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좌표: 51°30′26″N 0°07′39″W / 51.507222°N 0.1275°W / 51.507222; -0.1275
- 다른 뜻에 대해서는 런던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런던(London)은 영국 및 잉글랜드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면적은 1,577.3㎢이고, 인구는 735만 5,400명이다. 잉글랜드 남동부 템스강 하구에서부터 약 60km 상류에 위치한다.
런던은 세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며, 유럽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유럽연합(EU) 내의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크다.
//
[편집] 역사
[편집] 초기의 역사
기원(起源)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에 지금의 런던 지역에는 켈트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후, 로마인이 43년에 론디니움(Londinium)이라는 요새를 건설한 것이 그 시초이다. 200년대 초반에, 로마인들은 도시에 많은 벽을 세웠는 데 침입자들로부터 방어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410년에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로마군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편집] 중세 시대
게르만족의 부족인 색슨족, 앵글족, 유트족이 브리튼 섬의 동부를 공격하여, 결국 그곳에 정착하여 왕국을 세운다. 그래서 런던은 새로운 도시로 번영하였다. 800년대에는 덴마크의 바이킹이 도시를 공격하였고, 후에 알프레드 대왕이 런던을 새로 설립하였다.
1000년대에는 앵글로색슨의 왕 에드워드 참회왕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세웠다. 1066년에는 프랑스의 귀족인 기욤 (후에 윌리엄 1세)이 영국을 통치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 1세는 런던시민들을 자치정부로 승인하였다.
중세기 동안에는 런던의 다른 건조물들이 건설되었는데, 1090년 쯤에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200년 후에 완공되었다. 1209년에는 런던 브리지가 템스강에 첫 돌다리로 세워졌다. 후에 나무 다리로 변하였다가 가끔씩 재건하였다.
1100년대에는 런던의 공예와 상업의 길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길드는 각각 동업끼리 숙련공과 상인들을 상징하였다. 길드의 조합원들은 1190년대에 런던의 첫 시장을 뽑았다. 1215년에 존 왕이 런던이 자기 뜻으로 통치되는 것을 확립하였다. 역사가들의 주장으로는 1400년대에 런던의 인구가 약 75,000명이었다고 한다.
[편집] 장벽들을 넘은 확장 시대
런던은 1500년대와 1600년대 초기에 빠르게 번영하였다. 헨리 8세의 통치 때에는 귀족들이 장벽들의 바깥인 서쪽에 사유지를 지었다. 헨리 8세가 사망한 1547년에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이 의회의 회의 장소가 되었다.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 때 와서 런던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상인들이 부유해지면서, 화려한 집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첫 극장들이 외곽 지역들에서 개장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1600년대 중반에는 런던의 인구는 1000,000만명 절반이었다. 많은 런던 시민들은 장벽의 밖에 있는 구역들에 살았다.
[편집] 전쟁, 흑사병, 화재
1642년에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자, 런던은 올리버 크롬웰과 다른 청교도들이 이끄는 의회편 쪽에 섰다. 신앙심이 깊은 청교도들이 1649년에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권력을 잡자, 런던은 번영이 못 갔다. 크롬웰 정부가 극장들을 문닫는 등, 시민들의 인기를 잃었다.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망명으로부터 돌아오자, 런던 시민들은 그를 환영하였고 왕정 복고를 이루었다.
흑사병이 1655년에 도시를 황폐시키기 시작하였다. 쥐들이 빈민가를 들끓면서 도시로 번져가서 생겼는데, 100,000명의 생명을 빼았았다.
1666년 9월 2일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사망자의 수는 적었다. 그러나 세인트 폴 대성당과 80개의 다른 교회들, 44개의 길드 회관들 등 과 13,000채의 주택들이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다.
[편집] 재건
런던 시민들은 목재 대신, 돌과 벽돌 등을 이용하여 도시를 재건하였다. 새도시의 위대한 건축인은 크리스토퍼 렌 경이었다. 그는 화재로 인하여 파괴된 많은 건물들을 재건하였다. 많은 상인들도 웨스트 엔드로 옮겨갔다. 런던의 비지니스들은 곧 회복되었다. 1700년대 초반에는 런던 증권거래소가 열렸고, 신문업계들도 생겼다.
[편집]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18세기 이후 산업혁명기를 거치며 급속히 성장했으며, 1800년에는 인구가 대략 1000,000명이었다. 1800년대에는 런던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알려졌다. 산업혁명기동안의 런던의 주요 역할은 공업 제품을 파는 시장들을 발달시키는 것이었다. 도시의 상인들과 은행가들은 막대한 행운을 만들었다. 부자인 런던 시민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기는 하나, 웨스트 엔드 지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1800년대 중반에는 웨스트 엔드는 유행적인 사회 생활지역으로 유명해졌다. 산업혁명은 런던에 번영은 물론 고통을 끼치기도 하였다. 부두, 공장,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복잡하고 병이 옮는 빈민굴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후에 슬럼 분위기는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편집] 외곽들의 번영
1800년대에는 수많은 런던 시민들이 도시의 외딴 지역들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교통의 발달과 함께, 외곽의 번영이 시작되었다. 1750년에는 웨스트민스터 다리가 세워졌고, 그 후에 수많은 다리들이 세워졌다. 19세기에는 마차가 도시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고, 1800년대 중반에는 철도 서비스가 급격히 발달되었다.
런던 정부의 첫 개혁은 1888년에 세워졌다. 그레이터 런던이 그해에 성립되었고, 다음 해에 28개의 자치구가 생겼다.
[편집]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독일 공군이 런던에 폭탄 투하를 한 적이 있는 데, 제2차 세계 대전에는 더 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나자, 런던의 수많은 지역이 무너졌고, 15,000명~50,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곧 런던은 재건되어 영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편집] 최근 상황
1946년에는 1차 국제 연합 총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20세기 동안에 식민지들이 독립되자, 그 나라들로부터 들어오는 이민들이 급증하였다.
2005년에는 2012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가 결정되어, 세 번 올림픽을 개최한 유일한 도시가 되었다.
[편집] 주민
영국인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서인도 제도, 아프리카 등의 전 식민지들에서 온 이민들이 늘어났다. 최근에는 폴란드인들도 돈벌이를 위해 런던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젊은이들도 그 목적으로 들어오는 편이다. 중국인들도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영어학습을 목적으로 하는 단기체류자들도 많은 편이다.
[편집] 종교
많은 런던 시민들은 영국 국교회와 로마 가톨릭, 또한 다른 개신교도들이다. 또한 이민자들에 의하여 힌두교, 시크교, 이슬람교, 불교 등의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는 편이다.
[편집] 경제
[편집] 금융
런던 증권거래소는 뉴욕 증권거래소나 도쿄 증권거래소와 함께 세계 경제의 3대 중추(中樞)이다. 또한 중앙 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의 본사이기도 하다.
[편집] 공업
런던에서 제일가는 공업은 출판업이고, 섬유, 기계, 약품 등의 제조업이 발달하였다.
[편집] 교통
런던 지하철은 세계 도시의 지하철 중에서는 최초로 개통된 것이다. 런던 부근에는 6개의 공항(空航)이 있으며, 그 중 런던 히드로 공항은 국제적인 주요 허브 공항이다. 센트럴 런던 지역으로 진입하는 차량에는 혼잡통행료가 부과된다.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역에서는 해저터널을 통하여 프랑스와 벨기에로 갈 수 있는 유로스타를 이용할 수 있다.
[편집] 스포츠
런던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며, 아스널 FC,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찰턴 애슬레틱 FC, 첼시 FC,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크리스털 팰리스 FC, 토트넘 홋스퍼 FC, 풀럼 FC 등 다수의 축구팀을 보유하고 있다.
[편집] 국제관계
자매도시:
우호협력도시:
[편집]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