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고유성질을 지닌 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이것이 어떤 법으로부터 파생되었는지 혹은 어떤 여러 법들이 혼합되어서 일어났는지 아는 것은 필요합니다. 절벽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는 생명에 대한 집착도 작용하겠지만 떨어지면 죽는다는 인과도 알기에 그럴 겁니다. 이런 두려움은 혼합된 것일 겁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어떤 법으로부터 파생되었을 때는 꼭 불선법으로부터 파생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사실 두려움은 선법으로부터도 나옵니다. 경을 보면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라는 식의 언급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이때 두려움을 불선법이라고 볼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는 이런 감정을 법으로부터 파생되고 혼합된 2차적 감정이라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을 자비로 볼 수도 있지만 탐욕으로 볼 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사랑을 이 둘이 혼합된 개념으로 봅니다.
(아래의 글은 저의 생각이라서 틀릴 가능성이 있으니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 법우님들의 말씀과 대장장이 법우님의 말씀을 도움 삼아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 먼저, 예전에 저는(도)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1. 팔정도에서 ‘바른 사유’라고 할 때, “사유”는 마음부수로는 ‘일으킨 생각(위딱까)’일까?’ 하고. 또, 2.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은 오온 중에서 과연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하고.
* 그러다가 어느 날 저는 이렇게 우선 생각(정리)해 놓기로 했습니다. 1. ‘사유’가 ‘일으킨 생각(위딱까)’일까 아닐까 라고 탐구하지 말고, : 그냥 ‘사유’에는(‘사유’를 하면) 일으킨 생각도 있을 것이고, ‘지속적 고찰’도 있을 것이고, 다른 마음부수들도 적절히 있을 것이다. 라고 우선 생각해 놓기로 했습니다. 2.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라고 탐구하지 말고, : ‘이 근심 안에는 느낌(괴로움)도 있고, 인식(이 근심이 항상하다는 인식)도 있고, 심리현상들(이 근심이 괴로움이니 여기서 벗어나려는 의도 등)도 있고, 알음알이(이 방법 저 방법을 분별해서 아는 알음알이)도 있을 것이다.’라고 우선 생각해 놓기로 했습니다.
* 참고: 동영상 법문과 법우님들의 글 등을 도움 삼아서 : 예전에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잘못 생각했다면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유신견 → 사견(邪見)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신견도 사견에 속합니다. → 유신견은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그것은 아래의 자아에 대한 관찰에서 나타납니다.) →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 유신견입니다. → 마찬가지로 인식을 • 느낌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는 것을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2. 자만 → “자신을 [높게, 많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 자만에는: “나는 남보다 뛰어나다. 나는 남과 동등하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가 있습니다. → 자만에는 케마까 경(S22:89)에 나타나는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도 있습니다.
8. •••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 나는 이러한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attā라거나 자아attā에 속한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은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1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 인식이다 … 심리현상들이다 …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나의 마음을 아비담마와 관련지어 사유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비담마 공부의 시작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정판 『아비담마 길라잡이』제1권 제2장 제일 끝에는 도표가 실려 있습니다. ‘<도표2.4> 마음·마음부수의 자세한 도표’입니다. 법우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해로운 마음이라면 해로운 마음 12개(1번~12번 마음) 중 하나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 12개 중에 어디에 해당될지 도표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사유해 보세요. 해로운 마음은 그 무엇이든 최소 14가지 마음부수가 함께 일어납니다.
반드시들 (7): 감각접촉, 느낌, 인식, 의도, 집중, 생명기능, 마음에 잡도리함. 해로운 반드시들 (4):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 그 외 (3):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 정진
12가지 해로운 마음 가운데 실제로 내게 지금 일어난 마음이 어디에 해당되는지는 서로 공통되지 않는 마음부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구별해 보시면 되겠지요. (물론 마음부수가 함께 일어나있다고 해서 모든 마음부수의 강도가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 상황에 따라서 어느 마음부수는 강하고 어느 마음부수는 미약하고 그렇겠지요.)
‘들뜸’이라는 마음부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부수를 ‘들뜸’이라는 한국어로 사유합니다. 이 말의 빠알리 원어는 uddhacca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부수는 ‘들뜸’이라는 말로도 ‘uddhacca’라는 말로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본 사람만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단지 ‘들뜸’ ‘uddhacca’라는 단어, 그리고 이 마음부수에 대한 다양한 설명 등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 같은 범부는 ‘공포’ ‘두려움’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아, 내 마음에 들뜸이 있구나. 들뜸은 동요, 원초적인 동요라는 설명이 있었어.’라고 하는 정도로 이 말을 사용하고 마는 정도이지요.
‘들뜸’이라는 단어는 번역어이니 더 말할 것도 없고, ‘uddhacca’라는 빠알리어 역시 개념인 것은 동일합니다. 그 말로 표현되는 그 마음부수는 ‘법’이기 때문에, ‘들뜸’이라는 개념, uddhacca라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도 추론되는 범부들의 생각, 그 무엇도 그 ‘법’, 그 마음부수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그것과 무관하게, 법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그 무엇입니다.
법, 즉 담마와 개념, 즉 빤냣띠를 우선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구분은 제6장 말미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법과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를 기본적으로 사유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 속에 파묻혀 길을 잃게 됩니다. 법은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고 ‘찰나적 존재’라고 하지요. 이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법, 마음부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포의 마음이 일어났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고, 대부분 개념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십 찰나, 수백 찰나에 걸쳐서 일어난 수많은 심리현상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어떤 하나를 가지고 ‘공포, 두려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이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져 있는 것, 개념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생각을 뛰어넘어서 이것을 ‘찰나’로 나누고, 그 고유성질을 볼 수 있어야 법인 마음부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찰나’로 나눌 수 있는 힘. ‘고유성질’을 판단할 수 있는 힘. 간단히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것은 개념의 한계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개념적인 사유, 그것도 분명 훌륭하고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유가 가진 한계를 역시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하지요. 그것이 ‘법’(담마.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란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겠고요.
법우님은 아비담마에 나오는 마음부수들, 그 법들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오늘 아주 좋은 기회를 포착하셨다고 보여집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법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라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_()_ _()_ _()_
좋은 질문에 여러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의견을 주셨는데 저도 한마디 거들려고 합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두려움은 탐욕에 포함되는 마음부수로 보입니다. 특히 질문에 나오는 꿈을 자세히 보면 '사나운 짐승' 과 '덤빌까봐'라는 단어들이 보입니다. 사나운 짐승이 자신을 갑자기 공격할 때 혹은 공격할 것이라 느껴질 때의 '두려움'은 자신의 신체나 생명력에 대한 방어기제의 일환으로 작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욕의 하나로 보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위에 보면 성냄의 하나라고 하는 의견도 보입니다. 이 부분은 두려움이 생길 때 방어 작용으로 화나 성냄의 요소가 이어서 생기는 경향이 있어서 두려움을 성냄의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해체해서 보면 안으로 움츠러드는 두려움과 밖으로 밀어내는 분노의 감정이 별개로 있음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첫댓글 제가 출처를 찾지 못했지만 어디서 두려움은
탐욕의 마음부수라고 본 기억은 납니다.
뭔가에 집착하는 마음이 반대 급부로
이 두려움을 일어나게 한다는 겁니다.
두려움은 성냄의 마음부수에 포함되는거 아닐까요. 참고로 성냄은 불환자에서 완전히 제거된다고 하네요.
두려움 공포도 성냄의 일종입니다
우울 짜증 허무 불안도 화의 일종입니다
왜냐하면 성냄은 불만족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일묵스님 저 화 이해하면 사라진다에서 화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고 공부가 중요한게 아니고 수행이 법우님을 구합니다
두려움은 고유성질을 지닌 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이것이 어떤 법으로부터 파생되었는지 혹은 어떤 여러 법들이 혼합되어서 일어났는지 아는
것은 필요합니다.
절벽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는 생명에 대한 집착도 작용하겠지만 떨어지면 죽는다는 인과도 알기에 그럴 겁니다.
이런 두려움은 혼합된 것일 겁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어떤 법으로부터 파생되었을 때는
꼭 불선법으로부터 파생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사실 두려움은 선법으로부터도 나옵니다.
경을 보면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라는 식의 언급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이때 두려움을 불선법이라고 볼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는 이런 감정을 법으로부터 파생되고 혼합된 2차적 감정이라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을 자비로 볼 수도 있지만 탐욕으로 볼 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사랑을 이 둘이 혼합된 개념으로 봅니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따져볼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느끼는 그 상황과 맥락에서 어떤 법이 강하게 작용했냐는 겁니다.
제가 대장장이님의 글에서 언급된 두려움을 탐욕의 마음부수라고 말한 것은
꿈에서의 광경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겁니다.
두려움은.. 혹시..마음이 아니라.. 느낌으로 분류하는게 아닐까요?
두려움을 느낄 때는 괴로운 느낌도 일어날 겁니다.
두려움이 불선법에서 파생되었거나 불선법이 섞여 있다면 말입니다.
ottappa는 '수치심'으로 번역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래의 글은 저의 생각이라서 틀릴 가능성이 있으니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 법우님들의 말씀과 대장장이 법우님의 말씀을 도움 삼아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 먼저, 예전에 저는(도)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1. 팔정도에서 ‘바른 사유’라고 할 때, “사유”는 마음부수로는 ‘일으킨 생각(위딱까)’일까?’ 하고. 또,
2.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은 오온 중에서 과연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하고.
* 그러다가 어느 날 저는 이렇게 우선 생각(정리)해 놓기로 했습니다.
1. ‘사유’가 ‘일으킨 생각(위딱까)’일까 아닐까 라고 탐구하지 말고, : 그냥 ‘사유’에는(‘사유’를 하면) 일으킨 생각도 있을 것이고, ‘지속적 고찰’도 있을 것이고, 다른 마음부수들도 적절히 있을 것이다. 라고 우선 생각해 놓기로 했습니다.
2.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라고 탐구하지 말고, : ‘이 근심 안에는 느낌(괴로움)도 있고, 인식(이 근심이 항상하다는 인식)도 있고, 심리현상들(이 근심이 괴로움이니 여기서 벗어나려는 의도 등)도 있고, 알음알이(이 방법 저 방법을 분별해서 아는 알음알이)도 있을 것이다.’라고 우선 생각해 놓기로 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다른 법우님들께서 말씀하셨듯이, 두려움 등은 어느 하나의 마음부수로 일대일로 대칭하기 보다는 : 이 두려움 안에는 ‘이런 마음부수도 있고, 저런 마음부수도 있고, 또 다른 마음부수도 있구나. 라고 접근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한편, 저도 평소에 어떤 두려움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그런 두려움이었는데, 저의 경우에는 ‘유신견’이 원인이 되어 두려움이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 참고: 동영상 법문과 법우님들의 글 등을 도움 삼아서 : 예전에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잘못 생각했다면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유신견
→ 사견(邪見)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신견도 사견에 속합니다.
→ 유신견은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그것은 아래의 자아에 대한 관찰에서 나타납니다.)
→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 유신견입니다.
→ 마찬가지로 인식을 • 느낌을 • 심리현상들을 •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는 것을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2. 자만
→ “자신을 [높게, 많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 자만에는: “나는 남보다 뛰어나다. 나는 남과 동등하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가 있습니다.
→ 자만에는 케마까 경(S22:89)에 나타나는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도 있습니다.
8. •••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를 설하셨나니 … 나는 이러한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가운데 어떤 것도 자아attā라거나 자아attā에 속한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은 아닙니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1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 인식이다 … 심리현상들이다 …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나의 마음을 아비담마와 관련지어 사유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비담마 공부의 시작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정판 『아비담마 길라잡이』제1권 제2장 제일 끝에는 도표가 실려 있습니다.
‘<도표2.4> 마음·마음부수의 자세한 도표’입니다.
법우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해로운 마음이라면 해로운 마음 12개(1번~12번 마음) 중 하나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 12개 중에 어디에 해당될지 도표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사유해 보세요.
해로운 마음은 그 무엇이든 최소 14가지 마음부수가 함께 일어납니다.
반드시들 (7): 감각접촉, 느낌, 인식, 의도, 집중, 생명기능, 마음에 잡도리함.
해로운 반드시들 (4):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
그 외 (3):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 정진
12가지 해로운 마음 가운데 실제로 내게 지금 일어난 마음이 어디에 해당되는지는
서로 공통되지 않는 마음부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구별해 보시면 되겠지요.
(물론 마음부수가 함께 일어나있다고 해서 모든 마음부수의 강도가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 상황에 따라서 어느 마음부수는 강하고 어느 마음부수는 미약하고 그렇겠지요.)
물론 우리 범부는 법을 볼 힘이 없습니다.
즉 ‘마음부수’를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들뜸’이라는 마음부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부수를 ‘들뜸’이라는 한국어로 사유합니다.
이 말의 빠알리 원어는 uddhacca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부수는 ‘들뜸’이라는 말로도 ‘uddhacca’라는 말로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본 사람만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단지 ‘들뜸’ ‘uddhacca’라는 단어, 그리고 이 마음부수에 대한 다양한 설명 등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 같은 범부는 ‘공포’ ‘두려움’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아, 내 마음에 들뜸이 있구나. 들뜸은 동요, 원초적인 동요라는 설명이 있었어.’라고 하는 정도로 이 말을 사용하고 마는 정도이지요.
‘들뜸’이라는 단어는 번역어이니 더 말할 것도 없고, ‘uddhacca’라는 빠알리어 역시 개념인 것은 동일합니다. 그 말로 표현되는 그 마음부수는 ‘법’이기 때문에, ‘들뜸’이라는 개념, uddhacca라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도 추론되는 범부들의 생각, 그 무엇도 그 ‘법’, 그 마음부수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그것과 무관하게, 법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그 무엇입니다.
법, 즉 담마와
개념, 즉 빤냣띠를 우선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구분은 제6장 말미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법과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를 기본적으로 사유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 속에 파묻혀 길을 잃게 됩니다.
법은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고 ‘찰나적 존재’라고 하지요.
이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법, 마음부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포의 마음이 일어났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고, 대부분 개념적인 수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십 찰나, 수백 찰나에 걸쳐서 일어난 수많은 심리현상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어떤 하나를 가지고 ‘공포, 두려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이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져 있는 것, 개념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생각을 뛰어넘어서
이것을 ‘찰나’로 나누고, 그 고유성질을 볼 수 있어야 법인 마음부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찰나’로 나눌 수 있는 힘.
‘고유성질’을 판단할 수 있는 힘.
간단히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것은 개념의 한계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개념적인 사유, 그것도 분명 훌륭하고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유가 가진 한계를 역시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하지요.
그것이 ‘법’(담마.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란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겠고요.
법우님은 아비담마에 나오는 마음부수들, 그 법들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오늘 아주 좋은 기회를 포착하셨다고 보여집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법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라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_()_ _()_ _()_
좋은 질문에 여러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의견을 주셨는데 저도 한마디 거들려고 합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두려움은 탐욕에 포함되는 마음부수로 보입니다.
특히 질문에 나오는 꿈을 자세히 보면
'사나운 짐승' 과 '덤빌까봐'라는 단어들이 보입니다.
사나운 짐승이 자신을 갑자기 공격할 때 혹은 공격할 것이라 느껴질 때의
'두려움'은 자신의 신체나 생명력에 대한 방어기제의 일환으로 작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욕의 하나로 보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위에 보면 성냄의 하나라고 하는 의견도 보입니다.
이 부분은 두려움이 생길 때 방어 작용으로 화나 성냄의 요소가 이어서 생기는 경향이 있어서
두려움을 성냄의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해체해서 보면 안으로 움츠러드는
두려움과 밖으로 밀어내는 분노의 감정이 별개로 있음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