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상을 섬기면 망한다
신 4:15-31
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16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17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18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19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21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22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23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28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신 4:15-31 / 여호와께서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 말씀하실 때 여러분은 여호와의 음성만 듣고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신상도 만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됩니다. 우상은 어떤 형상이든지 똑같은 죄가 됩니다. 남자나 여자나 17) 땅에 사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나 공중에 날아다니는 어떤 새의 형상이나 18) 땅 위에 기어다니는 어떤 벌레의 형상이나 땅 아래의 물속에 사는 어떤 물고기의 형상도 만들지 마십시오. 19) 또 여러분은 하늘에 있는 해나 달이나 별들을 보고서 그것들을 섬기지도 마십시오. 천체들이 아무리 찬란해도 거기에 미혹되어 신으로 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세상의 다른 민족들에게나 천체들에게 미혹되어 그것들을 경배하고 섬기게 하셨습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그 용광로와 같은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셔서 오늘날과 같이 주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21)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미 여호와께 반역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내게 진노하시고 여러분에게 주신 저 요단강 건너 아름다운 땅에는 내가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겠지만 여러분은 요단강을 건너가서 저 아름다운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23)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맺으신 언약을 명심하고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대로 어떤 신상도 만들지 마십시오. 24)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는 바로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불과 같으신 분입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이 자기 외에 다른 어떤 것을 경배하는 일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25) [타락과 회개] 여러분이 그 땅에서 자녀를 낳고 손자를 보며 오래 살 때에 여러분이 어떤 형상이든지 우상을 만들어 여호와의 분노를 폭발시키면 26) 내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하는 땅에서 틀림없이 쉽게 멸망할 것입니다. 27)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세계 만민 속에 흩어 놓으실 것이고 여러분 가운데에서 소수의 무리만이 거기서 살아 남을 것입니다. 28) 여러분은 거기서 사람이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 곧 보거나 듣지도 못하고 음식을 먹거나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우상들을 섬길 것입니다. 29) 그러다가 여러분은 거기서도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 하나님을 찾으면 주께서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30) 여러분이 이 환난을 모두 당하면 결국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것입니다. 31)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는 분명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버리거나 멸하지도 않으시고 여러분의 조상들과 맹세로 맺은 언약을 잊지도 않으십니다.
모세는 율법 중에서도 특히 우상 숭배 금지에 대해 강조합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반드시 멸망하는 길이라고 경고합니다.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15-19) 모세는 호렙 산 불길 중에서 하나님께서 현현하셨을 때 소리만 들었을 뿐 어떤 형상도 보지 못했다는 말을 12절과 15절에서 반복하며 깊이 삼가라고 분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형상도 보여 주시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사람의 형상으로든지, 땅 위의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의 날개 가진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나 물 속의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그리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모든 천체를 보고 미혹하여 그것을 만들고 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창조주를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드는 행위로써 여호와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20-24) 모세는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의 기업을 삼으셨으니 스스로 삼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하실 수 없는 가장 심각한 범죄로 앞서 바알브올의 사건을 통해 그 심각성을 상기시켰습니다.
심판에 대한 경고(25-28)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어 오래 살다가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면 속히 망할 것이며 전멸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이러한 우려는 훗날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비극적인 역사이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로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회개의 기회(29-31) “그러나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찾으면 만나게 되고,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의 말씀을 청종하게 되리니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 너를 버리지 않고 멸하지 아니하시며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죄를 회개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적용: 범죄함으로 심판이 내려졌다면 겸손하게 엎드려 회개하고 있습니까?
한 몸이란 무슨 뜻일까요?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가 둘인가 하나인가를 규명해야 했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랍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랍비가 막대기로 한쪽 머리를 세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맞은 쪽의 머리가 "아야"하고 얼굴을 찡그렸는데 다른 쪽 머리는 히죽 웃었습니다. 이때 랍비는 "이 아이는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아플 때 함께 아파하고 괴로울 때 함께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신 4:25-31 / 피영민 목사
신명기(Deuteronomy)는 Duteros와 Nomos라고 하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두 번째 율법(second law)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율법은 모세가 율법을 새롭게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새로운 세대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준다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쓴 신명기는 모압 광야에서 모세가 행한 세 편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두 돌비에 받은 율법의 대의를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과 ‘가나안 땅’ 두 가지 선물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과 땅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순종하여 살면 형통하고, 번창하여 그 땅에서 오래 살게 되고 그 땅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불순종하면 그 땅에서 온갖 재난을 만나게 될 것이고 결국은 그 땅에서 추방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은 모세 설교의 핵심내용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땅은 우리의 삶의 지지기반, 삶의 터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 교회와 같은 우리 삶의 현장이 바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고 이 땅에서 살아가며 지켜야 할 법도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면 우리 삶은 형통하겠지만, 하나님의 법을 멸시하면 재앙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면 형통하고, 불순종하면 저주와 재난을 맞게 된다’는 말씀이 바로 모세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신명기 사관’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특수한 경우에는 신명기 사관이 적용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신명기 사관은 일반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삶의 타당한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모두 기억하십니까? 아시는 분들도 있지만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두 돌비의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두 번째 계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입니다. 세 번째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이고, 네 번째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여기까지는 ‘일신 이상 삼망 사안’이라고 축약해서 외우면 됩니다. 다섯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여덟 번째 계명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아홉 번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마지막으로 열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의 아내나 집을 탐내지 말라’입니다. 여기까지는 ‘오부 육살 칠강 팔도 구거 십탐’이라고 외우시면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 땅의 삶의 현장에서 형통하고 복되게 살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못할 것인지에 대한 것은 바로 이 십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고 부모님께 불효하며 살인하는 사람의 인생이 잘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계명은 성도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에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어떻게 하면 저주를 받는지에 대한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려면 그냥 주시지 왜 하나님은 이렇게 달갑지 않은 금지조항들을 나열해서 축복의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느냐고 반문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규례와 법도가 없이는 존속될 수 없습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삼가는 태도와 거리끼는 것이 없이 제 멋대로 교만히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사회에 어떤 법이 없다면 사람들은 방자히 행하고 사회는 결국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1. 율법의 가치와 역할
오늘의 말씀은 율법이 지니는 가치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살게 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1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살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우리가 살게 됩니다.
둘째, 율법은 사람의 마음을 계몽하고 자극합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9절)고 기록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될 때, 율법의 말씀, 신명기의 말씀을 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보면 ‘내가 부모님께 효도해야 되겠구나. 사람을 미워하고 살인하지 말아야겠구나. 도적질하지 말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위기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자극을 얻어 죄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을 계몽하고 자극하여 생명을 누리며 바르게 살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명심보감이나 처세술 책보다 이 신명기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여 그것으로 마음을 계몽해야 합니다.
셋째. 율법은 자녀 교육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모세는 율법과 십계명으로 교육하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9절)고 말씀합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교육시켜야 할 내용이 십계명과 율법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 율법의 말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간에 교육시켜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십계명을 가르치면 아이들을 망친다’는 내용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도리어 삐뚤어져 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십계명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십계명을 가르쳐도 삐뚤어질 아이들이라면 무엇을 가르친들 소망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설령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싫어한다고 해도 우리는 바른 내용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적 자녀 교육의 원리는 바로 율법 교육입니다.
넷째, 율법은 사회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10절)고 기록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로 연합하고, 그들을 정화시키고 교육하는 구심점은 오직 율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구성원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포츠, 특히 축구가 등장해서 사회를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다. 이 사회의 구심점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율법은 이웃 사회와 이웃 국가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6절)고 기록되었습니다. 열국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 지키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들의 나라는 대국이구나.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지혜로운 법을 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주셨구나’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자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교육시키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순종하며, 인위적으로 가감하지 말고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형통하고 승리하고 장구히 살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찾아야 할 때
그러나 과연 십계명을 따라서 잘 살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요? 인간의 죄성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율법을 교육시키면 도리어 어긋난 길로 가는 청개구리 심정이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 사람이 꿈속에서 천국에 가서 사도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이 세 사람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내가 너희들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으니 각각 소원을 이야기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사람은 “나는 구청장 선거에 네 번 나가서 모두 떨어진 경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권력에 한이 맺혔으니 제가 권력을 잡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건 아주 쉬운 일이다”라고 대답하고서는 그 사람을 구청장에 당선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나는 너무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돈 한 번 실컷 써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베드로는 “그건 아주 쉬운 일이다”라고 대답하면서 그 사람이 로또 복권에 당첨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자 이 사람은 “나는 좋은 아내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계속 묻습니다. “너는 어떤 아내를 원하느냐?” 이 마지막 사람은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을 원합니다.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는 여인, 또한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며,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남편은 칭찬하는 그런 여자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사람을 가만히 보더니 “에끼 이 사람아. 그런 여자 있으면 내가 당장 데리고 살지 너한테 주겠느냐?”라고 대답했다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 받는 비결을 몰라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 받는 비결은 너무 쉽고 간단하고 너무 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아마 성경도, 예수님도, 복음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부패하여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그 땅에서 결국 멸망하여 열국으로 흩어지는 결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해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시험 결과는 백성들이 율법을 어기고, 우상숭배하며, 멸망하여 열국으로 쫓겨나고, 부패하며, 타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어느 민족을 세워서 실험해 봐도 결과는 똑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이처럼 율법에 불순종해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 진정한 결말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복음과 예수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해서 환난을 당한 그 지점으로부터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이름과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율법에 불순종하여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처지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부패해서 본성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복음과 은혜,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야 할 때가 언제일까요? 본문은 세 가지 시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거기서’입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29절). 환난을 당하고 포로가 되며 강제로 목석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우리가 서 있는 그 시점 그 자리에서, ‘거기서’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환난을 당할 때’입니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30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가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할 때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해서 빚만 짊어지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돈도 없고, 빚만 지고, 몸도 병들었습니다.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통입니다. 빚쟁이는 몰려오지만 갚을 능력도 없고, 감옥 가자니 자식들이 불쌍합니다. 큰 환난입니다. 교회에 같이 가자고 그렇게 조르던 아내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면 이 또한 큰 환난입니다. 건강이라면 걱정 없다던 사람이 그만 암이 생겨서 이제 죽게 되었다면 이것 또한 말할 수 없는 환난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인생살이의 환난의 종류는 아마 수만 가지가 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 당할 때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환난을 당하면 당황하지 마시고, 다른 곳으로 가지도 마세요. 예수님 앞으로 나오세요. 미루지도 마십시오. 중병 걸려서 죽게 된 사람이 명의의 소식을 들었는데도 내일 가야지, 모레 가야지 하면서 시간을 끌겠습니까? 지금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구조선을 보면서 한 시간 뒤에 구조선에 올라갈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주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주여. 제가 하나님의 법을 어겨 이처럼 비참하게 환난을 당했으니 나를 건져주시고 도와주십시오. 제가 회개하고 다시 돌이키기를 원하오니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점은 ‘끝 날에’(30절)입니다. ‘끝 날’이란 환난의 과정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라는 의미도 있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인생의 후반부에 달한 시간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황혼기에 접어들었을 때, 젊음과 영화도 모두 지나고 죽음이 가까워진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에는 현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도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생의 노년기라 할지라도 영원한 내세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기 위해 여호와를 구하고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길
모세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29절에서는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씀이 “여호와를 구하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3절에서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30절 말씀처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인생 살다가 지금 망해서 환난 당하고 어려운 처지를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둘째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시점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회개해야 하며 우리의 삶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청종한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불순종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기도하고 순종하면“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시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도움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고자 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31절) 얼마나 좋습니까? 첫째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둘째로 멸하지 아니하시며, 셋째로 잊지 않으십니다. 버리지 않고, 멸하지 않으며,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순종해서 복 받을 만하기 때문에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해서 스스로 부패하고 환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멸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이솝 우화에 너무나도 유명한 태양과 구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외투를 입고 걸어가고 있는데, 태양과 구름이 그 사람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길 수 있느냐는 내기를 합니다. 먼저 구름이 자신만만하게 나가서 엄청나게 센 바람을 불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부니까 이 사람은 오히려 옷깃을 더욱 여미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율법은 구름이 만들어 내는 바람과 같습니다. 율법은 옳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오면 인간은 외투를 덧입고 더 껴입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밝은 빛과 뜨거운 열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 몸을 잠시 움츠렸다가 곧 윗도리를 벗고 흐르는 땀을 닦기 시작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의 광선이 우리의 옷을 벗기고 복을 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패자 부활전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율법을 지켜서 복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패자 부활전이 있다고 우리에게 역설합니다. 율법으로 복을 받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패자는 부활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비의 광선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003년도 SBS 최고 히트 드라마는 ‘올인’입니다. 무려 6주간 방송시청률 1위를 기록한 작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을 각색한 이 ‘올인’의 실제 주인공인 차민수 씨는 6·25 시절에 유복자로 태어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최고의 프로 도박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는 원리와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두 가지 원리가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원리가 교차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원리가 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약을 먹고 건강도 해치고 가정도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환난의 자리에서 차민수 씨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 기도함으로써 결국 건강과 가정도 모두 회복 되었다는 이야기가 드라마 ‘올인’의 내용입니다.
이 드라마를 소설로 기록한 올인의 저자는 노승일이라는 작가입니다. 역곡동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인데 이 분이 올인을 집필한 후에 역곡동 교회에서 ‘원산폭격’하는 자세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하나님! 제게 기침이라도 한 번 해주세요.” 심지어 찬송가 168장의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진동할 때에’라는 가사를 ‘하나님의 기침소리 천지진동할 때에’라고 바꿔서 계속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노승일 집사의 작품이 대 히트를 하게 되었고 그의 인생은 대역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축복도 그 만큼 멀어집니다. 삶에 환난이 와서 허둥대는 분이 계십니까? “아!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라고 한탄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기침소리라도 듣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 제가 환난 당하였으니 날 도와주십시오.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예수님을 믿는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버리지도, 멸하지도, 잊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신 4:26-31 / 정필도 목사
이 세상에서,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만족해하며 사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보다 좀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싶어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좀더 넓고 쾌적한 집에서 살고 싶어하고, 좀더 좋은 자동차로 바꾸어 타고 싶어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수입을 꿈꾸며 풍족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루 속히 이 메마른 광야를 벗어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4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광야에서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 그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권태로웠겠습니까. 누구나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오랜 기간 동안 생활하라고 한다면 아마 원망불평하지 아니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고대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리라는 생각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행복은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환경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변화됩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사신우상()을 섬기고 인간들이 악해지고 타락하고 방탕하면 그 땅이 저주를 받아 사막과 같이 황무지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신 28:23-24).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사막이 변하여 살기 좋은 에덴동산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32:15, 겔 36:3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라도 속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를 원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고별설교 부분에 해당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삼, 사백 년 후에 되어질 일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아들과 딸을 낳고 손자와 손녀를 낳고 오래오래 잘 살게 되면 부패하게 되고 사신우상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잘 살게 되어도 겸손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좋겠는데 도무지 그렇지를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조금이라도 잘 살게 되면 교만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며, 그 결과 마음이 부패해지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후로 지금의 구라파는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인들의 교회출석률이 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미국도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로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인들의 교회 출석률이 20%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50%의 교인들만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50%의 교인들은 장사를 하고 있든지 들과 산으로 놀러갔든지 골프장에 갔든지 딴 짓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주 5일 근무제가 전 직종으로 확대되면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자연히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게 되며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죄를 짓고 결국에는 우상숭배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십계명 중의 제 1계명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너희에게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우상입니다. 돌부처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모두 우상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에서, 사도 바울은 말세를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우상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자기자신을 더 사랑하므로 자신이 곧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므로 돈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므로 쾌락이 우상입니다.
과연 오늘날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빠 죽겠는데 교회출석이 문제냐? 당장 돈이 필요한데 십일조가 문제냐?” 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 위주로 살다보니 말씀도 저버리고, 주일도 지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신명기 13:9을 보면, 우상숭배를 권하거나 참여시키는 자는 긍휼히 여기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용서하지도 말고 아예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누군가 우상숭배를 하기 시작하면 우상숭배를 시작한 그 사람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온 집안이 망하고 그 민족과 나라까지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 모세는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다가 결국 전멸당하게 된다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24:20에서도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살다가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며 우상숭배를 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내리시던 축복이 그치고 대신 화를 내리시고 이들을 멸하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캄보디아는 가난한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만, 한 때 태국 라오스 베트남 전역을 지배했고, 중국 황제가 면담을 요청했으나 돌려보낼 정도로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극한 우상숭배로 저들의 영광은 짧게 지나갔고, 그 자손들이 오늘날까지 저주 아래 놓여있습니다. 자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온 국민들이 가난에 허덕이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불교를 숭상하며 특별히 뱀을 좋아하고 뱀을 극진히 섬깁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도 뱀의 그림이 많고, 장난감을 비롯하여 먹는 그릇에 조차도 뱀의 그림이 그려져있으며, 다리의 난간도 온통 뱀을 징그럽게 그려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대표하는 비행기에 조차도 일곱 머리 달린 뱀이 그려져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캄보디아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이 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앙코르사원(Angkor War)입니다. 앙코르사원은 그 옛날 수리아 바르만 2세가 20만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20년에 걸쳐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밀림 한가운데서 발견된 이 사원이 어디에서 어떻게 그 많은 돌을 가져다가 지었는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원에 쓰인 돌 하나 하나마다 우상들이 잘 조각되어져 있습니다.
이 사원뿐 아니라 1181년부터 1218년까지 통치했던 자야 바르만 7세는 얼굴사원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백 년이 지난 후 그렇게 강성했던 이 나라도 소리 소문없이 저절로 없어졌습니다. 이는 외부의 침략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600년이 지난 후 프랑스의 고고학자에 의해 앙코르 사원이 밀림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강성했던 한 나라가 비참하게 망해갔는지 고고학자들이 연구하다가 이 민족이 몽땅 문둥병으로 죽은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들이 돌에 새겨놓은 사람들의 얼굴 모습을 연구하다가 알아낸 것입니다. 점차 성한 얼굴에서 코가 떨어져나가고 귀가 떨어져나가고 점점 얼굴 형태가 일그러지는 모습의 조각에서, 이곳에 문둥병이 창궐했던 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결국 우상을 섬기던 이 성을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숭배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북한은 김일성을 신격화했습니다. 김일성 동상 앞에서 절해야 하며, 그가 죽고 난 후에도 방부처리를 하여 궁에 모셔놓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만 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절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만일 북한을 방문한 남쪽인사들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절을 했다면 심각하게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극에 달한 북한정권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북한은 온 백성들을 김일성 앞에 절하게 만들고 신으로 만들어 우상화했기 때문에 그 땅이 저주를 받아 무슨 농사를 지어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남한 연구소에서 그 토양에 알맞는 신품종을 개발하여 심어보아도 농사가 잘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연약한지 아시면서도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모르고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 아시고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1:2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잘 살게 되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며 사신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망하게 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더구나 전쟁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어 열국 중에 흩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8절에서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 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고 했듯이, 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듣도 보도 못한 우상을 강제로, 그것도 지겹도록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29~30절을 보면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입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들은 간사합니다. 편안하게 잘 살면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매를 맞고, 고통으로 죽을 지경이 되면 하나님 앞에 두손들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치 찬송가 330장의 가사처럼, 고통의 멍에를 벗으려고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도 모든 것이 잘 되고 계속해서 잘 살았다면 결코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타락의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오는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불택자와 택자의 차이점는?
1. 택함 받은 사람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택자는 환난과 고통이 오면 반드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3. 자비하신 하나님은 택자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48-49을 보면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망한 후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낙심 중에도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진멸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고 소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애 3:20-22).
예레미야애가 3:33을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고생하게 하시는 것은 이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축복하기 위해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회개시키기 위해 주시는 징계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03편을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라고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고,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으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시고 은혜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엡 2:1-6).
자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자!
신 4:31, 고후 1:3 / 이삼규 목사
지난 주간 부흥성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달으셨습니까? 은혜 많이 받으셨습니까? 한 번도 참석 안 했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의 선하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선하심이 인간의 죄에 맞설 때 나타나는 것이 자비이고, 그분의 선하심이 인간의 결함에 맞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는 성경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자비는 그분의 본질이며, 그분의 단일적 존재의 한 측면입니다. 다이아몬드에 많은 측면들이 있듯이 그분의 속성들에도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박형룡 박사님의 교의 신학에 보면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도덕적 속성이 있는데,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선(善)으로 분류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선(善)에서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하나님의 자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속성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자비’라는 말은 ‘!Wjr"(라훔)’이라고 하는데 ‘라훔(형용사)’은 라함(!j'r;)에서 유래했으며,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구약보다 신약에서 그분의 자비가 더 많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구약이 신약보다 자비에 대해 4배 이상 더 많이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뜻밖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대부분 잘못 배워온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구약은 율법의 책이고 신약은 은혜의 책이라고, 구약은 심판의 책이고 신약은 자비의 책이라고,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온유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분은 자비로우시고 그분의 자비는 완전합니다. 그분의 자비는 무한히 완전합니다.
일반인들이나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적극적인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은 피조물의 행복을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에 잘 나타납니다. ‘복을 주기를 원하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이런 소원을 갖고 계신 그분은 백성의 행복을 기뻐하시며, 악한 자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친구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고 그분의 원수들 때문에 슬퍼하십니다.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것은 우리가 ‘자비’라고 부르는 것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개념에 의하면, 자비는 자신을 낮추어 자기보다 낮은 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적극적으로’ 온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비 또는 긍휼은 인간의 죄에 맞설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 또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마지못해서 베푸시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정을 베푸실 때에 적극적으로 베푸십니다.
사실, 소극적으로 세상의 죄를 슬퍼하는 것은 세상에게 별 도움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어 그보다 낮은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십니다. 이 사실을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분의 속성들 중 어떤 것도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모든 속성들은 그분 안에 있는 그분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속성들은 인간에게 유익을 줍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분의 속성들을 잘 이해함으로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특징
1)하나님의 자비는 시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례를 지나 하동포구로 흘러가는 섬진강이 있습니다. 그 발원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진안 ‘뜸봉샘’이라는 곳입니다. 작은 샘에서 물이 솟아 나와서 임실 순창 곡성 구례를 거쳐서 하동포구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이 강처럼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흘러나온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시작점이 없습니다. 창조되지 않은 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2)하나님의 자비는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자비가 지금보다 더 많았거나 더 적은 적도 없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아득히 먼 과거의 어느 때에는 하나님께서 굉장히 자비로우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그분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함께 걸으셨다는 구절이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라는 구절을 읽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분의 자비를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 옛날에는 하나님이 지극히 자비로우셨음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스실과 잔학한 사건들이 있기 이전의 일일 뿐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옛날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과거에 더 자비로우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지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도 여전히 동일하십니다.
3)하나님의 자비는 완전하고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완전하신 분에게는 결함이 생길 수도 없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그분의 본질입니다. 그의 속성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누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분의 자비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설교자와 복음전도자들이 우리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울며 간청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눈에서 자비가 흘러나오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이 돌처럼 단단하다 해도 여러분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지 않는다 해도 그분은 여전히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비롭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된다 해도, 모든 인간이 짐승처럼 변한다 해도, 세상사람 모두가 악마처럼 변한다 해도 그분의 자비는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처럼 여전히 자비로우실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백 번을 더 돌아가신다고 해도 하나님이 지금보다 더 자비로운 분이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분이 무한히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앞으로 그분의 자비가 줄어들거나 마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자비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증가시키거나 줄이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필사도 하고 암송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갈보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의 자비는 시작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이 이미 자비로운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이미 자비로운 분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 모든 자비의 근원, 자비로운 일들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항상 자비로운 분이셨던 그분이 그 무엇으로 인하여 더 자비로운 분으로 바뀐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기(怒氣)를 띠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어나셔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잘못된 개념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간구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도고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중보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 비해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았고, 지금도 동일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자비의 질(質)이 더 완전해진 것도, 자비의 양이 더 커진 것도 아닙니다. 믿습니까?
4)하나님의 자비는 지금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경우가 발생할 때마다, 부도덕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에 대응합니다.
부도덕은 도덕적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모든 죄는 부도덕한 것입니다. 질투나 남을 헐뜯는 말은 부도덕한 것입니다. 남편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것도 부도덕한 일입니다. 잘못된 일은 다 부도덕합니다. 부도덕한 것은 불공정한 것이며, 불의한 것입니다. 정당하지 않고, 옳지 않고, 공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도덕적 불공정에 대응하면 그것이 심판이며, 그분의 선하심이 인간의 죄와 고통에 대응하면 그것이 자비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께 자비를 얻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순간 그분께 자비를 얻지 않고 있는 무신론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많은지 비유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만일 자비의 손발이 꽁꽁 묶여 있을 때 공의가 마음대로 활동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나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불이 비 오듯이 쏟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 때문에 우리는 이런 화를 면하고 지금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의 자비의 수혜자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분의 자비가 심판의 집행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하나님의 자비는 죄를 도말(塗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와 구별되게 합니다. 공의의 눈에 불공정이 보일 때에도 자비가 속죄를 통해 죄를 도말, 즉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도말’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 hj;m;(4229, 마하)’ 마하(동사)는 기본어근이며, (a) '씻다, 닦아내다, 지워 없애다, 도말하다, 제거하다', (b) '치다, 때리다, ~에 이르다', (c) '골수가 가득하다, 풍부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6회 나옵니다.
특히 노아 홍수 때에 노아와 일곱 식구 외에 모든 사람들이 멸망당한 사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를 도말합니다. 어떻게 도말하십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씻어 주십니다.
공의와 자비는 죄악을 보는 대신에 의(義)를 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혈로 인한 속죄의 혜택을 입은 죄인을 내려다보실 때, 그분의 눈에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롭게 된 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교리입니다. 이것이 속량의 기초이며, 교회의 큰 초석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속죄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속죄는 경건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분이 행하신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생활했고, 그분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으며,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사신 그분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의 속죄에 대해 여러분과 나만큼 많이 생각해보았을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벧전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속죄는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속죄를 우리가 다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마음에 영원한 만족을 드렸다는 것만큼은 압니다. 그것이 내 죄악을 의로, 내 불공정을 공정으로, 사망선고를 생명의 판결로 바꾸었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는 내게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교리이며, 내 생명이며 내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정을 베푸시다니, 자기를 낮추어 그분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셨다니, 하나님의 자비가 허락되었다니, 그분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할렐루야! 아멘 아멘
그분은 아무도, 특히 악한 자들이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자비로운 일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메시지요 세상에 내놓아야 할 증언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 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인자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과 친절함으로 충만하십니다. 그분은 아들을 보내사 당신들을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십니다. 그분께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