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심
열: "내가 이대로 농삿군으로 살아갈수는 없어- 은주 남편보다 더 성공함으로 날 버린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어줄거야 ",
방위병 제대후 거의 한달 동안이나 반복하여 생각하는 문제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정규(열아버지): 열아 나랑함께 골고랑 보리밭으로 거름을 져날르자구나
열: 예
그날은 하루종일 말없이 열은 아버지를 따라서 거름을 골고랑 보리밭으로 져날랏다.
저녁밥을 먹을때엿다.
열: 아버지 -
정규: 왜 그러느냐?
열: 저는 다시금 공부를 해서 신학교를 가고싶습니다.
정규: 신학교를 갈려면 고등학교를 졸업해야한다고 하지않있더냐? 너가 졸업한 성경고등학교는 안되다면서 ...?
열: 예, 문교부로부터 인가가 안나서 안된답니다.
정규: 그런데 어떻게 신학교를 간단 말이냐?
너가 정 신학교를 가고싶다면 논밭이라도 팔아서 보내주마
열: 고맙습니다. 우선 3십만원만 구해주십시요. 제가 여수로 가서 여수 공고로 찾아가서 편입학을 알아볼랍니다.
정규: 그래 알앗다 내일 구해주마
열이 어머니는 아들과 남편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다음날 정규는 아들의 신학교 가는데 필요한 돈 30만원을 구해다가 아들에게 주엇다.
거금이였다.
75년도의 30만원은 쌀 15가마 값이엿다.
열은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린후에 여수 공고를 찾아갔다.
여수 공고는 여수의 명산 종고산 중턱 남향받이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엇다.
여수 공고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여수시는 아름다웟다.
학교 운동장 아래로 이순신장군의 집무소인 진남관이 거대한 기둥을 다리로 하고 무거운 기와를 지고 웅장하게 앉아 있었고 그 아래로 오사카 언덕 도로 양쪽으로 대양서점과 태극사를 비롯하여 상점들이 줄비하엿고 그 아래로 로타리를 돌아 서국민학교쪽으로 도로가 시원하게 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오동도 다리와 오동도가 멋있게 보이고 바다가 멋있게 보였다.
열이 교무실로 들어가서 어느 선생님에게 대충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그 선생님은 편입학 담당 선생님이 지금 안계시니 내일 한번 와보라고 말하엿다.
열은 검정고시를 통하여 떳떳히 자격을 획득하여 신학교를 가는것을 생각하엿다.
부모님과의 약속과는 다른 생각이 열을 지배하였다. 아버지를 속이려고 해서 속인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속인것이 되엇다.
열이는 여수 공고 편입을 포기하고 말앗다.
여수 상고를 찾아가려고하다가 또 포기하고 말았다.
검정고시를 생각하엿지만 사실은 고등학교의 편입할 만한 자격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였다.
성경학교 졸업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엇던것이다.
3년동안 피나는 공부와 기도 훈련 기숙사 생활을 통하여 국내 어느 고등학교보다도 더 강한 훈련을 시키는 학교엿으나 국가에서 인정해주지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엇다.
단, 교회에서는 알아주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식 교육을 시켜주었던것이다.
미국 선교사 교장 이후에 대한민국 최대 교단의 총회장을 지내신 김형모 박사께서 교장으로 계실때에 그는 학생들에게 "우리 학교는 천립학교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학생들만 오는곳입니다."라고 연설하셧지만 열에게는 일반 고등학교도 편입할 수없는 힘없는 학교일뿐이였다.
열은 여수중학교 1학년 말에 중퇴하고 말앗다.
그후 여천 고등공민학교를 3학년까지 다녓으나 한마디로 나이롱 학생이엿다.
다니다가 쉬고 다니다가 쉬고 ...
열이 부모님은 속이 터졋다.
그리하여 열이 부모님은 열이를 농사군으로라도 만들려고 부지런히 일을 가르켜주엇다.
아무리 농사꾼으로 살아가더라도 천자문은 떼어주어야한다는 마음으로 이웃 면 웅천마을에 가서 유명한 한문 선생님을 모시고 오셔서 겨울 한철을 열이 집 작은방에 열이와 함께 자면서 한문을 가르켜주엇다.
즉 독서당인것이다.
말은 독서당인데 마을 청년들이 많이 와서 마을 서당으로 되엇다.
소문을 듣고 이웃 마을에서도 배우러 왓다.
그중에 열이 일년 후배와 2년 후배 현석이와 만조가 있었다.
그런데 이 한문도 열은 넘 늦었다.
다른 청년들과 학생들은 천자문을 떼고 명심보감으로 들어갔는데도 열은 아직 천자문을 붙들고 간신히 천자문을 떼긴 떼엇다.
생긴것은 안그런데 재주가 없는 모양이라고 열이 아버지 정규는 생각하며 기분이 안좋앗다.
이러한 열이 어떻게 지역의 명문으로 소문난 여수중학교를 거뜬히 들어갈 수가 있엇을가? 이상할 정도였다.
열이때문에 열이 아버지 정규는 열이 어머니만을 탓하엿다.
이러한 열을 순천성경고등학교를 보내어 졸업하고 전도사를 하다가 방위병을 마치고 신학교를 간다면서 돈 30만원 즉 쌀 15가마 값을 가지고 여수로 갔던것이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엿다. -------------
부모님으로부터 장리 빛을 얻어온 열은 어느새 주머니의 쌀 15가마 값은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
고등학교 편입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별로 한 것도 없었다.
그 돈으로 길거리의 꽃을 사러갔다든가 바람을 피울 줄도 몰랐던 것이다. 열은 너무나 시골스러운 총각이다.
정직하라는 아버지 정규의 가르침과 성경학교 3년 동안의 신부 같은 훈련을 받은 열에게는 그 유명한 병모가지라도 가서 돈을 주고 여자를 사서 하루 밤 품어보는 것도 몰랐었다.
이런 고지식함 때문에 사랑하는 은주를 놓쳤는지도 모를 것 이다.
병모가지 소문은 들었다.
[이웃마을 허 샌 은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간혹 여수 병모가지로 가서 젊은 여자를 보듬고 오곤 한다네]
여수 병모가지는 여수시의 생긴 모양을 따라서 병모가지처럼 좁은 곳에 많은 술집과 여인숙이 많았다.
서울의 미아리와 파주의 용주 골처럼 여수에도 그런 곳으로 유명한곳이 병모가지다.
그곳은 아주 작은 방 하나씩을 가진 젊은 여자들이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여수는 돈이 많다고 소문나 있다.
그것은 밀수와 고기잡이가 잘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밀수꾼들이 많았다.
그들에겐 돈 백 만원은 용돈이다.
70년 초에는 허 봉룡이 유명한 밀수 대장이였다.
허 봉룡이 밑에서 수많은 심부름꾼들에게도 많은 논이 굴러들어왔다.
이들은 병모가지가 아닌 더 고급 집을 찾아가서 회포를 풀었다.
하지만 열은 순수하였다.
다만 성질이 급하여 폭력 사고를 정당방위 차원에서 저지른 것 외에는 착한 청년일 뿐이다.
열은 공부를 해볼까하고 여수 병모가지 근처 이층 가정집에 세 들었다.
그런데 그 집은 30대 젊고 아리따우며 포동포동한 과부가 주인이다.
그때는 여름이다.
짧은 치마에 속에는 얇은 망사팬티 한 장만 걸치고 나이롱 실크 속치마를 입고 열이 바로 앞방에서 홀로 잠을 잤다.
열이 방에서 그 모습이 바로 보였다.
문도 안 잠그고 자는 것이다.
문은 밀 창문이다. 아예 그 밀 창문을 반쯤 열어두고 네다리를 주 욱 펴고 자는 것이다. 그것도 그 여인은 젊고 하얀 피부가 포동포동하였다.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서 치마가 걷어져 올라가 속 팬티 하얀 속살이 열 이방에서 환히 보였다.
열 이는 한참 피 끓는 25살이다. 5살 차이밖에 안 난다. 유혹은 참아내는데 매력이 있는 것이지 유혹을 참아내지 못하면 범죄가 되는 것이다.
열은 잘 참아내었다.
만일 열이 그녀에게로 살며시 다가가 그녀를 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가지중에 한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강간범으로 잡혀가든지 하나는 그녀의 남편으로 되든지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다행히 하루하루 그렇게 아슬아슬한 관계로 지내어갔다. 열 이는 돈도 다 떨어져가고 해서 중앙동 평양 냉면집으로 찾아가 요리 기술을 배워보기로 하였다.
그 집에는 냉면으로 여수시에서 유명하였다.
그 집에는 열이 동갑네기 요리사가 어려서부터 그 집에서 기술을 배워 아들처럼 대우를 받으며 있었다.
또 그 집에는 요리사와 동갑네기인 미인 딸이 시집을 가서 이층 안집에서 방송국 다니는 신랑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미인 큰딸과 요리사는 마치 친 오누이처럼 다정다감하게 지내었지만 방송국 다니는 그 미인의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열은 신기 해 하였다.
마치 부부처럼 요리사와 큰딸은 남편이 있으나 없으니 장난을 쳐대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려서부터 오누이처럼 지내온 사이만이 가능하였다.
다른 불순한 사이라면 그렇게 못 할 것 이다.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열은 그 집에서 1달 정도 지내는 동안 방위병 시절 함께 방위병 타격대원으로 근무하였던 친구 두 명이 일식집 주방장과 한식집 주방장으로 있었는데 그들과 간혹 만나 그들로부터 요리사가 되고 주방장이 되면 아주 좋으며 돈도 잘 번다는 말을 들었다.
날마다 과부로부터 유혹을 받는 열은 어느 날 과부로부터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의를 받고 승낙 하였다.
젊은 과부는 열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영화를 보러 여수 중앙극장으로 갔다.
중국영화였다.
아이 중들의 무술장면이 많았는데 즐겁게 보았다.
영화 티켓도 과부가 내어주었다.
25세의 열은 연애에 대해서는 제로였다.
그 제로의 이유는 철저한 종교심과 도덕심이다.
아무런 사고도 없이 열은 여수 생활을 정리하고 광주를 향하여 보따리를 싸고 광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열이 고향에 부모님들은 열 이와의 소식이 끊기자 난리가 났다.
혹시 열이 누구에게 돈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지나 않았을까? 하며 돈이 문제가 아니라 큰아들 목숨이 문제라며 걱정하며 찾기 시작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열이 아버지 정규는 막연하게 여수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하며 매일처럼 여수 거리를 누비셨다.─━☆멋진자료 클릭☆─━
첫댓글 많이 생각해야 될문제 같네요
글은 좋은결말이던지 좋지못한 결말이던지 마무리가 좀 아쉬운것 같네요,
깊은 생각을 해야 할 것 갔네요.감사..
잘보고 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근데 마무리가 ㅋㅋ
잘 봡습니다
잘 봡습니다
무엇을 그리는 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