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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세 성읍을 구별함
신 4:41-49
41 그 때에 모세가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42 이는 과거에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 곳으로 도피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 중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가 그의 생명을 보전하게 하기 위함이라
43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
4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45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으니
46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그리하였더라 이 땅은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속하였더니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를 쳐서 멸하고
47 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고 또 바산 왕 옥의 땅을 얻었으니 그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서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 살았으며
48 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의 아로엘에서부터 시온 산 곧 헤르몬 산까지요
49 요단 이쪽 곧 그 동쪽 온 아라바니 비스가 기슭 아래 아라바의 바다까지이니라
신 4:41-49 / [요단강 동쪽의 도피성들] 그때에 모세는 요단강 동쪽에 있는 세 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해 놓았다. 아무런 42) 고의가 없이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나 그 세 성읍 가운데에서 어느 곳에든지 도피하여 목숨을 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미리 원한을 품은 일이 없이 다른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그 도피성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43) 르우벤 지파의 지역에서는 모세가 사해 동편의 베셀 성읍을 지정해 놓았는데 이 성읍은 고원지대의 광야에 있었다. 갓 지파의 지역에서는 모세가 길르앗라못 성읍을, 므낫세 반 지파의 지역에서는 바산 땅에 있는 골란 성읍을 지정해 놓았다. 44-45) [율법 선포의 서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다음에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 곧 증언과 계명과 규정들을 선포하였다. 46) 모세는 이 모든 율법을 벳브올 맞은편의 골짜기에서 선포하였는데 이곳은 전에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올 때에 시혼왕을 쳐서 이기고 47) 그가 다스리던 땅을 차지하였으며 이어서 바산왕 옥의 땅도 차지하였다. 이 두 아모리 족속의 왕이 다스리던 전지역을 이스라엘 백성이 점령하였다. 48) 곧 아르논 강가의 아로엘 성읍에서부터 헤르몬산이라고도 하는 시온산까지이며 49) 사해와 비스가산 기슭에 이르기까지 요단강 동쪽의 저지대 전체이다.
요단 동편에 세 곳의 도피성을 지명하여 구별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미 기업으로 얻은 요단 동편의 경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의 목적(41-42) 모세가 자신의 첫 번째 설교(1:1-4:40)를 끝낸 때에 요단 동편에 성읍 세 곳을 구별하여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도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도록 하였습니다. 도피성(逃避城, the Refuge City) 제도는 일종의 성역(聖域)제도로서 고의적인 살인이 아닌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오살(誤殺)한 자가 피의 복수자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피신하는 피난처를 가리킵니다(19:1-13; 민 35:9-15; 수 20:1-9). 사람이 범죄한 후 찾아가야 할 곳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도피성 세 곳의 위치(43) 요단 동편에 정해진 세 곳의 도피성 중 하나는 르우벤 지파를 위하여 베셀을 구별하였으며, 하나는 갓 지파를 위하여 길르앗 라못을 구별하였으며, 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습니다. 이는 각 지파에서 피의 복수자로부터 오살자가 신속하게 몸을 피하여 그 생명을 보전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마친 후에는 요단 동편에 있는 세 곳의 도피성 외에 가나안 경내에 세 곳의 도피성을 추가로 구별하여 모두 여섯 곳의 도피성을 두게 됩니다(수 21장).
요단 동편의 경계(44-49)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는 말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들려줄 두 번째 설교(4:44-26:19)의 내용이 곧 율법에 대한 풀이 및 적용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선포의 장소가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로 이곳은 모세가 죽은 모압 평지 골짜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아모리 족속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서 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으며 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아로엘에서부터 헤르몬 산까지였으며 그 동쪽은 아라바 바다까지 경계로 신명기 1장 1절에서 이미 언급한 바를 재차 강조하며 하나님의 언약이 부분적이지만 성취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장차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써 이루어질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한 서곡과도 같습니다.
적용: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도피성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김경호씨 일가족 등 17명이 북한을 탈출하기까지 뉴욕에 사는 김씨의 장인 최영도씨 가족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최씨 가족은 이번 일에 사용된 돈의 규모에 대해 "평생 모은 돈을 다 썼다"고 대답했습니다. 소재파악에서부터 비밀 루트를 통한 탈출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액수에 대해 관계자들은 약 30만 달러(2억 4천 6백만 원)정도 들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태복음 6:21)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 설 교 >
도피성과 율법 강론
신명기 4:41-49
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내용 순서가 때로는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앞뒤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등장하여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당황하게도 하고, 그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을 읽다보면 이러한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되고, 오늘 본문도 앞뒤 내용과 상관없는 구절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도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를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문학적 작품이기 때문에, 문학적 형식과 특성에 따른 형태를 유지합니다. 오늘 본문이 전체의 내용의 흐름에 있어서는 다소 어색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나름의 내용적인 의미와 또한 문학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먼저 문학적 기능을 살펴보면, 신명기 1:1부터 시작하였던 신명기의 서론이 이곳에 끝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능을 합니다. 특별히 44-49절은 1:1-4의 서론의 말씀과 거의 내용이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학 작품을 기본적으로 서론, 본론, 결론의 형태로 되어 있다면, 44-49은 본론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44-49절은 이제 5장부터 본격적으로 이어지는 신명의 본론의 서론격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율법 강론의 시간적, 공간적인 배경에 대해서 설명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 해주는 것이죠. 그래서 44-49절의 내용은 율법 강론의 배경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41-43절에 등장하는 도피성이죠. 그 내용이 전혀 앞의 내용들과 상관이 없는 내용이 등장한다는 것이죠.
본문에서는 도피성의 위치와 지명, 그리고 도피성의 기능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42절에 말씀하는 것 같이 원한이 없는 살인을 저지른 자가 생명을 보존하도록 허락된 곳입니다. 율법에서는 살인은 살인으로 갚아야 하는데, 원한이 없는 살인은 이렇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위치는 르우벤 지파를 위해서 베셀이라는 곳과, 갓 지파를 위해서 길르앗 라못, 그리고 므낫세 지파를 위해서 바산 골란이 지정이 됩니다.
도피성에 대한 내용은 신명기 19장에서 더욱 자세하게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도피성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도피성의 기능 혹은 그 역할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왜 도피성에 대한 내용이 이곳에 등장하느냐 하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신앙과 삶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배운 성경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나의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성경의 내용이 내 삶에서 실현이 되지 않고, 단순한 지식 혹은 정보 또는 신념 정도로만 멈추어 있기 때문에 삶의 현실에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도피성은 바로 이러한 신앙과 삶의 연결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간 것도 아니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들이 모세를 통해 율법의 강론을 듣고 있지만, 이 내용이 지금 당장에 삶에서 실현되는 내용들은 아니죠.
물론 율법의 내용들 중에 어떤 것은 직접적으로 생활과 연관이 있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직 실제의 삶에서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내용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대한 순종의 자세가 흐려지게 되고,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도 등한시하게 되겠죠. 그러면 자연스레 율법과 삶, 신앙과 삶이 분리되게 되는 것이죠.
도피성은 바로 그 부분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실제로 발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라면, 도피성은 그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도피성을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를 지은 자에게 가해서는 징계를 생각하게 되며, 또 한편으로는 율법대로 살아감으로 받는 축복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도피성은 하나님의 율법이 실제의 삶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가 되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바로 이 도피성과 같이 우리의 신앙과 삶을 견고하게 연결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도피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여 보여주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어느 한 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삶 속에서 고민이나 걱정, 혹은 고난들이 찾아 올 때마다, 그 고민과 걱정, 고난들을 가지고 십자가에 앞에 나아서 자신에게 묻는다고 합니다. “고민과 걱정, 고난들이 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과 은혜보다 더 큰 가?” 그러면 또 다시 삶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신앙은 지식이나 정보 혹은 마음속 신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과 연결 되어야 하고, 삶은 신앙의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신앙과 분리된 세상의 삶이 아니라, 신앙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도피성을 기억하라
신 4:41-50 / 코너스톤장로교회
법률 용어 중에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범죄 혐의를 가진 피고인이라 할지라도, 사법부의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로 확정될 때까지는 피고인을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 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피고인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징벌을 받게 되는 상황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는 자가 처벌받을 수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무죄추정의 원칙 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바로 이와 비슷한 원리로 제정된 율법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도피성’ 제도 입니다. 도피성은 ‘과실로 인해 사람을 죽인 자를 복수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지정된 성읍’을 의미합니다. 도피성은 이스라엘 전체에 총 6개가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쪽에 세 곳, 서쪽에 세 곳 이렇게 총 6개 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 요단강 동쪽에 있는 세 곳을 지정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1절과 4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 4:41) 때에 모세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신 4:43)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 이와 같이 모세는 요단 강 동편에 위치한 세 성읍(‘베셀’,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을 도피성으로 지정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도피성을 세우신 목적을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42절 말씀 입니다. “(신 4:42) 이는 과거에 원혐이 없이 부지중에 오살한 자로 그곳으로 도피케 하기 위함이며 그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로 그 생명을 보존케 하기 위함이라” 앞서 이야기했듯이, 도피성을 선정하는 목적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살인으로부터 살인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원한도 없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부주의한 행위로 사람을 죽인 경우 입니다. 살인이 고의가 아닌 불의의 사고가 해당됩니다. 예를 들면,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는 작업을 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벌목하려고 도끼를 휘두르는데, 그만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곁에 있던 이웃을 맞혀 그를 죽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계획적이거나 악의를 가진 사건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연에 의한 살인 사건이라 하더라도, 죽은 이를 위해 복수 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입니다. 따라서 도피성 제도는 이와 같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피의 보복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와 같이 도피성 제도를 만드셨을까요? 아무리 한 사람이 실수로 이웃을 죽였다 할지라도, 그에게 복수하려는 피해자 가족이 생기기 마련 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피해자 가족의 분노를 그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의 피를 봐야 끝이 나는 거죠. 또한 이번에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자의 가족들도 억울한 사연으로 인해 살인자가 된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맞서 싸울 수도 있는 상황 입니다.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끊임없는 피의 복수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 대 가정의 피의 복수일 수 있으나, 작은 불이 산을 덮는 화염으로 커지듯이, 지파 대 지파의 싸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 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러한 분쟁을 막기 위해 도피성 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도피성은 적법한 절차를 통해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그가 보복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절차 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매복하여 기다리다가 일어나서 상대방을 돌로 쳐 죽인 경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와 같이 고의적이고, 계획적이고, 악의적인 살인자는 “잡아다가 보수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라”는 것이 신명기 19장의 내용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연약하기에 누구든지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도피성 제도를 통해 실수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도피성 제도를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민수기 35장을 보면 이와 같이 도피성에 피한 우발적인 살인자의 공소시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는 날까지 입니다. 민수기 35장 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민 35:25)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대제사장이 죽은 이후에는 도피성에 피한 자가 피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기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죽음과 살인자의 죄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아주 독특한 말씀 입니다. 즉 대제사장의 죽음이 고의성 없는 우발적인 살인죄에 대한 대속적인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재자로 죄를 속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통해 살인자의 죄를 대신한다는 원리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살인은 저지른 자의 죄는 그의 죽음으로만 속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자신의 죗값을 치뤄야 그의 죄가 용서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죽음을 살인자의 죽음을 대신함으로 그의 죄값을 대신 치뤄주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결국 거룩한 대제사장이 죽음으로 인하여 살인자는 죄의 멍에를 벗고 살인에 대한 보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자신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신약 시대의 누구를 예표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오늘 도피성에 들어간 살인자를 대신한 대제사장의 대속적인 죽음은 이 땅에 진정한 대제사장으로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예표 합니다. 율법대로라면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징벌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도피성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주님께 피하는 자를 주님께서 친히 사망과 저주의 권세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꼐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값은 대신 지불되었고,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지어 사망과 저주의 심판 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죄의 보복의 손길에서 벗어나야만 참된 평안과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가지고 어디로 가야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도피처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도피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곤경에 처한 죄인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이와 같이 영혼의 도피성 되시는 주님 안에 영원토록 머물러 참된 평강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반드시 믿어야 할 하나님
신 4:41-49 / 최민환 목사
졸음운전을 피하는 비법을 아는가? 만 원짜리를 왼손에 들고 유리창밖으로 손을 내민 채 운전을 하면 된다. 오만 원짜리는 더 확실히 깬다. 지금 졸린가? 그럼 백원짜리를 앞에 놓아두라. 졸면 누가 가져갈까봐 잠이 오지 않는다. 이게 인간이다. 돈이 아닌, 믿음으로,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졸음을 이길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으신 분이다.
새벽설교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컴퓨터바탕화면의 그림을 보았다. 바닷가 절벽위 좁고 길게 나와있는 절벽위에 등대가 있는 그림이다. 예전에는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나, 일본지진과 쓰나미, 땅함몰사건이후에는 그 절벽위의 등대가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아니, 왜 저런 곳에 등대를 세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 절벽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땅을 믿지 말라. 오직 하나님만 믿어야한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받드시 믿어야 할 두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첫째,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본문 41-43절은 도피성에 관한 말씀이다. 도피성이 왜 생겼는가? 잘못된 피의 복수를 막기 위함이다. 즉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함이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살인자를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살인 사건이 있는 경우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 살인자를 죽일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율법을 주셨는가? 그것은 복수를 합리화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이 악한 생각을 가지고 살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신 법이었다. 살인방지가 목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의가 아닌 경우이다.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의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평소에 아무런 앙심을 품은 적도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42). 이런 경우엔 용서가 필요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예는 더러 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자동차 급발진으로 사람을 치어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있으며, 등산을 하는 중 미끄러져서 돌을 굴렀는데 산아래 있던 사람이 그 돌에 치어 죽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떤 고의성도 없다. 고의성이 없는 사건에 대해 하나님은 용서를 선포하신다. 그게 하나님의 공의이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고, 억울한 자는 보호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도피성에 나타나 있다.
===> 구약시대의 도피성은 이제는 없는가? 아니다. 있다.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도피성이 되신다. 예수께로 피하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보호받고, 은혜를 입는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가 도피성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돈으로 살고, 자기 자랑으로 살고,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며 피해 나오는 사람들의 도피성이 되어야 한다. 고아와 과부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지난 주중에 어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여러 성도님들이 힘을 모아 그 가정을 도와주셨다. 많은 분들이 도피성의 역할을 하셨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축복하기는, 여러분 모두 도피성되신 예수안에서 참 보호하심과 사랑과 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길 바라고, 오늘도 우리 사랑의교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피성 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둘째,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요단 강 동쪽을 차지했다. 남북으로는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 동서로는 요단 강에서 아라바의 바다까지 이어지는 땅이었다. 땅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
==>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면 주신다. 아무리 상황과 형편이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면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연약해도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신다.
==> 문제는 우리이다. 우리가 말씀앞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약속의 땅을 얻는 것과 그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별개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잘 이행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 땅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요단 동편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선포하였다. 출애굽이후에 선포한 율법을 가나안땅 들어가기 바로 전에 다시 가르치는 까닭은 말씀붙들고 믿음으로 살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은 보물을 얻고도 보물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교수님이 경매에 나온 물건을 50만원에 샀단다. 아주 유명한 사람의 그림인데 아무도 그 그림을 가치를 몰라보았단다. 그래서 말도 안되는 싼 금액에 그 그림을 살 수 있었단다. 만일 그 그림이 우리앞에 있었다면 우리는그 그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50만원이 아닌, 5만원도 아까워하며 사지 않았을 것이다. 가치를 모르니까요. 가치를 알아야 보물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약속을 받고서도 불안해 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말씀을 받아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불신앙속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은 약속의 땅이 주어져도 그 땅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소용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 믿음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야 한다.
===>본문 앞의 말씀 40절을 다 함께 읽어보자.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이 심천땅에서 오래 살기를 원하는가?
===>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어라. 말씀대로 이루실 것을 믿어라. 그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십시오. 그러면 이곳 심천땅이 여러분에게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것이다. 한없이 오래살 것이다.
기도
1. 예수께서 우리의 도피성, 피난처가 되시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베푸시도록, 성도의 각 가정을 지켜주시도록(어려움당한가정들을 생각하며- 피할 길을 주시며,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이 지켜주시도록)
2. 신앙사경회를 통해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부활절이웃초청예배를 통해 우리교회가 도피성역할을 감당하도록
3. 어떤 이는 은혜받고 살지만, 아직도 어떤 이는 은혜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고, 주님앞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강권하심과 찾아가시는 은혜가 우리의 가족에게, 아직 믿음이 약한 모든 성도에게 임하시도록, 교회의 영적부흥을 위해
신명기 강해
신 4:41-49
오늘 주제는 요단강 동편의 도피성입니다.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율법 교육을 하는 한편, 틈틈이 다른 필요한 조치를 취했는데, 그중 하나가 도피성을 설치한 것입니다. 도피성은 총 6개입니다. 요단강을 기준으로 요단강 동편에 셋, 요단강 서편에 셋을 설치했습니다. 동편의 도피성 셋은 모세가 설치하고, 서편의 셋은 여호수아가 설치했습니다. 요단강 동편의 세 도피성은 베셀,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입니다. 베셀은 르우벤 지파를 위한 도피성이고, 길르앗 라못은 갓지파, 바산 골란은 므낫세 지파를 위한 도피성입니다. 이들 지파는 요단강 동편 땅을 배분받았습니다. 요단강 서편의 도피성은 게데스, 세겜, 헤브론입니다. 총 48개의 성읍 가운데 절묘한 위치 6곳을 정해 도피성을 세운 겁니다.
팔레스틴 어느 성읍에서든 도피성을 가려면 하룻길만 가면 됩니다. 어느 성읍이든 반경 32km 내에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도로도 잘 되어 있었고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도피성이란 표지판도 세워놓고, 청소, 양식 비축 등을 잘 해 놓았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한 개인의 인권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창작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입니다. 억울한 사람을 보호하라는 겁니다. 정착 후 분쟁이나 다툼이 발생하고, 그 와중에 인권유린 상황의 발생을 미리 예견하고 도피성을 세운 것입니다.
도피성(미크라트)은 어떤 제도입니까? 살인죄에 대한 형벌은 다른 그 어떤 징벌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살인죄에 대한 처벌이 가벼우면 그 사회의 정의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 나라나 살인죄에 대한 벌이 가장 중합니다. 살인죄에 대한 처벌이 혹독한 만큼 절대 억울한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의도적 살인과 과실치사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중한 죄를 지었으되 본의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한 곳입니다. 과실치사한 사람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재판에 응하게 한 제도가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우선 억울한 살인자가 도피성에 피신했다 해도 그 성 안에 있으면서 반드시 재판을 받으며 소명해야 합니다. 소명을 과실치사가 아니면 그를 끌어내 죽입니다. 억울한 사람만 보호하는 겁니다. 다음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도피성에 피신한 사람이 도피성에 있지 않고 이탈하면 율법의 보호를 못 받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해 도피성에 피신해 있던 사람은 무조건 사면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죄를 사했다는 대속사상 때문입니다.
도피성이 뜻하는 복음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 해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는 게 인간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단강 건너기 전에 도피성부터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살인죄는 엄격히 다스리되 그 재판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도피성 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동기와 과정입니다. 결과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실치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가슴에도 한이 맺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공명정대합니다. 이스라엘이 공의롭게 재판하지 못했기에 선지자를 통해 늘 책망을 들었습니다. 옛날 도피성은 오늘날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노아시대의 방주일 뿐만 아니라 도피성입니다. 우리가 죄 지으며 살다가 도피성으로 피했습니다. 교회는 확실히 마지막 시대의 방주이자 도피성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품입니다. 주님 자신이 도피성 되심의 고백이자 선언이 바로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은 ‘주는 나의 반석, 산성, 요새, 피난처, 방패시다’고 했습니다. 피난처가 도피성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그 대제사장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한 자들은 사면복권됩니다. 사실 우리가 그 혜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마련된 사면복권의 복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이게 바로 칭의입니다.
도피성 제도와 사상, 의미가 우리에게 큰 깨달음과 은혜,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진리를 겸비하십시오
신명기 4장 41-49절 / 도피성 구별 및 2차 율법 선포
모세는 첫 번째 고별설교를 마친 후 요단강 동편에 도피성 3군데를 구별해 지정했습니다(41절). 도피성은 고의가 아닌 과실로 살인한 자가 도피해 생명을 보호받도록 지정된 성입니다(42절).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도피성 제도’는 어떤 곳으로 도피하면 무조건 보호해주는 고대 이방지역의 ‘성역 제도’와는 다릅니다.
구약 때는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신 19:21).”는 계명에 따라 살인을 통한 개인적인 복수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복수가 복수를 낳아 원한이 깊어지면서 개인의 싸움이 가문의 싸움과 씨족의 싸움으로 커지는 것을 방비하려는 사회적 중재 제도로 도피성 제도를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격려하는 제도로서 죄인의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제도입니다.
요단강 동편에 지정된 도피성 3군데는 르우벤 지파를 위한 베셀, 갓 지파를 위한 길르앗 라못,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를 위한 바산 골란이었습니다(43절). 그렇게 도피성을 지정한 후 모세는 2차 고별설교를 합니다(44절). 그 설교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상기시키고 적용시키기 위한 설교였습니다(45절). 왜 모세가 2차 고별설교에서 이전의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다시 상기시켰습니까? 반복된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판에 하나님의 약속과 규례와 법도를 확실히 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발달된 세상 문화와 젖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 수도 있기에 가나안 땅에서 그 문화에 젖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고 미리 말씀준비를 확실하게 시키려고 그 설교를 한 것입니다. 말씀이 삶에 뿌리내리도록 진리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 안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
< 은혜와 진리를 겸비하십시오 >
‘도피성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얻는 은혜 체험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도피성의 은혜 체험만 너무 좋아하면 세상에서 도피하는 도피자처럼 되기에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얻는 진리 체험도 동시에 필요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겸비된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도피자’가 아닌 ‘세상 속에서 세상을 극복하는 인물’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체험신앙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습니다. 체험신앙이 가진 분열 이미지 때문입니다. 은혜 체험을 중시하는 만큼 진리 체험도 중시하고 전통적인 사역방식도 존중하십시오.
오늘날 교회 분열의 핵심 요인은 영성의 한 측면을 강조해 1급 신자, 2급 신자로 구별한 것입니다. 체험을 내세우는 성령운동은 그동안 교회가 잊었던 부분을 깨우쳐주고 잃었던 부분을 얻게 해주는 공헌도 했지만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런 부작용으로 인해 성령운동 자체에 대해 과도한 방어적 면역체계를 작동시키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할 확률도 줄어듭니다. 결국 해답은 은혜와 진리가 겸비된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체험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종교체험이 때로는 정신건강에 역효과를 미치고 정신적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정신적 혼란을 영적 체험으로 믿습니다. 그처럼 병적인 혼란을 순수한 종교 체험으로 혼동하는 것처럼 기독교에 피해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종교 집회에서의 종교 체험이 정신병을 유발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 가짜 신비주의 때문에 신비의 세계를 부인하지는 마십시오.
영적인 능력으로 자기도취에 빠진 인간을 깨워 자신을 직시하게 하고 양심의 불안을 피해 세상에서 도피한 사람을 그 도피처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겸손한 십자가의 능력이 아닌 능력은 큰 정신적 문제를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잘못된 영적 능력을 추구하다가 심한 심리적 불균형으로 파멸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어떤 감정적 충격이 가해지면 자기를 다 태워버리는 길로 가기도 합니다.
신앙이 감정의 세계에 머물게 하면 안 됩니다. 영혼의 병은 선한 결단으로 현저히 치유됩니다. 왜 그런 결단을 두려워합니까? 영혼의 병이 종교적인 열광주의로 변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열렬한 신앙은 나중에 환멸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음의 결단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은 비현실적인 공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체험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현실은 물질주의자의 인격분열을 낳지만 현실이 없는 믿음은 신비주의자의 인격분열을 낳습니다. 믿음도 있고 현실도 있어야 합니다. 은혜도 있고 진리도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겸비된 삶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자기 멋대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주의자나 이상주의자가 되기는 쉽지만 참된 성도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참된 성도가 되려면 영성 추구가 일종의 도피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