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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 9:6-15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8장과 9장에 걸쳐서 연보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그 마지막 부분이 되겠는데요, 헌금이나 연보에 대하여 강론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연보는 돈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은혜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임을 먼저 말씀드리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본문 시작부터 오해할 만한 내용이 있어서입니다.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이 말씀은 많이 바치면 많이 받는다는 뜻일까요? 세상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런 뜻이냐는 말입니다.
잠언을 한번 봅시다.
(잠 11장)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 19장)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이 말씀들은 단순히 좋은 일을 하는 데 돈을 아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건 다 그리스도의 연보, 그리스도라는 연보를 말합니다. 성경은 열심히 돈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딤전 6장)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어마무시한 말씀이지요. 한 군데 더 봅시다.
(약 5장)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재물이 너희를 좀먹는다는 이야기예요.
이런데도 이런 말씀을 이용해서 많이 바친 만큼 물질 복도 넘치게 받는다고 사기 치는 자들이 오늘날 강단에 서 있는 종교 기술자입니다.
본문에서 적게 거두고 많이 거둔다는 말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세상 것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닌 거에요. 세상 것으로 심어서 하늘의 것, 영적인 것으로 수확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자 록펠러는 아예 회계사까지 따로 두고 십일조를 계산했다고 하잖아요. 왜 그랬겠어요? 십일조를 하는 만큼 많이 부어주신다고 하니까. 그러나 그런건 하나님과 거래하자는 것이지 믿음의 행함이 아니에요.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밖에 모르지만,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성도예요. 이 말은 세상 것에 집착하거나 갇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 나라에 갈 때는 아무것도 못 가져갑니다. 세상 힘,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영생이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똑똑한 것 같지만, 사실 인간만큼 어리석은 존재가 없어요. 지난주에 설교를 들으신 분은 알겠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고 합니다. 심지어 성경은 모든 소유를 팔아 지혜를 사라고 합니다.
(계 3장)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벧전 1장)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은 자는 다 가련한 자, 벌거벗은 자, 눈먼 자,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눈먼 자, 어리석은 자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 하시는 말씀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걸 되새기면서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연보를 하는데요, 이 연보를 사도에게 주었다고 해요. 고린도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연보한 게 아니에요.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연보를 거둔 주체가 누구입니까? 연보를 하게 시킨 주체가 누구예요? 그건 바울이 아니라 주님이 시키신 연보예요. 그리고 그 연보를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십니다. 어떤 일에?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뭐예요? 복음 전파, 복음을 나누는 일이죠. 다시 말하면 연보를 거두는 과정을 통해서 연보를 하는 사람이나 연보를 받는 사람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하는 용도로서 연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궁핍한 사람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게 연보의 목적이 아니에요.
주님은 연보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 연보가 어떤 하나님의 일, 은혜의 일에 참여된 것인지를 너희가 알고 있는 거야?” “그리스도의 연보에 함께 참여되는 게 무슨 뜻인지를 알고 있니?” 이것을 물으십니다. 주님이 연보를 거두는 주체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연보라는 형식을 통해서 너희가 믿은 안에 있는지 그것을 물으시는 거예요. 어떤 믿음? 고린도후서 마지막에 나오는 그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고린도후서가 이렇게 마치거든요. 그리스도의 그 약하심 안에 있는지, 그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럼,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면, 그분과 우리가 연합되었다면 우리 인생도 그분이 사셨던 것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부요를 가진 자로서 세상을 통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약하심을 우리도 똑같이 체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건 이 세상 힘으로, 권력으로, 부로 자신을 지키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는 전부 자기 정당성, 자기 안정성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아닌 ‘주’가 계세요. 그 주님이 우리 인생을 사신다니까요. 이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에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시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고 낮아지시므로 십자가에서 아버지와의 약속을 다 이루신 것 같이 너희도 그분 안에서 스스로 약함을, 낮아짐을 보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 힘과 물질 권력이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 그 언약의 피가 나를 살렸음을 믿는 믿음이 너희에게 있다면 그 복음에 참여된 기쁨과 감사로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연보를 하라는 말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돈을 내는 게 (어떤 교회는 회비로 낸다고 하던데) 아니란 말입니다. 먼저 전제되는 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행하심과 낮아지심과 가난하게 되심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해요. 그것이 없이 내는 건 그냥 보험료를 내는 것과 같아요.
나의 약함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가난에 연합된 성도의 착한 일이라는 게 5절부터 9절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아주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고후 12장)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어떤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까? 약한 것, 능욕, 궁핍, 가난, 박해, 곤고를 통해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능력만, 십자가만 꼭 붙들게 되기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서 동일한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나는 나의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한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지만, 성도는 내가 약할 때, 고난에 처해 있을 때 그 낮아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 꼭 붙들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는 거예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나는 돈으로 살지 않고 세상 힘으로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으로서 연보를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 항상, 모든 것에 항상 착한 일이 넘쳐난다.. 한 단어로 표현하면 ‘충만’입니다. 이 말씀이 성경 처음 부분에 나옵니다.
(창 1장)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게 모든 것, 모든 일, 충만입니다.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토브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 좋은 것, 다른 말로 그 착한 일이 무엇인지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새 창조의 일을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번 여름 캠프에서 하게 될 빌립보서 봅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고, 또 하나님이 시작하신 착한 일이 뭔지를 바울 사도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 1장)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 착한 일이에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치시는 착한 일입니다. 그게 뭐라고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6절의 이 착한 일이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언어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그 ‘토브’가 가리키는 게 바로 그리스도의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아들들,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 왜 그리스도 예수의 날입니까? 모든 창조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있고 그에게로 돌아가는 창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 착한 일을 하나님께서 넘치게 하실 것인데, 그 일에 너희가 참여된 것 중 하나가 연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그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착한 일로 넘치는 충만을 너희가 알아야 하고 누려야 하고 또 하나님이 수확하실 열매로서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늘 강론 제목이 ‘착한 일’인데요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착한 일을 다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우리가 그 일에 협조하거나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그 착한 일의 결과물, 즉 열매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에요. 그리스도라는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두시는 의의 열매들로써 여러분입니다. 10절에 나오는 그 의의 열매가 바로 여러분 자신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시고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열매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신부 된 교회로서 여러분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하나님의 씨, 하나님의 약속이 심긴 사람들이에요. 그 씨는 창세 전에 여러분에게 심기었어요. 그 심긴 약속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된 복 있는 자들, 산상수훈에 나오는 그 복 있는 자들로 여러분을 완성시켜 나가시는 게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그 복 있는 자의 믿음의 행함을 보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자기가 심고 자기가 거두시는 그 수확물을 보시면서 기뻐하신단 말입니다.
또한 우리를 그 기쁨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연보가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5절에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 그의 선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11절에서 15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의 특권이며 자랑이며 부요함이라는 게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권면이에요. 너희는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니까 세상과는 다른, 세상과 구별된 교회니까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세상을 향해 생존이 아닌 생명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본무다. 그렇게 생명의 빛을 비추고 그 생명으로 인해서 약함과 능욕과 가난과 핍박과 고난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자들로서 교회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변질되고 뒤틀려진 기독교와는 너무도 다른 이야기죠? 오늘날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 것들을 축적해서 고지에 오르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축복이고 영광이라고 하잖아요. 어떻게 이렇게도 다를 수 있습니까? 세상 영광 그런 것들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단이 주는 거예요. 그걸 축복으로 속여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축복은 없어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져서 못 박혀 죽으시면 안 되죠. 그때도 많은 유혹이 있었어요.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을 불러서 이 나쁜 놈들 싹 쓸어버릴 수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걸 안 하셨다니까요.
이렇게 자신의 약함,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자들은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들에게는 세상에 없는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충만에 함께하므로 그 충만, 그 생명의 빛을 세상에 나타내라. 그것이 세상과의 구별이며 교회의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그 충만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충만한 기쁨이 에베소서 1장에 나옵니다.
(엡 1장)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 충만이에요. 교회는, 성도는 그의 몸이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다. 이 충만을 알라는 거예요.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 스스로 충만치 아니하기로 하신 그 충만입니다. 이 넘치는 충만을 안다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충만임을 안다면 우리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 인생살이, 세상살이 좀 불편하게 살아도 괜찮아요. 그리스도의 충만을 안다면.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과 감사는 하나로 모아집니다. ‘저에게는 주님이 전부입니다. 저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게 성도의 동일한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 이런 찬송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도는 그냥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아니에요.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여자예요. 그래서 성도냐 아니냐의 구분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지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 높은 자리에 있고 낮은 자리에 있고,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운 그런 차이가 아니에요.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로만 나뉩니다. 하나님은 그것만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죽은 흙들이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대부분 신학교에서 지옥을 부정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지으신 피조물을 어떻게 영원토록 지옥에서 불사를 수 있느냐는 거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그냥 우리더러 착하게 살라고 하시는 경고의 말씀일 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지옥에 가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은 가고 싶어도 못 가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있는 곳은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그럼, 지옥엘 가는 사람은? 악한 말, 거짓된 말, 옛 뱀의 말에 결합되어 그 옛 뱀과 함께 지옥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지옥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나타난 곳으로 지옥이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완성되는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게 바로 그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시죠. 고린도후서 4장에서, 골로새서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있음, 존재가 돼요.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아담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찬송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심이라(엡 1:6)..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사랑하시는 자 누구? 예수 그리스도.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능력에 따라서 주시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선택만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그 은혜를 영원토록 기뻐하고 찬송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라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가르치시려고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거예요. 교회(에클레시아)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러므로 교회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그 이름이 삭제되고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예요. 세상 사람들은 알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는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모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 전제되는 건 사람의 이름에 대한 부정이에요. 그게 삭제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모두 누구를 보고 모입니까? 이름 있는 목사 보고, 아니면 교회 보고 모이죠. 오래된 교회, 전통이 있는 교회, 큰 교회.. 그거 아닌 거예요.
여러분은 다 작은 예수들이에요. 예수가 교회를 낳고 교회가 예수를 낳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세상과 피로 경계지어진 거룩한 영역으로서 교회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피 뿌림을 얻은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사도가 편지를 하고 있음을 안다면 이 모든 성경 말씀이 새롭게 보이고 들리게 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모든 성경 말씀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든 종교인이 오해하라고 주어진 말씀이에요. 몰라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다들 자기가 믿고 싶은 예수를 믿으라고 내어버려 두신 거예요. 그래서 성경 말씀을 자기 구원을 위한 경전으로 삼거나, 이 말씀들을 깨달아서 나의 진리로 소유하겠다는 그런 종교성, 그런 열심을 성경이 탐심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창세 전 하나님의 약속, 그리스도라는 그 약속 안에 있는 자들은 인생을 아무리 방탕하게 살아도, 십자가 옆 강도처럼 평생 강도짓을 해도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주께서 다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있음보다 그 약속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 약속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아들의 피, 아들의 죽음이라는 그 약속은 결코 헛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시는 그것을 믿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어요? 말씀을 믿는 거예요. 이 말씀이 하나님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태초에 계신 그 말씀... 그래서 창세 전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자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들,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신 자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주되심, 십자가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다 이루신 그 주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시구나..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나의 신랑이시구나.. 나의 시작이요 완성이시구나.. 그분이 나의 충만이시구나. 나는 주님만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당신의 사람 맞습니다 라는 이런 고백.
그래서 그들 외에는, 약속이 심긴 그들 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몰라야 하는 거예요. 그분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고 학습할 수 있고 그분을 섬길 수는 있는데, 그분과의 관계는 가지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다들 자기 이름으로 사는 자들, 예수와 관계를 가지지 못한 자들, 그 믿음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이 교회나 사람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종교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세계는 사람의 선택으로 의지로 얼마든지 가능한 세계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교가 있습니까?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심지어 라일리안, 사이언톨로지교도 있지요. 미국 영화배우 톰 크루즈가 믿는 종교. 외계인, UFO가 지구에 찾아와서 인간들을 개량했다고 해요.
이렇게 세상 종교의 세계는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골라 믿으면 돼요. 내가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 종교의 세계죠. 그들에게는 주가 계시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주니까. 그래서 내가 믿은 것에 대해서 책임도 내가 져야 해요. 성경은 그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신을 믿도록 내어버려 두시는 게 심판이에요. 각자의 탐심에 따른 심판. 그래서 그 세계는 아무리 기어올라도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세계입니다. 나를 위한 구원, 나로 말미암는 구원 그 끝은 심판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에 복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내가 찾아 올라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나를 찾아오신 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그들 성도에게는 구원까지도 주를 위한 구원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구원이 아니에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겁니다(롬14:8) 나에게는 구원받을 의나 착함이 전혀 없는데 나의 어떠함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선택으로 나에게 영생이 주어진 그게 바로 기쁜 소식으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내시면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천사와 화염검으로 막아버리셨어요. 그래서 인간들의 어떤 열심, 선행, 종교 행위로도 그 길은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바벨을 쌓아도 하늘에 닿을 수 없어요. 한 마디로 구원 불가능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구원은 불가능입니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차단된 생명나무가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게 바로 구원이에요. 우리가 생명나무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생명나무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생명나무인 그분이 우리에게 길로 찾아오셔서 어느 날 보니 내가 그 길 위에 있다는 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구원은 인간들의 모든 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실행되는 구원입니다. 우리의 어떤 종교 행위, 깨달음, 헌신도 다 부정하면서 주어지는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신 목적이 바로 그거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가 지키지 못할 율법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했죠. 그런데 그 결과는 율법을 온전케 하러 오신 예수를 살해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게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고. 죄를 깨닫고 그 율법을 온전하게 하신 그분께로 가게 하는 가정 교사라고 해요. 그 일을 위해 죄와 사망까지도 동원되는 것입니다 (롬5:12-14)
이렇게 우리의 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실행되는 구원, 오직 하나님 아들의 죽음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이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모든 입을 막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게 로마서의 대주제예요. 은혜의 복음, 십자가 복음이란 말입니다.
(롬 3장)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이 몸은 율법의 몸, 선악이 장착된 몸이에요.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은 너희가 얼마나 구원 불가능한 자인가를 알라고 주신 게 바로 율법의 용도라는 뜻입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의, 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종교인은 자기가 부정되고 자기 가능성이 부정되는 그 복음을 싫어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다 싫어해요. 우리는 본성적으로 나의 가능성, 나의 존재가 부정되는 십자가 이야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살해할 만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끝까지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잖아요 (롬1:17) 그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착한 일이라는 게 오늘 본문 말씀이에요. 본문에서 말하는 의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연보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게 바로 사도의 성도에 대한 사랑이고 직무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의 그 직무입니다.
이렇게 복음으로 인한 오해와 핍박과 궁핍까지도 성도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직무임을 사도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런 성도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저 어리석은 놈, 쓰레기 같은 놈, 세상에 없어도 되는 것들, 미말에 끌려가는 패잔병이라고 하죠.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신 그 큰 선물, 그 생명의 은사로 인해서 자기 것이 다 털리고 목숨까지 빼앗겨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기뻐하고 찬송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모두 그 이야기예요.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는 인생이 전부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들은 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다가 간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새 예루살렘성.
(히 11장)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하죠?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이에요 그냥 죽음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죽는 그 죽음, 바꾸어 말하면 진리의 죽음, 약속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 죽음에 연합되었기에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어요. 죄의 삯으로 인한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치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 안에 부활의 생명도 같이 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섰느니라
이렇게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나그네로 살게 된 자들이 성도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 것들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인생을 가볍게 살다가 가도록 주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며 보듬으시고, 그들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그들이 이 세상에 뿌리내리는 것들을 잘라내시고, 이 세상에 세운 집들을 허무시면서 그들의 눈과 마음을 하늘 본향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소망이 없으면 예수 믿는 자들이 가장 불쌍하다고 바울이 말하잖아요.
그렇게 본향 찾는 자들로 이 광야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돌보심이고 성실하신 다스리심입니다. 그런데 그 돌보심이 많이 아파요. 우리 본성에 거스르는 돌보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피하고 싶지만, 그 돌보심이 없으면 사생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 전체는 하나님이 그 성도들을 양육하시는 시험관이에요. 그게 세상이 끝까지 세상으로 있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구원 불가능한 죄인으로 태어났어요. 예수를 믿어도 내가 잘되게 해주는 예수, 나를 긍정해 주는 예수, 내 구원에 디딤돌이 되는 교회에서 내 주체성과 가능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되는 설교를 듣고 싶은데 강 장로는 입만 열면 십자가 피 이야기만 하니까 우리 교회에 찾아온 사람들도 다 쫓아내어 버리고 변태들만 남은 교회가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죄인의 괴수들이 모인 모임이거든요. 바울의 서신서들이 뒤로 갈수록 내가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했던 바울이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했다가 젤 마지막에는 죄인의 괴수라고 하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그 사랑의 높이와 길이와 넓이가 너무 커서 그것을 알면 알수록 자기는 자꾸 작아지는 거예요. 먼지처럼 없음의 자리, 처음 자리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양육이에요. 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양육 아래 있는 교회입니다.
참 역설적이지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 모인 자들이 다들 어떤 자들이에요? 자기 의라고는 1도 찾을 수 없는 자들이죠.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천시 여기던 창녀, 세리, 귀신 들린 자, 문둥병자, 손 하나 까딱 못하는 38년 된 병자 등.. 그런데 그들만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만 의지하고 꼭 붙들었다니까요. 그들을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구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어떤 행위도 안 보세요. 그들의 죄를 간과하셨다고 하고(롬 3:25) 구약에서는 우리의 죄를 등 뒤로 던지셨다고 합니다.(사 38:17) 놀랍죠? 안 보신단 말이에요. 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있기도 전에 약속하신 아들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피가 우리의 거룩함이고 우리의 의고 우리의 착함이에요. 그 하나님의 의를 안다면 너희에게서 반드시 그 착함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모든 착한 일이 넘쳐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그리스도라는 보배가 담긴 질그릇으로 이 세상 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바로 그 질그릇이에요. 그리고 그 질그릇은 보배만 남기고 깨어져야 하는 질그릇입니다.
그리고 그 그릇들은 용량이 한정되어 있지요. 그러나 그 그릇에 부어지는 은혜는 한정 없는 은혜예요. 넘쳐나는 은혜란 말입니다. 양동이에 물이 부어지듯이 끊임없이 그 은혜로 인해서 여러분의 인생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수, 광야 이스라엘을 따라다녔던 그 반석으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수.. 그리고 그 생명수를 마시는 자마다 이 세상을 별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수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 우물을 찾지 않는단 말입니다. 물동이 던지고 뛰어나간 사마리아 여인처럼.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는 세상 우물을 버리고 우리 주가 계시는 아버지 집, 본향을 바라보게 된 자들에게 솟아나는 생명수, 그들이 복 있는 자입니다. 그들만 이 세상 것들로 소유를 삼지 않고 이 세상과 이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하늘의 것으로 차고 넘쳐서 더 이상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나눌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연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 된 자들,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들로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그리스도의 것이 된 그 행복, 평안과 자유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연보라는 것을 사도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종교의 세계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종교의 세계입니다. 여러분, 경치 좋은 산이나 계곡에 가면 눈에 띄는 큰 바위에 사람 이름들을 새겨놓은 걸 보잖아요. 튼튼하고 영원할 것 같은 그런 곳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이유가 뭘까요? 그게 자기 안정화 작업입니다. 그게 종교의 세계예요.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 건축 헌금 하고 절에 연등 달고 기와 불사하고 하는 것이 다 그런 거예요.
얼마전에 복음 안다는 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유아 세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가톨릭에서 나온 거거든요. 부모가 갓난아이를 세례라는 명목으로 교회에 등록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세례 주고 교회 등록시키면 그 애들이 커서 예수를 믿습니까? 복음을 안다는 목사가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죠. 그건 결국 복음보다 교회 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증거예요. 부모가 왜 아이의 신앙을 결정합니까? 아이가 자기 거예요? 여러분, 자식들 키워보니 어때요? 머리 조금 커면 말 안 듣잖아요. 유아세례하는 거나 옛날에 할머니들이 장독간에 정화수 떠 놓고 자식들 이름을 부르면서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냔 말이에요. 다만 그 기도가 기독교 멘트로 바뀌었을 뿐이죠. 결국 그런 게 모두 자기 안정화 작업이에요. 자식이 곧 나니까요. 왜 부모가 그런 종교의식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끼어들려고 합니까? 자식이 자기 것인 양. 내가 낳았다고 해서 내 자식이 아니잖아요. 모든 만물이 다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서 있어요. 강씨, 김씨, 이씨 그런 족보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있지 않으면 끝이에요. 그래서 어떤 목사는 태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하던데...
이 유아 세례 때문에 기독교 역사상 수천 명이 죽었어요. 재세례파라고 들어봤습니까? 가톨릭에서 유아 때 부모가 세례 주는 거 소용없고 나중에 자기 믿음으로 세례받아야 한다고 했다고 해서 교회가 그들을 물에 빠트려서 죽여버렸어요. 참 비참한 역사입니다. 너희들 물 좋아하니까 물에 빠트려준다고 하면서 수천 명을 수장해서 죽였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앞에는 두 사람만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 땅에 인자로 오신 예수 이렇게 두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자로 오신 예수님만 사람으로 인정하세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만 사람이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물 뿌리고 세례받았다고 해서 예수사람이 되는 게 아니에요. 예전 군대에서는 한 명 한 명 세례를 못 주니까 호수로 물을 뿌렸어요. 그런데도 훈련소서 초코파이 얻어먹으려고 교회 갔다니까요.
그런 게 아니죠.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되려면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야 하는데 그 옮겨짐이 우리 선택이나 우리의 능력이 아님을 차츰 알게 되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이에요. 그 옮겨짐은 목사나 교회나 부모가 해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은혜를 입은 자예요. 은혜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모든 가능성과 의와 착함을 부정하는 은혜에요. 온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다들 왕이 되고 용사가 되고 네피림이 되어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살해하려는 이 악한 세대에서 창세기 6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왜 세상이 심판당해야 하는가 하는 심판의 당위성을 노아는 120년간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으면서 배웠어요. 그게 은혜 입은 자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 그리스도 예수라는 방주 안에서 죄의 홍수로부터 자기를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에요. 바울이 그렇게 모든 서신서에서 강조한 그리스도 안(엔 크리스토스)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선택으로서 그리스도 안이에요. 죄의 홍수가 넘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 그 복음의 자유를 누리게 된 성도들만 시인하고 고백하고 그 이름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피로 구별된 영역으로 그리스도 안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그 선악의 몸, 율법의 몸으로 일평생 복음을 훼방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다가 아담을 유혹했던 사단과 함께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아니에요. 뱀과 결합된 죽은 흙들입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종교의 세계죠. 오늘날 하나님의 원수가 된 세상 교회들이그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지옥에서 이를 간다고 하잖아요. 왜 이를 갑니까? 그들도 착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자기 의, 자기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헌금도 많이 하고 십일조 하고 주일 성수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이천억짜리 예배당도 지어 바치고.. 그런데 왜 나를 모른 체합니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부자가 던져주는 것만 먹고 살았던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있는데 왜 나한테는 이러십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한 마디로 ‘왜 나는 아닌데?’.. 이게 지옥에서 이를 가는 자들이에요. 이게 가인의 하나님 살해 의지입니다.
‘왜 나는 아닌데요’ 가 가장 먼저 나온 게 가인이죠. 가인 속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 살해 의지가 아벨 살인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둘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하나님 한 분만 계셔야 해요. 그런데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된 자들이 있기 때문에 틈만 나면 안에 감추어졌던 죄성이 발작해요. 내 제사를 안 받아주는 건 하나님이 아니야. 하면서 그 하나님을 죽이고 싶던 살해 의지가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죽인 거예요. 그래서 지옥에서 영원토록 이를 가는 자들, 그들이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어요. 그건 피조물은 자기 목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자기 존재 의미를 스스로 챙겨 가질 수가 없어요. 그러나 뱀의 말에 속아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생긴 게 하나님과 별개의 ‘나’라는 자아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이라는 탐심과 교만입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아담은 자기 인생, 자기 목적, 자기 존재 의미 찾기에 일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죄성이 바로 그거예요.
그렇게 자기 목적을 가진 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각종 방법론을 개발해 주는 게 바로 종교이며, 그 배후에 세상 신 사단이 있습니다. 그렇게 거짓되고 악한 사단의 말에 결합된 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일, 복음의 일에 불려 나온 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큰 성 바벨론 길가로 쫓아내는 게 바로 오늘의 악한 세대, 악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죽임당하고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인 교회는 종말의 심판의 증인으로 그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로 큰 성 길가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 카페에 보면 ‘광야의 소리’라는 코너가 있잖아요. 그거 이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닙니다. 내일 모레 7월 7일부터는 방통법이 생겨서 말 함부로 하면 큰일나요. 최고 벌금이 10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진짜 가짜 판단의 주체가 세상 정부라는 게 문제지요. 입틀막 법, 앞으로 무당 잡교가 된 기독교도 종교권력도 부패한 교회도 목사도 함부로 비판 못합니다. 고소 당하면 패가망신 시킨다고 하니까...그런데 광야의 소리는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어떤 반향이 없고 협박과 억압만 있어도 부득불 할 수밖에 없어요. 구약 선지자들이 그랬고 광야의 세례 요한이 그랬지요 그 목이 쟁반에 담길 때까지... 그러므로 광야의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 곧 돈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로써 연보를 나누는 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씨 심는 일과 그 열매로 인해서 신령한 복과 넘치는 은혜의 선물을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이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빕니다.
끝으로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함께 읽고 강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후 9장)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착한 일, 그 엄청난 은혜의 일에 참여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를 증거하고 함께 나누며 그 예수와 십자가만 자랑하는 복된 교회로 저희를 지켜주시고 자라나게 하시고 그 은혜와 그 사랑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부요한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또 우리는 세상에 나갈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 말씀이 고갈된 마지막 때에 값없이 생명수를 나누어주는 그런 복음의 일꾼들 다 되게 하시고 이 세상 소유가 다 털려 나가도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면서 사도처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물게 됨이라는 그 기쁨, 그 감사가 우리에게 넘쳐나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나누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으로 부요하며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런 보배가 담긴 질그릇의 찬송으로 넘쳐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