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0일 (화) 촬영.
수로왕비릉과 김해향교, 김해읍성 북문을 거쳐 수로왕릉으로 가는 <가락왕릉정로>에 들어서니 배가 고파,
이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낙지곱창전골집"에서 일인당 10,000원 씩이나 하는 음식을 먹었는데 별로더라구요.
식당 건너 길에 수로왕릉이 있었습니다.
수로왕릉 숭신전으로 들어가는 문인 숭경문입니다. 평상시에는 열지않는 문인것 같습니다.
숭경문을 지나.
수로왕릉의 정문인 숭화문으로 왔습니다.
문앞에 하마비가 있네요.
숭화문을 들어 서면,
홍살문이 있고
그 뒤에 가락루가 있습니다.
가락루 옆에는
숭선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도 있네요.
가락문을 들어 서면 또 넓은 광장이 나오고
문이 또 하나 있어 수로왕릉이 직접 보이지 않습니다.
능침의 납릉정문(納陵正門)입니다.
납릉정문은 1792년에 세워 졌는데 쌍어문, 파사석탑, 코끼리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인도와의 교류를
나타내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수로왕릉을 보기 위해서는 정문인 승화문과 홍살문, 가락루를 지나 납릉정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납릉정문을 들어서야 비로소 수로왕릉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상시 납릉정문은 개방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수로왕릉을 벌초하는 날이라 잠시 능역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수로왕릉(首露王陵)은 서기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駕洛國, 金官伽倻)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립니다.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과 숭인전, 안향각, 신도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납릉 정문에는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모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합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능역이 설정되었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조선 선조 13년(1580) 영남관찰사 허영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 능비를 세웠으며,
고종 15년(1878)에는 승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는 춘추(春秋)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 숭선전재례는 경남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안내문)
가락국 수로왕릉이라고 새겨 있는 비는 조선 인조25년(1647)에 세운 비입니다.
문인석과 무인석.
무인석과 무인석은 경계석 위쪽에 있고 석호, 석양, 석마는 아랫쪽에 있습니다. 조선왕릉과 형식이 다릅니다
벌초하는 모습입니다.
능의 우측 모습입니다. 측면 담장 밖에 있는 건물이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이고요,
경계석과 석호, 석양, 석마, 우측으로 보이는 삼문이 납릉정문(納陵正門)입니다.
납릉정문 안에서 본 모습입니다. 문 위의 대들보 3곳에 하얀 석탑을 가운데 두고 쌍어문이 그려져 있습니다.
확대하여 보면 확실하죠.
쌍어 모양의 문양은 우리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드나 인도에선 흔한 문양으로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하는 문양이라고 합니다.
안쪽의 모습입니다.
숭선전 정문인 숭인문입니다. 이 곳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숭선전은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숭선전 정문인 숭인문에도 쌍어문이 있습니다.
숭인문 현판 좌우측의 문 위에 쌍어문 문양이 보이죠.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입니다.
안향각은 춘추제례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香)과 촉(燭)을 봉안하는 곳 입니다.
숭선전 옆에는 숭안전(崇安展)도 있습니다.
가락국 2대에서 9대까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곳 입니다.
숭안전은 1988년 신축되었습니다.
팔왕조(八王朝)- 2대 도왕(道王), 3대 성왕(成王), 4대 덕왕(德王), 5대 명왕(明王), 6대 신왕(神王),
7대 혜왕(惠王), 8대 장왕(莊王), 9대 숙왕(肅王).
숭안전에서 숭신전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앞에 보이는 문을 나가면 수로왕릉이 나옵니다.
숭안전과 숭선전의 뒷편입니다. 전각의 뒷편에 넓은 공원같은 후원이 있습니다.
숭안전 앞문으로 나가면 숭모재가 있는 공간이 나옵니다.
납릉정문 좌측에 있는 숭신각입니다
숭신각에 보호되고 있는 신도비에는 가락국의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신도비에서 본 수로왕릉.
신도비 뒤에 있는 숭재입니다.
연화대석(가락국 중엽에 조각된 것으로 호계사 절터에서 1910년도에 옮겨옴)
연화대석(복련을 새긴 받침돌)은 수로왕릉 앞 광장에 있습니다.
숭재 정문인 경모문.
숭재앞의 정료대(불을 밝히던 관솔 등을 올려 놓았던 돌)
숭재는 고려조부터 있던 김해부의 유향소(留鄕所)가 시대적 변천에 따라 향사당으로 개칭되었다가 "숭재"
가 되었습니다. 회로(會老)라고 이름지어 탁영 김일손이 회로당기문(會老堂記文)까지 지었다는
숭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는 동안 거의 소실되어 1728년(영조4)에 향사당을 북문밖에 이건하고
회로당으로 삼았다가
1878년(고종15) 수로왕릉에 숭선전을 창건함에 따라 북문밖에 있던 향사당의 회로당을 이곳으로 이건하여
숭재로 개판(改板)하였습니다.
숭재앞의 정료대.
수로왕릉의 연못.
구지봉에서 이 곳으로 옮긴 <천강육란석조상>
가락루를 나와
숭화문에서 택시를 타고 마지막 답사지인 해은사로 갑니다.
김해시의 진산인 분산(330m)에는 분산성과 성안에 해은사(海恩寺)란 절이 있습니다.
차로 거의 정상까지 올라 왔어도 남은 길이 험난하네요. ㅋㅋㅋ
분산성(盆山城) 이정표.
분산성 / 사적 제66호.
분산성은 김해시내, 김해평야와 낙동강, 그리고 남해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분산(330m)의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입니다.
현재는 시내쪽 경사면에 약 900m 가량의 성벽이 남아있고, 성안에서는 몇개의 건물터도 조사되었습니다.
성안에 있는 3개의 비문과 신중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분산성은 고려 말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옛 산성을 돌로 쌓았고, 조선말 1871년에 김해부사 정현석이 고쳐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가야, 신라의 토기편들도 출토되고 이 고대산성의 주류였던 테뫼식 산성이란 점
등에서 신라나 가야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해시민들에게는 만장대란 이름으로
친숙한 분산성은 조선시대에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리면서 만장대란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1999년에 복원된 봉수대 뒤편의 바위에는 만장대라고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도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산성 안의 해은사는 가락국의 허황옥이 바다에서 왔다는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하며,
해은사에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황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승병이 주둔하였다고 합니다. (안내문)
분산성의 성벽.
해은사입니다.
해은사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대왕전이 있고
옆에 법당인 영산전이 있습니다.
대왕전은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영정앞에는 허왕후가 망산도(望山島)
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라 불리는 영험있는 돌이 있어 지역민의 오랜 토속신앙으로서 남자에게는 재복을
여자에게는 생남을... 절에 지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전해주는 많은 영험설화를 가지고 있다네요 (안내문)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
조선시대에 그렸다는 김수로왕의 영정입니다.
영정 앞에는 허왕후가 망산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영험 있는 봉돌이 있네요.
허왕후의 영정과,
봉돌입니다.
대왕전에서 본 불이문입니다. 산중의 약수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해은사에 적멸보궁도 있습니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산신각 옆으로 길이 있네요.
해은사의 파사석탑 적멸보궁입니다.
영산전 뒤 옛 타고봉 자리에 세워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파사석탑 적멸보궁은
허왕후와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인도에서 가져온 가야불교가 한국불교문화의 모태로 성장한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절인 호계사와 최초의 탑인 파사석탑을 이루고 4국(가야,신라,백제,고구려)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추사 김정희가 중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해은사 사리탑과
연화사 칠층석탑에 각각 3과씩 봉안하며 세운 탑입니다. (인터넷 백과 등에서 발췌)
파사석탑 적멸보궁의 모습.
적멸보궁의 확대사진 (클릭해 보세요)
적멸보궁에서 본 해은사의 뒷모습입니다.
해은사 영산전.
해은사에서 만장대가는 길에 충의각이 있습니다.
클릭해 보세요.
충의각에 보존되어 있는 네개의 비석입니다. 모두 공덕비예요.
공덕비가 있는 능선에서 본 김해시내입니다.
이 바위 뒷편에,
대원군의 글씨라는 만장대란 글과 인장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만장대 옆에 있는 봉수대의 계단입니다.
봉수대에서 본 김해시내의 풍경이고요.
현재의 봉수대는 복원을 한 모습입니다.
봉수대에서부터 복원된 분산성이 시작 됩니다.
분산성이야기
사적 66호인 분산성은 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김해 분산의 정상에 둘레
약 923.7m에 걸쳐 돌로 쌓은 성벽입니다. 처음 축조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분산성 복원사업 당시 가야와 신라의 토기 파편이 다수 출토되었고 삼국시대 산성의 특징인 테뫼형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즉 김해 가야의 중심 근거지를 형성하였던 산성으로 판단됩니다 (안내문)
왕후의 노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은 꿈속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낭군이 될 수로왕을 만나기 위해 머나먼 바닷길에
올랐습니다. 거대한 바다, 거친 파도 속에서 그녀에게 위안이 된 것은 저녁노을이었다네요.
노을은 오늘의 안녕과 내일의 만남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허황옥은 마침내 운명의 짝을 만나 수로왕비가 되었으나,
그 노을을 잊을 수가 없어 처음 이 땅에 발을 내딛던 길이 훤히 보이는 분산성에 올라 노을을 보며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고 인도 아유타국에 대한 그리움도 달랬습니다.
분산성 노을은 이렇게 허황옥의 도전과 사랑을 품게 돼 <왕후의 노을>로 불립니다.
이 노을은 너무 아름다워 금릉팔경 중의 하나이며,
김해낙동강레일파크의 "왕의 노을"을 마주하고 있어 더 의미가 있습니다.(안내문)
아름다운 분산성.
낮시간이라 그래선지 분산성에 오르는 사람들이 없더라구요. 우리들만의 세상이었네요.
내려온 길을 뒤돌아 보기도 하고.
성곽에 앉아 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2,000년 전에도 이 산성에 가야사람, 신라사람들이 올라왔었을꺼라는 생각을 하니 세월이 무섭네요.
암문도 있습니다.
위에서 보니 성벽이 꽤 높았어요.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와,
성의 외벽도 보았습니다. 다시 성안으로 들어 오는 길이 없을것 같아 성 밖으로 걷지는 않았습니다.
밖에서 본 암문의 모습.
보수가 안된 성벽도 있네요.
복원된 분산성 성벽을 돌아 밖으로 나왔습니다.
걸어 내려갈 엄두가 안나 이곳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경전철역까지 내려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