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의 흔적 -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
마포 음식문화거리 인근 도로명은 '토정로'인데 재미있는 조형물이 있다. '귀한 소금 받아 가구려' 토정 이지함이 바다와 갯벌, 무인도를 이용하여 2~3년 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고, 굶주린 백성들, 특히 부녀자와 노인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2015년 세웠다는 동상인데 어려웠던 그 시절 삶의 흔적이 묻어나 듯 표정이 살아있다. 강아지도 바가지를 물고 한몫하고 있는 모습에 미소 지어진다.
토정 이지함(1517 ~ 1578)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기인.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 해박하였으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 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였다.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보여준 인물로, 당시 반상 구분이 엄격하였던 조선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간 실천가였다. 시대를 앞서 백성 구제와 구국의 방략 등 3대 부고론을 외친 경세가이자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었다. (현지안내판) 3대 부고론 도덕 부고론: 사대부들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수기치인하여 도덕을 지키면 백성은 경제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다. 인재 부고론: 어느 때에도 인재가 없었던 적은 없으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바르게 배치하지 못 하기 때문에 제도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 한다. 백용(산업) 부고론: 육지와 바다는 일백 가지로 소용되는 물산을 저장한 창고이다. 그의 생애 대부분을 마포 강변에 흙담 움막집을 짓고 청빈하게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토정(土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길을 건너 삼성 아파트 방향으로 향하면 용 조형물이 있는데, 조형물에 대한 설명이 없다. 행정구역명이 '용강동' 이라서인 듯하다. 지명 유래를 찾아보니 마포강이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한강 삼성 아파트 입구에 토정 이지함 집 터 표지석이 있다. 광복 직후까지 토정의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토정 집 터가 현재 마포유수지 공영주차장이었다고도 한다. 아파트 안쪽 관리 사무소 옆에 또 다른 토정 집 터 표지석이 있다. 이지함은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고 한음 이덕형이 조카사위이니 명문 양반가 출신이다.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6세에 부모를 여의고 한양으로 올라왔다. 56세인 1573년(선조 6) 유일(遺逸,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되어 포천과 아산에서 현감을 하기도 한다. 아산 현감 시절에는 걸인청을 세우는 등 백성 구휼에 힘썼다.
토정 이지함 하면 먼저 '토정비결'이 떠오른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은 사주(태어난 연, 월, 일, 시)와 육십 갑자를 이용하여 한 해의 점을 보는 도참서인데, 막상 토정 이지함의 문집에는 '토정비결'이 없어 토정이 직접 작성하지 않았다고 여기기도 한다. 연말년시가 되면 한 해의 운수를 보기도 했었다. 토정비결은 한 해의 운세와 열두 달의 월별 운세를 보여주기에 한 달 한 달 보면서 무탈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한동안 보험회사에서 고객을 만나기 위한 좋은 재료였기에 설계사 노트북에 토정비결 프로그램을 깔아 주기도 했었다.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간단히 볼 수 있지만 신뢰는 더 떨어진 느낌도 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무료 '토정비결'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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