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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당신이란 사람 지긋지긋해, 더는 같이 못 살아.
죽던 말던 혼자 알아서 살아!"
"뭐? 이 망할놈의 여편네. 애새끼 데려갈 생각은 꿈도 꾸지마라"
중년의 남녀가 일곱평이 채 안되는 단칸방에서
서로 윽박을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방 안은 좀전의 난투극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물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찬장에 있던 접시들은 몽땅 깨져있는 상태였고,
떨어져있는 물건들 중 성한 물건이 단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남녀의 목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한참이 지났을까.
방안이 조금 잠잠해 질 무렵.
여인이 씩씩대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 엄마.."
"..예은아."
구석에서 눈감고 귀를 막은 채
자신의 부모들에게서 시선을 떼고만 있던 부부의 하나밖에 여덟살배기 딸 예은이 엄마를 향해 쪼르르 뛰어갔다.
그러나 여자는 평상시처럼 예은을 끌어안지 않고, 매몰차게 뿌리쳤다.
"미안하다.. 엄마가..너무 힘들어. 더이상 버틸수가 없어. 아빠랑.. 지내."
"엄마..엄마. 잘못했어요...흐윽. 이제 내가 잘할께.. 엄마, 가지마...흐엉.."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져버린 부모의 싸움에서 말리지도, 끼어들지도 못한 채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던 딸, 예은.
이제 서른이 된 예은의 엄마는 딸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 채 포기할 정도로 희생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엄마가 자주 우리 예은이 보러 올게. 아빠랑 잘 지내... 응?"
"흐어엉. 엄마 가지마세요... 엄마아...흐왕."
엄마의 다리를 붙들고 눈물을 쏟아내는 예은을 그녀의 아빠가 들어올렸다.
예은이 발버둥치며 그의 품을 빠져나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예은의 엄마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를 바라보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짐가방을 든 채로 집을 빠져나왔다.
"흐앙!!!!!! 엄마아!!!!!!!!!!!!!!!!!.."
아직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어리광을 받을 나이인 예은..
아이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친어미의 모습을 보며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
예은의 엄마인 희정은 옷소매로 눈가에 어린 눈물자국을
닦아내며 끔찍하기만 했던 자신의 둥지에서 순식간에 벗어나버렸다.
...미안하다. 예은아...
이 엄말 용서하렴...
-
"집구석 꼴이 이게뭐야! 청소도 안하고 뭐했어?!"
..똑같은 생활. 똑같은 삶의 반복...
눈물의 연속. 상처의 연속.
난 이런 내 상황이 지독히도 싫다...
"그렇게 잘하면 아빠가 하면 되잖아?"
"뭐?! 너 말하는 꼬락서니가 그게뭐야?!!!"
술에 완전히 만취한 상태로 어제와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내 아빠.
... 이분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내 아빠다.
"알았으니까 그냥 주무세.."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오는 유리컵.
미처 피할새도 없이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아찔할 정도의 충격에 순간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조금도 미안한 기색없이 날 노려보고 있는 아빠를 쳐다봤다.
"하.. 아빠, 제발 그만해!!!!! 나도 이제 지친단 말야!!!!!"
"뭐?! 지쳐?
그래, 너도 니엄마한테 가. 갈 데 있으니 아빠고 뭐고 다 필요없다 이거냐?!"
매일매일.
술에 취한 아빠와 말다툼 후에 항상 들어왔던 저 말은
기어코 다시 내 눈에서 눈물을 쏟게끔 만든다.
이마에서 흐르던 핏물이 눈물과 섞여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체, 언제까지 나만 혼자 이렇게 희생해야해.
언제 끝나는지라도 알고 싶어. 너무 지쳐.. 너무 힘들고, 숨막히고, 죽을 것 같단 말이야!!
"그만해, 제발 좀!!!!!!!!!"
신경질 섞인 내 외침에 더욱 발끈해 내방으로 들어가 내 교복을 찢어버리는 아빠.
...얼마남지도 않은 집안 살림이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 괜찮아. 괜찮아, 정예은.
버텨, 참을 수 있어. 이겨낼 수 있잖아.
"어디서 못된거만 배워 쳐먹어가지고. 니 친구들도 다 그러냐!!!"
욱신. 욱신...
"내 친구 욕하지마!!!!!!!!!!!!"
결국 또다시 집을 뛰쳐 나와버렸다.
...... 바보같이.
아빠도 힘들거야.. 조금만 더 이해하고 견디자.
괜찮아.... 난 괜찮아. 아빠가 더 힘들어....
..나한텐 엄마가 있잖아. 아빠한텐 아무도 없어..
발기발기 찢어진 교복을 두팔 가득 짊어든 채로
눈물을 닦으며 거리를 걷는 모습이란 얼마나 추할까.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시리 밝은 표정을 짓고 추운날씨에 주머니로 손을 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핸드폰진동.
조심스레 꺼내들어 가만히 액정을 들여다보면... 울엄마.
아자아자, 정예은!! 밝게.
"여보세요."
- 예은아, 이 시간까지 안자고 있었네?
다정하기만한 엄마의 목소리에.
전화를 받자마자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려 했다.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괜찮아.
"공부하다가 잠시 바람 좀 쐬러 나왔어."
- 어머, 얜.. 이렇게 추운 날씨에 감기걸릴라.
"헤헤. 걱정마. 이래뵈두 내가 몸은 죽이게 건강하잖아."
못견디게 아플땐.... 평소보다 더 밝아지는 내 습관을 우리 엄만 알고 있을까...
- 호호, 그래. 밥은 잘 챙겨먹고 있어? 공부하느라 힘들텐데 피자라도 시켜줄까?
..피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
"아냐, 밥 먹었어."
- 그래? 먹을 건 꼬박꼬박 잘 챙겨먹어야해.
너희아빤 요새도 술..... 자주 먹니?
움찔.
..응. 매일먹어....
그래서 나 어렸을 적.. 엄마심정과 똑같애.
꼭 똑같애..... 너무 힘들어.
그렇지만 난.. 엄마처럼 아빨 버릴 수가 없어..
"에? 아니~~ 요새 술 근처에도 안 가."
- 그러니? 휴, 그렇담 다행이다.
엄만 아빠가 너한테도 술주정할까봐 매일 걱정이야..
.. 우리 예은인. 엄마가 다 해줄테니까. 기죽지 말구!!
기죽지말구, 공부만 열심히 해. 알았지?
"응....알았어."
- 그래, 엄마가 통장에 용돈 붙여놨으니까 먹고 싶은거 있음 참지말구 사먹어.
"응.. 고마워."
돈 같은건..... 괜찮은데.
수화기 건너편으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에
엄마가 다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 어머, 얘가 또 울어. 하여튼 눈에만 안보이면.. 커서 마마보이 안되려나.
예은아, 엄마 전화 끊는다. 현우야, 엄마 여깄어~ 울지마뚝.
달칵.
통화를 끝내자마자 금새 떨어지는 눈물방울.
타이밍두 죽이지..... 하하.
"흐...흐읍...흐으흑..... 흐앙."
괜찮아..... 난..
나말고두 힘든사람은 많아..
... 괜찮아... 괜찮아, 정예은.
두손으로 입코를 다막고 홀로 울음소리를 죽였다.
..벌써 7년째.....
난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혼자 숨죽여 울어야 할까?
2년 전 엄마가 재혼하신 후론.
엄마에게서 전화오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어만 갔다.
울음이 잦아들고 코끝이 시려오는 걸 느낄때쯤, 내 연락을 받은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 가영이가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은아!!"
"흐흐, 가영아...."
유일하게 내 맘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너.. 이마가 왜그래. 아저씨가 또 때리셨어?!"
"아, 괜찮아.... 괜찮은데.."
"뭐가 괜찮아, 바보야!!!!!!"
날 이해해 주는 사람... 같이 울어주는 사람.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 신가영....
"아 왜 맨날 바보같이 혼자 참고 울어... 그냥 너희 엄마한테 다 얘기해!!!"
"..아냐, 됐어. 괜찮아.."
.......... 괜찮아....
"도대체 이게 뭐가 괜찮은거야, 정예은?"
"흐읍.... 흑.."
간신히 멈춘 울음이 다시한번 터져나왔다.
울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끝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는 내모습에 이내 가영이도 얼굴을 묻고 나와 함께 울어버린다..
..그렇게. 우리 둘 다 울어버려...
-
다음날.
눈을 뜨니 가영이네 집이다.
아침상을 차려놓고 부지런히 날 깨우는 신가영.
"아훔. 잘잤다.."
오랜만에 편히 잔 느낌에 기분좋게 기지개를 펴자,
난데없이 핸드폰을 들이미는 가영이.
어리둥절해 들여다보자 아빠에게 전화가 오고있었다.
"받아봐. 어제 새벽 내내 울리더라. 걱정하시나봐.."
"응. 받아야지.."
조심스레 핸드폰을 받아들어 폴더를 열면 이제는 끔찍하게 느껴지기 까지 하는 아빠의 목소리..
레파토리가 뻔하다. 전화를 받지않아도 아빠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있어.
- 예은아..
"응, 아빠."
- 아빠가 미안해.. 잘못했어.
"아냐, 괜찮아... 나 그냥 가영이집에서 잤어."
여느때처럼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사과하는 아빠.
내가 아빠를 떠날 수 없는 이유..
... 아빤 날 너무도. 너무도 많이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아빠의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버린다..
- 아빠가 우리 공주님한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겠어.
난 도저히...... 우리 아빠를 떠날수가 없어요...
... 아직까지 철도 들지 못한 우리아빠.
나까지 없음.... 정말 살 수 없을거야.
..우리 아빤.. 나뿐이잖아......
"아냐. 괜찮아."
- 아빠가 이제 정말 열심히 살게.
오늘부턴 술도 안먹고 일찍일찍 집에 들어갈게..
사랑해, 우리딸.
7년내내..... 단한번도 지켜지지 못했던 그 약속은,
내일이면 또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새기겠지만....
... 나는 바보같이 또 기대해버리고 만다. 지독할만큼 바보여서.
"알겠어..괜찮아, 이따봐."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괜찮다는 말은..
.. 내겐 너무도 가슴시린 거짓말....
앞으로도 계속 내가 입에 달고 살아야 할.... 아픈 거짓말...
사실은.... 괜찮지 않아요.
.. 나 많이 슬퍼요. 너무 슬퍼서, 그 슬픔이 가슴을 눌러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에요.
통화를 끝내고 어색하게 웃음짓는 날, 안쓰럽게 바라보는 가영이.
네가 그렇게 보면 난......
"예은아....."
"나 괜찮아, 가영아."
괜찮을 수 밖에 없는거야.
-
쾅쾅!
"문열어!!! 문안열어?!"
문을 부셔버릴 것만 같은 기세에,
잠기지도 않은 문을 열라며 생떼를 쓰는 내 아빠때문에,
난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문 가까이로 다가섰다.
화를 낼 기운도 없다.
.. 난 이제 더이상.
숨을 쉬는 것 조차 너무 힘들어.
힘없이 문을 열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까만 봉지를 내팽겨치는 아빠.
안에 담겨져있던 소주병들이 굴러나왔다.
"이 썩을. 이제 문도 안열어줘??"
"문 열려 있었어요..."
"뭐?! 또 말대꾸야?! 너도 내가 우습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하루종일 치워놨던 집 안을 순식간에 다시 헤집어놓는 아빠.
와장창,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들 속에 간간히 들려오는 아빠의 욕짓거리.
"니 엄마한테 가!!"
귀를 막아도 들리는 아빠의 목소리.
... 제발. 제발.....
그냥 듣지말자. 듣지마. 들리지않아.......
... 들리지 않아.
들리지않아. 들리지 않아.....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은 채 울음을 삼키고 있으면,
...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
-
깨어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앞에 비친건 7년만에 처음 보는 엄마, 아빠가 함께있는 모습.
하지만. 뭔가 굉장히 불안해.
나를 너무나도 안타깝게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친구 가영이.
"...가영아?"
.....어?... 분명 방금 내가 가영일 불렀는데....
"가영아..... 가영아? 가영아!!!!!!!!!!!"
내 목소리가.. 안들려.
내가 말을, 말을.. 못하게 된건가?
깜짝놀라 두손으로 입을 막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영이를 바라보면,
가영이의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쉴새없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왜 그래, 가영아....
"어떡해. 어떡해요.... 흐엉.
우리 예은이 불쌍해서 어떡하면 좋아요...
..이제 어떡해요..."
가영이가 날 감싸안고 울부짖는 소리가..
항상 날 위해 걱정해주던 내 친구 가영이의 이쁜 목소리가..
"가, 가영아.. 나.. 이상해. 안들려. 니 목소리가 안들려, 가영아..
왜 이러지..? 꿈인가? 꿈인가.. 꿈인거야?"
내가 지금 제대로 말은 하고 있는 건가....
귀가 깜깜해. 누군가 내 귀를 막고 있는 것만 같아. 끔찍해. 싫어...
내 말이 계속 되어 갈 수록 가영이의 얼굴은 점점 눈물범벅이 되어갔다.
"이러면 안돼요. 안되는거잖아요... 예은이 불쌍해서 어떡해요. 흐윽...
흐엉. 우리 예은이 어떡하면 좋아요. 어떡해.. 예은, ..흐읍.. 예은아.."
"뭐, 뭐야... 가영아. 뭐가 어떻게 된거야."
분명 말을 내뱉고 있는데도......
귀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질 않아. 신기하리만큼, 귓가에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아..
내가 왜 이런거야.
"지, 지금 장난.. 하는거야? 이런거 무서워. 하지마...
난 못 듣는거. 그런거 싫단말야!!! 듣고 싶은게. 얼마나 많은데..."
더이상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 내 외침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눈시울이 붉어져갔다.
눈물조차 나질 않아....
...난 내 아픔에. 내 상처에 쏟아낼 눈물따윈 남아있지 않단 말야.....
"제 한쪽귀라도 떼어내 주세요.. 안돼요. 안돼요.....
예은인 안돼요, 의사선생님. 흐엉... 예은인. 예은인 정말 더 아프면 안돼요, 선생님......흐아앙."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좋을까.
"예, 예은아..."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얼굴...
"...엄마말.... 안들리니?"
입모양만으로 엄마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 하지만. 들리진 않아.........
"......저리가요!!!!!!!!!"
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엄마를 밀쳐내버리는 가영이.
"하,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안들리냐구요?!! 다들려요!! 제가 예은이 귀에요!!!"
가영이의 기세에 짓눌려 주춤 뒤로 물러난 엄마.
가영이가 내 오른손을 꽉 잡았다.
... 어쩜 좋아.... 나 정말 들을 수가 없나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너무 황당해서. 너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아.
"괜찮아, 예은아.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괜찮아. 예은아!"
...괜찮다구..?
"대체.... 애를 얼마나 볶아댔길래 애가 심리적으로도 듣는 걸 거부한다는거에요!!"
"뭐야? 지금 그걸 나한테 덮어 씌우는거야?"
"덮어씌우다니? 하, 당신 그런 행동은..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내가 어쩌자고 예은일 당신같은 인간한테 맡긴건지.."
"그렇게 잘났음 첨부터 당신이 데려가지 그랬어!!"
들리지 않아도.. 다 들리는 것만 같은 엄마, 아빠의 대화.
그 때 가영이가 이미 먹어버린 내 귀를 자신의 두손으로 다시 막아버렸다.
... 그리곤 정확한 입모양으로
또렷이 나에게만 말하는 가영이...
"나쁜말은 듣지마. 걱정마, 내가 네 귀야.
울어도돼. 괜찮지 않다는 거 알아, 예은아... 울어.."
신기하게도.
내 귀로 들리는 것만 같은 가영이의 말에 마법같이 내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떨구자 기다렸다는 듯이 펑펑 쏟아지는 눈물방울.
"..흑...흐으..흑. 괜찮지..않아. 하나도...."
사실은 하나도..... 처음부터..
괜찮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어요......
이까짓 들리지 않는 것쯤..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만요.
정말로 괜찮지 않은건....
.....엄마, 아빠 때문이었어요....
그 때문에 난 괜찮았던 적 따윈 한번도 없었어요.
"..흐읍.... 전혀.... 괜.. 찮지.. 하흑.. 않아요..."
-
"흔치 않은병인데... 여태까진 이렇다할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림프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가 점점 악성화 되어가서.... 결국은 온몸으로 퍼지게 됩니다.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 지금은 그걸 늦추는데만도 힘겨운 정도입니다...
예은양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심리적인 효과도 커서 저희 쪽에서도 어떻게할 도리가..."
의사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마자
예은의 엄마인 희정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 방법이... 하나도 없으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건가요.."
"죄송합니다.."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한다는건가요..?"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 하나하나 마비되어 갈거에요. 결국은 온몸에 감각도.."
"마, 말도안돼요!!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의사선생님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결국은 차마 시선을 두지 못하는 모습에
예은의 엄마는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 아주머니!"
가영은 재빨리 그녀를 잡아 일으켜 세웠지만
지금 심정은 정말 가영이 먼저 졸도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체 왜....
..예은인 지금까지도 충분히 아파왔는데..
지금 이걸...
.. 어떻게 예은이에게 알리라는 거에요..........
난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 네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망할 친구년이야, 난.....
-
"예은아, 어때? 곧 수술인데..."
내가 잘 볼 수 있게 내 바로 눈앞에서
입모양을 크게 해 말하는 가영이.
그치만 이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걸.
차마 ... 말할 수가 없어.
"괘..괘차나.."
내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탓에.
뭐라고 말하는지, 똑바로 말했는지 알 도리도 없다.
그 때 거칠게 문이 열리며
두 손 가득 꽃다발을 들고 엄마가 들어왔다.
"예은아, 엄마왔어."
웃는 낯으로 반갑게 엄마를 맞이하자 빠른속도로 내 가까이 오는 엄마.
그러다 침대 바로 옆에서 녹차를 따르고 있던 가영이와 부딪혀 잔 안에 들어있던 녹차가 내 무릎위로 그대로 쏟아져버렸다.
"꺅, 예은아!!"
무릎이 물에 축축히 젖은 기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릎에 쏟아진 차를 손으로 툭툭 털어내자,
"가영아, 잔 안깨졌어?"
"..예은... 너.. 안뜨거워?.. 방금끓인.. 녹찬데...."
...뭐....?
놀란 표정으로 동그랗게 눈을 뜨자,
녹차에 손이 데었는지 빨갛게 부어오른 가영이의 손.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무릎과 손을 보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빨갛게 화상입어 있는 피부.
가영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차가운 얼음수건으로
내 손과 무릎을 닦아냈지만,
... 하나도 뜨겁지 않았어. 정말로.
어쩌면좋아... 조금도 뜨겁지 않았어. 아무느낌이 없었어, 나.....
"하..나..괜찮아...하나도 뜨겁지 않았어.."
내가 너무 초라해. 이제 하나하나 죽어가잖아.
귀도, 눈도, 감각도.. 결국은 전부. 죽어버리는 거잖아......
"괜찮아, 예은아... 이제 엄마가 네 옆에 있을거야.
흑... 예은아, 엄마가 정말로 미안해.. 널 두고 가서.. 혼자 아파하게 해서..
... 엄마가 예은이한테 뭐라고 용서를 빌어야 할지... 정말로,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예은아... 흐윽.."
한참을 울기만하다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마취주사를 맞고 정신이 희미해질 때쯤, 신기하게도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 난 알 수 있어...
나는. 나는.. 이제 마지막이에요....
-
두손을 부여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원망하고,
그렇게 지나간 10시간이란 긴 수술.
수술실 문이 열리며 창백한 표정의 의사선생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무섭게 그를 향해 달려가는 예은의 엄마와 가영.
"선생님! 우리 예은인..? 괜찮겠죠? 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나도 잔인한 의사선생님의 말에
예은의 엄마는 뭐라 대꾸도 못하고 균형을 잃으며 그대로 주저 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잡아줄 생각도 못한 채
멍하게 허공만 주시하는 가영..
예은의 아빠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군 채 아무미동조차 없었다.
"...예..은아."
어떡하니....
...가엾은 내친구 정예은....
불쌍해서...어쩌면 좋아......
".....예은아!!!!!!!!!!!!!!!!!!!!!!!!흐앙.......!!!!!!"
나는, 정말로 괜찮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요.
그래도 늘 사랑했었어요...
엄마...아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