에게 받아 구멍을 뚫은 후 다시 고객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손동작 두 번이 귀찮다고 고객으로 하여금 승차권을 펀치에 갖다 맞추도록 한 것이지요. 고객 입장에선 손이 찍히는 사고가 발생했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개표방식이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생각해 낸 꼼수였지요.
분량 상 기타 언급되지 못한 일본국철의 수많은 개혁의 시작. 이는 당시 내로라하는 일본 대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혁신 그 자체였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된다!
1964년 10월 1일,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고속철도노선인 도카이도 신칸센이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이기도 한 도카이도 신칸센이 성공적으로 안착하자, 일본국철 기술진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해서, “일본 전역을 신칸센으로 연결하자”란 구상에 착수합니다.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현장에서 커팅을 하고 있는 이시다 레이스케 총재>
그러나 최종 결정권자인 이시다 레이스케는 신칸센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객 처리량에 한계를 보이고 있던 도쿄~오사카 구간의 도카이도 신칸센, 도카이도 신칸센에서 서쪽으로 더 뻗은 산요 신칸센에는 찬성이었습니다.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고, 이들 구간은 기존의 철도노선으로는 수요를 모두 처리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외의 신칸센 계획에 대해서는 명백한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혼슈와 훗카이도를 연결하는 세이칸 터널의 착공계획에 대해서는 “만일 기술적으로 터널이 있다 해도,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仮に技術的にトンネルができるとしても、実際には役には立たない)라며 의문을 나타내었고, 터널은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トンネルなんて、いつつぶれるかわからん)란 주장을 폈습니다. 무엇보다도 과도한 공사비와 유지비가 들어갈 신칸센에 한정된 예산을 꼴아박을 순 없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덩치를 키우기보단 우선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것.
한편 국철총재의 책상에는 엄청난 청원서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쌓였습니다. “우리 지역에 철도를 놓아 주시면 안 될까요?” “전철을 놓아 주시면 좋을텐데.” “급행열차를 우리 지역에 세워 주시죠?” 등등과 같은 수많은 민원들이었는데, 국회의원과 같은 높으신 분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압력을 넣는 것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시다 레이스케가 고향 마츠자키에 간 적이 있었는데, 고향에서는 국철에 대한 민원이 재빠르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시다는 민원에 대해 일절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요.
미시마시(三島市)를 방문했을 때는, 신칸센을 유치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그는 ダメなことはダメ(안되는 것은 안 된다!)라며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다만 말 끝에 ただし企業として採算が合えばいい(기업으로서 채산이 맞으면 유치해 주겠지만 말이에요)란 말을 남겨, 일말의 가능성까지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이타를 시찰했을 땐 다음과 같은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지역신문 기자: 複線電化を早くやって欲しい (복선 전철화를 빨리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시다 총재: 전철화? 그건 사치야. 너네들, 그정도의 교통량은 있어? 도저히 적합하지가 않아요. (電化? そりゃぜいたくだよキミ、このへんにそんな交通量あるの? 到底ひき合わんよ)
국철 수행원들: 이거 신나게 까이겠구나....ㄷㄷㄷ |
다행히 언론에서는 “이시다 총재, 전철화는 아직 이르다고 밝혀”라고 나왔지만, 이시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숨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화두를 던지고, 토론을 통해 해결하려 하는 걸 즐거워했지요.
철도안전을 위한 투쟁
하루하루 치열하게 개혁을 진행하는 이시다에게 있어 돌발상황도 연이어 터졌습니다. 바로 수송능력의 한계상황이 닥쳤다는 건데요. 도카이도, 산요 신칸센 외에 신규 신칸센의 착공에는 회의적이었지만, 한계를 보이고 있던 수도권의 철도수송력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통근노선의 시설개량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通勤対策は本来は国鉄の仕事ではないが、といって、降りかかる火の粉は振り払わねばならない。それに、この過密ダイヤと路線の酷使からは、大事故が発生しかねない。早急に輸送力の増強をはかるとともに、とりあえずは、輸送手段のすべてに安全装置をつけること。これは財源のあるなしにかかわらずやらなけりゃいかん」
통근대책이 원래 국철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눈앞에 밀어닥치는 불똥을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지금과 같은 과밀다이어와 노선의 혹사 상황에서는 엄청난 대사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먼저 수송력의 증강을 도모함과 동시에 수송수단에 안전장치를 갖춰야 합니다. 이는 돈이 있든 없든을 따지지 말고 진행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1964년 6월, 通勤五方面作戦(통근 5개 방면 작전)이라는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당시 무사시노센은 312%, 도호쿠본선은 307%, 츄오선 쾌속은 279%, 조반선은 247%의 승차율을 보일 정도로 막장일보 직전에 있었고, 이는 열차를 더 투입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였지요. 만약 현 상황을 그래도 유지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 다음과 같이 됩니다. 대형사고 터지기 딱 좋은 상황이 되는거지요.
승차율 | 개선 공사를 실시한 경우의 예상 승차율 | 개선 공사를 실시하지 않는 경우의 예상 승차율 | |
츄오 고속선 | 284% | 270% | 370% |
츄오 완행선 | 208% | 180% | 270% |
소부선 | 312% | 239% | 445% |
케이힌토호쿠선 (남행) | 282% | 192% | 357% |
야마노테선 (외선) | 272% | 171% | 326% |
난부선 | 284% | 257% | 461% |
요코스카선 | 264% | 200% | 486% |
토카이도선 | 171% | 207% | 367% |
어려운 사정의 국철이었으나 투자를 늦추다간 카오스가 되는 건 불보듯 뻔하기 때문에 이시다의 주도로 수송수요의 한계를 넘는 노선에 대해 설비개선을 바탕으로 하는 과감한 투자를 실시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이어그램의 과밀화를 해소하기 위해 장거리 간선과 근교 통근노선을 분리하고, 도쿄 도심과 접속하는 지하철과 국철의 상호직통운전을 실시하여 수송량의 증대를 도모한다는 것이지요.
<1960년대 일본의 수도권 철도망. 이대로 가면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못하고 파멸에 빠질 지경이엇습니다.>
이시다의 이러한 투자조치에 대해 국철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일었습니다. 통근이용자들은 엄청난 할인을 받아 열차를 이용했기에 비용 대비 편익이 떨어진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업은 국철 혼자가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자체도 함께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라는 신념으로 사업을 밀어붙였습니다.
1년 전의 츠루미 사고에서 161명의 사망자를 목격하고, 유가족들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읽지도 못했고, 사고의 책임을 지고 총재직을 사임하려 했으나 이케다 총리의 강한 만류로 총재의 자리를 지킨 그에게 있어 위협받고 있는 철도의 안전은 타협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국철노조와 정치권의 빗발치는 간섭에 대해 냉정함을 견지
한편 이시다 레이스케는 총재 임명 당시부터 노조에 대해 온건하면서도, 냉정한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는 철도원과 담배전매공사에서 일하는 직원의 월급이 같다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人命を預かる鉄道員と、 たばこ巻きの専売が同じ給料なのはおかしい) 라며 국철 근로자들의 처우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노조의 과도한 요구에 대해서는 "애정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은 없어요." (愛情は持ってるけど、金はないんだ)라며 선을 그은 게 대표적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지 빵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만둬라. 이상의 빛을 달아줄 수 있다." (ただパンのために働くのはよせ。理想の光をかかげてやれ) 라며 직원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국철 노조의 지도부들도 이러한 그의 마음을 이해하여 강성지향인 노조원들을 설득하는 데 앞장섰지만, 자신의 밥그릇 지키기에 익숙한 노조원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노조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던 그도, 노조의 준법투쟁이 일어나고, 근로거부가 발생하자 준법투쟁을 주도한 노조 집행부를 파면하는 강경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무기강 해이는 근절될 줄 몰랐습니다.
역무원이 늦잠을 자 영업개시를 제대로 못 하거나, 고객응대를 불성실하게 하기도 하였으며, 기관사가 신호를 무시해 탈선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급행열차가 정차역을 지나치는 일이 수시로 발생했습니다. 직원들을 감독해야 할 임원들의 정신상태도 가관이어서, 일은 뒷전이고 국철과 거래하는 기업들이 제공하는 골프접대에 빠져 헤어나올 줄 몰랐습니다. 이시다가 국회나 언론을 통해 “프로답지 못하다.”라고 일본국철 직원들을 질책했어도, 타성에 젖어버려 변화할 생각을 안한 거지요.
일본국철의 상급기관인 운수성과 일본 국회와의 관계 역시 좋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이러한 마찰도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이시다총재. 내가 듣자하니, 현재의 전동차 4인승무를 2인승무. 기관사 한명, 차장 한명으로 줄인다면서요? 차장이나 기관사를 지금처럼 각각 2명씩 태운다면 안전이 더 확보되지 않을까요? 이시다 레이스케: 그렇군요. 그렇다면 4인승무가 아니라 6인승무로 하는게 어때요? 눈이 넷이든, 여섯개든, 성불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네 개도 필요가 없습니다. 두개도 많아요. 중요한 건 눈 뒤에 있는 그 사람의 정신상태입니다. 정신상태가 온전하다면 눈이 하나여도 됩니다. 그러나 신이 눈을 두개로 만들어주었을 뿐이지요. |
이처럼 국회의원들은 유권자이기도 한 국철노조와 지역민들의 표심잡기에 팔려 이시다의 개혁에 대해 이런 저런 태클을 걸었고, 합리주의와 효율을 추구한 이시다에게 있어 이러한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습니다. 감독기관인 운수성과의 관계도 불편했습니다. 사소한 트집을 잡아 수시로 불러내고, 권위를 강요하는 관료주의의 폐해를 드러냈기 때문이지요.
내부와 외부의 벽에 막혀 끝맺지 못한 일본국유철도의 개혁. 이게 마지막 시도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Young Soldier의 마음으로 국철을 개혁해보려 한 이시다 레이스케는 재임 6년째가 되는 1969년, 나는 늙을대로 늙었다며 총재직을 사임했습니다. 고령을 이유로 대었지만, 고령의 이유보다는 “당근과 채찍을 줘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거대한 공룡인 국철에 진저리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시다 총재의 개혁을 본 몇몇 의식있는 임직원들이 사퇴를 만류했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지요. 이시다 총재의 후임으로 이소자키 아키라 부총재가 임명되었습니다. 이소자키 아키라 부총재는 이시다 레이스케에 비해 정치권과의 관계도 좋고, 인간관계에도 실수가 없어 무난한 후임 총재로 보였지요.
그러나 이시다 레이스케 전임 총재의 개혁이 일본국철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혁의 시도로 남게 될 줄은 일본국철의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시다 레이스케 본인조차 말입니다. 또, 자신이 일본국철총재 최장수 재임기록(6년)을 세웠다는 사실 역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국철의 개혁조치에 저항한 근로자들의 구호. 그러나, 이들은 나무만 봤지 숲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시다 레이스케의 개혁조치에 하나하나 반대를 하며, 철밥통 사수를 외친 일본국철의 근로자들 역시 수십년 후 일본국철 개혁의 좌절로 일본국민의 분노를 사며 분할민영화로 회사에서 대거 쫓겨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시로야마 사부로, 粗にして野だが卑ではない - 이시다 레이스케의 생애, 문예춘추
건설세계 2007년 2월호, 일본을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들, 일본토목업협회
http://www.nikkenren.com/archives/doboku/ce/ce0702/ce.html
通勤五方面作戦
http://ja.wikipedia.org/wiki/%E4%BA%94%E6%96%B9%E9%9D%A2%E4%BD%9C%E6%88%A6#cite_note-yomiuri-19651030-1
이시다 레이스케 관련 사진들의 출처
http://amanaimages.com/indexTop.aspx
개찰 가위
http://d.hatena.ne.jp/tamiyant/20121016
http://bunshun.jp/bunko/e-otoko/report/read/sonishite/
첫댓글 내각제라서 국회의원들 입김이 세긴 세군요...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모든 걸 다 쥐고 있어서 공기업 사장 정도는 잘 못 쫒아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