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제주도청 사이트 :신례리 왕벚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156호)>
꽃상식 - 벚꽃의 고향은 한국
4월은 진해군항제 등 전국에서 벚꽃제전이 열린다. 벚꽃의 내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벚꽃에서 일본냄새가 난다고 한다.
벚꽃의 정확한 이름은 왕벚꽃. 학명은 [푸르누스 에도엔시스 마쓰무라(PRUNUS YEDOENSIS MATSUMURA).
이 학명이 일본의 꽃으로 오해를 사게 한다. 푸루누스는 벚나무의 속명이고 에도는 동경의 옛이름. 마쓰무라는 최초의 학명을 붙인 일본학자의 이름이다.
왕벚꽃이 최초로 학계에 등장한 것은 1901년 동경대학 松村任三교수가 동경에서만 자라는 나무라 하여 이같은 학명을 붙였다.
벚꽃이 일제히 활짝 피었다가 말끔히 낙화하는 모양이 마치 일본의 무사정신이나 국민성을 상징하고 그들의 기질에 맞는다하여 이때부터 제2의 국화로 삼았다. 황실의 꽃으로 菊花를 정한데 이어 왕벚꽃 [사쿠라]를 백성들의 꽃으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1908년 남제주성당에서 근무하던 프랑스인 에밀 타케신부가 한라산 북쪽 관음사 뒷산 해발 6백m 지점에서 왕벚꽃나무를 채집했다. 당시 세계적인 권위자 독일의 베를린 대학 괴네교수에게 이를 보내 제주도가 왕벚꽃의 자생지로 확인 발표해 동경의 벚꽃이라는 주장이 무색하게 됐다.
이때부터 왕벚꽃의 족보를 놓고 세계학자들 간에 논쟁이 일기 시작했으나 일본에서는 한군데서도 자생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한국에서는 타케신부가 발견한 자리 부근에서 1백년 생이 또 전남 대흥사 등 10군데에서 계속 발견되어 왕벚꽃의 고향은 한국이라는 주장이 유력하게 됐다.
20세기초 이같은 논쟁도 조선조 효종(1619-1659)이 북벌을 계획하고 궁재로 쓰기 위해 지금 서울 우이동과 장충단근처에 왕벚꽃나무를 대량으로 심었다는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일본 학자의 주장은 무색케 됐다.
수백년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민간의 감기처방으로 벚나무 껍질을 벗겨 말려 두었다가 달여 마셨다. 종기나 부스럼 두드러기도 이 물로 씻었다. 벚꽃나무 열매(버찌)와 꽃망울이 달린 가지를 꺾어 술을 담가 마셨다.
벚꽃은 해방과 함께 일제의 잔재라 해 수난을 당했다. 쌍계사 10리 벚꽃터널도 하마터면 잘려나갈 뻔했다. 세월이 지나 벚꽃이 우리 것이라는 설이 굳어지면서 75년 조성된 전주-군산간 1백리 벚꽃터널, 경주 보문단지등 벚꽃은 봄의 여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출처 :http://www.dapsa.co.kr/zboard/zboard.php?id=thema&page=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
벗꽃의 원산지는 제주
사쿠라 나무가 일본에 건너 간 것은 고대에 한국 불교가 일본에 포교되던 서기 6세기경부터로 본다. 왜냐하면 요시노산(일본 사쿠라의 총본산(해발 455미터))이 있는 나라땅은 서기 538년 부터 백제 성왕에 의해서 백제 불교가 일본에 포교된 나라땅의 터전이며, 사쿠라나무는 우리나라 불교와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1933년 일본 식물학자 코이즈미 켄이치씨는 일본 벗꽃의 원산지가 한국의제주도라 주장했고, 그 이후에도 많은 일본 학자들이 그 사실을 언급했다.
일본 사쿠라회 회원인 타카키 키요코 교수는 그의 저서 '사쿠라(쥬우오우공론사1995)에서'소메이 요시노 사쿠라'의 원산지는 제주도다'라 했고, 마키노 카즈히로 교수 역시그의저서 '사쿠라 정신사(마키노 출판사 1978)에서 그 사실을 언급했다.
소메이 요시노 사쿠라라 하면 오늘날 일본이 최고의 품종으로 세계에서 자랑 삼는왕벚꽃이다.
내용출처: 일본 문화 백과 (서문당, 홍윤기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