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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하얀 고양이가 같이 산다.
나는 요즘 고양이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너는 왜 고양이로 태어났는가? " 라는 생각을 하곤한다.
머리도 달렸고, 손발로 구분은 안되지만 네 발이 있다. 가끔 사람처럼 일어서서 무얼 할려고도 한다, 마치도 강아지가 뒷다리로 일어서듯이...
무척 영리해서 눈치도 빠르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 흥미가 없으면 아무리 놀려대도 놀지를 않는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 건강을 위해서 인지 버릇인지 모르지만, 응접실을 온통 휘젓고 돌아다니거나, 고양이 요가같은 것을 하곤한다.
생물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머리가 달리고 먹으면 배설을 하고, 그리고 무언가 감각을 가지고 행동하고, 그리고 지력이 있어서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잠도 자고 잠을 잘때는 꿈도 꾸는 것 같다. 자면서 꿈틀대는 모양이 사람과 비슷하다.
또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모든 생물은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자신의 DNA, 즉 유전자를 발전시키는 것 같다.
그것이 진화라고 하든지 아니면 용불용설에 의한 발전인지, 아니면 환경적 영향에 적응하기 위한 발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슨 지향점을 가지고 발전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인간 중심적 생각으로, 모든 생물이 인간을 따라 모방 발전한다?
글쎄? 그럴까?
지능은 분명 인간이 우위이다.
하지만 수명이나 삶의 형태는 인간보다 더욱 하늘이라는 자연과 더가깝게 우수한 생물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북이는 인간보다 더 오래사는 거북이도 있다고 한다,
고래도 더 자연스런 생태를 유지하면서 산다.
그러나 인간은, 내가 거울을 들여다 보아도 깊은 산중에 수도처로 들어가서 도를 더 닦아야 거북이나 고래와 같이 자연과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인간이라는 종이다.
인간들끼리 인간 사회를 이루고 사니까,그래서 인간을 더 좋아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간끼리 인간들 사회 속에서 사니까.
하진만 모든 생물이 인간과 같은 지능이나 외관 형태로 발전하지는 아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쨋든 생물들은 그 나름대로 어떤 지향을 가지고 발전 혹은 진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떤 것은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고, 어떤 것은 뿌리로만 종족을 번성시키고, 어떤 것은 가지만 꺾어서 땅에 묻히면 번성하고....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요즘 로봇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줄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로봇이 지능을 가지리라고 예측한다. 인간보다 더 고도의 지능도 가지리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아마도 인간과 같이 창조적 지능도 가지리라고 상상도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어떨가?
이 우주에 생물이 아니라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이 있다면?
그러니까 지능이 있는 물질이 어떤 우주 공간을 운용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이 지금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빅뱅이니, 블랙홀이니하는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주에는 많은 법칙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빅뱅이고 블랙홀이고 성운의 움직임이고, 별들의 궤도이고 ....
이러한 생각을 하면 참으로 인간이 대수럽지 않은 존재이다 라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우주의 수많은 법칙중의 하나일 뿐이다는 것이다.
태어나고 살다가 죽고 다시 물질로 돌아가고, 그리고 살면서 무엇인가 우주를 인식하면서 깨닫고...
그런데 지능이 인간보다 더 우수하고 인간보다 더 아름다운 생각과 지능을 갖고 있는 물질이 있다면?
생물체가 아닌 그 물질로 구성된 지능체의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로봇일까? 지능을 지닌 우주인일까?
아마도 내 상상이 너무 허구일까?
인간이라는 생명을 갖고 있는 종보다도 더 아름다운 생각과 지능을 갖고 있는 물질이 있다면 어떤 생각과 지능을 갖고 어떤 세상을 만들고 어떤 사회를 구성하고 존재할까?
내 생각이라는게 거기서 거기이니 별 뾰족한 생각의 범주야 있겠는가?
나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그 삶을 중심에 놓고 실행하려고 노력하며 사는 한 인간이다. 그러니까 예수쟁이 그리스도인이다. 그 행위나 생각이 조잡하고 미덥지 못할 지라도 내 자신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예수를 닮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닮고싶은, 예수 주 하느님이라는 우주안의 종이고져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그리고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
요즘 대통령 선거철이다.
오늘 야당 인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로 문재인씨가 선출 되었다.
그리고 여당에서는 벌써 박근혜씨가 대선 후보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또 한 사람 국민의 99% 희망을 안고 있는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원 원장인 안철수씨가 있다. 물론 아직 대선 출마 여부를 의사표시로 안하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3자가 상호 비방없이 국민을 위한 정책대결로 치열하게 겨루기를 바래본다.
오늘 한겨레 신문에, 토요일판으로 나온 신문에서 남의 일,남의 나라일이 아닌 듯한 기사가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사람 일 이기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많은 걱정과 우려를 갖는 기사이기에 옮겨본다. 사람이란 그 종으로서의 DNA가 대동소이 하다는 생각이들면 똑같거나 비슷한 사건이 있으면,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와 비슷한 사례가 있어서 걱정과 우려와 진정성 측면에서, 동일 사건에서 벌어진 같은 생각이 아닌 다른 새로운 생각의 범주에 드는 대한민국이 되길 빌면서...
그러나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를 이번 대선에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러한 외국의 사례를 들어서 쌩뚱맞는 듯한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역사는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이고, 미래는 미래이다는 이론은 자기편리적인 역사이론, 역사해석이다. 역사는 과거,현재, 미래가 이어져있고 과거는 역사의 거울이라고 한다.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잘못을 고치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지난 이차대전 후 독일과 일본의 역사적 처리와 그에 대한 지금의 독일과 일본의 역사적 시각을 비교해 보면 명확해진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인식조차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하는 사람의 의지를 어떻게 미래에 대한 약속을 믿겠는가? 그 사람의 머릿 속에는 딴 생각만이 가득차 있는데...
요즘 일요일마다 과거 역사를 바라보자는 역대 대통령들 얘기(대통령의 그날 특집다큐 3부 중 2부)가 어느 TV에서 방영하고 있다. 다음 주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얘기가 진행 될 것으로 본다. 지난 어제는 과거의 역대 대통령에 대해 화면이 나오는데,
앞쪽은 내가 보지 못해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화면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한심했다.
5.18 민중항쟁에서 수천명의 살인을 하고 정권을 잡은 사람이 경제를 잘 했다고 칭찬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경선을 출마하려 했던 정몽준의원이 발언했듯이 국민을 "행복한 돼지"로 보는 시각이 그 화면에 대한 해석에 적당하지 않을까?
또 한가지 흑백화면으로써 과거의 박정희 치정에 대한 애착이 심하게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심리적 요인을 생각해 본다.
또 한가지 그렇다면, 이제 과거의 역사에 살인으로, 쿠테타로 , 독재로 역사를 날치기한 사람들의 자식들이 또 다른 대통령으로 나서겠다면 우리의 역사는 계속 독재자들의 후손이 대통령해보겠다는 역사인가?
내가 너무나 해석이 과했는가?
어제의 TV화면을 보면서 나는 이러한 생각에 언론인들이 말하는 과거의 역사와의 단절을 읽었다.
과거와 단절된 현재와 미래의 역사가 제대로 된 역사인가?
이러한 생각에 가득한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된 후 치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한가지다. 자신의 아버지 밑에서 보고 듣고 배운대로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걱정 가득한 생각으로 중국의 경제역사 속에서 받아들인 자본제국주의 경제변화의 과정에서 나온 전체주의자의 얘기가 생각이 났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를 이번 대선에 들이대지마라!
흑묘는 흑묘이고, 백묘는 백묘이다.
정책대결과 그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실행은 분명히 책임이 따르고 국민의 심판이 따른다.
불행의 역사가 반복되질 않길 바란다.
박근혜 후보, 정녕 카인의 후예가 되려는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인혁당 발언이 이번 한 주도 최대 이슈였다. 인혁당 사건은 1차와 2차가 있다.
◈ 1차 인혁당 사건, 공안 검사도 기가 막혀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가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해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지명수배한 사건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대로라면 당시로는 해방 이후 최대의 엄청난 간첩사건이다.그런데 사건의 증거와 정황이 너무도 뻔한 것이어서 검찰 공안부장(부장검사 이용훈)을 비롯한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 등 검사 4명 모두가 중앙정보부 주장이 증거가 없다며 공소를 기각했고 결국 검사직을 내놓고 검찰을 떠났다. 당시 사표를 제출한 장원찬 검사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피의자들 모두가 ‘인혁당’이란 단어를 들어본 일이 없고 모두 고문에 의해 한 것이라고 혐의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건 증거로서 효력이 없다. 하다못해 심증이 갈만한 무슨 종이쪽지라도 있어야 할 텐데 정말 하나도 없어 답답했다. 공안부 다른 선배 검사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무리하게 기소를 한다 해도 공소유지에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나의 양심에 배치되는 짓이었다.” 사법부도 이 사건을 황당하다고 판단했다. 기소된 57명 중 2명에게만 징역 3년 이하의 실형을 선고하고 모두 풀어줬다. 1차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이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굴욕적으로 일본에 구걸했다고 비판하는 학생.시민운동의 싹을 자르려는 의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 다음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민청학련을 빌미로 2차 인혁당 사건이 벌어졌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은 1973년 여름 이후 조직적인 반유신 운동을 목적으로 전국 대학생 시위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뤄진 조직이다. 학생, 교수 등 지식인 사회, 종교계까지 유신반대에 나서자 위기의식을 느낀 군사 정권은 일단 긴급조치 1호.2호 등을 잇달아 발동시키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해 저지에 나섰다.
◈ 민청학련과 2차 인혁당, 암흑의 유신시대그리고 10년 전의 ‘인혁당 사건’을 꺼내 재활용하고자 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이 인혁당이며,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해 대규모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국가전복을 기도하였다고 제 2차 인혁당 사건을 날조해 터뜨린다. 이 사건으로 1,024명이 체포됐고, 비상보통군법회의 1심과 2심, 대법원 판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확정판결, 다음날인 4월 9일에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것이 국제법학자협회가 1974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게 된 경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신 전과 유신 이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다. 1972년 유신으로 박정희 정권이 장기 독재가 아니라 아예 영구집권 내지는 히틀러 식 총통제를 실시할 것이라는 흉흉한 여론이 사회를 지배했다. 실제로 군사반란, 한일굴욕외교,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까지 치달려 온 박정희 정권으로서 남은 순서는 영구집권 뿐이기도 했다. 그것을 위해 권력구조와 국민 여론을 완전히 재구성하려는 것이 유신헌법의 목적이었을 것은 확연하다.그 결과 검찰을 건너 뛰어 비상군법회의가 교수.학생들을 수사하고 대법원에서도 60년대 1차 인혁당 사건 때와는 달리 무지막지한 수사결과를 군말 없이 통과시켰다. 검사가 뭐 이런 말도 안되는 간첩조작사건이 있냐며 기소를 거부한 뒤 사표를 쓰고 사법부가 대부분 무죄로 풀어주었던 1960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나 문민정권이 들어 선 뒤 진상규명 작업을 벌이고 사법부의 재심으로 뒤늦게나마 역사를 바로 잡은 것이 인혁당 사건의 경과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앞으로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는데 그러면 인혁당 사형수들을 다시 유죄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는 얘긴가? 사법부의 재심이란 확정 판결이 났으나 사실에 대한 중대한 오인 등이 드러나면서 과거의 판결을 고치는 비상구제 절차이다. 그러니 유신 정권 시절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은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만 법적 효력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의 판결이 2개 있지 않느냐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 말이 맞다. 어찌 억울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사법살인 재판이 나중에 고쳐줬다고 해서 역사에서 사라지겠는가. 그 판결은 사법부 굴욕의 표식으로 영원히 남아 언제나 경종을 울려야 한다. 인혁당 판결은 영원히 2개가 맞다. 역사의 기록은 나중에 뜯어 고친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5.16을 국가재건을 위한 명예로운 군사혁명이라고 색칠해 국가 기록과 교과서에 적어 넣는다 해도 군부 소장세력들의 무장반란인 것은 지울 수 없다. 군사반란을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왕에게 혈서를 써 바친 일본군 군관 출신인 것도 그가 나중에 국군통수권자가 되었다고 해서 지울 수 없다. 그의 군 경력은 일본군, 국군 영원히 두 개이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로당 출신인 것도 역시 그가 훗날 공화당 총재가 되어 반공정책을 폈다고 해서 없던 일로 삭제되지 않는다.그 대가를 이제라도 대신 치르라는 뜻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되며, 진지하고 엄숙히 받아들여야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 21세기에 등장한 카인의 후예지금 그런 거 따질 필요는 없지 않느냐,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는 역사인식도 따져 보자.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하리라”는 말은 기록상으로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처음 외친 항변이다. 쿠바의 부패한 독재정권에 항거해 반정부군을 이끌던 카스트로는 무장항쟁 초기에 몬카다 병영습격사건이라는 걸 벌였다가 체포돼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당시 신분이 변호사였기 때문에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법정에서 변론한 내용이다.“오늘 당신들은 한 명의 피고를 심판하지만 당신들 역시 심판 받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훗날 오늘의 재판을 돌이켜 볼 때마다 당신들은 심판받고 또 심판받고 그럴 것이다... 사법부가 겪게 될 전무후무한 치욕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비열한 독재자의 분노를 겁내지 않듯이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비난하라, 그것은 상관없다. 역사가 나를 사면하리라.”'그 후로 역사가 증명하리라, 역사가 나의 무죄를 밝히리라...'는 표현은 억울한 이들의 항변에서 종종 인용되었다. 그런데 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에 처해지던 1975년 4월 9일 군목으로서 사형집행장에 입회한 박정일(70)목사의 증언 일부를 간추려 읽어보자. (당시 군종참모로 33세의 육군 대위) 새벽 4시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에 도착해 기다리니 4시 30분 흰색 죄수복을 입은 첫 번째 사형수가 들어왔다, 백열등이 환하게 켜진 방안으로 들어온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본 그가 물었다, 법무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형을 집행한다는 판결문을 읽고 유언을 물었다, “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사형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웠다, 목에 밧줄도 감았다, 잠시 뒤 버튼을 누르자 사형수 발밑에 송판이 열렸다, 군의관은 다가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주검을 치웠다, 한 사람당 30분씩 걸렸다. 뒤이어 들어온 사형수들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이수병씨는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다,” 이렇게 역사가 나의 억울함을 증명할 것이라는 부르짖음은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것이지 권력자가, 권력을 누려온 자가, 더 큰 권력을 쥐려는 자가 우물우물 거릴 말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오류이자 책임회피이다. 토론을 벌이다 대답을 못 찾아 궁색해지면 논증의 자기책임을 회피하고 실체도 없고 언제 등장할지도 모르는 막연한 미래에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를 논리학에서 “미래도피의 오류”라고 한다.
논증의 회피와 불능은 엄연히 다른 상황이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은 억압된 상황에서 어떤 논증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자 신념에 의해 미래와 역사를 불러 왔고,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절대권력자의 후예는 따지지 말자는 뜻으로 미래와 역사를 불러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성서에는 동생을 살해한 뒤 진실을 캐묻는 神에게 ‘그걸 왜 내게 묻습니까?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며 진실된 대답을 회피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바로 카인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우리는 집권당 대선 후보가 '카인의 후예'가 되어 대답을 회피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2012.09.14노컷뉴스 변상욱 대기자==
박근혜, 잘못된 경제인식도 문제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문제가 되고 있다. 5·16, 유신, 인혁당 사건,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등에 대한 박 후보의 일련의 발언은 의식 있는 민주시민의 공분을 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박 후보의 대통령으로서의 자질과 자격에 대한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성을 파괴하고 헌정질서를 유린한 5·16 군사반란이나 유신 쿠데타에 대해 “그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내가 그때에 지도자였다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면서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거나 그에 대한 판단은 “역사의 몫”이라고 하였다. 대한민국 사법사에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인혁당 사법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사법부의 판단을 무시하는 오만한 역사인식을 드러냈다. 사법부를 정권의 시녀 정도로 생각했던 박정희 독재정권 당시를 연상케 하는 소름끼치는 대목이다.
박 후보는 자신의 역사인식에 대한 언론, 지식인, 야당의 문제제기에 대해 “과거 말고 미래를 얘기하자”, “‘이게 잘못됐다’고 얘기하다 보면 계속 과거로만 가게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는 개인의 내면적 의식 상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표로서 그러한 왜곡된 인식이 외적 행위로 반복해 나타나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이고 미래가 될 수밖에 없다. ‘잘못된 과거’에 대한 진솔한 반성 없이 ‘바람직한 미래’가 오겠는가. 더욱이 단순히 일개 개인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민주주의 헌정질서와 법치를 부정하고 역사를 자기중심적으로 다시 쓰려고 하는 제왕적 발상과 그러한 왜곡된 내면적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 사람에게 국가를 맡길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박근혜 후보의 잘못된 인식 문제가 비단 역사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경제인식도 문제다. 예를 들면, 경제민주화에 대한 박 후보의 인식이 지극히 왜곡되어 있어 박근혜표 경제민주화의 실체와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박 후보는 2007년 경선 당시의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치를 세운다) 공약에 대한 비판을 받자, “줄푸세와 지금의 경제민주화는 철학이 같다”며 “감세는 세율을 낮추자는 것인데 현 정부에서는 중산층과 저소득층 대상으로 실현했고, ‘푸’와 ‘세’는 규제를 풀고 법치를 세운다는 것인데 (지금도)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정직하지 않다. ‘줄’은 대기업의 법인세 인하와 부자감세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푸’는 재벌 대기업에 유리한 규제완화였으며, ‘세’는 파업 통제 등 노동조합을 겨냥한 것을 박 후보가 모를까? 박 후보의 설명은 줄푸세와 경제민주화에 관한 실로 엄청난 인식의 왜곡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특히 박 후보의 ‘푸’에는 재벌의 은행 소유제한 완화도 포함되어 있다. 은행의 재벌 지배를 허용하는 것도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라고 생각하는가? 박 후보는 역사를 자기 편하게 자기중심적으로 다시 쓰려는 경향을 경제민주화에 대한 해석에서도 보이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지난 총선 때 경제민주화를 ‘팔아서’ 톡톡히 재미를 봤고, 이를 연말 대선까지 계속 우려먹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는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발표된 바가 별로 없어 정치 마케팅을 위한 광고성 카피에 불과한 실정이다. 오죽하면 같은 당의 원내대표라는 중책을 맡은 사람이 “정체불명의 포퓰리즘”이라고 하겠는가. 박 후보 본인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인식이 확실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왜곡되어 있고, 또 그 안에 구체적인 내용도 없으니 “정체불명”일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 마케팅은 화려하게 잘하고 있지만, 과연 박 후보가 진짜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한다면 경제민주화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박 후보의 인식구조가 왜곡되어 있다면 어찌 역사에만 왜곡되겠는가. 어찌 경제민주화에만 왜곡되겠는가.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고 한다. 박근혜표 맞춤복지가 박 후보 “아버지의 꿈”을 이루려는 것이라면 국민들은 “행복한 돼지”나 되란 말인가?
==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2012.09.16한겨레칼럼==
페루의 게이코 후지모리, 독재자의 딸 “아버지는 결백하다”
뉴스분석 왜? 페루의 박근혜, 게이코 후지모리
◈'박정희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을 따라다니는 꼬리표입니다.
남미 페루에는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딸’ 게이코가 있지요. 두 사람은 ‘독재자’ 또는 ‘경제를 살린 지도자’란 상반된 평가를 받는 아버지로 인해 늘 역사 논쟁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싫다’고 부모를 바꿀 수는 없는 법, 딸에게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라면 부당하겠죠. 하지만 아버지의 ‘오명’을 어떻게 씻을 것인지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5년이, 더한 미래가 그 답 안에 있을 테니까요.
1994년 친위쿠데타로 의회와대법원·사법부까지 해체하고3선개헌에 납치·살인 자행한페루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당시 퍼스트레이디로 활약한첫째 딸 게이코의 말 바꾸기상황 불리할 땐 “과거 사과”제1야당 대표로 차기 대선 노리며다시 독재자의 딸로 돌아가아버지의 인도적 사면 압박
“20년 전 9월12일은 살인·학살을 자행했던 ‘빛나는 길’의 지도자 아비마엘 구스만이 체포된 날입니다. … 구스만의 체포로 범죄·테러 단체인 빛나는 길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죠. … 위대한 전투 승리는 단 하나의 작전이 아니라 위대한 전략들의 결과로 얻어집니다. (구스만 체포에는) 총체적인 전략이 있었고, 다방면에서 테러와 싸워온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 정부는 정치적 옹졸함 때문에 이런 전략들을 포기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석방시키는 특혜를 줬습니다. (그 결과) 빛나는 길은 오늘날 ‘사면 및 기본권을 위한 모임’(MOVADEF) 등의 이름으로 세력화해, 페루 정부가 테러를 저지른 이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거는 되풀이돼선 안 됩니다. 빛나는 길의 위협을 (다시금) 느끼는 지금, 페루의 주적인 테러 앞에서 우리 페루인들은 차이를 넘어 힘을 합쳐야 할 것입니다.”
▼ 알베르토 후지모리(오른쪽) 전 페루 대통령이 2000년 조기 사임 발표 이후 딸 게이코와 함께 대통령궁 앞에 나와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페루의 과거사
페루 의회의 제1야당인 ‘푸에르사 2011’(130석 의회에서 6개 정당 중 37석 차지)의 대표인 게이코 후지모리(37·이하 게이코). 2011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오얀타 우말라 후보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줬던 그가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KeikoSofiaFujimoriHiguchi)에 이 글을 올렸다. 알베르토 후지모리(74·이하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1990~2000년), 반정부적 공산 게릴라 조직 ‘빛나는 길’을 소탕해 페루의 고질적인 치안 문제를 해소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게이코는 후지모리의 네 자녀 중 큰딸이다. 그의 페이스북엔 아버지와 함께한 사진 등 정겨운 ‘기억’으로 가득하다. 어린 시절, 남동생 히로의 생일날 아버지와 형제들이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어린 게이코는 행복하게 웃고 있다. 페루의 독립기념일(7월28일), 아버지의 생일이기도 한 이날엔 아버지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띄우기도 했다. 아버지가 5번째 설암 수술을 받자 병원 앞에 모여 쾌유를 빌어줬던 아버지의 지지자들에 감사를 표하는 글도 있다. “제 아버지의 건강 악화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지속적인 애정을 보여주신 데 대해 가족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9월4일) 게이코가 페이스북을 통해 기록하는 아버지는 ‘가정적인 아버지’이며 여전히 추앙받는 ‘페루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이다. 하지만 그의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페루 현대사에서 ‘독재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자신이 만든 정당(Cambio 90)의 이름처럼 페루 ‘변화’(Cambio)의 상징이었다. 12%도 안 되는 백인이 정치·경제를 독점했고 우파와 좌파 모두 신뢰를 잃은 상황 속에 치러진 1990년 대선에서 “당신과 같은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는 일본계 2세 후지모리에게 페루인들은 열광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20%대로 잡아 마이너스이던 경제성장률을 최대 12.9%(1994년)까지 끌어올렸고, 빛나는 길이나 투팍아마루혁명운동(MRTA) 등 반정부 무장게릴라 소탕에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그는 독재의 길로 내달았다. 후지모리는 1994년 친위 쿠데타로 헌법 기능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정당에 의한 민주주의는 끝났다”며 이른바 ‘신독재’를 선언한 것이다. 대법원과 사법부도 예외 없이 해체됐다. 게릴라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만든 비밀 암살조직 ‘콜리나’를 만들어 납치와 살인 교사 등 무차별적인 인권 탄압을 자행했고, 공금 유용 등 부정 축재도 서슴지 않았다. 재선에 성공하는 데 만족하지 못한 그는 1996년엔 헌법을 개정해 3선 연임의 길을 열어뒀다. 아내 수사나 히구치(62)마저 그를 “독재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등을 돌렸다. 2000년, 그의 뜻대로 3선에 성공했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헌 시비 속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그의 ‘오른팔’이었던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전 국가정보국(SIN) 국장이 야당 의원을 매수하려고 뇌물을 주는 비디오가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그가 선택한 것은 ‘도주’였다. 그해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 참석차 브루나이로 출국했던 후지모리는 부모님의 나라 일본으로 도망쳤다. 며칠 뒤 그의 대통령 사임장이 팩스로 도착했다. 일본으로, 칠레로 떠돌던 ‘도망자’ 후지모리는 2007년 페루로 송환됐고 2009년 25년형을 받아 복역중이다. 1979년, 대통령 암살로 끝난 ‘한국적 민주주의’와 닮은 후지모리의 ‘신독재’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 사형제 등 아버지의 정책 잇기에 충실
‘살아 있는 과거’의 그림자는 ‘현재’까지 드리워진다. 그의 딸 게이코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페루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 서른한살 때의 일이다. 부모님의 이혼 뒤, 19살부터 7년간 퍼스트레이디를 했던 게 정치 경험의 전부인 그는 2006년 전국 최다 득표로 화려하게 의회에 입성했고, 5년 뒤엔 대선에 출마해 결선투표까지 진출했다. 선거 때마다 전면에 아버지를 내세운 그는 그저 ‘또다른 후지모리’였을 뿐이었다. 의원 시절이던 2006~2011년에도 그는 독자적인 여성 정치인이었다기보단 그저 ‘후지모리의 딸’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판사들이 상습범들에게 최고형을 주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제출하는가 하면, 친 후지모리 의원들과 함께 흉악범죄 대부분에 사형을 구형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했던 게 대표적이다. 그는 1990년대 아버지가 추진했던 정책들을 이어가는 데 전력을 다했다.
게이코에게 대선 도전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한 대장정이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아버지를 사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했다. 그의 대선 캠프는 아버지의 측근들로 가득했다. 캠프를 진두지휘한 하이메 요시야마는 아버지의 친위 쿠데타 이후 헌법을 썼던 장본인이며, 보건장관을 지냈던 알레한드로 아기나가도 선거 참모로 활동했다. “(후지모리의 3선 개헌은) 우리가 테러와 초인플레이션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특별하고 예외적인 상황”이었다며 아버지의 유산을 적극 끌어안는 행보를 보이는 게 이상할 게 없었다. 게이코의 이런 퇴행적 행보가 먹혀들어 갔던 건 “경제성장이 높아지는 만큼 불만도 높아지는 페루의 역설”(마이클 시프터 인터아메리칸다이알로그 회장의 말) 상황에서 중도 후보들이 분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1년 4월, 대선 1차 투표에선 3~5위 중도 후보들이 절반에 가까운 42%를 득표해 과반을 얻은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 결선투표에서 맞붙게 된 1·2위 후보 우말라와 게이코는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내 지지율 격차를 보이며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했다. ‘중도 및 부동표를 누가 잡느냐’에 승리가 달려 있었다. 그때 게이코가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과거사 반성’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임 시절 일어났던 잘못을 인정하고 페루 국민들에게 사죄한다”고 했다. “대통령에 당선돼도 아버지를 사면하지 않겠다”고도 약속했다. “나는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아니다.” 거듭된 아버지와의 거리 두기에 나섰다. 언론 환경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36년 만에 좌파 집권을 우려한 대다수 우파 매체들까지 게이코 편향 보도를 쏟아냈다.
2011년 페루 민심은 그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우파 지식인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은 게이코가 당선되면 분명 후지모리를 사면할 것이고, 이는 “페루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르가스 요사와 마찬가지로 민심은 우말라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돌아섰다.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었던 그해 6월 대선 결선투표. 우말라는 고작 3%포인트(51.5%-48.5%)의 격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바르가스 요사의 말대로 “독재로 회귀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한 선거였다.
◈ 우말라 대통령 위기 속에 ‘과거 재소환’
‘과거의 재림’을 막은 페루 대선이 끝난 지도 1년여가 지났다. 급진좌파 차베스가 아닌 중도실용좌파 룰라식 개혁을 표방했던 대로 우말라 대통령은 전임 정부의 경제 정책을 계승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다시금 사회적 불안이 고개를 들며 정세 불안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페루 북부 카하마르카에선 우말라 정부가 추진하는 ‘콩가 프로젝트’(중남미 최대 규모 금광 개발)를 둘러싸고 수질 등 환경오염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져 시위대 일부가 사망한 게 대표적이다. 또한 구스만 체포 이후 힘을 잃어가던 ‘빛나는 길’이 다시금 세를 얻어가고 있다는 징후도 포착되고 있다.
게이코는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 있는 과거’를 재소환하는 데 집중하는 모양새다. 그는 대선 이후인 지난해 연말부터 우말라 정부를 향해 후지모리에 대한 “인도적 사면”을 압박하고 있다. 후지모리의 사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47%(2011년 11월)에서 49%(12월)로 오른 데 이어 53%까지 올라갔다는 <페루21>의 여론조사 결과를 페이스북 등에 언급(1월13일)하면서 여론전도 펴고 있다. 후지모리가 5번째 설암 수술을 받았던 지난달에는 “아버지는 위독한 암 환자인데도 정부는 인도적 사면을 발표할 의향이 전혀 없다”며 우말라 정부의 “잔인함”을 비난했다고 <코메르시오>가 전했다.
나아가 아버지가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난 7월13일 페이스북에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겐 (숨겨놓은) 자산도, 계좌도 없다. 병약한 그는 부당하게 투옥돼 있다”는 글을 올리며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바리오스 알토스 민간인 학살 사건 등 일부는 반인도적 범죄로 볼 수 없다며 몬테시노스 전 국장 등의 형량을 낮춰준 최근 법원의 판결을 환영하며, 같은 혐의에 대해 아버지의 재심을 청구하겠다는 뜻도 내비친다.
지난 대선 국면, 사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제1야당의 대표로 차기 대선을 노리는 게이코의 이런 ‘효심’ 어린 행보는 후지모리 시절을 그리워하는 지지층을 끌어안고 가겠다는 정치적 행위기도 하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짖는 게이코에게 앞으로 페루 민심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먼 나라 페루의 상황은 그저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2012.09.15한겨레 이정애 기자==
페루의 ‘박근혜’, 대통령 되나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의 딸 게이코… 6월5일 대선 결선투표 앞둔 여론조사에서 좌파 우말라에 대한 중산층 이상의 불안에 힘입어 선두달려
▼ 지난 5월17일 페루 수도 리마 빈민가에서 게이코 후지모리 대선 후보(가운데)가 지지자들과 함께 걷고 있다
‘잉카의 태양신을 백인이 살해했다. 400년 뒤 태양의 나라(일장기) 일본에서 후지모리가 페루로 건너와 대통령이 되었다. 후지모리는 신이 페루에 내린 선물이다.’
잉카 문명의 후예인 페루 원주민들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재임 기간 1990년 7월~2000년 11월)을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일본계 이민 2세가 어떻게 낯선 페루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을까라는 궁금증을 풀 실마리다. 지금 페루에서 다시 후지모리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36) 상원의원이다. 게이코 후지모리는 6월5일 대선 결선투표를 앞두고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이지만 좌파 오얀타 우말라(48) 후보를 앞서고 있다. 5월 여론조사에서 그는 41% 대 39%, 40.6% 대 37.9% 등을 기록했다. 페루인들은 게이코 후지모리를 또 한 명의 태양신 부활로 여기는 것일까?
‘가난한 자의 혁명’ 신화
한국의 지하철 등에서 안데스 지역 전통의상을 입고 공연하는 모습이 가끔 보인다. 전통악기 삼포냐를 불며 <엘 콘도르 파사> 등 전래민요를 연주한다. 짙은 황색 피부의 그들이 전형적인 페루인이다. 하지만 페루의 정치·경제를 장악한 이들은 전체 인구의 45%에 이르는 원주민도, 37%의 메스티소(백인과 원주민 혼혈)도 아니다. 15%의 백인이다. 일본계 등 소수민족은 중국계와 흑인 등을 다 합쳐 3%밖에 안 된다.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그렇듯, 페루에서도 원주민은 스페인 식민 정복 이래 오랫동안 소외받았다. 페루는 2002~2010년 평균 6.5%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라틴아메리카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혜택은 수도 리마와 태평양 연안의 중산층 이상에게만 돌아갔다. 페루의 피지배 계층인 안데스와 아마존 지역의 원주민은 그 혜택에서 제외됐다. 페루의 원주민 비율은 중남미에서 볼리비아(55%) 다음으로 높다. 빈곤층은 줄어들었다지만 아직도 34%에 이른다. 절대다수는 원주민이다. 5가구 가운데 1가구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 어린이는 20%가 영양실조에 시달린다. 수도 리마 주변에는 범죄가 들끓는 슬럼가가 넘친다. 2009년 6월 벌어진 사건은 사회 모순을 잘 보여준다. 아마존 지역인 바구아주에서 석유만 채굴하고 자신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며 원주민들의 항의시위가 벌어져 30여 명이 숨진 사건이다. 이들은 “선조가 물려준 땅과 자원만 빼앗기고 오랫동안 2등 국민 취급을 받았다”고 반발했다. 이런 뿌리 깊은 인종 갈등과 빈부·지역 격차는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대통령에 당선된 사회적 배경이다. 1990년 대선에서 우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전형적 백인 엘리트답게 전용 비행기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대선 유세를 벌였다. 반면에 후지모리는 낡은 트럭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당신 같은 대통령’을 내걸어 소외 계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후지모리가 원주민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는 점이 큰 무기였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에게 따라붙는 이름표다. 자식이 아비의 꼬리표를 떼기 어렵기는 게이코 후지모리도 마찬가지다.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한국의 많은 노년층이 박 전 대표를 차기 대선 주자로 지지한다. 게이코 후지모리도 마찬가지다. 빈곤층은 아버지 후지모리 시절을 그리워하며 딸 후지모리를 지지하고 있다. 아버지 후지모리를 되짚어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어떤 지도자였나? 농대 학장 출신의 후지모리는 ‘변화 90’(Cambio 90)당을 만들어 ‘정직·근면·기술’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가난한 자의 혁명’을 외치며 백인 중심의 기득권 세력에 도전했다. 그리고 연 7천%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고, ‘빛나는 길’ ‘투팍 아마루’ 등 반정부 무장게릴라를 소탕해 고질적인 치안 불안을 안정시켰다. -4.2%였던 경제성장률은 경제개방 등의 전략을 통해 최대 12.9%(1994년)로 끌어올렸다. 여기까지가 많은 논란 속에서도 열렬한 아버지 후지모리 지지자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 2008년 6월 부패 혐의로 기소된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왼쪽)이 게이코 후지모리(오른쪽)
아버지가 최대 정치 자산인 딸
하지만 후지모리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이른바 ‘신독재’다. 그는 1992년 4월5일 친위 쿠데타를 성공시킨 뒤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 기능을 정지시켰다. 대법원과 사법부도 해체하고 제왕적 대통령 1인 통치 구조를 구축했다. 1995년 4월 재선된 후지모리는 3선 출마 위헌 및 부정선거 논란 속에 2000년 4월 51.2%를 얻어 3선에 성공했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반정부 시위가 두 달 넘게 이어지던 2000년 9월 한 비디오테이프가 방송됐다. 최측근인 국가정보국장이 야당 의원을 매수하려고 뇌물을 주는 내용이었다. 후지모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는 같은 해 11월13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브루나이로 출국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사임장을 팩스로 보냈다. 이후 일본 등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후지모리는 2007년 9월 페루로 송환됐고, 2010년 1월 부패와 인권침해 혐의로 25년형이 확정돼 결국 수감됐다. 아버지 후지모리 정부의 장관 8명과 대법원장 등 고위 관료 1500명이 부패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국제투명성기구는 아버지 후지모리를 역대 7번째로 부패한 지도자로 꼽았다. 후지모리는 6억달러를 빼돌린 것으로 추정된다.
게이코 후지모리는 “나는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아니다. 자식은 부모의 책임을 넘겨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딸 후지모리의 선거캠프를 지휘하는 하이메 요시야마는 아버지 후지모리가 1992년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뒤 헌법을 새로 쓴 장본인이다. 또 아버지 후지모리 정부에서 보건장관을 지낸 알레한드로 아귀나 역시 딸 후지모리의 선거 참모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가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땅에 묻힌 것도 아니다. 최근에는 딸 후지모리의 유세 차량이 아버지 후지모리가 수감된 곳을 출입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페루의 최고 대통령”이라고 평가해왔다. 사실 아버지가 이혼한 뒤 19살 때인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영부인 생활을 한 게이코 후지모리에게 아버지는 최대 정치적 자산이다. 2007년 5월 조사에서 아버지 후지모리의 지지도는 49.5%를 기록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부인 시절 어린이 심장병 재단 등을 이끌었던 게이코 후지모리는 2006년 의회에 진출했지만 의회 법안 발의는 6건밖에 안 된다.
공약도 아버지와 닮았다. 미국 보스턴대학 경영학과 출신의 그는 최소 7%의 경제성장과 범죄 추방 및 빈곤 문제 해결 등을 내걸고, 학생들에게 점심과 교복을 제공하겠다는 등 물품 공세가 아버지 시절 공약과 비슷하다. 성실하고 단호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도 아버지와 비슷하다. 다비드 술몬트 페루 가톨릭대학 교수는 과의 인터뷰에서 “게이코 후지모리가 페루의 현 상황을 유지할 가장 안전한 후보로 보는 거대 언론그룹과 경제집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손잡았다”고 중·상류층의 지지 배경을 분석했다. 이것이 4월10일 대선 1차 투표에서 게이코 후지모리가 23.5%로 2위를 하고도 31.69%로 1위를 차지했던 우말라에 역전극을 펼치는 배경이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전문 싱크탱크인 ‘미주간 대화’(Inter-American Dialogue)의 마이클 시프터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 후지모리 정부는 페루에 트라우마를 남기고 끝났고 그것을 되살리는 데 대한 상당한 저항이 있다”고 말했다. 딸 후지모리는 아버지를 사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당선 뒤 사면하고 아버지 후지모리가 배후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의심은 끊이지 않는다. 딸 후지모리의 최대 걸림돌은 자신의 최대 자산이기도 한 아버지의 그림자를 어떻게 벗어나느냐에 달렸다는 얘기다.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과 꼭 빼닮은 대목이다.
우말라를 괴롭히는 ‘차베스 효과’
후지모리의 선전에는 육군 중령 출신인 좌파 성향의 우말라 후보에 대한 중산층 이상의 두려움도 작용한다. 이른바 ‘차베스 효과’다. ‘부의 공정한 분배’를 내건 우말라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처럼 급진적 사회주의 모델을 추구할 것이라는 우려다. 광산업 국유화와 증세 등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말라는 2000년 후지모리 대통령을 반대하는 쿠데타 시도를 이끈 바 있어, 군인 출신으로 실패한 쿠데타를 주도한 점이 차베스와 똑같다. 2006년 첫 대선 도전 때 차베스가 지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중산층 이상은 그를 차베스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의 동생이 2005년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반란을 이끈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고 재판이 진행 중이고, 그의 아버지가 변호를 맡고 있는 점도 우말라 반대파에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2006년 대선에서 과격한 이미지 탓 등으로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에게 져 2위에 그친 우말라는 이 때문에 차베스와 거리를 두고 있다. 우말라는 “페루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며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다. 물가 안정과 중앙은행 독립, 자유무역협정(FTA) 준수 등을 내세우는 배경이다. 하지만 게이코 후지모리는 우말라를 “양의 탈을 쓴 늑대”라며 유권자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우파 게이코 후지모리와 좌파 우말라의 대결은 톨레도 전 대통령,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총리와 같은 기술관료형 중도파가 쪼개지며 빚어졌다. 이를 두고 소설가 바르가스 요사는 “말기 암과 에이즈 사이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경우든 최악의 선택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두 후보는 아버지 후지모리식 개발독재형 모델도 차베스식 급진 권위주의 모델도 아닌,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브라질식 모델을 내세우고 있다. 우말라 캠프는 “브라질과 베네수엘라를 보면 브라질이 훨씬 더 성공적이다. 우리는 외국인 투자자를 몰아내기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게이코 후지모리 진영도 룰라를 모델로 제시한다. 이런 상황을 놓고 <파이낸셜타임스>는 5월16일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민주주의를 존중하면서도 시장경제 성장과 빈곤층을 위한 사회개혁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상호 배타적이라고 간주됐던 것을 하나로 묶는 게 가능함을 룰라가 보여줬기 때문이다”라고 풀이했다. 사실 페루 의회는 대통령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어려운 구조다. 우말라의 ‘가나 페루’ 연합은 130석 가운데 47석, 후지모리의 ‘푸에르자 2011’은 37석을 갖고 있다. 중도파가 나머지를 갖고 있다. 후지모리나 우말라 모두 중도세력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급격한 변화는 어렵다.
페루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아시아계 두 번째 대통령에 바짝 다가선 게이코 후지모리. 그는 룰라의 브라질 모델을 따르며 페루인에게 진정한 태양의 신이 될까? 6월5일 결선투표에서 당선되느냐가 첫 관문이다.==2011.06.06한겨레 김순배기자==
<인터넷한겨레,노컷뉴스에서 퍼온글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