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생활입니다.
<연중 제29주일 강론>
(2024. 10. 20.)(마태 28,16-20)
<연중 제30주일 강론>
(2024. 10. 27.)(마르 10,46ㄴ-5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6ㄴ-52).”
1)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있는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라는 말은, 바르티매오가 단순히 ‘시력 회복’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새 인생’을 원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 인생’은 ‘새 직업’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신앙인)의 삶’, 또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이었음도 나타냅니다.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시력회복만을 원했다면? 그리고 시력이
회복된 뒤에 새 직업을 갖게 되는 것만을 원했다면?
그러면 이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면?
살던 대로 살기만을 바라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그토록 간절하게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즉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났을 것이고,
복음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 선포에 관심 갖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이었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기득권층 사람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일반 서민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층 사람이든지 소외계층 사람이든지 간에,
부유한 상류층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변화를 싫어하고 거부한 사람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 선포를 무시했고,
복음 선포를 외면했습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만족하는 것은
아닌데도 변화 자체를 두려워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회개하라는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쇄신’이나 ‘개혁’ 같은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으려고 하면
저항하고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갑니다.>
2)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하신 말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5,34).
두 이야기는 겉으로는 차이점이 많지만,
현재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는 점과
완전히 변화된 ‘새 인생’을 갈망했다는 점은 같습니다.
두 사람의 희망과 간절함에 초점을 맞추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단순한 ‘치유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원했던 ‘새 인생’으로 인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더욱 굳은 믿음을 갖고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네가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의 뒷이야기는 모릅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에, 충실한 신앙인이 되어서 ‘새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수건으로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라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도 예수님 덕분에 완전히 영적으로
변화되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신앙생활은 당장 눈앞의 일에 대한 소원이나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만족하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생활입니다.
<세례식 때 흰옷을 입는 것은 새로 태어났음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신앙인의 신앙 여정에서,
‘새로워지는 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단순한 ‘치유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원했던
‘새 인생’으로 인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더욱 굳은 믿음을 갖고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네가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