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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요단을 건너지 못함
신 3:23-29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
신 3:23-29 / [거절된 모세의 간구] 그때에 나는 여호와께 이런 간구를 드렸습니다. 24)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강한 손으로 위대한 일을 이 종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토록 엄청난 일들과 놀라운 이적들을 주님과 같이 행할 수 있는 신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습니다. 25) 이제 비오니, 저도 요단강을 건너가서 그곳의 아름다운 땅 멀리 레바논에 이르기까지 그 아름다운 산지를 보게 해주십시오.' 26) 그러나 여러분이 여호와께 반항하였기 때문에 주께서 내게 화를 내시고 내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것으로 만족하게 여기고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말아라. 27)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동서남북을 눈으로만 둘러보아라. 네가 직접 저 요단강을 건너가지는 못할 것이다.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네 임무를 넘겨 주고 그를 강하고 담대하도록 격려하여라. 그가 이 백성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네가 여기서 둘러보는 땅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29) 그때에 우리는 느보산 북쪽에 있는 벧브올 성읍의 맞은편 골짜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모세의 간구(23-25) 이때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를 알려주셨습니다(민 12:12). 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모세는 인내의 한계를 보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징계가 너무 가혹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24). 주의 종으로 모세는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온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가나안 땅을 바로 앞에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하여 그 땅을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다시 말하지 말라(26-27) 하나님의 응답은 단호합니다.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여기서 진노는 이중적인 것으로 모세 개인의 죄와 모세의 죄를 유발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입니다. 분명히 모세는 백성 앞에서 인내의 한계를 보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너희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모세가 죄를 짓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그 죄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 1세대 모두가 광야에서 죽었고, 그 지도자인 모세도 약속의 땅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모세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 그 땅을 바라볼 뿐입니다. 저명한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에 의하면, 모세가 들어가지 못한 것은 어떠한 인간도 자력으로 하나님의 기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27-29)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웁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요단을 건너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얻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새로운 지도자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모세는 어떤 면에서 실패한 종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완전한 종을 예비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영원한 기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고난의 종에 대한 예표입니다(사 5장). 자력으로 하나님의 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우리는 고난의 종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 기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행 16:17; 7:37).
적용: 하나님께서 “그만해도 족하니” 이제 중단하라고 하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모세가 위대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모습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의 자리를 전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섬기고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성숙함이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한 조직에 리더십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 자리를 아름답게 떠나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 설 교 >
하늘의 보좌를 소망하며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자 되게 하소서
신명기 3:23–29
시작 기도
주님, 3월의 마지막 날을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지도 벌써 1분지를 지나갑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여전히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신실하게 주어졌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주의 뜻과 상관없이 지낸 시간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익하고 게으른 종으로 살아가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깨우치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참으로 크심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따라 주어진 삶을 살고자 주님께 간구합니다.
내 안에 죄와 허물을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주시고 새 영과 마음을 채워주옵소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게 하시고 주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허락해 주옵소서.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서도록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해설
요단 동편을 점령한 후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먼저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크신 권능을 나타내셨으며 세상의 어떤 신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타낼 수 없음을 선포한다.
이어서 자신이 요단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의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과거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명령을 번복해 주시기를 요청한다.
이는 모세가 가나안 땅 밟아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일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다시 말씀하시고 이 일로 다시 간구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거절은 모세에 대한 미움이 아닌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임을 의미하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모세에게 비스가산(느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것만 허락하시고 요단을 건지 못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또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을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여 강하게 할 것을 말씀하시며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모세가 볼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도록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그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진치고 있음을 밝힌다.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는 비스가산으로 연결되는 골짜기로 서쪽으로는 여리고를 마주보고 있고 동쪽으로는 모압 평지로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나의 묵상
광야의 생활을 마감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한다.
어려서부터 민족의 해방을 비전으로 삼고 그 일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광야로 도망가서 은둔 생활을 하던 자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출애굽을 하게 만드셨던 모세였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가나안 입성은 인생의 비전을 성취하는 것이었으며 인생 최대의 감격적인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단호히 거절하시고 결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을 선포하신다.
그 이유는 율법으로는 온전한 자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는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가나안인 하늘의 보좌가 실제임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모세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영적 가나안인 하늘의 보좌에 들어갔으며 땅의 모든 것은 하늘의 모형에 불과하고 온전한 원형인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자이다.(신18:15)
모세의 간구를 거절하신 하나님은 모세가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만드셨으며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온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율법으로 이방인을 대하려 할 때 그에 대해 분명하게 제시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는 삶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머무르기를 소망하게 만드시며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며 하늘의 보좌에서 평안과 안식을 얻고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땅의 것에 마음을 두었던 삶을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도록 만드시며 가르치신다.
성도가 가지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것에 있다.
이것은 땅이 생명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위대한 사역을 감당한 모세나 연약한 자요 무능한 자에게나 동일하게 베푸시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성도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마음에 두는 자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잠시 상징에 불과한 가나안에 자신의 마음을 두는 것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에 마음을 두기를 원하셨기에 눈으로만 가나안을 보게 하신다.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하게 성도는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마음을 두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보좌에 시선을 두게 하셨음을 선포한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마음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며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영생을 누림에 익숙한 삶이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지체들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며 하늘의 보좌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모세가 가진 땅에 대한 소망을 하늘의 소망으로 바꾸시고 진정한 가나안인 하늘의 보좌로 이끄심을 발견합니다.
때로는 땅에서 얻고 누리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진정한 만족은 오직 하늘의 보좌에서 얻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며 하늘의 것에 익숙한 자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지만 땅에서 주어지는 삶에서도 성실하게 하시고 주님이 맡기신 것을 지혜롭게 사용함으로써 주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자로 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살게 하시고 주님을 드러내는 일에 힘쓰는 백성이 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본향을 향하는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그 길에 동행하시는 주님을 경험케 하옵소서.
오늘도 함께 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기대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담대히 떠나라
신 3:23~29
이제,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의 종착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 생애 마지막’이라는 진짜 주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은 ‘담대히 떠나라’는 것입니다.
담대히 떠나라는 것은 한 때 어느 광고의 카피로 유명하였던 ‘떠나라, 열심히 일한 당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떠나라, 열심히 일한 당신!’은 일 중심의 문화에서 여가 중심의 문화로 변해가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대히 떠나라’는 이 세상 중심에서 저 세상 중심으로 변화하여야 할 것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정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고, 온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는 삶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두려움 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나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정은 우리가 살아야 할 태도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할 내용입니다. 배움은 우리가 살아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사랑하며 사는 것을 겸손히 배운다고 해서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 땅에서 다 이룰 수 있을까요?
23절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간구하다’[@n"j/하난]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참으로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는다고 여겨졌기에 제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오히려 공주의 아들로 40년간을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서 또 40년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광야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40년이었습니다. 이제 고통스러운 훈련의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기시를 간구합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25절 말씀입니다.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모세는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요단강 건너 저 아름다운 땅, 저 풍요한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합니다. 모세는 ‘구하옵나니’[an:/나], ‘제발, 바라건대, 청컨대’하며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모세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생명은 여기에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로써는 하나님의 결정이 야속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도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몇 년 만, 아니 몇 달 만 더 살게 하시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 터인데, 120년 인생의 끝을 화려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만 퇴장하라니 모세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에게 일 백 이십의 삶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떠나야 했습니다.
1. 아쉬워도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삶 치고 아쉽지 않은 삶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백년, 천년을 산다고 해도 아쉽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지나온 삶은 짧고, 한 일은 없고, 남은 일은 많다고 해도, 더욱이 이제 막 빛을 보게 될 순간을 맞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시면 아쉬워도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서 덜 살 수도 없고 더 살 수도 없습니다. 아쉽지만 떠날 것을 생각하십시오. 다만 그 때까지 열정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십시오. 이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할지라도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부르시면 떠나야 하는 우리의 인생에는 아쉬움만 있는 것입니까?
26절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족하다’[bb'r;/라바브]는 말은 ‘많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던져 죽어야 했는데 오히려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친 모세의 삶은 양 치는 목자로 끝나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는 지도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더욱이 그를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존귀한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셨고, 시내산 위에서 그에게만 말씀하셨고, 그로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그를 사용하셨는지를 헤아려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 가나안까지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은 욕심입니다.
2. 만족하고 떠나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모세와 같은 기도를 하고 모세와 같은 응답을 받은 사람이 신약에도 있습니다. 그는 바울입니다.
바울에게는 그가 ‘육체에 가기 곧 사탄의 사자’(고후 12:7)라고 부르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질병은 ‘간질’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설교하던 바울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것은 바울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도 충격이었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구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는데 정작 자신은 질병으로 자주 쓰러진다고 하는 것이 모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기를 세 번이나 작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응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이 받은 은혜가 이미 넉넉하고 충분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하다가 오히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율법의 노예로 살아야 할 사람이 은혜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약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이 모세처럼, 바울처럼 화려하지 못하더라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많은 아쉬움이 있더라도 헤아려보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오늘 아침 건강하게 눈을 뜰 수 있었다면 당신은 오늘 한 순간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던 6백만 명보다 더 행복한 것이다. 전쟁의 위험이 없다면, 교도소에 갇혀있지 않다면, 고문을 당하지 않는다면, 배고픔에서 면제 된다면, 여러분은 전 세계의 5억 명 중에서 제외 된 것이다. 여러분이 예배를 참석할 때 체포의 위협, 고문이나 죽음의 위협이 없다면 전 세계의 30억의 인구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냉장고에 먹을 음식이 있고 입을 옷이 옷장에 있고, 지붕이 있는 집이 있고, 잠잘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은 전 세계의 75%의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은행에 돈이 있고, 지갑에 돈이 있고, 잔돈을 둘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전 세계에서 8%내의 부자에 속한다.”
헤아려보면 우리에게는 받은 은총이 많습니다.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하나만도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이 땅에 왔다가 가는 이유를 안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만족하고 떠나실 수 있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쉽지만 만족하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미 받은 복이 많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또 무엇이 있습니까?
27절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는 대신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 갈 땅의 서쪽과 북쪽과 남쪽과 동쪽을 둘러보게 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요단강 건너 저 건너편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고 강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그가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한다는 아쉬움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들어갈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자 우리가 또한 죽음의 요단강을 건넌 후에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상징합니다. 이 땅에서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들어가지 못하지만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바라보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것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것은 요단강을 건넌 후 천국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기에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기 위하여 담대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세상을 떠나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청원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힘써 모은 재산을 모두 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지못해서 허락하셨다지요. 대신 단서를 하나 달았습니다.
“가방 하나에만 담아서 가져오라.”
부자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금덩어리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큰 여행 가방에 금덩어리를 잔득 담아가지고 갔습니다. 천국 문에 도착하자 베드로가 가방 검색을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요?”
“하나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한 번 열어보시오.”
부자가 가방을 열었더니 금덩어리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지요.
“천국에서 보도블록으로 사용하는 것을 왜 가져 왔소?”
천국 문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보도블록이 온통 금으로 다 깔려있고 새 예루살렘과 본향 집은 각종 보석들로 지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바라보기에 이 세상을 담대히 떠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였기에 담대하게 살았습니다(히 11:16).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가장 훌륭한 부흥사였던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십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죽음 저 건너편에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담대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기에 천국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쉽지만 만족하고 바라보고 떠나면 이 땅의 남은 일은 어떻게 될까요?
28절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를 대신할 사람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여호수아에게 너의 직분을 맡겨서,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용기를 주어라. 그는 이 백성을 이끌고 건너갈 사람이며, 네가 보는 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줄 사람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출애굽을 완성할 사람으로 생각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백성의 앞장을 서서 약속의 땅에 건너가 백성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줄 자로 세우셨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모세의 몫이었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몫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일을 여호수아에게 맡겨야 했습니다.
4. 맡기고 떠나야 합니다.
리더십학자인 존 맥스웰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복면을 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가로 막고 서있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방해하고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달려들어서 복면을 벗겨보았더니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무슨 얘깁니까?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제한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매우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생각이 자신이 모든 일을 하려는 독선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일 수도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장과 자하는 대조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자장이라는 제자는 활달한 기상과 진보적 사고를 가졌기에 일을 지나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하는 만사에 신중하고 현실적인 행동하여 일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낫냐고 어떤 사람이 물었을 때 공자는 지나친 사람이나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나 똑 같다고 즉 과유불급[過猶不及/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지나치는 것이나 모자라는 것이나 똑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고 그 이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모든 곳에 친히 가셔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맡기고 떠나셨는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우리의 일을 맡겨 그들도 또 다른 사람을 양육하도록 하여야 합니다(딤후 2:2).
훌륭한 지도자는 또 다른 지도자를 길러내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사명은 영원합니다. 유한한 사람이 영원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만 남아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 남아서 계속 일할 사람을 세우고 그 사람을 믿고 맡기고 담대하게 떠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을 세우고 남은 사명을 맡기는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라노 성당’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문마다 글귀가 하나씩 새겨져있다고 합니다. 첫 째 문에는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고 새겨져있고, 두 번째 문에는 ‘모든 고난도 잠깐이다’라고 새겨져 있고, 세 번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영원한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영원을 위하여 이 땅을 영원히 떠나야 할 때를 맞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홀연히 찾아옵니다. 우리가 건강하며 힘이 충만할 때는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으나 죽음은 참으로 뜻밖에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어느 순간이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영원에 잇대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도 있고, 부족이 있더라도 이 땅에 귀한 생명으로 왔었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만족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담대히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던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담대하여야 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 열정을 가지고 온전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고 담대히 떠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
이제,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의 종착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 생애 마지막’이라는 진짜 주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은 ‘담대히 떠나라’는 것입니다.
담대히 떠나라는 것은 한 때 어느 광고의 카피로 유명하였던 ‘떠나라, 열심히 일한 당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떠나라, 열심히 일한 당신!’은 일 중심의 문화에서 여가 중심의 문화로 변해가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대히 떠나라’는 이 세상 중심에서 저 세상 중심으로 변화하여야 할 것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정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고, 온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는 삶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두려움 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나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정은 우리가 살아야 할 태도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할 내용입니다. 배움은 우리가 살아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사랑하며 사는 것을 겸손히 배운다고 해서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 땅에서 다 이룰 수 있을까요?
23절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간구하다’[@n"j/하난]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참으로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는다고 여겨졌기에 제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오히려 공주의 아들로 40년간을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서 또 40년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광야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40년이었습니다. 이제 고통스러운 훈련의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기시를 간구합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25절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모세는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요단강 건너 저 아름다운 땅, 저 풍요한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합니다. 모세는 ‘구하옵나니’[an:/나], ‘제발, 바라건대, 청컨대’하며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모세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생명은 여기에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로써는 하나님의 결정이 야속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도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몇 년 만, 아니 몇 달 만 더 살게 하시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 터인데, 120년 인생의 끝을 화려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만 퇴장하라니 모세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에게 일 백 이십의 삶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떠나야 했습니다.
1. 아쉬워도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삶 치고 아쉽지 않은 삶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백년, 천년을 산다고 해도 아쉽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지나온 삶은 짧고, 한 일은 없고, 남은 일은 많다고 해도, 더욱이 이제 막 빛을 보게 될 순간을 맞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시면 아쉬워도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서 덜 살 수도 없고 더 살 수도 없습니다. 아쉽지만 떠날 것을 생각하십시오. 다만 그 때까지 열정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십시오. 이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할지라도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부르시면 떠나야 하는 우리의 인생에는 아쉬움만 있는 것입니까?
26절 말씀입니다.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족하다’[bb'r;/라바브]는 말은 ‘많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던져 죽어야 했는데 오히려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친 모세의 삶은 양 치는 목자로 끝나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는 지도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더욱이 그를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존귀한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셨고, 시내산 위에서 그에게만 말씀하셨고, 그로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그를 사용하셨는지를 헤아려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 가나안까지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은 욕심입니다.
2. 만족하고 떠나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모세와 같은 기도를 하고 모세와 같은 응답을 받은 사람이 신약에도 있습니다. 그는 바울입니다.
바울에게는 그가 ‘육체에 가기 곧 사탄의 사자’(고후 12:7)라고 부르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질병은 ‘간질’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설교하던 바울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것은 바울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도 충격이었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구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는데 정작 자신은 질병으로 자주 쓰러진다고 하는 것이 모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기를 세 번이나 작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응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이 받은 은혜가 이미 넉넉하고 충분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하다가 오히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율법의 노예로 살아야 할 사람이 은혜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약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이 모세처럼, 바울처럼 화려하지 못하더라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많은 아쉬움이 있더라도 헤아려보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건강하게 눈을 뜰 수 있었다면 당신은 오늘 한 순간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던 6백만 명보다 더 행복한 것이다. 전쟁의 위험이 없다면, 교도소에 갇혀있지 않다면, 고문을 당하지 않는다면, 배고픔에서 면제 된다면, 여러분은 전 세계의 5억 명 중에서 제외 된 것이다. 여러분이 예배를 참석할 때 체포의 위협, 고문이나 죽음의 위협이 없다면 전 세계의 30억의 인구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냉장고에 먹을 음식이 있고 입을 옷이 옷장에 있고, 지붕이 있는 집이 있고, 잠잘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은 전 세계의 75%의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은행에 돈이 있고, 지갑에 돈이 있고, 잔돈을 둘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전 세계에서 8%내의 부자에 속한다.”
헤아려보면 우리에게는 받은 은총이 많습니다.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하나만도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이 땅에 왔다가 가는 이유를 안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만족하고 떠나실 수 있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쉽지만 만족하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미 받은 복이 많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또 무엇이 있습니까?
27절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는 대신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 갈 땅의 서쪽과 북쪽과 남쪽과 동쪽을 둘러보게 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요단강 건너 저 건너편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고 강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그가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한다는 아쉬움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들어갈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자 우리가 또한 죽음의 요단강을 건넌 후에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상징합니다. 이 땅에서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들어가지 못하지만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바라보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것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것은 요단강을 건넌 후 천국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기에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기 위하여 담대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세상을 떠나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청원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힘써 모은 재산을 모두 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지못해서 허락하셨다지요. 대신 단서를 하나 달았습니다.
“가방 하나에만 담아서 가져오라.”
부자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금덩어리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큰 여행 가방에 금덩어리를 잔득 담아가지고 갔습니다. 천국 문에 도착하자 베드로가 가방 검색을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요?”
“하나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한 번 열어보시오.”
부자가 가방을 열었더니 금덩어리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지요.
“천국에서 보도블록으로 사용하는 것을 왜 가져 왔소?”
천국 문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보도블록이 온통 금으로 다 깔려있고 새 예루살렘과 본향 집은 각종 보석들로 지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바라보기에 이 세상을 담대히 떠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였기에 담대하게 살았습니다(히 11:16).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가장 훌륭한 부흥사였던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십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죽음 저 건너편에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담대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기에 천국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쉽지만 만족하고 바라보고 떠나면 이 땅의 남은 일은 어떻게 될까요?
28절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를 대신할 사람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여호수아에게 너의 직분을 맡겨서,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용기를 주어라. 그는 이 백성을 이끌고 건너갈 사람이며, 네가 보는 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줄 사람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출애굽을 완성할 사람으로 생각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백성의 앞장을 서서 약속의 땅에 건너가 백성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줄 자로 세우셨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모세의 몫이었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몫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일을 여호수아에게 맡겨야 했습니다.
4. 맡기고 떠나야 합니다.
리더십학자인 존 맥스웰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복면을 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가로 막고 서있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방해하고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달려들어서 복면을 벗겨보았더니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무슨 얘깁니까?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제한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매우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생각이 자신이 모든 일을 하려는 독선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일 수도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장과 자하는 대조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자장이라는 제자는 활달한 기상과 진보적 사고를 가졌기에 일을 지나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하는 만사에 신중하고 현실적인 행동하여 일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낫냐고 어떤 사람이 물었을 때 공자는 지나친 사람이나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나 똑 같다고 즉 과유불급[過猶不及/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지나치는 것이나 모자라는 것이나 똑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고 그 이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모든 곳에 친히 가셔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맡기고 떠나셨는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우리의 일을 맡겨 그들도 또 다른 사람을 양육하도록 하여야 합니다(딤후 2:2).
훌륭한 지도자는 또 다른 지도자를 길러내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사명은 영원합니다. 유한한 사람이 영원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만 남아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 남아서 계속 일할 사람을 세우고 그 사람을 믿고 맡기고 담대하게 떠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을 세우고 남은 사명을 맡기는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라노 성당’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문마다 글귀가 하나씩 새겨져있다고 합니다. 첫 째 문에는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고 새겨져있고, 두 번째 문에는 ‘모든 고난도 잠깐이다’라고 새겨져 있고, 세 번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영원한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영원을 위하여 이 땅을 영원히 떠나야 할 때를 맞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홀연히 찾아옵니다. 우리가 건강하며 힘이 충만할 때는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으나 죽음은 참으로 뜻밖에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어느 순간이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영원에 잇대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도 있고, 부족이 있더라도 이 땅에 귀한 생명으로 왔었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만족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담대히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던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담대하여야 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 열정을 가지고 온전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고 담대히 떠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신명기 3;23-29 / 창녕감리교회
지난여름의 무더위가 참으로 대단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어느덧 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열대야의 숨 막히는 밤이 계속되고 있다면 아마 지금쯤 모두 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앉아들 계실 터인데, 가을이라는 선선한 계절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늘 감사한 마음으로만 사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가을이 귀한 계절인 이유는 봄과 여름에 뿌린 씨앗과 가꾼 곡식이 열매는 맺는 계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젊어서 좀 고생하고 살았어도 인생의 말년에 풍족하게 거둘 것이 있다면 그 얼마나 복된 삶이겠습니까?
성경 안에는 많은 인생의 스토리들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처음보다 나중이 아주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저돌적이고 유명한 인물 중 그 명성에 비하여 나중이 그다지 '멋진 마무리'가 되질 못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솔로몬 왕'입니다. 그의 등장은 멋지고 화려합니다. 그는 나이 스물한 살에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합니다.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하고 지혜를 얻어 당대 최강국가의 지도자들조차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를 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솔로몬의 마지막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류의 마무리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 날을 생각하면 모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땅을 밟았어야 했습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 되어야 마무리가 개운하고 후세에 '보란 듯이' 전할 것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모세의 모습이 그 화려했던 모세 인생의 마무리라고 하니 뭐가 아쉽고 서운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멋진 마무리를 맞이하게 되는 것도 복 중의 복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잘 알고 계시듯 모세라는 인물의 120년 인생날은 바로의 궁궐에서 애굽의 문물을 익히며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기른 20년과 그 다음 혈기를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거기서 장가들고 장인의 양무리를 치며 처가에 얹혀살아가는 가운데 '겸손'과 '인내'를 배운 40년이있습니다.
그리고 80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는데 쓰임 받는 일군이 됩니다.
인내심을 얻고 순간순간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까지 40년 광야생활 하면서 모세는 얼마나 말 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과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이일을 다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의역사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순종과 탁월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순종의 사람이 되기까지 몇 번이고 이 부담스러운 자리를 피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결국 그에게 이 일을 맡기시고 그에게 탁월한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열 가지 재앙'과 '홍해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지는 사건' 과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 사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오는 장면' 등 남다른 영광과 능력을 직접 체험하기도 합니다.
반면 지도자로서는 백성들의 온갖 불만의 음성과 모욕적인 대접을 감당해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 일들이 80세에서 120세 되기까지 모세가 겪은 사건들 이었습니다.
이 정도의 사연으로 40년 역사를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였다면 결국 모세가 나이 많아서는 "좋은날"도 함께 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나안 땅에 당도하여서 12지파에게 이 땅을 분배하여 주고 나서 '나는 나 할일 다 하였다' 하고 멋지게 유언도 남기고 온 이스라엘의 송별과 애도 속에 하늘나라로 가는 장면이 이어져야 멋있는 마무리가 아니겠는가.
사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밟게 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40일 밤낮을 하나님의 산에서 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죄악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말씀하시길 '내가 이 민족을 자멸하고 너와 네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포기하고 이제부터라도 모세의 혈통을 키워 새로운 하나님백성을 만드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로서는 얼마나 영광될 일입니까?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마시고 버리지 마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않고 진멸하시려거든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옵소서" 하나님은 이 기도에 진노를 거두십니다. 이때만 하여도 이스라엘 백성을 몰라도 모세만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1.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오늘은 모세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는가 하는 것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켰고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도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했습니다.
여기 '그 때에'라는 말은 '약속의 땅에 가까운 곳에 왔을 때에' 하는 말입니다.
모세는 마침내 그가 가고자 했던 그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바라 보게 되었습니다. 온갖 고생을 다 겪고, 주름살진 120세의 고령이 된 모세의 눈 앞에, 그가 그토록 꿈꾸어 왔던 약속의 땅이 바로 눈 앞에 잡힐 듯이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이 땅을 몇번이나 생각했겠습니까? 40번을 했겠습니까? 아니면 400번을 했겠습니까?
그저 고생이 되고 힘들 때마다 또 백성들이 불평을 말할 때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그 땅을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가나안 땅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곳에 와서, 그 땅을 점령할 작전의 지시도 다 끝냈습니다. 이제 모세에게 단 한가지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이 노지도자 모세가 부르짖는 참으로 인간적인 기도 한 토막이 바로 오늘 본문 25절에 있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밟아보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는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 이 일로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비스가산에 올라 눈을 감았습니다.
생을 다 바쳐서 죽음의 사막을 건너 온 이 노인은, 40년 동안이나 그렇게도 꿈꾸어온 그 약속의 땅을 넘겨다 보면서도, 그땅을 한번 밟아 보지도 못한 채 죽은 것입니다. 모세의 죽음은(인간적으로 불 때는)정말 한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헌데 지금 본문에 와서는 이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도 모세는 이 곳 '비스가나'언덕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은 모세가 오늘 비스가산에서 죽어가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가 가슴 아픕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본문 25절)
이때 하나님은 고개를 저으십니다.
"하나님의 거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따라 한 평생을 드린 종에게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 마지막 순간의 간청을 외면하신 것입니까 ?
2.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실족케 즉 넘어지게 했고 죄를 짓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3:41에서 심판하시는 날 '모든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갔다고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십니다.
그리고 마18:7이하에서는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니까 만일 네 손이나 발이 남을 실족케 하거든 차라리 그 손이나 발을 찍어 내는 것이 더 낫다고 까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 보다는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천국에 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실족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실족케 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실족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너무 자극을 했기 때문에 화가 나서 그만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실족케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큰 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실족한 모세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하는 큰 화를 당한 것입니다.
3, 무조건 복종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꼭 명심해야 할 것은 '그만해도 족하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을 수고하고도 나에게 돌아오는 아무런 대가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를 통해서 모세가 우리에게 꼭 주고 싶어했던 신앙의 고백이요, 간증입니다.
모세는 들어가지 못하는 그 땅을 바라보면서 결코 '운명의 땅'이라고 한탄을 하거나, '망할 놈의 땅'이라고 불평을 하거나 또 아무리 저 땅은 들어갈 수 없는 땅이라 하더라도,
내가 피땀 흘려 달려온 낙원이니까, 내가 공들여 쌓아온 탑이니까! 나는 밟아봐야 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괴로운 순간에도 '그만해도 족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복종했습니다.
어릴 때의 이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께서 출석을 부르실 때 흔히 앞에 앉은 학생들의 연필을 빌려서 사용하시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서로 자기의 것을 드리고 싶어합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그것은 선생님께 펜이 없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계시면서도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저학년 일수록 서로가 자기의 것을 드리고 싶어합니다.
그 어린 학생들에게는 선생님께서 자기의 것을 사용하셨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준 것이 아니고, 선생님께서 자기의 것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것이 소모되었는데도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모세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분을 내기는 했었습니다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적으로 복종만 했습니다.
평생을 다 바쳐 쌓아온 탑이지만, 자기가 차지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로, 정말로 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안된다고 하시면, 안들어가도 좋습니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오늘 신명기서를 본문으로 보았습니다.
창, 출, 레, 민, 신명기 이 모세 5경 가운데 앞에 나오는 4권의 책은 광야 생활 40년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들을 40년에 걸쳐서 기록한 책들입니다.
그러나 이 신명기서는 모세가 바로 '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죽기 전 약 두 달에 걸쳐서 기록한 책입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들어 간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 가지의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후계자를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이제 죽을 것이니까 대신 백성들을 인도해 갈 후계자를 세운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지방에 당도하였을 때 저들은 이 땅에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때 백성들의 들끓는 여론은 도를 넘을 지경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반석을 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경험상 하나님이 반석을 열어 물을 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그 백성 앞에 서게 되는데 이때순간 자기 감성을 다스리질 못합니다.
자신은 이 백성을 위하여 이렇게 노력하고 희생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몹시 서운하기도 하였고 화가 나기도 하여서 '반석을 두 번 내리친 것입니다.
이 일로 반석에서는 물이 솟구쳤고 백성들은 반석의 물을 마시고 불만이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장면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민수기20장12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단순히 혈기 부리고 반석을 두 번 친 것 뿐인데 이것이 모세가 가나안 땅(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모세는 잠깐 성질 좀 부린 것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불신의 죄"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동안 모세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사역한 40년의 수고는 다 어디로 가고 순간의 혈기부린 것만 가지고 "믿지 아니한 연고"라고 하신 것입니까?
사실 지난 40년간 모세는 탁월한 인내심과 겸손함 그리고 이 백성을 위하여서라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삭제하여 주십사 할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지도자 직을 감당하였습니다.
'물이 없다'고 민20:2 "공박"할 때도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문제를 들고 나아갔습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심부름'만 잘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헌데 모세는 끊임없는 원망 불평공박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백성들을 보는 순간 마치 자신이 지금까지 이 백성을 먹여 살려온 것처럼 화가 났습니다.
"패역한 세대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그는 원망을 들었지만 원망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움을 받더라도 미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절망하는 사람들 속에 있더라도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지도자"의 자리입니다.
내가 맞았다고 나도 때려도 되는 게 아니고, 내가 빼앗겼다고 나도 빼앗아도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저주를 들었다고 나도 저주를 쏟아 부어도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지도자 자리 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길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게 성도이고 그게 지도자입니다.
잘 견디다가 한순간 혈기를 부린 것, 이것은 모세에겐 가나안땅을 밟아볼 수 없게 된 '불신앙'적인 사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믿음 없는 행동'이라고 외면당한 모세의 말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가나안 정탐스토리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열두 정탐꾼 가운데 열사람은 가나안땅에 있는 기골이 장대한 백성을 보고 와서는 우리같이 메뚜기 같은 백성이 어찌 그들을 꺾고 가나안땅을 차지하겠느냐 하였습니다.
이 부정적 보고는 백성들에게 아주 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들은 우리 밥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인데 무엇이 두려운가'하면서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절망하는 사람과 함께 절망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불신의 시대 한복판에 있어도 믿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과 기분에 영향 받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목에는 믿음으로 살아오다가 그만 믿음 없는 행동을 하는 과오를 범하고 맙니다.
본문은 모세가 불 신앙적 행동을 한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것과 하나님을 거역할 것을 결정적 잘못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온유함과 평정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분노의 폭발은 하나님 보실 때에는 하나님 주권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추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없는 행동이라는 예기 입니다.
모세는 40년간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지만 하나님의 심정보다 자기감정을 앞세우다가 가나안땅을 밟는 영광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모세는 구원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를 목격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이르렀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영광을 빼앗겼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으니 천국에 갈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 자기 순교의 열매는 다를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렸으니 영광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세는 수고하고도 그 영광의 땅 가나안을 멀리 두고 바라만 봐야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들여보내면서 정작 자신은 실격되고 만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하였습니다.
불신앙으로 자격박탁탈퇴는 것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끝까지 섬김으로 살아 하나님 예비하신 최후승리를 얻게 되는 저와 온 수성가족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만 해도 족하니
신 3:23-29 / 염두철 목사(순복음한마음교회)
기도만큼 쉽고도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기도가 쉽다는 것은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아무데서나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서두에서 지금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역사하신 그 능력의 일들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찬양한 이후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자기의 소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바가 있었지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셨고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약속의 땅을 한 결 같이 갈망했던 그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참으로 엄청난 절망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응답이란 항상 나의 소원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러나 응답이 주어졌을 때는 우리의 소원대로가 아닌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사명을 이스라엘 백성을 요단강 앞까지 인도하는 것으로 한정하셨습니다. 그 이후는 여호수아의 몫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 합니다.
1. 모세는 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그 직접적인 원인을 민수기 20장에 기록된 므리바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계속되는 불평에 화가 난 모세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낸 것은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가른 것도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것도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므리바에서 잠시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모세는 그토록 소망했던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실수를 왜 그토록 엄하게 다루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 합니다. 모세의 실수는 한 번의 실수였지만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신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하나님 이해와 직결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세의 실수는 결코 용납될 수 있는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미국 드루대 석좌 교수인 레버드 스위트는 오랫동안 서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앞지르는 기독교가 되려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보다 앞서려는 교회, 성경보다 앞서려는 신학, 이웃보다 앞서려는 자신, 자연보다 앞서려는 과학 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앞서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 결과가 아무리 그럴 듯하게 보여도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 40:36-38).
이렇게 40년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훈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딱 한 번 하나님보다 앞서서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의 사명을 종료시키셨습니다.
시편의 150편 시 가운데 모세가 쓴 시가 한편 담겨 있습니다. 바로 90편입니다. 이 시에서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70세 정도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신 34:7).
모세는 늙어 쇠약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왜 죽게 되었을까요? 사명이 끝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죽음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사명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명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 남아 있는 한, 나는 죽을 수 없다”라고 했고,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자는 남겨 두시고 사명이 끝난 자는 데려가십니다.
일찍 사명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반의 공생애를 통해 사명을 마치고 가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첫 순교자로서의 사명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명이 왜 소중합니까? 생(生)은 명(命)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소중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나에게 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병이 났을 때 우리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질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중한 병에 걸리면 그 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줄 알고 생에 대해서 아쉬워하지 말고 가야 합니다.
2. 모세는 하나님의 조처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본문 23-25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6절입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이 말씀은 “그것으로 충분하다”(현대인의 성경), “너는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공동번역)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병을 위해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족하다’고 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시지 않은 것이 오히려 유익인 것을 알았습니다. 약한 데서 강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우월합니다. 네 생각이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접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만 해도 족하다 할 때에 그만둘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일군의 자세입니다. 사역을 아름답게 바톤 터치하고 물려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무응답이 때로 그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것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족히 여길 줄 아는 자는 눈앞의 현실이 가시이고 죽음일지라도 결코 낙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가 받은바 은혜를 족히 여길 줄 아는 참 성도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성취 욕구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굴복시키며 자신의 현 주소를 바로 이해하는 참 신앙의 자리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는 순종했습니다. 만약에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느냐, 난 억울해서 못 죽는다!’고 저항했다면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걸림돌만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의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더 이상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도자와 성자는 다릅니다. 지도자는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사람이요 성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영향력을 주고 가르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성자는 살고 나서 영향력을 끼치며 가르침을 주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입으로 말하고 성자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지도자와 같은 성자를 찾기 힘들고 성자와 같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지도자는 머리에 남는 사람이고 성자는 가슴과 영혼에 남는 사람입니다.
성자는 알아도 아는 티를 내지 않으며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남에게 조건 없이 주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위함보다 오직 남을 위해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베풀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성자는 남들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과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지도자가 세상의 소리에 귀 밝은 사람이라면 성자는 하늘 소리에 예민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의 간구를 거절 하셨지만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인 위대한 지도자요 성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게 아직은 능력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더 큰 일을 해 낼 것 같아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하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에는 추한 모습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기실 때 거기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는 자가 있고, 물을 뿌리는 자가 있습니다.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백성들을 애굽에서 빼내어 광야를 통과하여 약속의 땅 지경까지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모세에게 맡겨진 고귀한 일이었습니다.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에 있던 나라를 정복하고 백성을 그 땅에 정착시키는 일은 모세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택하여 그 일을 시키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하나님께 받은 우리의 사명이 모두 끝날 때 겸허하게 역사의 뒤로 물러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자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는 죽음의 문제에 초연한 듯 말하고 행동하다가도 막상 죽음에 직면하면 전혀 딴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1) 주후 68년, 스페인의 총독 깔바가 로마에 반기를 들고 쳐들어오자 네로의 신하들은 모두 줄행랑을 치고 네로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네로의 근신(近臣)이었던 에바브로 지다쓰만은 그에게 조용히 자결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잔인함에 비해 겁이 많고 몸을 유난히 아꼈던 네로는 죽은 뒤에 묘비를 세워 달라느니 화장을 시켜 달라느니 하면서 머뭇거렸습니다. 그리고 신하들 앞에서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내 손으로는 차마 죽지 못하겠다고 울며 추태를 부렸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해 에바브로 지따쓰가 네로의 칼 쥔 손을 잡아 그 목에 찔러 주었습니다. 네로는 명색이 로마의 왕이었지만 끝내 장엄한 최후를 남기지 못하고 영원히 후대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2) 평생을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인들을 멸시하고 큰소리치며 살았던 프랑스의 무신론 작가였던 볼테르는 임종을 앞두고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그는 “나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나는 지옥에 가는 구나”라고 처절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3) 기독교인들을 바보라고 하며 수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 신앙을 떠나게 만들었던 토마스 페인이 마지막 숨을 넘기기 전에 무엇이라고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오,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오,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했습니다.
(4) 영국의 유명한 회의론자였던 토마스 홉스는 “내가 이 세상을 다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하루치의 생명과 바꿀 수 있겠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내 앞에 오는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껑충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5) 미국 가수 중에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다가 죽었습니다. 아직도 그의 인기는 여전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혼자 타고 다니는 전용 헬리콥터도 몇 대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편안이 없었습니다. 그는 죽기 일주일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처럼 평온하게 일주일을 살게 해 준다면 100만 달러를 주겠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도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42세의 나이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6) 20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Chartre)는 1980년 3월에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을 이 병원에서 발악하며 보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고함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면 살려 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더 살아봐야 뭐하겠다고 그렇게 집착을 합니까? 우리가 사모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 죽으려고 헛고생하지 말고 잘 죽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삶이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죽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세의 죽음이 부모나 남편과 아내, 자녀를 잃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우연히, 병들어서,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의외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한다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영적 거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마틴 로이드 존스는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 강단에서 오랫동안 봉직하다가 1981년 82세에 암과 투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이 다가오자 그의 가족들이 영국 전역에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말할 힘조차 없던 그는 아내의 손바닥에 이렇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오. 내 영광의 순간을 가로막지 마시오.”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계 14:13). 그리스도인은 소망 없는 자들처럼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에 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우리의 죽음은 아름답게 장식될 수 있습니다.
3. 모세는 어떻게 물러날 준비를 했습니까?
미국의 32대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 유일하게 네 차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4선이 되었을 때 그의 건강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가 임기를 마칠 수 없을 것이고 불가피하게 해리 트루먼 부통령에게 대통령직이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 무렵 미국은 역사상 가장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핵폭탄이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고, 그것의 사용 여부를 두고 대통령의 결정이 필요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폐허가 돼 있었고 연합국 열강들은 패전 국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결정해야 했습니다. 소련은 공산주의를 전 세계에 퍼뜨리면서 초강대국으로 떠올랐습니다.
루스벨트가 자리를 비우게 될 때 트루먼은 수많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부통령 트루먼에게 정황을 알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트루먼이 부통령으로 지낸 86일 동안 루스벨트는 짤막하게 두 차례 그를 만났을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트루먼 대통령이 큰 실수 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었지만 미리 준비되었더라면 더 나은 판단과 결과를 기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헨리 블랙커비는「영적 리더십」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루스벨트에 대해서 “그는 후계자를 키우는데 실패했고 그 점에서 그는 실패한 리더였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지도자는 후계자를 세우는 일로서 성공 여부가 평가됩니다. 모세는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떠날 때를 알고 떠났기에 여호수아와 같은 후계자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마지막 할 일을 명령하십니다.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은 이미 모세에 의해서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후계자를 세우기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민수기 27장 16-17절입니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가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7장 18-2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모세는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라고 인정하시고 그에게 모세의 자리를 넘겨주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을 뿐 아니라 여호수아에게 완벽하게 지도자의 자리를 넘겨줌으로써 지도력의 공백이 없도록 했습니다.
“사람이 떠나갈 때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뒷모습에는 삶의 이면이 배어 있습니다. 앞은 겉모습이요, 뒤는 참모습입니다. 뒷모습을 보아야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우려면 머물다 간 자리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대하는 앞모습은 요란한 화장과 치장으로 가득하지만 뒷모습은 진실합니다. 가식과 과장과 허세가 없습니다.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던 자녀가 돌아서서 갈 때, 부모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이 진실인지 아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누군가의 뒷모습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 진실성 때문일 것입니다. 앞모습은 말과 수식으로 가득하지만 뒷모습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없는 뒷모습이 정녕 더 많은 의미를 전하기도 합니다.
모세는 비록 힘이 남아 있었지만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여호수아에게 지도력을 이양하고 죽음을 맞기 위해 홀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뒷모습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의 뒷모습은 분명 쓸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사명을 위해 살다가 귀환하는 자의 거룩함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 대개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다정한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홀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여리고 맞은편 아바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가 들면 가끔씩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묵상해보면 죽음 준비는 내가 머물렀던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죽음의 길은 누구도 같이 갈 수 없는 고독하고 외로운 길인 것을 느끼며 조금이나마 모세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의 길은 누가 곁에 있든지 없든지 간에 죽음의 길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아무리 헌신적인 아내와 남편이라고 해도 그 길을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홀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죽음의 현실입니다.
결 론
: 어쩌면 인간은 자기 성취욕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한 인간에게 성취욕을 제거해 버린다면 무기력한 생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성취욕을 절제시키거나 억제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허무한 생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 의욕과 목적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도와 목표에 맞는 삶을 살면 반드시 기적과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순종하면 자다가도 떡을 먹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좋으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거절당했을 때 조금 섭섭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비록 모세의 개인적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중대한 일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 제목이 혹 응답이 ‘안돼!’라는 것으로 응답이 왔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포함되어 있어서 크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을 쳐다봄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택한 백성을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야 마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인생이 사모해야 할 더 나은 본향인 가나안인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갔던 가나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그 모형을 실감 있게 목도하고 참된 실체되는 천국으로 모세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만하면 되었다’는 하나님의 응답이 모세 개인으로는 가장 좋은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래를 그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부탁하게 함으로 미련 없이 영원한 천국으로 입성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건너가는 것 이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계셨을 때 선지자 엘리야와 함께 주님과 대화하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은혜가 풍성하시며 주권적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물질이나, 건강이나, 성공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면서, 그것을 모세처럼 자신의 섭리에 순종하며 충성된 자녀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어떤 응답에도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됩시다.
가나안 땅을 향한 모세의 간구
신명기 3:23-29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원하는 모세의 간구를 진노하시며 단번에 거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범죄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5~26)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수기 20:10~12)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음의 죄를 무겁게 지우셨습니다. 모세는 이 죄에 대해 하나님께 여러번 간청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간청에 대해 분노하시고 족하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모세이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며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오히려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담대하게하고 강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모세에게 짊어 지게 하시고 그가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단 한번의 잘못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임을 분명히 하지만,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우시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로 가신 것의 예표임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모세는 마지막까지 이스라엘을 담당하는 책임을 가져야 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율법의 시작과 마침을 그의 삶으로 드러내야 했습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말씀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의 완성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의 완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하는 모습으로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곳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가나안 땅의 유업을 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통해 가나안의 영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마가복음 9:2~4)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마가복음 9:9)
모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며 영광스런 자리에 들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사역을 이스라엘 가운데 보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신3:2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악을 모세에게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놀고 먹으며 영원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모세와 같이 십자가의 비밀한 것을 함께 나눌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천국의 삶이며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진 사람들에게는 이미 가나안 땅의 유업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길 원합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천국임을 알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