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상쾌한 햇살과 시끄러운 새들의 지저귐으로 시작하는 하루는 그리 나쁘지 만은 않지만,
어제 쉴새없이 마셔댄 현수에게는 햇살은 울렁증의 원인이되고, 새소리는 두통을 몰고올
뿐이다.
지금의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시혜가 봤다면 ‘꼴 좋다’며 패줬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어디가서 찾아요!!”
죽어라 폭발해대는 술기운을 애써 꾹꾹누르며 사무실 앞까지 오긴 했는데 문 너머의 상황이
뭔가 불안하다.
아침부터 사무실에서 소리치는 여자목소리라니 왠지 알수 없는 오라가 품어져 나오는 문고리를
부여잡고는 고민하자 의도하지 않게 문이 안쪽에서 열린다.
“우린 정말 모른다고요!”
............어! 강현수! 잘됐다 이분 좀 돌려보내드려라.”
“엉?”
문 안쪽에서 윤철에게 등을 밀려 나오는 여자를 보니 고객은 아닌듯 싶다.
고객도 아닌 여자가 아침부터 찾아와 난리를 쳤으니 다혈질의 윤철이 욱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왜 자신에게 떠넘기느냔 말이다.
“한선배 찾아왔데-”
“뭐?”
“한지나 선배 말이다.
도대체가 1년전에 그만둔 사람을 왜 지금 찾는지..”
“우리 새언니란 말이에요!
새언니가 도망을 갔다구요-!”
“네~네~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모르거든요.
강현수! 뭐해 얼른 데려가!”
자신에게 밀다못해 던지듯 여자를 맡긴 윤철은 ‘쾅’소리와 함께 문을 닫는다.
뭔가 확실히는 몰라도 1년전 꽤 요란스레 결혼을 했던 한선배가 도망을 갔다는것 같고,
이 여자는 한선배 시누이쯤 되는 것 같은데 어째서 1년 동안 전혀 상관도 없었던 자기네 회사에 와서
이 난리를 치느냔 말이다.
“우리 새언니 찾아내란 말이야............
으아앙~~“
난감한 여자다.
이 큰 건물 한복판에서 그것도 다 큰 여자가 엄청난 성량으로 울어대다니 보통의
여자 아니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을 잘도 해댄다.
역시나 제멋대로였던 한선배의 시누이 답다.
“저, 한선배 시누이씨.
우선은 따뜻한것부터..”
“홍차라떼 먹을래요-”
자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먹고싶을 것을 주문하며 카페로 향하는 여자의 모습에
현수는 또다시 벙찐다.
뭔가 알 수 없는 성질이 저 깊숙한 곳에서 치솟으면서 아까까지 폭발해대던 술기운들이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한선배 시누이씨. 그러니까...”
“율희에요. 채율희-”
“채율희씨 한선배는 1년전 결혼식 이후론 한번도 못본데다,
회사랑도 전혀 연락이 없었거든요-”
“진짜 독하지 않아요?”
“네?”
“새 언니요, 갑자기 사라졌다고요.
‘미안합니다’ 이렇게 다섯글자만 써놓고는 어떻게 그래요.”
율희의 말에 현수의 고개가 애매모호한 긍정의 표시를 한다.
독하다는 표현보다는 제멋대로라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자신이 알던 한선배는 늘 자신이 하고싶은대로 하고 남의 묵혀둔 상처를 콕콕 찔러서 맘대로
터트려버리던 제멋대로인 선배였다.
하지만 독하다는 표현을 할 만큼 못되먹은 성격은 아니였는데다, 알고 보면 타인의 생각도
늘 해주고 있어서 인정하긴 싫지만 고마운 선배였다.
헌데 결혼한지 1년만에 소리없이 사라져서 시누이란 사람이 찾아다니는 상황이라....
“그런데 남편분은요?”
“네?”
“한선배 남편 되시는 분은 어디가시고,
시누이씨 아니 채율희씨가 한선배를 찾나요?”
“오빠는...........”
현수의 물음에 율희의 표정이 이상한 오로라를 풍긴다.
갑자기 호기심으로 가득찬 눈빛을 보이며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던 율희는 그 시선을 현수에게
그대로 옮기더니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현수에게 묻는다.
“그러게 오빠는 뭐할까요?
왜 아무것도 안하는 거죠?”
“네?”
갑작스런 율희의 물음에 잠시 회로가 정지했던 현수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미치겠다-’
라는 네글자가 세겨진다.
정작 마주앉은 율희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좋지 않아요-”
“...........?”
현수의 말에 혼자서 말도 안되는 고민을 하던 율희의 시선이 다시금 정면을 향한다.
꽤나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현수의 시선에 율희는 왠지모르게 굳어서는 마주한
현수의 다음 말을 진지하게 기다린다.
“채율희씨가 이러는 것은 좋지않아요.
작정하고 숨어버린 사람을
이유도 알지못하는 제 3자가 찾아돌아다니는건,
사라진 사람에게도, 잃은 사람에게도 좋지 않아요-”
“하지만....”
“조금은 기다려주세요.
세상엔 꼭 본인들이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란 것이 있으니깐요.”
“........그래도”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현수의 모습이 당황스러운지
율희도 엉겁결에 일어서 밖으로 향한다.
사실 무엇을 얻으려고 찾아온 곳은 아니었다.
단지 새언니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보려 온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충고를 들어버렸다.
“아.....”
“진짜..”
카페에서 나온 두사람 앞으로 시원스레 비가 쏟아진다.
그렇게 상쾌한 햇살이었는데 잠깐사이에 이렇게 비가 쏟아지다니 하늘도 영 제정신이
아닌듯 싶다.
아님 어제를 기점으로 현수의 인생에 엄청난 불운의 기운이 스며들었거나..
“이거 쓰고 가세요-”
자신 앞으로 내민 현수의 우산에 율희의 시선이 의아한 빛을 띤다.
[개업기념]이라는 작은 글씨가 새겨진 우산은 받은지 얼마 안된듯 비닐포장까지 그대로이다.
카키색의 삼단우산을 멍하니 보고있으니 현수가 우산을 율희의 손에 쥐어주고는 빗속으로 뛰어든다.
거절한 타이밍을 묘하게 놓친 율희의 시선이 현수를 쫓지만 빗속으로 뛰어든 현수는 용기있게도
왠 여자의 우산 속으로 들어간다.
“뭐야..저 사람?
나 차 가지고 왔는데-”
꼭 쥐어진 삼단우산을 괜스레 꼼꼼히 살피던 율희의 입가가 말려올라간다.
“왠 여자냐?
너 의외로 바람둥이구나.”
지나가다 발견한 여자와 단둘이 있던 현수의 모습이 궁금해 숨는다고 숨어 지켜봤는데,
언제 알아 챈건지 옆에 있던 여자에게 우산을 주고는 당연한 듯 자신의 우산으로 뛰어든 현수를 향해 시혜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낸다.
“한선배 시누이래.”
“엉?”
“한지나 선배 시누이.”
“지나언니 시누이가 왜?”
“한선배 집 나갔단다.”
“뭐!!!”
“사라졌데. [미안합니다] 다섯 글자 남기고.”
자신의 말에 굳어버린 시혜를 향해 인사를 건넨 현수는 회사로 들어간다.
왠지 엄청나게 길어진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제 있었던 다영의 결혼식이었다던가, 때문에 마셨던 술기운들은 모두 꽤 오래 전일처럼
흘러간 느낌이다.
.
.
[♩♬♪♪♩♬♩♪]
편의점의 선반을 샅샅히 살피며 이것 저것 체크하던 시혜는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자신도 당황한 듯 어깨를 들썩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벨소리를 무시한다.
귀에 잘 박히는 이유로 유난히 시끄러운 벨소리를 선택한 탓에 그리 크지 않은 편의점
한가득 시혜의 벨소리가 가득찬다.
“저기 시끄러운데요-”
“제가 더 하거든요-”
“네?”
“너! 신혼여행 갔으면 니 남편이랑 놀아!”
참을인 자를 그리며 겨우 부드럽게 말한 준서를 향해 짜증을 부린 시혜는 급기야
핸드폰 저편의 상대에게도 양껏 소리를 지르며 멋대로 끊어버린다.
도대체가 자신이 몇 년 외국에 나가있던 사이 대한민국 여자들이 하나같이 이상해졌다는
생각에 준서의 고개가 절로 도리질을 친다.
“손님 뭐 필요한거라도?”
“내 기억력이요.
진짜 다 까먹어 버렸잖아.”
알바생이 영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시혜에게 다가가 굳이 도움을 주려 하지만
시혜는 그런 친절조차 받을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알바생에게도 짜증이다.
준서의 눈에 비친 시혜의 뒤로 위험수위 100%가 적힌 해골이 빨갛게 반짝이고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한마디만 더하면 꽤 재미난 광경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휴우.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찾는 물건이 없네요.
그리고 그쪽 시끄럽게해서 죄송해요-”
혼자서 차오르는 열을 꾹꾹 정리하던 시혜는 어차피 글러먹은 일이라 생각한 듯
앞의 두 사람에게 조용히 사과를 건넨다.
미스테리 샤퍼로 꽤 오랜시간 일을 해왔지만, 근무시간에 핸드폰을 켜두는 맹한 짓을 한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 누구 탓도 아니고 다 자신의 탓이다.
아니 조금 남 탓을 하자면 결혼 1년 만에 가출소식을 들려준 지나 언니 탓이다.
“결혼한 아줌마가 가출을 왜 하냐고,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편의점 밖으로 향하는 시혜의 중얼거림이 준서의 귀로 똑똑히 들어온다.
저 여자가 아는 여자도 결혼한 뒤 가출을 한듯하다.
겨우 외국에 나간지 3년만에 대한민국이 많이 변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버라이어티하고 시끄러워졌고, 아줌마들은 다들 집을 나갔다.
“3년...........그렇게 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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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