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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원들의 봄 나들이
오늘 5월 25일 길일을 택하여
19회원들이 봄 나들이를 나선다.
영주 부석사와 소수서원으로 문화탐방 겸
동창회 임시총회를 겸한 가족동반 여행이다.
아침 새벽부터 서두르니 9시경에 용인휴게소에 도착한다.
잠시 쉬는 동안 무언가 바삐 움직이는 원정연, 강용운 회원
김동건, 박의상 회원!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까?
안 탄 사람 없어요?
잠시 후 다시 출발하여 충주호반에 이르니 11:00시
멋지게 생긴 다리를 건너니
팔영루 앞이다.
팔영루는 청풍부(淸風府) 출입문으로 원명은 남덕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조선 고종 시절 부사 민치상의 청풍팔경을 시제로한
팔영시가 여기에 있어 팔영루라 부르게 되었단다.
팔영루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 시끌 벅쩍
드디어 1차 목적지인 부석사 앞
식당 "종점"에 도착하여 민생고를 해결한다.
점심 메뉴는 산채정식
새벽에 나온 터라 한창 시장할 시간
막걸리에, 소주에, 맥주에,
취향대로 한 잔씩 들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 그릇 해 치우고
답답한 방을 피해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물줄기가 반갑다.
분수대의 물줄기를 뒤로 하고
보무도 당당히 삼삼오오 짝을 지어
부석사 경내로 향한다.
안녕하세요!
하이!
봉황산 기슭에 자리한 부석사(浮石寺)는
사시사철 여행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찰 중의 하나이다.
바쁜 걸음에도 역사 공부도 하면서..
은행나무 가로수가 벌써 녹음이 짙다.
일주문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을 개종한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발원지인 사찰이다.
일주문을 배경으로 족적을 남기고
석탄일이 5월 28일이라 연등이 화려하게
방문객을 맞는다.
당간지주
은행나무길을 따라 오르다 천왕문 못미쳐 왼쪽으로
부석사중수기념탑과 당간지주가 있는데,
당간지주는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사 중인 천왕문 앞을 돌아드니
범종각 앞이 나오는데
화려한 연등이 시선을 끈다.
연등 하나 하나에 제 각기 염원이 달려 있어
하나하나의 연등이 같은듯 다른 연등들이다.
범종각을 뒤로하니 부석사 현판이 보이고
안양문이 나온다.
안양루 밑을 오르면 석등과 무량수전에 이른다.
무량수전 옆 감나무 밑 시원한 곳에 자리잡고
문화해설사를 만나 인사를 나눈다.
해설사의 부석사 해설이 시작된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해설사 뒤에서도 열심히 수강하는 학생들
의상대사는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곳에 머물렀다.
의상대사와 부석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수학차 혼자서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난 의상은
신라방이 있었던 산동반도 부근
어느 신도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는
잘 생긴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켰고
선묘는 불교에 귀의하여 의상이 뜻을 펼치는데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나라에 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의상은 귀국을 하게 되는데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한 옷가지 등을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안 선묘는,
급히 상자를 가지고 부두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저 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옷상자를 던지니
그 상자가 배에 닿았고 그리고는
다시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된다.
부석 (浮石)
의상이 화엄사상을 전파하려고 그 곳에 절을 짓고자 했으나
그 당시 주변일대의 토착세력의 극력반대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자 용으로 변한 선묘의 도움으로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서 그들을 진압하여 무사히 창건 할 수 있었다 하여
부석(浮石)사로 칭하게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무량수전에서 조금 떨어진
고려 시대의 건물로 국보 제19호인 조사당.
조사당 안을 보면 삼면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벽화 역시 국보 제46호이다.
그러나 진짜 그림은 떼어내 범종각 아래에 있는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고,
조사당에 있는 그림은 모사이다.
유무전시관에 있는 조사당 벽화
조사당 건물 앞에 유리와 철망으로 가려진 곳이 있는데,
이 안에 있는 나무가 '선비화'라 불리는 나무이다.
속설에 의하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나무가 되었다 하는데,
이 선비화의 잎을 달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이런 속설 탓에 사람들이 마구 잎을 따가
유리와 철망으로 막아 놓았는데,
너무 철저히 막아 잘 보이지 않는다.
정식 학명은 "골담초"라 한다.
무량수전 오른쪽의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삼층석탑에서 보는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無量壽殿과 배흘림 기둥
국보 제45호 無量壽殿 塑造如來坐像
이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큰 소조 불상이란다.
국보제17호 無量壽殿 앞 石燈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진 무량수전 편액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로 국보 제18호임.
역사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면에서 보면
이 건물에 비해 다소 떨어져.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라고 합니다.
법당 앞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안양루에는
김삿갓이 지나며
시를 한 수 남겨 놓은 흔적이 있는데
"세월이 무정하여 나는 벌써 늙어 있네"
이 문귀를 음미하며 다음 일정에 따라
소수서원을 향한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書院으로
이 서원 앞에 죽계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그 천변(川邊)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
그 밑에 깊은 소(沼)가 있다.
이 소는 별다른 이름 없이 "백운동 소"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신라통일기에 이 서원 터에 숙수사(宿水寺)라는 거찰이 있어
인근 뿐만아니라 먼 곳에서 수많은 참배자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고 한다.
그 숙수사의 흔적이 여기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
그 앞에서 해설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소수서원 왼편에 나즈막한 산과 소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수백년에서 천년 이상된 적송들이 서원주변을 덮고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굳건한
선비가되라는뜻에서 "學子樹, 라고부른단다.
敬字바위를 보면서
불행하게도 세조 3년(1457년) 이곳 순흥에서
금성대군과 의사들의 단종 복위 거사 계획이 탄로나면서
당시 세조가 보낸 관군들에 의해 순흥도호부가 혁파되었다.
숙수사도 불타버리고,백운담 소에는
그때 희생된 의사들의 시신이 많이 수장되었으며
의사들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죽계를 타고,
10여리 흘러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마을로 불리어지고 있다.
주신재 선생이 바위에 유교이념인 "경(敬)" 을 음각하시고,
그 원혼을 위로하고자 붉은 글씨로 덧칠한 후로는
영들이 울음을 그치고, 편히 잠들게 되었다고 한다.
「敬」자 바로 위에는 「白雲洞」이라는 글자도 새겨 있는데,
이것은 퇴계의 글씨다.
(敬)자를 각(刻)한 것은
주자의 철학의 근본이 경에 있기 때문이며
회헌(晦軒), 퇴계의 사상의 근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자를 새긴 연유의 액자가
아직도 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경자 바위는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으나
옛날에는 명주 실꾸리를 다 풀어 넣도록 깊던 소의 수심은
이제 잔잔한 여울물로 변하여 흐르고 있다.
취한대 (翠寒臺)
퇴계선생의 나이 49세에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서원경 시냇가에 암석을 끊어내고 대를만들어
송 죽 백을 심고 취한이라고 하였다고한다.
"翠寒"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옛 시 '訟翠寒溪'에서 취한 것이라
바위에 새겨진 ‘경(敬)’자가 담심(潭心)에 어려
난간에 기대어 보고 있노라면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일게하고
그윽히 소쇄한 정취에 취하게 하는 경렴정.
신재는 이 정자를 짓고 경렴정(景濂亭)이라 했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의 학자
염계(廉溪) 주돈이를 사모하려는 뜻에서였다.
景濂亭 초서 현판은
조선시대 金 絿, 楊 士彦 과 함께
3대 草聖으로 불리던 孤山 黃 耆老의 글씨다
文成公廟 (문성공묘).
文成公 안향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安軸(안축)·安輔(안보) 형제와
주세붕을 배향했다.
안축은 景幾體歌(경기체가)인 「關東別曲」(관동별곡)과
「竹溪別曲」(죽계별곡)을 지은 고려 말기의 저명한 문필가이며,
안보는 東京留守(동경유수:경주)를 지낸 대학자다.
이 祀廟(사묘)에선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초정일 文成公을 제향하고 있다.
講學堂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열심히 귀기울여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스승이 사용하던 직방재
학생들이 공부하던 일신재, 지락재
영정각
원래 소수서원에없던 건물로 1975년에 안향 (安珦)선생의
영정을 모시기위해서 별도로 지은 건물이다.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소장하고있다.
영정각에는 안향, 주세붕, 이덕형 등의 초상화가 있다.
영정각 주위에 예쁘게 핀 작약
서원을 나와 시원한 그늘에서 토론을...
죽계별곡을 음송도 해 보고
시원한 곳에서 땀을 식히기도
소수서원을 나와
선비마을을 지나
약선당에 이르른다.
입실하기 전에 한 건 해결하고
임시 총회를 시작한다.
박영조 회장의 인사 말씀에 이어
김영하 총무의 결산보고
그리고 내년도 사업계획 등 일사 천리로
안건을 처리하고
기다리던 약선당 정식으로 약진!
회의 중 잠시 인견공장으로 견학갔던
가족들도 회식에 참석한다.
예정된 시간에 약선당을 떠나며
황치홍 회원과 이렇게 석별하는 약선당 주인 박순화 여사
서울로 떠나기 전에 기념으로
다 같이 함께
귀경 길 차 안에서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도 한 컷
치악 휴게소에서
여기도 한 컷
12시간 후에 다시 용인휴게소
이번 나들이를 기획하고 진행하는데 수고를 많이하신
박영조 회장, 김영하 총무와 운영위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첫댓글 즐거운 여행의 추억을 아름답게 남겨주시어 고맙습니다. 나형! 오래 건강하셔야돼요.
감사합니다. 즐겁게 삽시다.
사진으로본 광경이 직접간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동창들 즐거운모습 보니 보기에좋습니다. 나형 수고많이 하셨습니다.황치홍동문 제일 기분낸것 같습니다. -임종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