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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일(금)
* 시작 기도
주님...
3월의 첫날 아침을 맞이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맞이하는 삼일절, 그보다 더 심각한 영적 어둠의 치하에서 휘둘리는 나를 성령 안에서 자유케 하옵소서.
나를 혼돈과 어둠으로 몰고 가려는 비존재 세력 앞에 그것을 물리치려하기 보다 오히려 십자가 앞에 가만히 앉사오니 나의 마음에 평강을 허락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옛 사람이 나를 주장하려 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42:1-11
제목 :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느냐?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나의 묵상
시편 42편은 뒤에 이어 나오는 43편과 하나의 시로 보기도 한다.
그 이유는 형식과 주제가 유사한 시온을 바라며 고대하는 점과 43편의 표제어가 따로 나오지 않는 점, 그리고 42:5, 11의 후렴구와 43:5절의 후렴구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시가 둘로 나누어진 것은 시편의 최종 편집자가 편집상의 편의를 위하여 따로 분리 수록했기 때문이다.
42편은 하나님의 전이 있는 시온 곧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노래한 시이다.
표제어에 보면 ‘고라 자손의 마스길’로 나오는데 이는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고라 자손 중 헤만과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성전에서 찬양대의 우두머리로 활동한 음악가들이다.
하지만 표제어에 언급된 고라 자손은 헤만이나 아삽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성전 봉사자들이었던 고라 자손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시온을 그리워하며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슬픔과 나라를 잃은 절망을 담아 이 시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를 다윗의 작품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하면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를 고라 자손들이 수집하여 불렀기 때문에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어가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42, 43편을 하나의 시로 볼 경우, 이 시는 모두 3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연은 42:1-5절로 시온 곧 예루살렘을 떠나 원수들의 조롱을 당하는 중에 지난날 성전에서 하나님을 즐겁게 섬기던 때를 회고하며 그 때로 돌아가고픈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다.
제2연은 42:6-11절로 폭포와 엄몰하는 파도와 같은 환난을 하나님을 소망하는 심령으로 꿋꿋이 극복하겠다는 신앙 결단과 다짐을 발하며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제3연은 43:1-5절로 자신 자신이 예루살렘인 시온을 떠나 있는 중에 불의한 대적들에게 압제당하는 비통한 심정을 호소하며 속히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로 돌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여 주기를 호소한다.
표제어에 나와 있는 ‘마스길’은 지휘자의 지도로 연주된 제의(祭儀) 음악으로,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시를 뜻한다.
1-4절, 시인 자신이 마치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는 상한심령을 호소한다.
5절, 반복되는 후렴구로서 낙심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며 행하는 그의 신앙을 보여준다.
6-10절, 엄몰하는 절망과 뼈를 깎는 것 같은 아픔을 다시 호소한다.
11절, 낙심과 아픔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며 시인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후렴구이다.
시편 42편은 ccm으로도 만들어져 그리스도인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찬송시이다.
1절,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 영혼의 갈급함을 토로하는 시인의 호소는 그가 지금 얼마나 절박하고 고통스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인은 자신을 사슴과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사슴은 원래 열이 많은 동물이기에 물을 자주 먹음으로써 열을 식혀주어야 한다.
시인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물을 찾아다녔음에도 물을 얻지 못한 사슴의 모습에 자신을 오버랩시키고 있다.
사슴과 같은 동물은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숨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물을 찾아 헤맨다.
시인은 이를 근거로 자신의 영혼 역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갈급하며 타는 목마름으로 찾는 것이다.
2절, 2절 상반절은 1절 하반절의 반복이다.
하지만 그 강도는 더욱 심화되고 강해진다.
1절의 ‘주를’이 2절에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 대체되어 시인의 갈급한 심정을 더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데 비해 자신은 지금 죽은 것 같은 상황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넘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의미는 단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아니다.
1절과 연결하여 사슴이 찾는 시냇물이 사슴을 생존케 하듯이 바로 지금 시인으로 하여금 생존케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더 풍성하고도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신다.
(요 10:9-1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한 시냇물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사시사철 푸르게 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 나오는 사람들의 영혼 곧 삶을 책임지신다.
이런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내가 언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하고 탄식과 비참함을 토로하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히, 파님)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 예배할 수조차 없는 자신의 비참함을 토로하며 탄식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3절에서 이야기한다.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비웃음 때문이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니?’
그런 조롱과 비웃음 때문에 시인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그런데 이처럼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경건한 자들이거나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조롱하는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야로 눈물을 음식으로 삼는 것이다.
4절, 전에는 성일 곧 절기를 지키는 축제에 참석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춤을 추고 즐거워하였다.
시인은 이런 절기에 기쁨과 감사의 찬송으로 참석하였고 나아가 주도적으로 다른 이들을 이 축제에 인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을 성회로 인도하던 그가 지금은 자신도차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지 못하는 형편에 처한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풍성한 기억과 현실의 비참한 괴리 속에서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는 ‘내 마음이 상한다’고 토로한다.
5절, 하지만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그는 거기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자문(自問)한다.
‘내 영혼아 너는 왜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니?’
이 독백은 절망의 수렁에서 나와야 한다는 자기 격려임과 동시에 잘못 서 있는 곳, 있어서는 안 될 곳에서 나올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것이다.
그는 현재 낙망과 절망에 빠져 있다.
성소와 멀어진 비참한 현실,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며 찾듯이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그가 마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야로 흐르는 쓰디쓴 눈물뿐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격려하며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으되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권고한다.
그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같은 상황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둘 것을 권면한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의 정확한 번역은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으로 인하여’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곤고와 어려움으로 인하여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내 얼굴’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곤고와 고통을 뜻한다.
6-11절,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격려하고 회복을 추구하지만 또 다시 낙심에 빠진다.
엄몰하는 절망과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다시 한 번 호소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시인은 절대 낙심이 되는 중에도 그동안 요단 땅, 헤르몬, 미살 산 등과 같이 약속의 땅과 거기에 속한 크고 작은 모든 산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한다.
빠른 폭포처럼 굉음을 내는 물살을 바라보며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을 꾸짖는 주님의 음성으로 시인은 듣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한다.
이렇게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렸던 시인이 다시금 자신에게로 돌리자 탄식이 터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하나님께로 소망을 두며 그의 영적인 시선을 주님께 돌린다.
흔들리는 마음이 어디 시인뿐이랴?
나 역시 주님 안에서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하건만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절망과 낙심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 해결의 근본을 나에게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로 인하여 각종 곤고와 어려움이 닥쳤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시편 42편을 쓴 시인이 다윗이든, 아니면 후대의 고라 자손이든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그 마음이 간절하였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광야로 쫓겨나서 광야를 성소로 삼고 예배한 자이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고라 자손들은 그 옛날 하나님께 예배하던 시온을 그리워하며 타는 목마름으로 성전을 사모하였다.
그 애타는 심정이 본문에 절절하게 그려져 있고 내 마음 또한 애타게 만든다.
하지만 구약의 상황에서는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신약적인 차원으로는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 생명은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그 믿음은 곧 메시야적 구속행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고(요 5:26), 그 생명을 또한 사람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딛 1:2, 엡 1:3-6).
아들은 자기 속에 있는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하였다(벧전 1:20).
때가 되어 오신 아들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공의를 행하고 착한 일을 많이 쌓을지라도 그것으로는 우리의 생명이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난 인간은 아담과 똑같이 선악과를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실존이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한데 그 말씀은 다름 아닌 복음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과 현현이다.
이를 믿는 것이 복음을 믿는 것이다.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나는 이 복음 곧 말씀을 통하여 거듭남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나의 행동으로 하루에도 열두 번씩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불신앙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복음을 듣고 알게 된 후로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이미 창세전 언약으로 인하여 구원 곧 영생을 얻은 자임을 믿는다.
내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주님께서는 내가 떨릴 정도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고난을 주기도 하신다.
하지만 이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은 구약적인 신앙이다.
신약적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된 생명이 흔들리지 않기에 그 고난을 통하여 속히 생명의 말씀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변치 않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원한 생명되시는 우리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오늘도 담대하게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 나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갈대와 같이 연약하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가 여기 있습니다.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것처럼 주를 찾기에 갈급한 자가 되어 혼돈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헤매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구원에서 밀려나지는 않을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성도 곧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그런 염려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음을 복음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요 아들이기에 결코 절대로 그 아들의 신분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설령 여러 가지 상황이 나를 어긋난 길로 이끌지라도 그것을 깨닫는 순간 속히 말씀 안으로 들어가 주님 앞에서 항복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나의 의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님을 압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의로 인하여 들어갈 뿐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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