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온도
노상비
겨울 햇살이 창가에 가득하다. 새해 연휴의 시간.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 속에 무념무상으로 햇빛과 노닐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거실을 휘둘러보는데, 쌓여 있는 책들과 정리되지 않은 자료 뭉치들이 가득 쌓인 것이 보였다. 바쁘게 달려온 시간의 흔적이다.
연휴 기간에 버려야 할 물건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정리의 기준은 필요 없는 것부터 버리는 것이다. 자료 더미가 많이 쌓여 있었고, 메모 용지와 스크랩한 기사들도 흩어져 있었다. 서류와 책들도 정리했다. 읽으려고 급히 주문했던 기억이 나는데, 주문만 하고 읽지 않은 책도 있었고, 책을 샀는데 또 구입하기도 했다. 기한이 지난 식품들도 많았고, 변색한 재료들
도 있었다. 물론 바빴다는 핑계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절제를 모르는 욕심의 소산들이다.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나의 뱃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심을 발견했다.
버린 줄 알았는데 또 가득해진 욕심. 그것은 소리 없이 다시 쌓이나 보다. 뱃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욕심과 욕망이 쌓이게 되면 사물의 진위 분별이 안 되는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원고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도 진전이 없다. 내가 쓰는 글들도 욕망의 소산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내가 쓰는 글의 정체가 알고 싶었다. 그 문제는 꽤 오래 나를 흔들었다
괴로움의 정체를 찾아 헤매는 시간 속에 엎치락뒤치락하며 마음속에 엉켜 있는 것들을 풀어내려고 애썼다. 그것은 내 글의 모양이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그냥 덮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한참을 부여잡고 있으며, 오랫동안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소파에 엎드려 있다가 베란다 창으로 비춰드는 겨울 햇살을 쫓아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러고는 거실 장식장 위에 놓여 있는 도자기에서 멈췄다. 항아리 모양의 도자기였다. 한참을 그 언저리에서 서성이는데, 기억이 또렷해 지며 '산 사기'와 '죽은 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다시 천천히 기억의 흐름 중앙으로 들어갔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데 이청준의 소설이었던 것으로 떠올랐다.
책을 버렸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하며 서재의 책꽂이를 더듬었다. 많은 책을 버려서 헐렁해진 책꽂이 구석에서 <불 머금은 항아리>를 찾았다. 이글이 나의 답답함을 풀어줄 것이라 기대하며 찬찬히 읽었다. 글을 읽어가면서 예전에 밑줄을 그은 부분을 더 유심히 보았다. 도공인 허 노인과 제자 용술의 이야기이다. 허 노인은 용술이 빚은 도자기를 매번 깨며 꾸짖는다. 단순히 도자기 모양만 만드는 기술보다. 도자기에 혼과 정성을 불어넣는 자세가 없다고 지적한다. 용술은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스승인 허 노인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사기는 고온에서 구워내는 도자기이다. 불의 온도가 중요하다. 허 노인의 가르침에 중요한 것은 '불 때는 법'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정신 자세를 이른다.
이 글은 예전에 읽었다. '산 사기' 와 '죽은 사기'에 감명받았는지 곳곳에 줄이 그어져 있다. '산 사기'는 도공의 정신과 혼, 그리고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는 작품을 이야기한다. '죽은 사기'는 겉모양을 갖추었으나 도공의 혼이 실리지 않아 생명력이 없는, 물질적인 욕망이나 타인의 시선에 굴복하여 만든 작품을 말하고 있다. 스승인 허 노인은 용술이 빚은 항아리를 매번
깨고 꾸짖었다. 실패작이라고, 후에 용술도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을 깨우치고나서, 자기가 구운 가짜 항아리를 스스로 깬다.
이쯤에 이르러 내 기분이 좋아졌다. 나의 글은 분명 '죽은 사기'인데, 왜 내 기분이 좋아진 걸까. '산사기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해졌기 때문이다. 불의 온도를 높여야지. 꽉 막혀 있던 위가 뻥 뚫리는 듯하다.
진짜 글과 가짜 글. 나도 용술처럼 진짜와 가짜의 글을 분별할 힘부터 키우리라. 욕심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앞지르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늦지 않은 시간에 잘라내면 된다. 실수를 많이 할수록 좋은 글을 쓸 수있다는 속담 같은 풍문이 있다. 참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도 진실한 마음으로 글을 쓰다 보면 진짜 글과 가짜 글을 구분할 수 있겠지. 그때는 가짜 글을 내 손으로 구겨서 휴지통에 버릴 수 있으리라.
겨울인데도 햇볕이 따뜻하다. 거실 창가에 기대어 아파트 뒷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또 세월이 가고 다가오는 새해라는 시간 앞에 서 있다. 써야 할 내 마음의 불 항아리가 보이니 몸과 마음이 가볍다. 시간을 향해 날아가는 나의 꿈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