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화단의 대부 - 서동진(소허 1900 - 1970)
서동진을 두고 대구의 화가, 대구 화가의 대부, 수채화라는 독특한 화풍으로 대구 화단의 특성을 구축한 화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1900년에 태어났다는 사실만 보아서도 한국의 서양화가로서는 아주 앞선 시대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정착하는 초창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임이 분명한데도 대구라는 지방에서 활동한 까닭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대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사숙을 했고 18세라는 꽤 늦은 나이에 해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계성학교를 다닐 때 반일 운동을 한 경력으로 졸업을 얼마 앞두고 퇴학당한다. 새로 서울의 휘문고보로 전학했다. 이후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24세에 대구로 내려와 첫 직장으로 계성학교 교원이 되었으나 곧 ‘회화전문연구’를 위해 그만둔다. 1925년에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고교)의 무보수 미술교사로 15년 간 봉직한다. 1931년 다시 계성학교 도화교사로 부임하면서 제출한 이력서에서 앞의 약 2년간의 연구기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힌 바 없다. 그 사이에 그는 양화 도입기에 형성된 대구의 신생 화단에서 크게 주목받는 화가가 되었다.
서동진이 화단에서 갖는 또 하나의 큰 의미는 대구 화단의 지도자라는 점이다. 대구는 우리나라의 서양미술 수용기에 구심점 역할을 한 지방이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유학 후에도 대구에서 활동한 화가였다. 상업 미술과 인쇄소를 겸하는 ’대구 미술사‘를 운영하면서, 스스로 대구 미술의 요람이라고 했다.
당시 대구 화단에는 주체 의식을 가진 미술가들이 많이 활동했다. 서동진이 주축이 되어 수채화를 그리므로 대구에서는 수채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 우리나라에 서양미술이 싹을 틔워 가던 1924년, 서동진은 일본 유학 중에 수채화를 공부하였다. 유화 일색인 한국 화단에 수채화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그는 대구에서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그들은 후에 우리나라 화단에서 걸출한 인물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30년 경의 소허 서동진은 당시 서른 안팎의 교사요, 화가이었다. 후배에게 회화 및 판화기술을 전수하였고, ‘대구미술사’란 사업체를 경영하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1927년과 28년 두 차례 수채화 개인전을 시작으로 일약 대구 양화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식민 치하 속에서의 민족 애환을 수채화의 투명함 속에 녹여 내면서 대구 화단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정처 없는 발걸음들이 오가는 대구역, 한복 차림의 마부, 근로자들, 리어카 행상, 개천의 다리 밑에서 빨래하고 있는 여인들, 길가를 따라 자리해 있는 가정 주택과 언덕 위로 짙은 녹음이 펼치는 풍경…그의 작품은 이처럼 모두가 일상적인 포근함에서 출발한다. 특히 그는 민족의 애환과 소리 없는 한숨을 화폭에 담고 있는 화가였기에 그의 작품은 우리네 삶이 드리운 눈물과도 같았다.
1927년에 동아일보 대구 지부가 ‘서동진 수채화 전람회’라고 하여 대구 조양회관에 열어주었다. 이것은 개인 전람회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우리나라에 수채화라는 양식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채화의 열기에 힘입어 다음 해인 1928년에 수채화를 가지고 다시 한 번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대구의 서양화 화단에서 중진작가로 불리면서 과분의 대접을 받은 것이 오히려 그의 활동에 장애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의 나이 겨우 28세 였다.
이후로 화가로서 공식적인 활동이 미미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930년에 결성했던 ‘향토회에’ 참여하여 저극적으로 활동하면서 35년 6회전까지 이어간 것이 그 후 공식적인 작품 활동의 전부다.
서동진은 화가로서라기보다는 미술 운동에 더 열심이었다고 말한다. 그림에 뜻을 둔 사람을 모아서 동인회를 만들었다. 영과회와 향토회를 결성하여 수채화의 보급과 지방미술의 발전에 힘을 쏟았다.
서동진이 화단에서 갖는 또 하나의 큰 의미는 대구 화단의 지도자라는 점이다. 대구는 서양미술 수용기에 구심점 역할을 한 지방으로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유학 후에도 대구에서 활동을 한 화가였다. 그는 대구 미술사를 운영하면서 1928년에 이인성을 발굴하여 지원하였고, 김용조를 발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인성과 김용조 같은 후학들을 발탁해서 그들의 내부에 잠재해 있던 천재성을 드러내도록 도왔지만 정작 자신은 화가로서의 재능을 다하기 전에, 너무 일찍 붓을 놓았다.
대구에서 활동한 서동진이 서울의 중앙화단과 연결된 것은 몇 번 참가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서동진이라는 이름이 우리나라 화단에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1928년에 선전에 출품한 작품 평을 통해서 서동진을 ‘다소 사실적이며서 아카데믹한 화풍의 소유자로서, 가장 흥미를 느끼게 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화가들은 유화에 비해서 수채화를 과소평가하였다. 유화를 그리기 위한 기초적인 학습 과정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같은 수채화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가 서동진이다. 외면당하던 일상적인 풍경을 화폭에 담아 내며 민족의 애환과 삶을 노래했다. 서동진은 그 어떤 화가보다도 따스한 정감을 작품에 불어넣었다. 대구 화단의 특징의 하나인 수채화가 성하였음은 그 연원이 서동진에 있다고 한다.
물론 그가 유화를 전혀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유화 작품인 <팔레트 속의 자화상>에서도 그는 마치 자신이 수채화가라는 사실을 말하듯 사실적인 묘사를 서슴지 않았다. 특히 이 작품은 나무로 만든 수채화 팔레트 박스에 그려져 그가 가진 수채화에 대한 애정을 말해 준다.
서동진은 수채화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는 수묵화가 무릉도원이나 관념적인 산수화를 그린 반면, 서동진의 풍경은 일상적인 것을 취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시 유화에 비해서 과소평가 되었던 수채화라는 장르에서 굳이 서동진이 수채화 전문화가로 활동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식민 치하 속에서의 민족 애환을 수채화의 투명함 속에 녹아 내며 화단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작품은 이처럼 일상적인 포근함에서 출발한다. 특히 그는 민족의 애환과 소리 없는 한숨을 화폭에 담았다.
1930년경에 그가 주동하여 만든 향토회는 이전에 영과회의 회원이 좌와 우의 화가들이 혼성되어 있는 것을 우측 화가들로 새롭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1회 향토회전을 가졌을 때는 이인성이 13점이나 출품한 것도 눈에 띤다. 김용조도 3점을 출품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경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 경상북도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계보상으로는 신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신도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민의원 외무위원회(현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서동진의 유작은 서울, 대구, 부산 등지로 흩어져 있는 30여 점의 수채화가 알려져 있다. 자화상 등 인물화도 있지만 대부분이 풍경화이다. 그의 풍경화는 도시화되어가는 대구를 표현해서인지 초갓집보다는 서구화된 건축물이 많다고 한다.
서동진의 미술사적 성과는 작품 내적인 면에서(작품의 경향이나 특징 등) 그치지 않는다. 지방에서 갖가지 미술운동이 갖는 악조건을 극복한 투지와 사명감에서 찾을 수 있다.
첫댓글 대구미술사가 반월당에 있었다고 하던데, 정확한 주소나 위치를 아시는 회원님이 게신가요?
조양회관도 대구미술사를 공부해보면 많이 나오거든요. 조양회관에 대해서도 아시는 회원이 계시는지요.
아시는 분이 있으면 자료 부탁 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