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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신 4:32-40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38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39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40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신 4:32-40 / 하나님이 땅 위에 인간을 지으신 때로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역사를 모두 살펴보고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것처럼 위대한 일이 언제 어디서 또 있었습니까? 그와 같은 일이 어디서 소문이라도 났었습니까? 33) 여러분이 체험한 것처럼 일찍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 남은 민족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34) 고난 당하는 백성을 다른 강한 백성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자기 백성으로 삼은 신이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애굽에서 여러분을 바로 그렇게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온갖 이적을 행하시고 여러분을 괴롭히는 원수들에게 무서운 재앙을 내려 그들의 간담이 서늘케 하셨습니다. 주께서 친히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시고 강한 팔을 뻗쳐 여러분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35) 여호와께서 이 모든 일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만이 하나님이시고 그분밖에는 다른 아무 신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는 데에 있습니다. 36)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말씀하시고 땅에서는 여러분에게 큰불을 보여주시며 그 불 속에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7) 주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을 사랑하셔서 그 후손인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친히 큰 권능으로 여러분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38) 주께서 여러분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들을 여러분 앞에서 쫓아내시고 여러분을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셔서 그곳을 여러분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이렇게 여기에 와 있습니다. 39) 그러므로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서 참 하나님은 여호와뿐이시며 더 이상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깨달아 알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40) 또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하는 계명과 규정들을 잘 지키며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과 후손들이 모두 잘되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아주 주시는 땅에서 여러분이 언제까지나 평안히 살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과 출애굽의 사건을 재차 설명하며, 지나간 날 즉 과거의 역사를 통해 여호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니 그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고 선포합니다.
계시하시는 하나님(32-33) 모세는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 이후 지금까지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말합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고 상기시킵니다. 성경은 인간이 노력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와 말씀하시는 계시 종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세속종교와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34-36) 출애굽 사건은 다른 민족의 역사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역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는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업을 약속하신 하나님(37-38) 또한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인 너희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애굽에서 인도하여 나오게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너보다 강한 여러 민족을 쫓아내고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말씀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39-40) 모세는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명심하고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하면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말합니다. 구원 그 이후의 축복은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적용: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1957년에 제정되고 1987년에 개정된 어린이 헌장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두 11조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어린이는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1조)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라는 꿈나무의 토양은 따뜻한 가정입니다. 싸우는 가정, 억압적 분위기의 가정, 싸늘한 가정에서 내일의 꿈나무가 밝고 아름답게 자랄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햇볕을 듬뿍 쬐며 자란 아이와 사랑의 결핍 속에 시들시들하게 자란 아이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설 교 >
당대와 후대가 복 받는 길
신명기 4:32-40 / 이한규 목사
< 좋은 멘토의 중요성 >
분당에서의 교회개척 초기에 저희 교회에 은수(가명)란 아이가 다녔습니다. 둘째 딸 한나와 친구였는데 얼굴이 연예인처럼 예뻤고 키도 초등학생이 160이 넘을 정도로 컸고 성숙했습니다. 가정도 분당의 중형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절도 바르고 얼굴도 밝았습니다. 멀리서 저를 보면 막 달려와서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밝게 인사하니까 더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 아이가 어느 날부터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아이는 나오고 싶어 했지만 성당에 다니는 부모가 못 나오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성당에 다니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계속 교회출석을 권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약 2년 후 그 아이가 학원 건물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모는 딸의 정확한 사인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경찰도 사건을 금방 종결시켰습니다. 평소에 워낙 밝은 아이였기에 저는 자살소식이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워낙 외모가 탁월했기에 강제폭행을 피하려다가 생긴 사고사나 자살로 위장한 타살 등등의 여러 의문도 생겼습니다. 그때 가장 안타까웠던 생각은 왜 교회를 잘 다니는 아이를 부모가 막았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엄마는 딸아이의 죽음으로 땅을 치고 통곡했습니다.
자녀를 학교나 학원에만 맡길 수 없습니다. 이단 교회가 아닌 정상 교회라면 영혼을 살피고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 기도해주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교회만큼 자녀를 안심하고 맡기기에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십일조 문제로 교회가 싫다고 하지만 자발적인 사랑의 십일조가 뭐가 나쁩니까? 십일조에 마음이 안 열렸으면 안 드리면 되지 남이 드리는 것까지 잘못이라고 할 일은 아닙니다. 한국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십이조나 십삼조도 기꺼이 씁니다. 그처럼 교회를 사랑하면 십일조 이상도 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의 위선에 실망했다고 자녀들의 교회출석을 막습니다. 가끔 목회자의 추문이 언론에 대서특필되거나 평소 행실이 별로인 사람이 갑자기 목사가 되어 나타나면 목회자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이 커집니다. 그러나 크게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늘 가식도 있고 가짜도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도 어느 때는 진실하지 못할 수 있고 인격적인 사람도 어느 때는 비인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이 있다고 그 현실을 보편화시켜 진리를 포기하고 교회출석을 포기한다면 사탄의 작전에 말려드는 셈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교회에서 잘못 배워 바른 길에서 이탈하고 극단주의에 빠질까봐 자녀들의 교회출석을 막습니다. 그런 염려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가짜 기적, 가짜 치유, 가짜 은사를 내세워 영혼을 망치는 교회도 분명히 있습니다. 가짜 기적, 가짜 치유, 가짜 은사를 내세워 미혹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을 비판하면 마치 기적과 치유와 은사를 부인한다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가짜 기적, 가짜 치유, 가짜 은사에 속지 말라는 말은 기적과 치유와 은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외에도 교회와 교인과 목회자의 허물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일반인들에게는 보편적인 허물이 교회와 교인의 경우에는 큰 추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도덕적 기준을 달리 두고 위선을 논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다 약한 존재요 늘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믿지 말되 누구를 쉽게 위선자라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더 나아가 교회와 관련된 추문에 휘둘려 인생과 가정과 자녀의 운명을 걸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교인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교회출석을 포기하지만 그런 사기도 세상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그처럼 도덕적인 수준을 달리 적용해서 위선을 논하고 기독교를 배척하는 것은 불행한 태도입니다. 사실상 도덕 수준을 달리 두는 것 자체가 기독교인들은 더 나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위선이든 어떻든 더 나아지고자 하는 추구까지 막는다면 그것이 자녀들에게 유익이 될까요? 위선자가 되면 안 되지만 남을 위선자라고 쉽게 정죄해도 안 됩니다. 자기 허물을 생각하면 그런 정죄와 비판이 쉽게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선에 대한 추구가 생길 때부터 동시에 위선의 가능성도 생깁니다. 선을 추구할 마음조차 없다면 위선자란 말을 별로 들을 일도 없습니다. 선의 추구가 있기에 위선자란 말도 더 듣지만 그나마 양심은 덜 죽습니다. 그 양심이 영혼과 가정과 인간관계를 조금이라도 더 지켜주는 내적인 파수꾼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안 믿어도 현명한 부모는 자녀의 믿음생활을 막지 않습니다. 자녀의 믿음생활을 막고 자녀의 축복을 바라는 것은 모순입니다.
물론 자녀가 이단 교회에 빠져서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고 균형감각과 현실성을 상실하면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아빠는 자기는 믿지 않아도 자녀들이 교회에 간다고 하면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최소한 자녀가 바른 교회를 다니게 합니다. 인터넷 검색만 해도 잘못된 교회는 거의 걸러집니다. 그것도 일종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른 교회라고 판단되면 자녀가 교회를 잘 다니도록 배려하는 것이 자녀교육 문제에서 천군만마를 얻는 비결입니다. 그런 교육적인 지혜를 외면했다가 나중에 통곡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습니까?
혼자 힘으로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부모는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잘 되려면 좋은 멘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좋은 목회자만큼 좋은 멘토는 없고 좋은 교회만큼 좋은 멘토 공동체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성적관리만 하지 말고 태도와 인격과 성격관리도 하고 더 나아가 자녀가 잘하는 분야의 스승이나 장인을 만나서 재능이 발휘되도록 스승관리나 장인관리도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잘해야 할 것은 자녀에게 믿음과 사랑을 전해줄 좋은 멘토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고 좋은 멘토와 연결시켜주는 멘토관리입니다.
참된 믿음의 유무를 떠나 지혜로운 종교인을 옆에 두는 것은 대통령도 필요하고 정치인도 필요하고 기업인도 필요합니다. 개인 무속인을 두어 수시로 점을 치라는 말이 아니라 종교인의 지혜도 빌리고 기도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교인이 때로 밀어주기도 하고 때로 브레이크도 걸어주면 실패가 크게 줄어듭니다. 특히 좋은 목회자가 좋은 멘토가 되어준다면 자녀교육 문제에서 천군만마를 얻게 됩니다. 그런 소중한 축복을 교회관련 추문 때문에 포기하거나 막는다면 얼마나 큰 손실입니까?
대형교회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장점이 많은 편이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단점이 많은 편입니다. 그 중에 치명적인 단점 중의 하나가 수직관계의 단절입니다. 교회가 크니까 같은 또래로 부서를 나누면서 ‘또래와의 교제’는 얻지만 ‘세대 간의 교훈’은 얻지 못합니다. 요새 가정과 사회도 세대 단절도 신음하는데 교회에서조차 세대 단절이 극복되지 못한다면 자녀들은 통전적인 시각을 가질 기회를 잃습니다.
또래 친구와 어울리면 ‘재미’는 얻지만 ‘의미’는 별로 얻지 못합니다. 물론 좋은 친구를 사귀면 좋지만 대개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또래 친구와 어울리다가 같이 길을 잃을 때도 많습니다. 반면에 연로하신 어르신들과 어울리면 어르신들의 식탁 봉사 등을 통해 섬김과 충성과 효성을 배우고 어르신들의 아낌없는 기도와 관심과 사랑을 받습니다. 또한 장년의 부모 세대와 어울리면 귀한 멘토도 얻고 지혜도 얻습니다. 또한 손아래 어린이들과 어울리면 순수함도 찾고 어린이들을 돕고 이끌면서 의젓함과 리더십도 배웁니다. 얼마나 복된 세대 소통입니까?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교회는 3대가 어울릴 때 교회답게 됩니다. 또래와만 어울리면 통전적인 사고와 시야를 얻기 힘듭니다. 사회는 세대 단절로 진행되어도 교회는 세대 통합의 역사를 이뤄내야 합니다. 물론 인생에서 또래 친구도 중요하지만 또래 친구는 학교나 다른 사회 공동체에서도 얼마든지 사귈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까지 또래 친구와만 어울리려고 하면 또래 친구는 대개 미성숙한 경우가 많은데 그런 친구와 어울리며 지내다가 그 친구와 멀어지면 교회도 멀어지고 신앙도 멀어질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또래 친구나 동료 교인보다 좋은 목회자 멘토입니다. 그러나 좋은 인간 멘토보다 더욱 중요한 가장 위대하신 멘토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참된 성공과 축복과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게 하고 예배하는 삶과 감사하는 삶을 가르쳐서 자녀의 복된 삶을 예비해야 합니다. 복은 후대까지 지속되어야 진짜입니다.
< 당대와 후대가 복 받는 길 >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앞두고 모세가 죽기 전에 했던 세 편의 고별설교로 이뤄진 책입니다. 본문은 1차 고별설교의 결론 부분인데 본문 마지막 구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이 구절에서 “한없이 오래 산다.”는 말씀은 “오래 장수한다.”는 뜻보다는 “오래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해야 당대와 후대가 복을 받고 그 복된 삶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을까요?
1.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십시오
모세는 지나간 날에 있었던 하나님의 기적적인 일을 상고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대성을 강조했습니다(32절).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400여 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특별한 사전 준비나 독립운동이나 변변한 무기도 없이 고대 최강국이었던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또한 출애굽 후 40년 동안 약 200만 명이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파죽지세로 많은 족속들을 몰아내고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손길과 인도와 보호 때문이었음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내일의 복을 예비하려면 과거의 복을 깊이 묵상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씽크(생각하다, think)에서 쌩크(감사하다, thank)는 어원이 같습니다. 씽크(생각하다, think)를 통해 쌩크(감사하다, thank)를 하면 쓰라이브(번영하다, thrive)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즉 지난날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 미래와 후대에 복된 역사가 넘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모세는 유일신 사상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도전했습니다(35-36절).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순종은 복된 삶을 위한 필수 전제조건입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요구가 많으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만 동참하고 순종하면 힘을 많이 얻습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희생하고 순종하면 자기만 손해 같지만 오히려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복된 길이 열립니다. 세상에서도 순종하면 길이 잘 열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나 길이 잘 열리겠습니까?
말씀은 실천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지식은 교만을 나타냅니다. 말씀의 실천을 남에게 요구하면 공동체가 피곤해지지만 말씀을 앞서 실천하면 공동체가 힘을 얻습니다. 남에게 요구하는 인간상을 먼저 갖추고 먼저 십자가의 진리를 실천하십시오. 자신이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 안에 묻혀 계시지만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면서 바로 그때 각종 어둠도 사라지고 복된 앞날도 펼쳐질 것입니다.
3. 사랑받는 부모가 되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해 큰 권능으로 출애굽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려고 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그들의 조상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37-38절). 이 말씀은 사랑받는 조상이 되는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선택된 존재가 되길 원하면 그냥 기도만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사랑 받는 부모가 되려고 하십시오.
자녀의 축복은 선대가 씨를 뿌린 것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씨앗을 삶아 먹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주신 물질, 직장, 사업, 자녀, 재능, 자리 등을 자신을 위한 양식으로만 삼지 말고 내일과 후대를 위한 축복의 씨앗으로 삼으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당대와 후대에 복을 주시고 그 복을 오래도록 지속시켜주실 것입니다(39절).
< 참된 예배자가 되십시오 >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생기는 가장 뚜렷한 삶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일에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다른 많은 복을 내려주십니다. 죄인과 의인의 차이는 예배하는 삶을 통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죄인은 예배를 통해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죄를 지어야 일시적인 기쁨을 느끼지만 의인은 예배를 통해 기쁨을 느끼고 힘을 얻고 참된 만족을 얻습니다.
어떤 성도는 형사로 지내면서 30년 동안 죄인만 상대하며 험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예배를 통해 은혜를 체험한 뒤 3년 동안 예배만 드리면 창피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너무 기쁘고 감격이 되고 은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수많은 복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어집니다. 예배가 죽으면 다른 것도 점차 다 죽게 되고 예배가 살면 다른 것도 점차 다 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치유와 축복과 능력을 받습니다.
너무 삶 자체와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사람을 궁극적으로 살릴 수 없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람의 방법만 가지고는 길이 얽혀집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나라나 모든 축복이 사실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스!”라고 하면 예스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예스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평생 주일예배의 축복을 놓치지 마십시오.
삶 자체가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닙니다. 결국 불신이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내일, 내년, 내세까지 복을 지속시킵니다. 예배를 가까이하면 인생과 가정이 다 회복됩니다. 세상의 모든 축복의 원천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즉 평안, 행복, 풍요, 승리, 영광, 능력의 축복들이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을 통해 당대와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4:32-33 / 피영민 목사
신명기의 전체적인 구조는 고대 근동지방에서 왕과 신하들 사이에 맺던 종주권 언약 문서의 구조와 동일합니다. 종주권 언약 문서는 다섯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첫째, 전문(Preamble)입니다. 계약의 체결자 왕과 신하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기록해 둔 부분입니다. 둘째, 역사적 서언(Historical Prologue)입니다. 이 부분은 왕이 신하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기록되었습니다. 셋째, 의무사항(Stipulation or Duties)입니다. 왕이 신하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해 주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왕이 신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서 기록해 둔 부분입니다. 넷째, 상벌규정(Blessing and Causes)입니다. 왕이 요구하는 의무사항을 잘 수행하면 얻게 될 상과 거부하면 받게 될 벌이 무엇인지를 기록해 둔 부분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문서의 보관과 정기적 낭독(Deposit and Periodic Reading)입니다.
신명기 1~4장은 고대 종주권 언약 문서의 전문과 역사적 서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왕이 여호와시고 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기록해 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아모리 왕 시혼을 이기게 하셨고, 바산 왕 옥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이를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고, 마지막 신명기 4장에서는 더욱 중요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내산에서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33절입니다. 이 구절에 신명기 4장의 전체적인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모세는 “사람을 지으신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 이외에 불 가운데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은 사람이 있었는가?”라고 감탄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죽지 않고 살게 된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들 말고 누가 또 있느냐?”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33절에 기록된 구절 속에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Ⅰ.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말씀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침묵하는 분도 아니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말씀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시시각각 분분초초 여러 가지 방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장로교 목사 가운데 프랜시스 쉐퍼라는 분은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스위스에 복음주의 공동체인 ‘라브리’를 세운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많은 저서 가운데 신학교 필독서로 선정된 책들이 두 권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성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Reason)』라는 책입니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부인하면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결국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고 이성으로부터 도망갈 수밖에 없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논증한 내용입니다.
둘째, 1972년도에 출간된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해도 침묵하시고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 10~14절에서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사건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불꽃과 연기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음성을 귀로 직접 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모습을 뵌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육안으로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러나 형상을 볼 수는 없어도 음성을 들을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 33절에 모세는 하나님을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만약 성도가 술을 마시고 방탕한 삶을 살면 하나님은 그에게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외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도적질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수없이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우상의 특징은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거짓 선지자 850명이 영적 대결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참된 신인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불로 분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단 앞에 춤을 추고 자해하여 피를 흘림으로 불이 떨어지기만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별짓을 다 해 보았지만 그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7절에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섬기는 신은 외출을 나갔는지, 잠이 들었는지 왜 불러도 이토록 대답이 없느냐?”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도록 아무런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고 그들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는 철저히 무능한 신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들어주시고 시시각각 말씀도 주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시며 성령으로도 말씀하시고 자연으로도 말씀하십니다. 시편 115편 4~8절에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우상처럼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상은 형상을 다 가지고 있지만 그것 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하나님은 형상을 뵐 수 없는 대신 모든 기능을 다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을 말하지 못하는 우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연 세계의 질서나 인류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를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라고 합니다. 일반이라고 붙인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동일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산을 보고, 태양을 보고, 달을 보고, 아름답게 물 들은 단풍나무들을 보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인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자나 역사가들은 모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밝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반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죄인 된 인간이 어떻게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특별한 계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 전반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이사야, 호세아, 요엘, 아모스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배우고 실천하여 기록한 내용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신구약성경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신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도 없고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누구라도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연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고, 성경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살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분이시라면 설교는 아무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설교를 들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는 분이시기에 설교를 하고 또 들으며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늘 경청하고 그 말씀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 바랍니다.
Ⅱ.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불 가운데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들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다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듣는 특권을 주신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신 이유는 이들이 숫자가 많은 거대한 민족이거나 머리가 좋은 탁월한 백성들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말씀을 주시기로 이 민족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말씀을 주시기로 이들을 선택하셨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택과 말씀을 듣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이유도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하심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3~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성경을 멀리 하지 마시고 가까이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귀로 듣기는 잘 듣는데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밥을 준비하고 아이에게 “와서 밥 먹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예!”라고 대답하고 밥 먹으로 옵니까? 안 옵니까? 두 번 세 번 해도 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결국 야단을 맞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듣고 대답은 하지만, 순종하지 않는데 말씀을 들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은 반드시 말씀에 대한 순종을 포함합니다.
저는 72학번인데, 학창시절 유명한 가수가 있었습니다. 남성 2인조 가수인 ‘Simon And Garfunkel’입니다. 이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 가운데 ‘Sound of Silence’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의 가수 중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사람들이 말은 많이 하지만 진심을 말하지 않고, 듣기는 들어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를 봐도 밭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길가 밭은 어떤 밭입니까? 말씀을 들어도 마귀에게 그 말씀을 금방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방금 설교를 들었지만,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면 설교 본문이 어딘지도 까먹어 버리는 사람의 마음 밭이 길가 밭과 같은 사람입니다. 새가 와서 다 물어가는 것입니다. 돌 밭은 어떤 밭입니까? 환란이 오면 그 즉시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가시떨기 밭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지만 먹고 살 일이 생기면 예배 드리기를 포기하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자라지 못하고 막히는 경우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로는 말씀의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좋은 땅에 씨가 떨어져 말씀을 순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좋은 땅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만이 좋은 땅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하나님이 이 시간에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는지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오늘 순종해야 할 말씀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말씀을 순전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자가 누구이든지 관계없이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받아들일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교육전도사가 설교를 해도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설령 발음이 좋지 않은 설교자가 설교를 해도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성경과 설교를 통해, 그리고 양심과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늘 귀 기울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Ⅲ. 백성들의 생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
33절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부르심을 받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아가 살아남은 것과 똑같은 차원의 일입니다. 직접 말씀을 듣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존 자체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데 달려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번영하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데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생존의 문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시기에 절대로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그 앞에 절하지도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생존 자체가 위험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하나님이 질투하는 분이시기에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 숭배하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더라도 속히 망할 것이고, 너희를 열국 중에 흩어 버리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존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4장 40절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손들이 복을 받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또 4장 6절에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거절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명기 30장 15~20절에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택하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28세 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이전에는 술을 많이 마시고 방탕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공군 장교였기 때문에 퇴근하면 늘 상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몰랐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에 술을 마셨던 것입니다. 허무한 마음에 채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는 우리의 생명이 유지될 수 없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복을 받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 론
1517년 종교개혁의 회복은 하나님 말씀의 회복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순종하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택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것입니다. 택하심의 은혜가 없는 사람은 들을 수도 없고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인 것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듣고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신명기 4:32-40 / 崔仁根 牧師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 작품을 수집하며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이 들었고 곧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붙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 엄청난 재산의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작품들 중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제목의 보잘 것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걸작들을 놔두고 보잘 것 없는 한 아이의 그림을 누가 사가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눈물을 글썽이며 그 그림을 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내 모든 소장품을 가질 것입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 하인은 어린 시절 그 집 아이를 돌보며 키웠던 추억을 더듬으며 비록 자신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 집 아이를 곁에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따뜻한 마음씨로 일확천금을 가지게 되는 기적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신명기 4장은 이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학대 받으며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적 같은 사랑으로 출애굽 시키시고 광야에서 연단하신 다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모세를 그들을 인도 할 지도자로 세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사를 진행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와 같은 놀라운 사랑의 마음과 뜻을 이해조차 못한 채 틈만 나면 원망하고 불평하며 애굽으로 되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가슴에 간직하고 지켜야 할 도리인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하시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면 “한 없이 오래 살리라!”고 비장한 축복을 보장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40)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없이 오래 사는 장수가 바로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결과가 바로 장수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축복의 달 9월을 마지막 보내면서 이 종도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바로 이렇게도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기 원하여서 오늘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모쪼록 들을 귀를 준비하시고 귀한 말씀을 받아서 자손 대대로 복을 누리고 장수하는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오늘만 보지 말고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민 14:22-23 /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결코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오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는 저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던 그들은 끝내 20살 이상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한 60만 명이 다 죽어 광야에서 장사되었기 때문입니다.
민 14:26-33 /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두 자기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하였던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죽게 되고 그 후손들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유리하며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렇게도 끔찍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당해야만 하였을까요? 눈앞에 있는 오늘의 고통만 생각하고 장차 누리게 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계획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출애굽한 후 그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였습니다.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두려움의 대상인 가나안 7족속들과 싸울 생각을 하면 왜 절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그 누구라고 원망하며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그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안목이 좁고 영안이 닫혀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인내하지 못하고 오늘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사실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끼리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모든 소리를 다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 14:26-27)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기대하지 않았던 고통과 시련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직장의 상사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믿었던 친구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한국에서는 한 아버지가 직장의 나이 어린 상사가 너무나도 힘들게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나이 어린 상사가 오죽 힘들게 하였으면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겠습니까? 이렇듯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오늘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내일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군 다윗도 우리들의 이와 같은 어려움을 공감하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시37:5-9)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말씀은 이 종이 평생을 가슴에 새기며 힘든 목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삶의 큰 도움으로 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의 고통만 보지 말고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대하며 끝까지 참고 견디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승리하라고 우리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성경 말씀을 주시고 그 속에서 진정한 길을 찾으라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우상이 없어야 합니다
신 4:3-4 /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이 사건은 민수기 25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물고 있을 때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연애하고 그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알브올을 섬기고 그 신들에게 절하며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서 그런 모든 남자들을 태양을 향하게 하고 목을 매달아 죽이는 끔찍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우상숭배를 싫어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처럼 우상숭배 하는 일을 철저하게 금하시고 경고하시고 계십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자신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고 그 누구를 막론하고 우상숭배 하는 자들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말씀하셨으므로 이런 자들은 그 즉시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됨으로 장수하고는 거리가 먼 어리석은 자들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신4:23-26)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다소 위로를 받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우상을 만들거나 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상은 결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야 할 마음이 이 세상 그 무엇에 빼앗기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식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잘 살아가고 있을 때에 스스로 부패하여 우상을 두게 되는 것을 하나님은 미리 경고하고 계십니다.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신4:25)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24시간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몇 퍼센트나 향하고 있을까요? 오늘날 하나님을 향하여야 할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기록된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결혼한 부부나 교제를 하고 있는 남녀들이 자기 아닌 다른 상대를 자기처럼 만나고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요? 단 1%도 용납하거나 이해하거나 눈감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며 절교하고 돌아서거나 이혼하며 끝장을 내고 말 것입니다. 같은 사람들도 이렇다면 하늘의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하실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장수의 축복을 전제로 하시며 이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하나님은 사람처럼 속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늘 우리들에게 자손도 재물도 건강도 장수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또 섬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오래토록 자손들과 함께 복을 누리며 한 없이 오래 살아가는 축복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형제 둘이 참으로 우애 넘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동생이 금덩이 둘을 발견했습니다. 동생은 얼른 집어서 형에게 한 개를 주고 자기 자신도 한 개를 가졌습니다. 그러고 한참 길을 가다가 두 형제는 각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에이그! 이 길을 나 혼자 갔더라면 둘 다 내 것인데......, 괜히 형님한테 한 덩이 뺏겼네." “저 녀석이 저는 큰 것을 갖고 나는 작은 것을 주었겠지? 내 눈에 먼저 좀 띄질 않고......." 그러면서 둘은 마음이 편하질 않아서 "어이구나! 이것도 감지덕지지......, 감사할 일이야." 하면서 길을 가는데 다시 둘 다 내 것이었으면 하는 생각에 갈등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한참 길을 걷다가 강을 건너려는데, 동생이 금덩이를 번쩍 들더니 "에이 요사스런 골칫거리 이놈을 버려야겠다." 하면서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형이 깜짝 놀라 "아니! 왜 그 귀한 금을 버리느냐?" 아까운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네, 제가 평소에 형을 따르고 존경했는데 이놈이 생기고부터는 별놈의 생각이 다 들어서 아주 위험한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 역시 "네 말이 맞다! 나도 실은 그랬다. 이놈은 마음에 병을 주는 요사스러운 놈이야." 하면서 금덩어리를 던져 버렸습니다.(열왕기하5:20-27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됩니다
신 4:39-40 /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신 28:1-3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아이들을 낳아 키워보면 참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면 마음에 가시가 되고 고통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부모라면 그 누구라도 경험하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오늘 우리 성도들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객관적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 할 때는 가차 없이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이스라엘 백성 60만 명을 단숨에 죽이신 사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축복을 제공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인용해 드린 오늘 본문 말씀과 신명기 28장의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 이와 같은 말씀들을 기록하여 두시고 우리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축복과 저주 이 두 길 중에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 할 것이니라(신30:15-18)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축복과 장수를 누릴 것인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적당하게 사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잘 말고 잘 살수록 하나님의 은총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 꼭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토록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는 말씀 또한 이와 같은 사실을 정확하게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새겨두고 간직해야 할 고귀한 말씀인 줄 믿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믿음을 만들고 믿음이 있어야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으로 믿음을 만들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한 없이 오래 사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멕시코에 사는 홍인종들은 "믿는다."는 말과 "순종한다."는 말을 한 단어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믿으면 당연히 순종하게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노아는 `홍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에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혀 전망도 보이지 않는 일을 당신에게 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순종은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 주님, 저희가 사는 날 동안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여러 방법으로 인도하시나
신 4:32-40 / 유관지 목사
우리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평화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럴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의로 인도하시고(시5:8),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시18:19),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시23:3),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고(시27:11),
인도하시며 지도하시고(시31:3),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고(시48:14),
주의 교훈으로 인도하시고(시73:24),
흑암과 사망의 길에서 인도하시고(시107:14),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시17:28),
영원한 길로 인도하시고(시139:24),
공평한 땅으로 인도하십니다(시143:10).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다'라는 말이 수없이 나오는데 특히 두 군데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하나는 출애굽과 관계된 기록들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시편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모두 시편에 있는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 하나, 하나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가정을 인도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나라를 인도하십니다.
세계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역사를 인도하십니다.
사순절에 힘써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묵상인데 여러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셨나, 우리 가정을 인도하셨나, 우리 교회를 인도하셨나, 우리 나라를 인도하셨나, 세계를 인도하셨나, 역사를 인도하셨나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인도하신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생하고 체험적인 일들을 구체적으로 많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양교회를 인도하신다' 이 믿음이 제가 목양교회에서 목회하는데 가장 힘이 되는 것입니다.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잡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뿌리치는 일이 많았지요.
사순절이 우리를 붙들고 이끄시는 크고 부드러운 손, 사랑의 손을 발견하고 그손의 따뜻한 기운을 느끼고, 그리고 그 손을 마주 꼭 잡는 때가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때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318장) 저희가 좋아하는 찬송이지요.
때로는 채찍으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알게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도하십니다.
신명기에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 세 편이 실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첫 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인데 모세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출애굽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면서 '아. 시험은 이것을 말하는구나' '아. 이적은 이것을 말하는구나' 찾아내고 분류해서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제가 '시험은 이것을 말합니다' '기적은 이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적었다가 성도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아서 전쟁의 경우 하나만 남기고 원고에서 다 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전쟁도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전쟁은 애굽의 군대가 쫓아왔을 때의 일을 말합니다(이것이 제가 하나 남긴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대단히 위험하게 되었을 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행14:13 중) 했습니다.
이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행 14:14) 했습니다. 여기에서 '성전(聖戰) 사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즘은 종교끼리의 싸움, 또는 주된 종교가 다른 나라끼리의 싸움을 성전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의 성전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쪽이 다른 쪽과 싸울 때, 특히 하나님의 인도를 방해하는 쪽과 싸울 때, 하나님이 자신이 인도하는 쪽의 편이 되어서 싸우는 싸움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가운데 가장 큰 사건과 연관하여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 전쟁은 하나님이 우리를, 역사를 인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구나!'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라크 전쟁이 왜 일어났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세계 평화 유지와 테러 방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후세인의 고집때문이다'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미국의 욕심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의 패권주의 때문에, 석유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서, 중동지역에 미국 세력의 벨트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비난이 점점 거세어져서 오늘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반전시위가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매스컴도 이제는 전황 보도와 함께 그런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또 문화유적 파괴에 대한 염려를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그 지역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유적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곳에는 바벨탑의 자취라고 여겨지는 유물도 있고, 구약 역사의 출발점이 되는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가 이라크 안에 있고.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요나서를 강해하고 있는데 요나서의 무대가 되는 니느웨가 이라크 안에 있습니다. 이곳은 또 예루살렘이 패망하고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그래서 성서와 관련된 많은 유적지들이 이라크 안에 있습니다.
이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 성서의 세계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있는 세계의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전쟁도 하나님이 역사를 인도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 기운데 하나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인도하기 위해서 이 전쟁을 사용하시나, 그것은 지금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 시간이 좀 지나야 알게 됩니다.
또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 일반 역사가들, 정치인, 계층에 따라서 말하는 것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6·25를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이후 분열과 갈등과 혼란, 특히 교회의 분열에 대해 하나님께서 드신 사랑의 채찍입니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6·25는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 때문이고 젊은 세대들 가운데 는 6·25를 외세 때문에 일어난 대리전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고, 이렇게 해석이 다릅니다.
우리는 성서의 시각에서 이번 전쟁을 보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기독교인은 한 손에는 성서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현실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야 한다고 했는데 신문에 큼직하게 기록되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알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신문은 겉만 말하지만 성경은 속까지 말합니다.
신문은 보이는 것만 말하지만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도 말합니다.
세상이 모든 것은 빙산과 같아서 물위로 드러난 부분보다 물밑에 감추어진 부분이 더 큰 데성경은 그것을 알게 해 줍니다.
한 가지, '최근 십여 년 사이 세계는 걸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세 번의 큰 전쟁을 겪었고 또 지금 겪고 있는데 왜 그 세 번의 전쟁이 모두 이슬람권에서 일어났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슬람 선교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전쟁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세에 전쟁의 소문이 있고 전쟁이 일어날 것인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끝은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마24:6∼8).
예언자들은 전쟁을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이나 교만한 이방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전쟁을 믿음에 대한 시험과 종말에 대한 표징 가운데 하나로 보면서 마지막 평화의 시기가 오기 전에 대규모의 성전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b)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는 여호사밧 왕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사밧은 남왕국 유다의 왕입니다. 여호사밧 왕의 이야기는 역대하 17장에서 20장까지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습니다.
잘못한 일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과 자주 동맹을 맺은 일입니다.
그는 북왕국의 아합 왕과 동맹을 맺고 아람과 싸웠습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를 괴롭히던 그 왕입니다. 이 싸움에서 아합 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선견자 예후가 이 일을 가지고 여호사밧 왕을 규탄했습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
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대하19:2 중) 엄하게 꾸짖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역시 악한 왕 아하시야와 동맹을 맺고 해상연합작전을 펴다가 배들이 부서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잘한 것은 개혁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백성들 사이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이지요.
재판관들에게는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라"했고 제사장과 지도자들에게는 "너희는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라"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이렇게 개혁운동을 한참 일으키고 있을 때에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크게 두려워하면서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모여서 여호와께 간구하는데 야하시엘이라는 레위인이 이렇게말합니다. 여러분 역대하 20장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681쪽).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b)
여호사밧 왕은 이 말에 크게 용기를 얻어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으지어다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20: 20중)하고 싸움에 나서는데 21절을 보세요, 앞에 거룩한 예복을 입은 찬양대를 세웁니다. 이상한 작전입니다. 군악대는 후방에 있다가 싸움에서 이겨 어디를 점령했을 때 입성식을 할 때나 동원되는 것이 상식인데 여호사밧 왕은 군악대를 선봉으로 삼았습니다.
예복 입은 찬양대가 앞에 서서 찬송하는데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대하 20:21)라고 찬양합니다
그 싸움에서 여호사밧 왕은 적을 전멸시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전쟁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까?
첫째,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하심이니라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합니다.
본문 앞의 4장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다 생존하였느니라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않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돛단배가 심한 파도를 만났습니다. 선장을 파도를 뚫고 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다가 마지막에 선원들에게 밧줄로 자기를 배의 돛대라든가 튼튼한 곳에 묶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가 만일 배가 깨지면 뱃사람답게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얼마 뒤에 바람이 가라앉았습니다. 선장의 명령에 순종한 선원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선장의 명령을 듣지 않은 선원들은 파도에 휩쓸려 자취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꽉 묶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풍랑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배는 깨지는 법이 없습니다. 다른 배들은 다 깨져도 하나님이라는 배는 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합니다.
신명기 4장 5절과 6절의 앞부분은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아,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이 하시는구나!'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 싶으시지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라크 전 관련 기사에 인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3월 20일 자 「조선일보」1면 기사인데 기자가 쿠웨이트 미 제5군단 공격지휘소를 방문해서 쓴 기사입니다.
이 기자는 공격지휘소의 여러 가지 긴장된 모습을 전하고 이런 말로 기사를 끝냈습니다.
이날 아침부터 무시무시한 사막의 돌풍이 밀어닥치기 시작해 이곳 집결구역은 1m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모래바람에 휩싸였다. 막사 안에서는 군인들이 '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를 결심했네 돌아오는 길은 없나니…'라고 합창하는 구슬픈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를 결심했네 돌아오는 길은 없나니…' 싸움터에서 어울리지 않는 찬송이지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하는 복음성가를 기자가 이렇게 모르고 이렇게 번역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찬송을 들으면 감동을 받아야하는데 구슬프게 들렸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군인들,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서양 격언하나가 자동적으로 떠올랐습니다. 'There is no atheist in the fox hole' '참호 속에 있는 병사 치고 무신론자는 없다'는 격언입니다. 위기를 만나면 누구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전쟁터에서는 군목들의 역할이 커집니다.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미군 부대의 군목들 가운데는 재미동포 젊은 목사님도 한 분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인류 역사 전체가 참호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참호라고 하면 '총탄이 날아오는 곳'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미사일이라고 날아다닙니다. 파괴력이 더 커지고 무서워졌습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해야합니다. 케네디는 '인류가 전쟁을 끝나게 하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대로 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합니다.
신명기 4장의 중간 부분은 우상을 섬길 때 임하는 저주를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25절과 26절을 보세요.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라
이 말씀은 통일을 바라고 있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통일이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입니다.
통일은 복음에 기초를 둔 통일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을 들고 들어가 이루는 통일은 속히 망하는 길이 될지도 모릅니다.
대조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끝, 신명기 4장39절과 40절입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기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선명한 대조입니다. '우상 섬기면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멸망,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둘째, 하나님께서 전쟁을 포함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교훈하시기 위해서입니다.
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과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며 복을 준다, 내가 하려는 일, 내가 인도하는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로도 막지 못한다, 홍해도 막지 못한다, 광야도 막지 못한다, 모압이나 암몬이나 블레셋 같은 이방부족들도 막지 못한다, 이런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서는 모세의 설교인데 그 표현이 아주 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축복에 대해서 말할 때도 강하게 말하고 저주에 대해서 말할 때도 아주 강하게 말합니다. 대조를 해서 말하기도 하고 질문하는 형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왜 이렇게 강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이 세대는 홍해를 갈라지는 것을 보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대는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 죽었습니다. 그 세대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땅이 갈라져서 모세를 거스르는 고라와 그에 속한 사람과 재물을 삼켰고 불이 나와서 당을 지은 이백오십 명을 불사르는 심판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지금 요단 강 동편에서 모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갈렙과 여호수아만 빼놓고는 그것을 겪지 못한 신세대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모세는 이와 같이 강렬한 표현을 힘써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6·25를 겪지 않은 세대에게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설명하려면 참 어려워서 우리는 포기하고 그들이 떠드는 데로 방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모세를 본받아 강렬한 표현으로 교훈을 주기에 힘써야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전쟁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37절과 3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역설 같지만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6·25에 대해서 말할 때 '6·25는 하나님의 채찍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오늘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채찍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의 채찍'이라고 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시험 속에서, 환난 속에서, 병에 시달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요약합니다.
전쟁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않게 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상 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유는 여러가지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전쟁이 빨리 끝납니다. 깨닫지 못하면 깨달을 때까지 전쟁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40절의 말씀과 같이 저희와 저희의 후손이 복을 받아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 대해 세상이 말하는 것들도 참고로 하세요.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오늘 드린 말씀을 기준으로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전쟁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신 4:32-40 / 조성훈 목사
세상에는 신이 참 많습니다. 인도에는 3억 3천 가지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숭배하는 신이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실상은 의지하는 신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따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들 중에는 신을 숭배하는 짐승이 없습니다. 소나 원숭이가 자신의 먹이를 차려놓고 절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모세가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세상에 그런 신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들은 말할 수 없고 나타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많은 재물을 불살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백성들 중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인도나 네팔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소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믿고 섬기는 신은 짐승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자신을 직접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모세와 아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선시대에 살았던 이순신 장군이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명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자신을 보여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하나님을 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얼마나 큰 이적을 보이셨습니까. 수많은 재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세상의 어떤 신이 그 많은 민족을 광대한 나라에서 구출해 낼 수 있을까요. 홍해를 가르신 것은 어떻습니까. 그 놀라운 일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크게 감격하고 찬양했습니까. 그러나 이후에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요? 이것이 사람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우리 민족처럼 특권을 받은 민족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고기를 주셨으며 신발과 의복이 닿지 않게 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것이나 이방인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수없이 인간들에게 나타나셨고 또는 천사를 보내셔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사 람은 보이는 것을 좋아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무언가 만들어서 섬기기를 원합니다. 달과 별을 섬기는 사람이나 바위나 돌단, 산과 강, 짐승 등을 섬기는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어떤 신을 섬기든지 간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얼마나 큰 특권을 가진 사람들인가요. 수백 마리의 병아리를 키울 때 그들의 운명은 무엇입니까? 그들 중 뛰어난 병아리도 아름다운 병아리도 삼계탕이 되는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돈이 많은 사람도 지옥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신이 인간 앞에 나타나서 자신을 드러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며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합니까? 이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복됩니까. 우리도 우리가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곳이 많습니다. 진실한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서 하늘의 복된 소망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큰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런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예 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나고 경험한 것을 전했습니다. 세상에 우상을 섬길 기회가 많이 있는데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께로 돌아온 것은 매우 값진 일입니다. 수많은 잘못된 교회들 가운데서 진실된 교회를 만나 구원받고 하늘의 소망을 가질 확률은 얼마나 낮은 것입니까.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우리의 음성을 매일 언제든지 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12)” 이런 특권을 받았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 것, 참다운 하나님을 만난 것은 영원히 표정 관리를 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보 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3)”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내가 함께 하겠다 너희를 위하여 처소가 예비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3).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창세로부터 준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축복된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 론
하 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자신을 보이셨고 그들을 구출하셨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와 동일한 특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축복된 사람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면 재벌과 가난한 사람이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가 많고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온 우주를 소유한 하나님과 약혼한 사이라면 어떨까요? 그런 엄청난 분을 섬기는 우리이고 그런 엄청난 분과 혼인하게 된 우리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권을 누려라
신명기 4장 32-40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존재합니다. 신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그 숫자를 정확하게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구약 시대 역시 수많은 신들이 존재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그 어떤 신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임을 오늘 본문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 가지 일을 소개 합니다. 모세는 이 두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 바로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임을 말했습니다. 자, 그럼 함께 두 가지 사건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 입니다. 33절 말씀을 봅시다. “(신 4: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민족도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불 가운데서 만난 경우가 없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죄인이 듣는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사건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신 은총을 베푸사 그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에게 말씀 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건 입니까? 이것은 생각할수록 경이로운 사건 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친히 나타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존재를 계시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속에 친히 나타나시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셨습니다. 이 계시의 정점이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친히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타종교처럼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방에 떨어진 실 한오라기를 찾는 것과 같은 ‘암중모색(暗中摸索)’식의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고, 우리는 이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 가운데 나타나셔서 친히 그 음성을 들려주신 위대한 사건을 언급하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참 신이라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모세가 전한 하나님께서 하신 두번째 사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로 고통받고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출애굽 사건 입니다. 3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신 4: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40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의 경험이 전무 했습니다. 손에 무기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수많은 전쟁 무기들과 전차를 소유한 애굽 군사를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생활에서 풀어주게 하셨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로 건너가게 하신 후, 홍해를 원상태로 돌리심으로 바로와 애굽 군대를 멸하셨습니다. 세상에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을 친히 도우시고 구원하신 위대한 사건이 또 어디 있습니까? 모세는 35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 4: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 많은 이적과 기사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나타나시고 말씀하신 사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되고 유일한 신으로 섬기고 살아가기를 권면 했습니다. 39절 말씀 입니다. “(신 4: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하늘 위로나 땅 아래로나 바다 깊숙한 곳에도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만방의 신은 모두 거짓 신이요, 나무, 돌, 금과 은으로 만든 우상들도 모두 가짜 신 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권면 했습니다. 40절 입니다. “(신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께서 주신 규례와 명령을 지키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아낌없이 풍성한 복을 베풀어 주실 것 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임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참되고 유일한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만방의 신은 모두 거짓 신 입니다. 따라서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성경과 성령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날마다 하나님과 깊게 교제하며 구원의 주님만을 섬기고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네게 알게 하려 함이라
신 4:32-40 / 의정부장로교회
하나님은 대문을 닫으면 쪽문을 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 말고, 우리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계속 질문하시면서 지난 날을 회상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날의 모든 일을 ‘너희를 위하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너를 보고 기뻐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를 이렇게 사랑하고 뒷바라지 해주고 예뻐해주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라고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다가 엄마를 보면서 웃거나, 엄마하고 처음 부를 때 부모는 너무나 신기하고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시면서 즐거워하시고, 관심 가지시고, 미소 짓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며 통곡할 때에도 그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 하나님을 우리의 말로 고백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체험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체험한 그것을 뭐라고 내가 고백하고 해석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내 삶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자기의 표현으로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자신을 알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십니다(35-36절). 그런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말은 존재적 유일성으로 해석해도 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한 방식의 유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다른 그 누구, 그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늘에서부터 음성을 듣게 하셨고, 땅에서는 큰 불을 보이셨고, 불 가운데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랑을 보여주고 싶어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항복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것은 내 삶의 현재가 하나님의 사랑이고 결과물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37절). 과거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것을 발판으로 현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사랑하셔서 너를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현재 우리의 삶은 사랑과 택함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현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내 삶의 과거가 하나님의 안도하심이자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삽니다. 우리는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와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가는 존재입니다(벧전 2:4-5).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우리는 신하이고,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우리는 신부이며, 예수님이 목자라면 우리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령한 집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신 나라가 제사장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현재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과 명예를 받은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세상 앞에서 당당하며 흔들림 없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4장 32~49절
최정운 목사 /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첫 번째 설교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서 절대 우상 숭배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순종하라는 명령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이스라엘은 속히 멸망하고 흩어질 것이지만, 또 그 가운데서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택한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간에 베풀어 주셨던 은혜와 자비로운 일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회상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32-40)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먼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떠올려 보라고 말씀합니다. ‘상고하다’라는 단어는 ‘묻다’, ‘구하다’, ‘요구하다’, ‘간청하다’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스스로 자세히 답을 찾아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물어보라는 명령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얻어야 할 답은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찾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들과 온 우주 만물이 오히려 그들에게 답을 알게 해 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나온 날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하는 듯한 장면이 떠올려집니다. 그 역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물어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발견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전무후무하고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반드시 기억하고,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생각하고 상고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발견해 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사랑이었고, 도우심이었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왔던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설명합니다.
(33-34)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당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또 두려워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곧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양심에 가책으로, 또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하나님은 곧바로 벌하지 않으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기다려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음이 은혜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하며 죄를 멀리하는 신앙의 여정이 되도록 힘쓰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출애굽 사건은 역사의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야말로 가장 크고 놀랍고 위대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깊이 깨닫고 감사했던 시간이 언제이십니까? 그때를 꼭 기억하시고 간직하시고, 인생 여정 가운데 자주 떠올리시길 바랍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의 찬송을 끊임없이 올려드리는 우리 인생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이 이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입니다.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교회 안에서는 타 종교에 있다가 오신 분도 계시고, 무교, 무신론자로 살다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너 자신을 믿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손을 뻗어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와서 구명조끼를, 밧줄을, 손을 내밀어서 구해주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를 위해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 구주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구원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임을 믿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심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을 강한 민족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38)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복 주기를 원하시는 민족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나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면, 나보다 강한 사람, 환경, 나라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와 어려움과 장애물을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며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며 구원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모세는 첫 번째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순종을 요구합니다.
(39-40)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이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은 십계명과 율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신구약 66권의 성경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또 이 말씀에 순종하며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우리 삶을 끝까지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어서 도피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도피성 구별(41-43)
(41-43) 그 때에 모세가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이는 과거에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 곳으로 도피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 중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가 그의 생명을 보전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잘못한 경우에 일정 기간 도피성으로 피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아래쪽부터 르우벤 지파의 베셀, 조금 위쪽의 갓 지파의 길르앗 라못, 좀 더 위쪽 헬몬산 아래 므낫세 반 지파의 바산 골란입니다. 요단 동편을 먼저 정복하고 나서 그곳에 세 도피성을 허락하셨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참된 도피성이십니다. 그분 안에 거하면 우리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안전할 수 있습니다. 평화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면, 내가 말씀이신 주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더 주님을 알아가고 체험하게 되며,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을 닮은 열매를 더욱더 맺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내 속에 모셔 들이도록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계명의 서문(44-49)
(4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44절부터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됩니다.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치고 정복한 요단 동편에서 이 율법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앞선 4장 10절 이하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던 때를 상기시켰습니다. 그것을 다시 강조하면서 서론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이어지는 5장에서 십계명 말씀을 다시 언급합니다. 신명기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곧 하나님의 음성이자 하나님과의 만남의 통로였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기준이고 근거이며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생명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이천 년 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모시고, 말씀으로 생명을 얻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눈을 들어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꼭 붙어있는 가지가 되어서,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깨닫고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이번 한 주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깊이 묵상하는 대림절의 기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한 주간 더욱 주님께 붙어있음으로 주님 닮은 성숙한 열매를 맺는 하루하루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워지는 한 날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을 대면하였음에도 살아남은 은총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베풀어 주신 은총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신이심을 선포합니다. 나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며 그분을 참된 주인으로 모시며 살고 있습니까?
3. 하나님은 부지중에 범죄한 자들을 위해 도피성을 준비하셨습니다. 영원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4. 대림절 기간 주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리며, 예수님의 성품과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왜 택하셨나?
신 4:32-40 / 이상문 목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나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자신의 이해나 느낌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의해 정하여졌음을 의미한다. 왜 그런 특별한 사랑에서 우리를 택하셨나?
1.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택하셨다.
1)하나님은 선조들에게 언약하신 것을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루셨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이 주겠다는 말씀은 애굽에서 400년의 세월 동안에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것은 선조들의 약속에 의한 것이었다.
2)창세 전에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택하셨다. 우리 주님은 그의 피로서 세운 새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를 그와 하나로 연합하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예가 되셨다.
3)우리는 그런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의 남은 약속 다시 오겠다는 말씀에 따라 그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우리를 믿음으로 단장하는 것이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땅한 일일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과 아들로 삼기 위하여 택하셨다.
1)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 능하신 손으로 행하신 것들을 되새기면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백성이 없었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택하셨다.
2)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아무리 놀라운 일이었어도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을 마음으로 바로 섬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행하심은 우리같이 되셨고 우리의 죄짐을 지셨고 우리의 의가 되어 주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기적과도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의 역사이다.
3)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아들로 택하셨다. 아들로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것을 기업으로 누리는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누리고 있는 자들인가!
3.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서 택하셨다.
1)이스라엘 백성을 그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이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 하셨다. 그 큰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으로 순종할 때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해 주셨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을 오로지 섬기지 못하여 그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2)사도 바울은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였다(엡1:6) 우리를 택하신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오로지 찬송하기 위함이었다.
3)주님이 행하신 모든 구원의 사역을 아멘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고후 1:20)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