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에 혼자 다녀온 적은 어쩌다 있었지만,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함께 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약간은 좀 어설프기도 하고 그랬지만 여러분들이 모두 반갑게, 스스럼없이 대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노무현 추모제에 김한길 대표가 봉변을 당했다고 하네요...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무조건 적으로 치부하고 힘으로 강제하는 행위는, 자신의 목적에 걸리적거린다고 자국민에게 총을 들이대는 것과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언제나 깨닫게 될까요?
저는 80년 5월에 전북기동대에 있었습니다. 광주에 배치받지 않았기에 아직 숨쉬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시위대의 일원이기도 하다가 시위진압의 대원이기도 하다가,,,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머리가 좀 어지러운 젊은 시절을 보냈지요. 그러면서도 다치지 않고 여태까지 잘 살아왔구요... 한편 잘 살아왔기에 '광주'하면 항상 마음속에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산 자'의 빚 같은...
같은 내용이 될 테니 몇년 전 대학졸업동기 카페에 올렸던 글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광주와 구례의 여행길 동안 따뜻하게 대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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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선전물 - 화려한 휴가 >
공부하기 싫어 1학년만 마치고 군대로 도망갔다가... 전투경찰에 당첨되고는 전북 고창의 해안초소에 배치되어, 최하위순 쫄병이다 보니 낮에는 하루 종일 밥하고 치우고 (11명분 밥하고 치우는 게 왜 그리 일이 많던지...) 저녁에는 얻어터지고... 밤에는 search light (해수욕장 같은데 가면 바다쪽으로 길게 이리저리 비추는 조명등) 돌리면서 졸고...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무주경찰서에 발령이 나서 갔더니... 시골 구석이기도 하거니와, 와! 그렇게 천국 같은 병정놀이도 있나 싶게 편하고 좋았었는데 (하루에 너댓 시간만 권총차고 서 있으면 끝... 나머지 시간은 먹고 자고 빈둥빈둥... 그야말로 내 체질과 적성에 찰떡궁합이었는데...).
그것도 복이라고 몇 달 못 가 나랏님께서 어떻게 되신 후에, 비상소집령이 떨어져 전주로 끌려와서는 전북대학교 코 앞에 있는 체육관에 몰아넣고는 투구하고 방패하고 플라스틱봉 하나씩 던져주고는, 뭐 누구나 다 잘들 아는 ‘로마병정놀이’가 시작되었지요... 이른바 1979년 초겨울...
급조된 전북대학교 담당 기동대 인원의 90%는 나처럼 대학다니던 중 공부를 못해서 온 녀석들이었고, 그 중 70%는 바로 전북대를 다니다 온 녀석들이었기 때문에, 80년도 봄에는 데모를 막으러 나간다 한들, 투구만 벗으면 ‘어 형, 잘있었어 어쩌구...’, ‘너는 먼저 걔랑 잘 되고 있냐... 저쩌구’ 하는 녀석들이 많아 임무 수행중에는 절대 투구를 벗지 말라는 웃지못할 지시가 떨어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쫄병에게 압력을 넣어 전북대 여학생들이랑 미팅도 했었음. 그 뒤에 계속 만난 녀석들도 있음.)
싸움이란 게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감정이 격해지다 보면 서로 주먹질에 이르게 되듯, 80년 봄의 데모 역시 처음에는 서로 좀 눈치도 보고 점잖은 체도 좀 하고 그러다가, 누군가 잘못 피를 보거나 여학생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공기를 가르거나 하면, 그때부터는 서로 눈에 보이는 게 없어져서, 형이고 동생이고 없이 마구 발길질에 돌멩이에 몽둥이질도 서슴지 않게 되는 모습들을 너무나 여러 번 보았는데... 어쨋거나 전북대 담당 기동대는 항상 효과적으로 데모를 잘 제압(?)하면서 봄을 보내고 있었지요...
5월 들어서면서는 갑자기 데모를 대학교 문앞에서 막지 말고 조금씩 후퇴하라는 ‘의아스러운’ 지시가 있어 점차 전주 시내도 최루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지요. 중순을 넘어 5월 17일에는 전북도청 앞 거리가 완전 쑥대밭이 되기도 했고, 흥분들 하다보니 다치는 녀석들도 제법 있었고,,,
5월 18일이 되고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렸지요... 특전사 친구들이 오더니 참나무 몽둥이로 너무나 효과적으로 전북대학교 내부와 전주 시내 요소요소를 '확실히' 접수해 버린 관계로... 반쯤 부러진 플라스틱 봉과 최루탄이 주무기인 우리는 다시 먹고 뭉개고 자고...
내가 그렇게 먹고 뭉개고 자고 하는 사이에, 광주 도청 앞 상무대에 배치되었던 내 친구 (역시 전투경찰) 녀석 하나는 상무대가 공격받고 난 후에 부대가 없어져 버려서, 츄리닝 하나 달랑 입고, 짧은 머리를 감출 수 없어 양쪽의 눈을 모두 피하느라 낮에는 숨고 밤에는 몰래 몰래 걸어 광주를 겨우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그 녀석은 지금도 ‘광주’ 소리만 나오면 표정이 굳어져서 도통 말을 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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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사람에게 너무 식상할 수 있는 얘기이기도 하고, 광주사람들의 애국심이나 민주의식이 다른지역보다 특별히 강해서 그런 일이 시작된 것이라고 믿는 것도 아니고, 또한 ‘광주’란 호재를 등에 업고 당선된 이들이 하는 짓들이 실망스럽다 못해 요즘에는 누군가가 TV에 나오기만 하면 꼴보기가 싫어 채널을 돌려버리는 ‘나’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집 아이들을 데리고 ‘화려한 휴가’를 갔다 왔습니다.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아이들 자신의 나름대로의 평가이겠지만, 5월 27일 밤, 도청을 점령하기 위해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던 상황에서, 실전에서 결코 정예의 정규군을 이겨 낼 수 없다는 점과 실탄이 오가는 실전에서의 패배란 다시는 가족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근무를 교대하거나 자청했던 시민들이 그 때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기억’하였으면 하는 조그만 바램이었지요... 81년 제대 후, 혹 데모가 있으면 ‘맨 뒤'에 조심 조심 따라가다가,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날렵하게 도망 온 ‘산 자’의 자식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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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의 평가가 다 다를 수 있는 부분이라 많이 조심스럽지만...
혹 시간이 나면 한번쯤 아이들에게 보여 주세요... 아이들이 그저 ‘재미’로만 영화를 판단할 지라도...
<2007. 7. 30 시골훈장>
첫댓글 1980년 5.18 광주에 대한 인연은 모두 다르겠지만, 그 시대의 청춘들한테는 대 놓고 말하지 못하는 무언의 감정은 비슷하리라 봅니다. 그점을 잘 표현하셨네요. 1980년은 제가 수원의 유신고3학년 때인데, 기숙사에 광주와 전남 출신들이 있어서 계엄군들이 자행한 흉흉한 살육 소문을 듣곤 했죠. 아직도 엊그제 같습니다.
다들 힘들었던 시절이죠...그렇기에 더욱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날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총,기타 무기 찾아야 한다고 길가에 나무들 모조리 다 배고.. 아이고 .. 그땐 무슨 정신들로 살았는지 몰라요 날이면 날마다 대학생들 데모에 체루탄...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음 지금 저기~~동남아 가난한 그들과 똑 같이 살고 있을것을...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역사.. 생생 살아 기억하건만 아니라고 떠들어 대는 방송사... 미친짓은 여전하구요..슬퍼요
사람들이 제 욕심대로 살아도 엘레느님처럼 누군가는 노력해야 되겠죠?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넘겨주기 위해서는...ㅎ
5.18민주화운동을 놓고 대립쌍으로 존재하는 인식의 차이를 절감하는 시대적 상황입니다.
유기적으로 상호 인정하고 이해하는 풍토를 진작하는데 언론과 정치인의 참회가 중요합니다. 호남의 새정치 부상도 이점을 예외로 해서는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부정권력이 멋대로 정한 표준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지적작용은 주관적이고 배타적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주의, 주장을 구분하고 절대화하려는 사고는 사회적 가치체계와 규범을 만들 뿐 아니라 나아가 대립과 경쟁이 계속 발생하도록 하여 인류의 불행을 초래게 합니다. 그러한 부정은 당사자가 결자해지의 마음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당시의 현실을 정말 사실적으로 기술한 널리 퍼져가기를 바라는 글이네요. 요즘도 마찬가지겠지만 맨 첨단에서 민초는 항상 서글프죠. 시골훈장님과 대포라도 한잔 하고 싶군요
어지러운 글을 예쁘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안녕하세요. 시골훈장님. 검색을 하다가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글을 남깁니다. 제가 여쭤 볼 말이 있어서요. 메일을 보내고 싶은데 방금 가입을 해서 준회원이라 메일쓰기가 허락되지 않네요. ㅠㅠ 제게 메일 주소 남겨주시면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