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成龍(류성룡)] ◆ 류성룡: 1542년(중종 37년) ~ 1607년(선조 40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사촌(외가)출생 *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 우의정(右議政)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 허균은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는데 근세 인물로는 류성룡 나의 형 허성 이순신 원균이 일시에 났으며 한 동리의 출신이다 이순신보다 원균이 5살 류성룡이 3살 연배이고 허성은 3살 연하이다 ◆ 진진휼기민사의장(陳賑恤飢民事宜狀) * 류성룡은 왜란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전라도좌수사(이순신: 1591년 47세로 부임)에 천거(薦擧)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했다 『진관(鎭管): 조선시대 전기의 지방군사 조직 (국경과 외침 대비한 지방군사 조직)』 * 1593년(선조26년) 2월과 그해 3월에 논군량민식장(論軍糧民食狀)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올린 상소문(서애문집 권6) - 주 내용은 왜병이 서울을 철수한 뒤에 도성민의 굶주림에 관한 참상(慘狀)과 진구대책(賑救對策) 등을 개진하고 명나라 원병이 평양으로 퇴각한 뒤 그들이 다시 진격해올 것에 대비한 군량미의 조치와 함경도 지방의 성지(城池)보수와 호령(號令)의 통일 병기의 조치 그리고 공을 세운 사람에게 양반은 물론 천인에 이르기 까지 상을 주되 전공의 진위를 철저히 조사하여 의병 중에도 처음에는 공로가 컸으나 그 뒤 이득을 주는 것보다 폐단을 끼치는 자도 있으니 그들의 공로가 있고 없음을 가려서 공이 있는 자는 상을 주고 공이 없는 자는 의병을 다른 의병에 소속시키게 하면 얼마 안가서 의병은 모두 관군이 되어 군령(軍令)이 통일되고 민폐도 줄어들게 될 것임을 제시하였다 ◆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부임했을 당시 군기와 함선 병기를 새로 제작하고 수리하였으며 화대 연대도 수축하여 통신시설을 확립하고 또 수영성을 쌓았다 이처럼 시설과 장비에 있어서 전쟁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였으며
한편 류성룡으로부터 얻은 증손전수방략책(增損戰守方略策)인 병서를 탐독하여 전시에 대비 하였다 이순신은 그 내용에 대하여 감탄하였다 그 내용은 수륙전의 화공전술(火攻戰術) 등을 낱낱이 기록해둔 만고 기이한 책이었다.
또한 거북선을 새로 꾸미어 임진 2월 8일에는 거북선의 범포(帆布: 돛을 만드는 천) 29필을 준비하였고 3월 27일에는 여수 앞바다에서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였으며 거북선에 장착한 대포를 시험 발사하였다
4월12일에는 역시 거북선에 장착한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보고 그 포성의 위력을 측정해서 적을 공격할 때 위력을 낼 수 있도록 정비했다 이 준비 완료 후 거북선의 함포 시험발사는 임란이 일어나기 이틀을 앞두고 거행된 것이었다 ◆ 1592년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으며 그해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촐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기도 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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