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쌀 뒤 주 *
저는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의 자진 이동으로 해서 중, 고등학교를 타지방에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고등학교 일 학년 때 봄방학을 해 집에 돌아오니
제 방 머리맡에 예쁜 밤색 쌀뒤주가 놓여 있었고, 안방 벽 옆에는 새로
들여온 아이디알 재봉틀이 놓여 있었습니다. 왜 쌀뒤주와 새로운 재봉틀이
필요한 것인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유를 어머님에게 물어 보니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너 시집갈 때 줄려고 김목수 살아 계실 때 하려고 미리 해놓았다."고
그러시는 것이었습니다. 김목수는 우리가 살던 근동에서는 알아주는
솜씨이신 데, 이미 연세가 높으시어서 곧 일을 그만두시려고 하셔서 미리
해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어머님은 옛 사람이셨습니다.
오동나무로 만든 쌀뒤주는 밤색으로 매우 아름답고 품위가 있는 장식을
해 더욱 덧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쌀뒤주와 재봉틀을 가지고 시집을 가는 저를 보시지 못하시고
어머님은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고, 저는 살면서 얼마나 많이 옮겨 다녔는지
그러는 사이에 열쇠 통은 간 곳이 없고, 어떤 때는 둘 곳이 없어서 처마 밑에
놓을 자리밖에 없을 때 목사님은 물을 맞아서 썩을가봐 방수칠을 해서
그렇게 예쁘던 밤색은 간 곳이 없고 검정 색이 되어 버렸습니다.
재봉틀은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딸 시집 보내기 전에 전자 재봉틀하고 바꾸
어서 지금도 제가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큰아들이 쌀뒤주를 가지고 가겠다고 그래서 웃으며
주었습니다. 왜 웃었는가 하면 그 뒤주 때문에 얽혔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입니다. 명문회사를 다니던 큰아들이 가족을 데리고 그곳을 그만 두고서
신학을 하겠다며 올라왔는데, 그때 저의는 개척 교회를 섬기며 있었기에
목사님과 저는 교회에서 기거하고 아이들은 집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한 날은 집에서 딸이 저를 보고하는 말이
"엄마 큰오빠가 밤이면 쌀뒤주 열어보는 소리에 잠을 깨서 더 잘 수
없어"하면서 두덜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벌던 사람이 신학공부를
한다고 처자식 끌고 와서보니 개척교회 하시는 부모님께 어려움만 드리고
살 일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딸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오빠가 기도에 앞서 걱정이 되어서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
엄마가 쌀을 외상으로라도 들여와서 가득가득 채워놓아야 하겠다. 엄마
생각이 짧았구나,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하면서 딸을 달랬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던 쌀뒤주를 가져가겠다니 저는 코끝이 찡했습니다.
통장 하나 주지 못하고 산 어머니 그런 어미 사연이 있는 물건이라고
소중히 여기는 아들 내외가 정말로 제겐 대견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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