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기있는 김수정 꼬마가 나오는 껌 광고 보신 적 있나요?
여기에 삽입된 배경음악이 서수남-하청일 콤비의 <벙글 벙글>이라는 곡인데, 사실 이 노래는 창작곡이 아니고 싱잉 넌의 1963년 곡인 를 번안해 1971년에 발표한 것입니다.
도미니끄, 니끄, 니끄는 정말 소박하게 살다 갔지
용병으로, 청빈하게 노래부르며 모든 길로, 모든 곳으로
그는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을 하지, 그는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을 해
어떤 날에는 이교도가 그를 고난으로 몰고갔으나
우리의 수호자 도미니끄 성인은 기쁨을 가지고 그를 개종시켰다네
낙타도 없이, 마차도 없이 그는 걸어서 온 유럽을 두루 돌아다녔지
스칸디나비아나 프로방스를, 청빈을 정결하게 지켜가며
열정으로 충만한 모든 학생들을 불타오르게 했고
또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설교자 형제단을 창설했지
도미니크와 그의 형제들 집에 마침내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지
그러자 천사 둘이 나타났지, 계란 노른자를 입혀서 구운 빵을 많이 가지고서
도미니크는 꿈속에서 보았어, 온세상의 설교자들을
성모 마리아의 그늘 아래 모여든 수많은 설교자들을
저의 훌륭한 수호자 도미니크 성인이시여, 저희를 지켜주소서
꾸밈없고 즐겁게 인생과 진리를 저의 형제들에게 전파하도록 말입니다.
-후략-
원곡의 가사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 곡은 로마 가톨릭 산하 도미니크 수도회의 창시자인 도미니크 성인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곡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천주교에서도 전도가로 쓰인다고 하던데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노래에는 좀 사연이 있습니다.


1959년 벨기에의 도미니크회 피세르몽 수녀원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자닌 데케르. 불우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자기가 만든 곡을 기타 치며 불러 동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수녀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수녀원의 간부들은 그녀의 노래가 해외 선교활동에 큰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고 음반을 만들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1961년 데케르 수녀는 브뤼셀에 있는 필립스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고, "Soeur Sourire" (Sister Smile - 미소 수녀)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합니다.
발매되자 마자, 노래 가 입소문을 타고 전 유럽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폭발적 인기를 얻습니다. 그렇게 되자 1963년 필립스 레코드는 그녀의 앨범을 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 발매합니다.
미국인들이 그때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수녀의 맑고 투명한 노래는 단번에 대중을 매료시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1963년 11월 9일 싱글 차트 64위로 데뷔한 는 프랑스어 노래라는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초고속 상승을 거듭했고, 차트 진입 5주 만에 12월 7일자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라 한 달간 1위를 유지하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합니다.
그녀의 노래가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자, 그 주인공을 불러오려는 세속의 손길이 수도원까지 뻗쳐옵니다. 데케르 수녀는 더 이상 수녀원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죠. 서둘러 콘서트를 열었고 1964년에는 최고 인기 프로인 에드 설리번 쇼에까지 출연해 대중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줘야 했습니다. 1965년에는 수녀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노래하는 수녀(The Singing Nun)"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집니다. 그녀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지만 노래하는 수녀는 자신의 삶이 점점 예측하지 못한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모든 활동을 접고 다시 수녀원에 들어가 신앙생활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떨칠 수 없었던 수녀는 결국 몇년 후 수도원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이제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수의 길에 접어든 것이죠. 프로가수가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취향이나 요구에 계속 귀 기울여야 하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이름을 알려야 하죠. 그러나 수녀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뿐, 돈이나 대중적 인기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67년 두 번째로 내놓은 앨범의 제목입니다. 앨범 제목이 - 나는 스타가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대중스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런 태도는 결코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대중의 취향과 거리가 있는 2집앨범은 당연히 실패합니다. 그리고 데케르 수녀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녀원 생활로 복귀하지도 않습니다. 당시 교회의 보수주의에 대해서 점점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그녀는 수녀원에 들어가는 대신, 오랜 친구였던 안네 페셰르와 함께 자폐아를 위한 학교를 설립해 운영합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초반부터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벨기에 세무당국이 그 동안의 수입에 대해 6만 3천 달러의 세금을 부과한 것입니다. 노래활동으로 번 수익금 중 시설 설립과 운영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수녀원에 기부했던 그녀로선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고, 번 돈을 거의 수녀원에 보냈으므로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수녀원에 보낸 돈에 대해 따로 영수증을 받아놓지 않았기에, 세무당국은 수녀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수녀는 기부실적을 고려해 세금을 감면해 달라고 재차 탄원하지만, 세무당국은 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고 세금 납부를 독촉합니다. 몇년 동안 이 문제로 다투느라 심신이 지친 데케르 수녀는 결국 술과 약물로 시간을 보내게 됐고,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그리하여 1985년 3월 29일 자닌 데케르 수녀는 52세의 나이로 친구 안네 페셰르와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에 와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 간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파산에서 구원해 줄 것이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수녀가 죽은 뒤에 벨기에 저작권협회에서 3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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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나 돈 때문이 아닌, 단지 노래가 좋아서 가수로 활동했던 미소 수녀가 결국 돈 때문에 세상을 떠나야 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노래는 지금도 세상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ps. 자닌 데케르 수녀의 삶을 다룬 영화 <시스터 스마일>이 작년에 개봉했습니다.

첫댓글 저렇게 아리따운 멜로디속에 이런 슬픈 사연이 담겨있군요...세상은 역시 아이러니 합니다
이런;;; 돈이라는게 참...
돈이라는 것은 얼마만큼 버느냐도... 때론 중요할 순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고... 어떻게 쓰느냐도 정말 중요합니다.
짜장면 123그릇 따위의 저속한 판단은 그래서 참 짜증나는거죠...
흐어어 잘 읽고 갑니다. 저 영화 꼭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