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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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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새 법우님은 이곳으로 열 가지 족쇄 중 유신견, 자만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v내맘대로v 추천 0 조회 103 24.03.31 19:46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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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4.01 11:57

    첫댓글 유신견은 사견이고 자만은 사견과 또 다른 불선법입니다. 유신견은 오온을 자아라고 여기는 '견해'이고
    자만은 '내가 있다'라는 기본적인 '태도라'고 봅니다. 견해가 사라졌다고 해서 이런 기본적인 태도가 사라지는 건
    아닐 겁니다.

  • 작성자 24.04.05 06:26

    예. 동의합니다.

  • 24.04.06 13:57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초불연 각주: ‘미세한’은 anusahagato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sukhumo(미세한, 섬세한)로 설명하고 있어서(SA.ii.316) 이렇게 옮겼다.]

    그는 나중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 인식이다 … 심리현상들이다 …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물 때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은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 24.04.06 13:57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더럽고 때가 묻은 천이 있는데 주인이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긴다 합시다. 그러면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비벼서 빤 뒤 맑은 물에 헹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천은 청정하고 깨끗하게 되었지만 미세한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세탁업자가 이런 천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주인은 그 천을 냄새를 제거하는 상자를 넣을 것입니다. 그러면 뿌리 뽑히지 않고 남아있던 미세한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모두 뿌리 뽑히게 될 것입니다.” (...)


    - S22:89. 케마까 경 中, 초기불전연구원 역

  • 24.04.06 14:00

    위의 케마까 경 전문도 참고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

  • 작성자 24.04.08 00:57

    니까야 본문 중 자만과 유신견 차이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어디 있을까 궁금하던 차에 좋은 해답을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 24.04.06 20:59

    수다원은 '모든 정신-물질법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무상하다'라는 사실을 알고
    '여자, 남자, 사람' 등이 단지 개념일 뿐, 실재하는 성품이 아니다라는 걸 알지만(= 무아)

    한편으로 아직까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몸(감각적 대상)을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보는
    지각(산냐)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성행위 등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물질 무더기를 나라고 여기는' 삿된 견해는 완전히 제거되었지만
    '내가 있다는 미세한 느낌', '나에 대한 미세한 지각(산냐)'과 그에 대한 갈애는 남아있기 때문에
    그 '나'라는 개념법(생각)을 대상으로 갈애와 마나(비교하는 자만)를 일으키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러나 그 '나'에 대한 생각 역시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걸 아는 지혜 역시 있기에
    '실재하는 내가 있다'라는 삿된 견해로 발전하지는 않겠지요

    케마까 경에 따르면 오취온을 두고 '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취온을 떠나서 '나'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24.04.06 14:13

    “도반들이여, 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두고 … 인식을 두고 … 심리현상들을 두고 … 알음알이를 두고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떠나서 ‘나는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향기가 난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향기는 꽃잎에서 난다고 하거나 꽃자루에서 난다고 하거나 암술에서 난다고 한다면 그는 바르게 말한 것입니까?”

  • 24.06.03 17:01

    좋은 질문입니다.

    유신견이 제거 된 상태와 무아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만은 그 간극 사이의 어느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오온을 보고 자아를 주장하지 않아도 '내가 있다' 고 하는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아
    그곳에서 아직 자만이 활동하고 있다는 말씀에 좋은 생각거리로 숙고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 작성자 24.06.04 10:30

    오온을 보고 자아를 주장하지 않아’도’… 아직 사라지지 않아…

    라는 부분이 뭔가 와닿네요. 수행이 덜 된 상태라 저 구절의 뜻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유라도 해볼 수 있는 경전 상 말씀이 있어 다행이라 여깁니다.

    이 주제를 함께 숙고하는 분이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네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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