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 윤남석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허긴 천 년 동안 이 땅은 남자들 세상이었으니까요.”
일순 무거운 긴장감이 정내(廷內)에 흐른다. 처용 아내가 무죄임을 변론한다. 피고석에서 눈에 힘주고 강변하는 처용 아내의 얼굴에 비장함마저 감돈다. 이미 천 년이 지나 굳게 들러붙은 간통 사건의 자세한 내막에 대해 조목조목 항변한다. 간부(姦婦)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입이 열둘이라도 할 말은 하겠다는 심산이다. 작심한 듯, 처용 아내가 입술 지그시 깨물며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우선 ‘처용가’에 대해 한마디 하겠어요. 벽사 기능을 하는 노랫말로 불린다고 하지만 저는 늘 꺼림칙했어요. 제 남편 처용랑이 그날 밤 우스꽝스런 짓을 한 건 맞아요.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는 것을 보고도,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니 기가 막힐 수밖에요. 사람들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면 제정신이 아닌 걸로 오해하기도 하니까요. 그것이 우매성을 초극한 듯 비쳐지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저는 부정 저지른 여자라는 굴레를 여태껏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사실 간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를 씌울 때만 해도 저는 너무 억울해서 울화가 탄산음료 거품처럼 부르르 넘쳤지요. 그러나 그날 이후, 제 남편 처용랑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가 불티나게 팔리고, 부적처럼 나붙는다는 얘기에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지요. 제 남편 초상화를 문에 붙이면 사악한 기운이 물러간다는 소문에 저희 집 문턱이 남아나질 않았어요. 저는 쥐죽은 듯 골방에 숨어 마음 졸였지요. 혹여나 급벌찬(級伐飡) 벼슬을 하고 있던 제 남편 신세를 가로막을까 봐 조마조마할 수밖에요.
일이 의외로 풀리니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저의 답답한 심정을 대놓고 밝힐 수도 없다는 게 한편으로는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때도 역시나 남자들 세상이어서 제 말에 누가 귀 기울이기나 하겠어요. 잘못했다가는 돌팔매질 당하기 십상이었죠. 당시에도 간통은 낯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중한 범죄였지요. 천 년 전의 형법을 새삼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작금에도 보시다시피 간통을 여전히 범죄적 행위로 규정하잖아요. 재작년에 한 탤런트가 제기한 간통죄 위헌 소송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는 합헌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가요. 간통이 사회적 질서를 해치는 데 대한 사회적 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재판부의 입장이라 했던가요.
그건 그렇고, 간(姦)이란 글자에 대해서도 무지 불만이 많아요. 시끄럽게 송사한다는 난? 위에 계집녀(女)가 얹혀 도리에 어긋남을 뜻한다는 데, 우리 여자들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기분 나쁜 글자임에 틀림없어요. 간음하다는 글자에 왜 여자(女)만 들어가야 하는지요. 여자 혼자만 가능한 행위가 아님에도 그것도 세 개씩이나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작금의 형법 241조도 배우자가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 징역에 처하며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고 규정하고 있던 데, 왜 간(姦)이란 글자는 여자들만 저지르는 불장난처럼 형상화했는지 모르겠네요. 여자 둘이 있으면 시끄럽게 송사를 하고, 셋이 모이면 간음한다는 이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어째서 나왔을까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 문자를 만들고 한참을 낄낄거렸을 것 같군요. 이것도 다 남자들 세상이기에 가능한 짓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그동안 입이 광주리만 해도 말 못하고 있던 처지였지요.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노랫말이 더는 나돌지 않을뿐더러 그 의미도 감감해지기에 가슴 쓸어내리던 차였지요. 내심 한자의 음과 훈을 섞어 교묘하게 표기한 기록문이 절대로 판독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지요. 제가 부정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벗겨지지 않은 억울한 평판이 자꾸만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던 게지요. 그런데 일본인 학자 아유가이(鮎貝)에 의해 한동안 잠잠하던 천 년 전의 치부가 들춰지게 되었지요. 정말 남부끄러운 누명이지만, 일본인 학자의 해독으로 드러난다는 데 달가울 리 있겠어요. 게다가 양주동(梁柱東)은 한술 더 떠서, 보다 나은 풀이를 끌어낸다며 이 일이 대단한 것처럼 다시 만천하에 소상히 밝히게 되었지요. 저로서는 이러한 짓들이 정말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남편 처용랑은 밤늦게까지 노느라고 귀가가 늦었지요. 남편은 늘 기이한 옷차림을 고집하는 바람에 남들이 수군대기도 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세상을 즐겁게 보고 가무를 무척이나 즐기던 사내였지요. 그만큼 낙천적 사고의 소유자였지요. 그날도 남편은 저를 원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선천적으로 체질이 약해서 몸때가 되면 통경(痛經)에 시달리곤 했지요. 예전에는 월객(月客)이 찾아드는 것조차 부정한 것이라 했지요.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서 신랑과 거리낌 없이 상의하기도 하지만, 그때만 해도 몸을 하는 자체를 더러운 것, 피해야할 것으로 여겼지요.
그날도 달은 휘영청 밝았지요. 교결히 빛나는 달빛이 깁창으로 흘러들었어요. 새로이 달이 차오르면 여자들 몸엔 창조의 신비가 깃듭니다. 체내 보름사리에 영향 미치는 주기적 변화로 인해 몸을 시작하는 여자들이 많아집니다. 달거리는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모든 게 귀찮고 몸이 마냥 무겁게 느껴지지요. 저는 약골이라 그런지 자연적 리듬이 그닥 순조롭지 못했답니다. 달이 차오르는 것은 생명 창조의 과정이고 신성한 거라지만, 유독 몸때가 되면 온몸이 쑤시고 아랫배가 바늘에 콕콕 찔리는 듯한 몸앓이를 했답니다. 달거리주기가 들쑥날쑥하다보니 몸때 외에도 허리와 아랫배가 차고, 때론 이슬이 비치곤 했어요. 그날은 정말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았어요. 게다가 밑이 빠지는 듯한 통증으로 괴로워했지요. 깁창으로 새어 드는 위험한 달빛이 뒤척이는 제 몸을 더듬거리는 걸 느꼈지요. 여느 때 같으면 불면의 밤을 지새우곤 했을 텐데, 그 위험한 달빛이 부드럽게 어루만짐에 저도 모르게 촉촉이 젖어 들었지요. 그렇게 백설처럼 하얀 달빛에 몸을 맡긴 채 로맨틱한 분위기에 빠져들고 말았어요. 미치도록 고운 달빛이 그리 위험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설핏 잠이 들었는데, 마침 남편의 노랫소리가 밖에서 들리지 않겠어요. 문구멍 틈새로 내다보니 남편이 사립짝 밖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있지 않겠어요. 섬돌에 남편의 목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 봐서 방에 들어왔다가 뛰쳐나간 게 분명했어요. 밤늦도록 제가 얼마나 뒤슬렀는지, 베치마가 흐트러지고 샅에 찼던 개짐도 느슨해 있었어요. 매무새를 바로 하며 남편의 노래를 듣다가 이내 히죽거리고 말았어요.
그 노랫말 가운데 ‘각오이사시량라(脚烏伊四是良羅)’라는 대목을 천 년이 지나 ‘가로리 네히어라’로 판독했다죠. 그걸 다시 현대어로 해석한다며 ‘다리가 넷이로구나’로 쉽게 풀어놓았더군요. 저는 그만 실소를 금치 못했어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 같은 ‘가랑이 넷’이 바로 광목으로 만든 개짐이란 걸 아셨다면 이런 오해를 받지 않았을 텐데요.
여자들은 몸때를 대비하여 천 조각으로 개짐을 만듭니다. 좋은 옷감이 아닌 다 헤진 천을 기워 만들곤 했지요. 기저귀처럼 생긴 개짐에 끈을 꿸 수 있게 만듭니다. 훗날 치마 가장 안쪽에 받쳐 입던 다리속곳도 여기서 유래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을 샅에 차려면 끈을 넣어 붙들어 매게 되는데, 그날 아랫배와 두덩뼈의 심한 통증으로 이부자리에서 몸서리치듯 뒹굴었지요. 그래서 끈이 풀렸는지도 남편의 기척이 있은 다음에야 알게 되었죠. 남편은 말려 올라간 속치마 사이의 개짐을 보고 뛰쳐나갔던가 봐요. 새어 드는 달빛에 두 가닥 하얀 끈을 보고 ‘둘흔 뉘해언고’라고 읊은 거지요.
요즘은 일회용 개짐이 나와서 참 편한 것 같아요. 양쪽 날개까지 달려 밤새 뒤척여도 안심이 된다며 사방팔방에 떠들지만, 예전에는 드러내 놓고 무엇이라 부르기도 멋쩍었지요. 그리고 개짐 보관과 세탁도 비밀스레 행하곤 했지요. 밤에 몰래 빨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널어 말려야 했죠. 여자라면 누구나 달마다 치르는 일이지만 소리 내어 말하기도 뭣해 보통 ‘그것’이라 했죠. 그만큼 은폐해야 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죠. 부끄러워 남편에게조차 숨길 정도였으니 처용랑도 생전 처음 보는 물건임에 틀림없었을 거예요. 다리 달린 그것이 몸엣것을 걸러 내기 위해 샅에 차는 건 줄 몰랐던 겁니다. 그러니 기겁하며 버선발로 마당으로 뛰쳐나간 게지요.
후에 남편에게 “털 난 역신”이 아니라 ‘그것’이라고 말해주었더니 파안대소하더군요. 그런데 남편 얼굴 그린 그림을 부엌이건 우물이건 질병 도는 곳에 붙이면 역신이 얼씬도 안 한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져 있었지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 버린 겁니다. 저지른 일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탓도 있지만, 또 그것이 남편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까봐 쉬쉬했던 거예요. 그리고 더러운 것으로 배척되는 여자들의 달거리와 개짐을 들먹이며 해명에 나서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았지요. 금기로 다루는 비밀스러운 그것을 거론하며 사정 얘기를 해봤자, 뜬금없는 소리로 치부할 게 뻔했던 거죠. 그 염치를 고분고분 들어줄 만한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방청석에 잠시 웅성거림이 인다. 한쪽에서 처용 아내의 구두 변론을 조용히 노트에 받아 적던 한 여류시인이 일어선다. 입가에 묻은 엷은 미소를 애써 감추며 바삐 재판정을 빠져 나간다. ‘처용가’가 체념적 주사(呪辭)가 아닌, 정말 웃지 못 할 그날 밤의 해프닝이었다는 게 드러난 마당에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게다.
이 땅, 천 년의 남자들만 몰랐을 전말에 이내 웃음 터진다. 영문도 모르고 천 년 동안 처용가를 부르며 낄낄댔을 남자들만 생각하면 웃음보가 여지없이 간지럼 탄다. 주체 못할 낄낄거림이 한없이 이어진다. 법원 앞마당에 함박웃음이 연방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