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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1-4
신 5:1-15
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15 / [십계명] 모세가 온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놓고 율법을 선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ㄱ) 계명과 규정들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을 모두 외우고 그대로 사십시오. (ㄱ. 이 십계명은 출20장의 십계명과 근본적으로 같은 내용이지만 그 계명의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에서 서로 조금씩 다르다. 또 출20장의 1-2계명이 여기서 첫째 계명으로 결합되어 있고 열번째 계명은 9-10계명으로 나뉘어 있다) 2)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3) 그 계약은 이미 죽은 우리의 조상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4) 여호와께서는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 여러분과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5) 그러나 여러분은 그 불길이 무서워서 산으로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와 여러분 사이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다. 내가 너를 애굽에서 이끌고 나왔으며 너를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7)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8)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의 모양에 따라서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 9)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숭배하며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나 여호와는 질투하나 하나님이어서 너의 온전한 사랑만을 받기 원한다. 누가 나를 미워하고 내게서 떠나가면 내가 그 죄를 그의 후손 삼사대에까지 갚겠다. 10)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손들에게도 변함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겠다.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말라.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쓰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그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기만 하라. 13) 일주일 가운데에서 네 모든 일을 할 시간은 엿새 동안이다. 14) 그러나 제7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바치는 안식일이다. 이날에는 너나 네 자녀나 네 노예나 네 소나 나귀나 네가 키우는 어떤 짐승이나 네 집에 함께 사는 외국인까지도 쉬어야 한다. 이날에는 네 집에서 일하는 남녀 노예들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라. 15) 네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안식일에는 쉬도록 네게 명령하셨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출애굽 1세대들에게 주신 십계명을 출애굽 2세대들에게 다시 주십니다. 십계명은 세상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삶, 마음가짐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1-6) 십계명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신앙의 대전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행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저명한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구원하는 은혜가 이에 반응하는 인간의 순종보다 먼저”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7)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 유일한 하나님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고대 근동 세계의 다른 나라처럼 여신의 자리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들의 모든 삶의 중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요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8-10) 인간은 하늘에 있는 신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우상 안에 가두어놓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신의 능력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만든 신은 모두 가짜입니다. 헛된 것을 의지하는 삶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욕망과 공포를 위해 조작되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11) 하나님의 이름을 하찮게 취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그 이름이 조롱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지켜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12-15)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분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이날은 예배와 쉼의 날입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회상하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과 가축에게도 안식의 특권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늘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적용: 1-4계명은 하나님과 관련한 계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면 당신 삶의 모든 것이 어그러집니다. 하나님을 당신 인생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십시오.
한국의 여인들은 아기를 낳기 전 댓돌위에 놓여진 자기 고무신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고 합니다. 아기를 순산하고 다시 이 고무신을 신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문지방이 흔들리고 대들보가 내려앉는 것 같은 산통을 겪어야만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 후에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셨습니다.
< 설 교 >
주일성수의 참된 의미(2)
신 5:15, 요 5:16-19 / 박기완 목사
지난주에 우리는 주일성수의 참된 의미(1)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제 칠일은 창조의 엿새와는 달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음으로 무시간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제 칠일은 해가 지지 않는 '영원한 하루'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일간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제 칠일에 안식하시고 이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제 6일에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첫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이요, 바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교제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안식이요 또 하나는 인간 편에서의 안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안식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에 대한 만족과 기쁨으로 쉬신 날이었고, 인간 편에서의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이었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중요한 말씀, 곧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잘 준수했다면 아마도 인류는 완벽한 창조인 에덴 동산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깨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을 더 이상 창조주로서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안식이 파괴된 원인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안식의 파괴 - 인간의 죄(罪)
첫째로, 인간의 안식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이 사라지게 된 것도 역시 두 가지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인간은 영원한 안식이 사라지고 불안과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불안과 고통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죽었습니다. 엡 2:1절에 보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뻔 한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곧 영혼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약 2: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은 곧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과 단절되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된 사람은 그 육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육체의 죽음 이후에 또다시 영원한 죽음의 세계, 곧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계21:8).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뿐만 아니라 온 천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창3:16F에 보면,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창3:16), 아담은 노동의 고통을 당하여만 했으며(창3:17), 필경 흙으로 돌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창3:19,히9:27).
뿐만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땅을 비롯한 모든 세상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창3:18). 땅은 꽃과 열매를 내어야 할 터인데,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인간을 찌르고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짐승들은 사람을 따르며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데, 사람을 향하여 대어들고 물고 띁는 지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안식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안식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 칠일은 본래 인간의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모든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제 칠일을 축복하심으로 쉬셨으며, 그 창조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조물에 대한 만족과 기쁨이었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과 찬양을 돌릴 때, 하나님은 그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고 만족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기쁨과 안식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생겨난 안식의 파괴를 그냥 보고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를 타락한 그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곧 실행하신 것입니다.
창3:21절을 보면, 하나님은 죄를 지어 수치를 드러낸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한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 짐승은 아무런 죄도 없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 아담과 하와의 허물을 가리웠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상징언어' 였습니다. 대신 죽은 그 짐승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아무런 죄가 없었던 그 동물이 대신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고후 5:21).
2. 안식의 회복 - 예수그리스도의 사역(하나님의 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엿새 동안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시므로 안식을 누리셨으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또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 2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 곧 구속의 사역입니다.
이러한 구속 사역은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 동산의 안식에서 쫓겨난 이후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일은 안식과는 정반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이후로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고 천국이 도래하여 영원한 안식이 회복될 때까지... 하나님의 이 일, 구속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된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5:1F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38년된 병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물이 동할 때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으므로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므로 병을 고치는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이 이 사건을 목격하였다면 38년 동안이나 질병을 앓아서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환자를 고쳐주었다는 것이 큰 화제가 되고 주목을 끌었겠지만,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이 치유한 '날' 이었습니다. 그 날이 어떤 날인데... 그들은 그 '날' 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을 할 수 없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치료하는 일은 분명히 일이었으며, 그것은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도 생명이 위독한 환자라면 안식일에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처럼 만성적인 환자라고 한다면 안식일이 지나서도 고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구태여 안식일에 그를 고치는 것은 분명히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고의로 어기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셨을 때, 예수님의 능력을 생각지 않고 안식일의 규정을 어긴 일에만 몰두하였던 것입니다.
요5: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만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음을 입은 그 병자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조차 일로 규정하고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힐난하였습니다.
요5:10절에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답변하셨습니까?
요5: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전혀 일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유전보다 더 위대한 권세를 지닌 하나님의 경우를 예로 제시함으로 안식일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그날 이후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고 천국이 도래하여 영원한 안식이 회복될 때까지... 하나님의 일, 구속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식일이라고 해서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안식일이 되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일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참된 안식은 육체의 쉼이라는 단계를 뛰어 넘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범죄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이것이야말로 참된 안식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는 여러가지 직분을 맡아서... 주일날 쉬기는 커녕 직장생활을 하는 것보다도 더 동분서주하고 힘쓰고 애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날 오히려 쉬지 못하고 더 피곤합니다. 그러나 육체는 피곤하더라도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안에서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이 참된 안식이요, 더구나 하나님의 일을 주님과 더불어 함께 일 한다는 긍지를 갖아야 할 것입니다.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엿새 동안 노동을 하고 하루는 쉬는 것, 그것만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안식이 아닙니다. 참된 안식은 바로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행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타락 이후로 다시 일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따지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지으셨습니다. 요 6:28-29절에 보면,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규정지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구속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인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속 사역인 하나님의 일을 자신을 믿는 것으로 규정지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주일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지키려들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안하고 편히 누워 쉬는 것이 안식일입니까? 아니면, 주일만 하루종일 교회에 가서 살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식일의 의도가 참된 안식에 있듯이, 주일의 의도 또한 참된 구원을 통한 안식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주일에 골프를 쳐도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골프를 치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기 레저 생활과 사업상의 이익을 위해서 주일날 골프를 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불신자를 전도하고, 주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뭐... 매 주일마다 전도를 핑계 삼아 주일마다 교회는 빠지고 낚시를 가고 등산을 가고 취미생활만 전념한다면 그 낚시대는 집어 던져야 합니다.
사실.... 그것이 『전도의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 형편과 사정이야 자신과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에 남이 이러쿵 저러쿵 판단할 것도 못되고, 그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 개개인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주일을 어떻게 지내십니까?
3. 안식의 이유(동기) - 구원을 상기하라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식의 참된 동기, 안식을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안식일에 대한 말씀은 십계명에서 잘 기록하고 있는데, 십계명은 모세 오경에서 두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시간적으로 출애굽기에 비해서 나중에 쓰여진 것인데,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보내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교육하기 위해서 율법을 재차 강조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모순이나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을 보다 점진적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것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을 도표를 보면서 비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주보 제일 뒷면에 그 도표를 실었습니다. 함께 보면서 이해하시겠습니다.
언뜻 보기에 두 장에 기록된 안식일 계명은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20장 11a절과 신명기 5장 14c-15a절입니다. 두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규례를 지켜야 하는 동기 내지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신 것을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동기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것을 그 동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의 규례가 갖고 있는 동기에 대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규례에서 출애굽의 구원으로 변화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계시하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제사법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되고,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 와서 세례로, 구약의 안식일이 주일로 된 것 등은 모두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5:15절에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더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했습니다. 신명기 5:15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말씀은 '너는 기억하라'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억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종살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주며, 신음과 탄식 소리를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고난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셔서 출애굽시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에서 건져내어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서 안식일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시키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은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계명을 선포하시고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첫째는, 출애굽기 20장 11절에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7일 때 안식하신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둘째는, 신5:15절에 기록된, 애굽에서 구원하신 구원의 주를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의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주일)을 지켜야 하는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킬 때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늘 기억하였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며, 은총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과 감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은 안식일날 단순히 육체적인 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감사에서 비롯된 동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 규례를 주시고 지키라고 명령하신 중요한 의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안식을 누릴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 그 자체에 얽매여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급급해 했을 때,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격은 사라지고 안식일은 오히려 '생활을 얽어매는 족쇄'로 작용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단순히 지켜야 하는 규정으로 이해된다면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규례에 얽매였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규례에 얽매였을 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하는 책망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책망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지킬 때에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격과 기쁨과 감사에 비롯된 자원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며, 주일을 성수하고 있습니까? 혹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규례에 얽매여 조목조목 조항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어긋난 삶을 살면 정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력 없는 삶을 본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채찍을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주일을 성수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키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구원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그분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산본성광교회의 믿음의 권속들은... 주일성수의 참된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고, 이제 이후로 주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돌리는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
신 5: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세의 간략한 권면 같이 보이는 오늘 본문은 사실은 신명기 5장부터 26장까지의 모든 율법에 대한 그의 설명과 가르침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옛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재확인할 때마다 그 의식에서 사용되곤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터 받은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며 설명하는 일은 오늘 본문의 직전까지로 다 끝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모든 규례와 법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먼저 오늘 본문에 앞서서 자기가 전하고 가르친 모든 규례와 법도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한 말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하나님 자신이 명령하셨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임을 모세는 강조합니다. 16절 하반절의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17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밝혀주고 있습니다: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하여 갖는 언약관계의 첫 번째 도리는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며 하나님 외의 일체의 우상을 그들에게서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그의 도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인정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를 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 뒤에 나오는 말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도를 행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갖는 언약관계입니다.
언약관계는 쌍방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실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18-19절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18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만 일방적인 요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고 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당신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확언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 된다는 것,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 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신 언약관계입니다.
19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 더 부연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보배로운 백성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찬송과 명예와 영광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 즉 구별된 백성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신 언약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이러한 언약관계를 잘 지킬 때 하나님께서 베푸실 복이 어떤 것인지는 신28:1-14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 누릴 복으로 약속된 것이니 만큼 한 번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과의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배로운 백성 되게 하셔서 누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복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이 나라가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처한 가운데 광복절을 맞은 우리로서는 크나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갈 길을 잃고 혼란과 방황을 거듭하는 국민들에게 이 나라가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그 도를 행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도를 행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갈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길을 가지 않으면 망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백성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택해야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가는 길이 정말 우리가 가야 할 마땅한 길인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표를 향해 바르게 선택한 길인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에 서 있음을 깨달을 때에는 즉시 그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자유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되찾은지 59주년을 맞은 우리는 지금 세계가 놀라며 우려하는 국가의 이념적 방향전환을 꾀하는 세력들로 인하여 국민적 갈등과 불안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고 피땀 흘리며 달려온 끝에 공산주의 노선을 취한 북한을 압도하는 발전과 번영을 이루어왔는데 이제는 갑자기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도 눈총을 받을 만큼 민족주의와 민족공조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우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편과 좌편의 대치상황에서 국민들은 갈피를 못 잡고 이념적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과연 우리가 택할 길인지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 하고 전력으로 달려가도 국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는 과거사에 매달려 제자리걸음, 아니 뒷걸음만 치고 있습니다.
곧 선진국대열에 합류할 것을 기대하던 우리 국민은 어느새 머지않아 저개발국가들에게 추월당할 것을 예상하며 한숨짓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한 때 "한국 배우기"에 열을 올리던 나라들이 지금은 "한국처럼 되는 것 피하기"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즈음은 참 못 볼꼴을 많이 봅니다. 50년 혈맹관계를 유지해온 나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선호한다며 추파를 보낸 그 나라는 우리의 고대역사를 송두리째 도둑질하려고 작정하고 나서질 않나,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말로만 억지 부리던 나라가 얼마 전에는 노골적으로 독도에 상륙을 하겠다고 시위를 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 여러 나라들이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우리의 역사 지리에 관한 책자나 인터넷 자료들에서 우리 영토와 영해의 이름들을 슬며시 밀어내거나 남의 것처럼 바꿔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언제부턴가 이 나라가 나아가는 길이 바뀐 탓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새 출범을 하게 하신 이 나라가 택하고 굳게 지켜나갈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나라를 복지국가 만들고 선진국 되게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나라를 밖으로는 이웃나라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억눌리며 끌려 다니게 내버려두고, 안으로는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나라로 팽개쳐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보배로운 백성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19절, 신28:1).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신28:3).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신28:6).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하셨습니다(신28:8, 12). 많은 민족에게 꾸어주면 꾸어주지 꾸지 않을 나라 되게 하시리라 하셨습니다(신28:12).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습니다(신28:13).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패하게 하시고 그들이 한 길로 치러 들어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게 하시리라 하셨습니다(신28:7).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28:14에서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했습니다. 이제는 그만 우왕좌왕하고 하나님과 상관없거나 하나님에 대적하는 이 세상의 어떤 이념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좌든 우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어떤 사상이나 노선도 우리가 갈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멸시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로운 백성으로 여기시면 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찬송과 명예와 영광으로 삼으시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만 되면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짓밟으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19절, 신28:1)이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 어느 나라가 우리의 종주국 노릇을 하려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실 것(28:13)이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어느 나라가 우리의 영토를 탐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우리 앞에서 패하게 하시고 그들이 한 길로 우리를 치러 들어와도 우리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게 하실 것(28:7)이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늘 따라다니는 백성 되면 만사가 형통할 것입니다.
광복절을 다시 맞은 오늘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 되기를 온 국민과 함께 다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면하여 일하는 기쁨
신 5:4-6 / 이성희 목사
어느 심리학자가 10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외관상 혐오스러움, 특히 얼굴의 흉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지원자들을 서로 보지 못하게 떨어져서 실험을 하였습니다. 분장사는 지원자의 얼굴에 추악한 흉터를 분장하여 지원자들로 하여금 거울로 직접 보도록 하였습니다. 지원자들이 병원 대기실에 앉아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게 합니다. 대기실로 가기 직전에 분장사는 지원자에게 파우더를 발라주는 척하면서 흉터를 다 지웠습니다. 물론 지원자들은 지운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지원자들이 대기실에서의 경험을 얘기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하면서 한결같이 무례하고 자신을 피하고 흉터만 바라보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에 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가 자신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평가하게 됩니다.
또한 얼굴은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신체의 일부분입니다. 얼굴은 인격이며, 성품이며, 마음 자세입니다. 어떤 사람이 화가 났다, 기쁘다 하는 것을 얼굴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은 참 힘듭니다. 그래서 전화할 때는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얼굴 대하면 얼굴이 얘기하고 표정이 얘기하는데 전화로는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오해하기도 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만나서 얼굴을 대하여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보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의 어원은 ‘얼’ 바로 정신적인 것 그리고 ‘꼴’ 모양새라는 뜻으로 바로 정신적 모양새를 뜻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얼굴은 ‘얼이 들어 있는 굴’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얼굴은 얼이 들어 있는 곳입니다.
링컨이 대통령 재임 시절에 절친한 친구로부터 어떤 사람을 소개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재주가 비상하니 한 번 일을 시켜보게.” 링컨은 그 사람을 쓰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왜 그 사람 쓰지 않았는가?” 친구의 말에 링컨은 “사람은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얼굴이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얼굴을 다듬어가는 것은 내 몫입니다. 얼굴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다 씌어 있습니다. 우리의 표정관리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는 “얼굴보고 이름 짓자”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 다 나타나 있습니다. 보톡스 주사를 맞고 눈가의 주름을 없애도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뱃살은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얼굴은 자신의 모든 성격과 감정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얼굴’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얼굴을 붉히다”라는 말은 감정의 표정을 의미합니다. “무슨 얼굴로 다시 만나겠는가”라는 말은 처지와 체면을 뜻합니다. “정계에 얼굴이 넓은 인물이다”라는 말은 개인의 평판이나 지명도를 의미합니다. “연예계에 새 얼굴이 많이 등장했다”라는 말은 두각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표지는 책의 얼굴이다”라는 말은 사물의 주된 부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얼굴’이란 말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감추고 계셨습니다. 출애굽기 33:20에는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자신의 얼굴뿐만 아니라 온 삶을 다 보이십니다. 요한복음 14:9에는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요구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인격적 관계, 대화의 관계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얼굴을 대하는 대면의 관계로 변한 것입니다.
존 템플턴의 ‘열정’이란 책에는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표정은 그 이상입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의 표정은 온갖 마음의 것을 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속담에는 “질투는 천의 얼굴을 가진다”고 합니다. 얼굴 그리고 얼굴의 표정은 그 자체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영향을 미칩니다. 요한이서의 결론을 통하여 은혜의 말씀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대면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할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요한은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들려주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할 말이 많고, 쓸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노인과 아이의 차이 중의 하나가 노인은 종일 아무 말 없이 지내고, 아이는 종일 조잘거리며 지낸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의미입니다. 들려줄 말이 많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의 깊은 사랑이 묻어 있는 말입니다. 교회에 한 마디라도 더 들려주려는 늙은 사도의 애정이 넘치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는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 틀림없습니다.
요한이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써도 얼굴을 대하여 하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10계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613개의 작은 계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최초로 분류한 사람은 중세 유대 랍비 사상가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였습니다. 그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전부 분석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 법 248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법 365개를 만들었습니다. 248은 사람의 몸을 이루는 모든 부분의 총합입니다. 365는 1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습니다. 주실 명령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세밀하게 명령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등의 거창하고 큰 법만이 아닙니다. 레위기 19:27에는 “머리 가를 둥글게 깍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라고 하십니다. 레위기 21:5에는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발사가 할 일까지도 다 일러주십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심하게 권고하십니다. 다음 성경들에서 ‘다시’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0:7에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1:9에는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4:4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에서 반복해서 말할 만큼 얼마나 간절한 말씀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 절인 21:25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기록된 것 외에도 많습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씀이 많습니다. 성경에 기록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흔히 잔소리라고 하는데 잔소리는 굉장히 중요한 소리입니다. 어른들이 잔소리가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잔소리가 즐거워야 하는데 이게 방해가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고 합니다. 청소년들이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을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설문에 보시면 엄마가 공부하라고 잔소리할 때가 40%로 제일 많습니다. 시험결과나 성적이 나쁠 때가 35%입니다. 친구랑 싸우거나 사이가 나빠졌을 때가 13%입니다. 엄마랑 아빠가 싸울 때가 12%입니다. 그런데 “스트레스 받으면 보통 어떻게 해소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이 “특별한 해소방법이 없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잔소리에도 그렇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특별한 해소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 안 받는 방법은 있습니다. 잔소리를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와 사랑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많은 말씀이 사랑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의 잔소리가 스트레스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얼굴을 대하여 말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요한은 “오히려 너희에게 대면하려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글로 쓰는 것보다 얼굴을 대하여 말하면 훨씬 많이 할 수 있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대면하여”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입과 입을 대하여”(스토마 프로스 스토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종이와 먹”이라는 말에 대조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글로 쓰는 것은 제한되어 있지만 얼굴을 보면 할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보는 자체가 이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서는 얼굴을 보면서 하려고 글은 짧게 써서 짧은 서신입니다. 얼굴을 보는 것으로도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로마서 1:11에는 바울이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4에는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 보기를 심히 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7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 원하는 바울의 사랑과 소망의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는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은 기쁨이요, 확실한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어도 봐야할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를 들으면 더 얼굴을 보고 싶어집니다.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말입니다. 그래서 할 말이 많은 것 같지만 보면 모든 말이 필요 없기도 합니다.
창세기 45:28에는 야곱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합니다. 살아있다는 소식으로는 부족합니다. 가서 얼굴을 봐야 합니다. 고등학생 때에 납북된 김영남씨가 28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살아있다 소식 아니라 가서 직접 얼굴을 확인한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얼굴을 대하여 말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을 쳤습니다. 미술 시험인가 봅니다. 문제가 “할머니 생신입니다. 할머니께 드릴 카드를 예쁘게 그려보세요”입니다. 그 아이는 답에 ‘삼성카드’라고 신용카드를 그려놓았습니다. 아이들의 생각도 점점 돈인가 봅니다. 가장 좋은 것이 돈이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얼굴입니다.
영화감독인 우디 앨런은 “인생의 90%는 얼굴 도장을 찍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풍속도는 얼굴 도장이 아니라 온라인 도장이 더 많습니다. 얼굴을 대하고, 가주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바쁘다는 핑계로 청첩장에도 온라인번호를 적어서 보내고, 축의금도 부의금도 우체국 전신환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얼굴 없는 삭막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지난 주일이 서울노회 신광교회 창립 60주년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계시던 백상규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가신 교회인데 목사님이 지금 공부 때문에 미국에 가고 없어서 제가 그런 관계도 있고 해서 갔습니다. 제가 축사를 하게 되었는데 첫마디로 “나 떨고 있니?” 그랬습니다. 백 목사님이 우리 교회 사임할 때 “우선 일차 목표가 연동교회보다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 그날부터 잠을 못자고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떨 사람입니까? 그냥 듣기 좋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축사가 끝나고 나니 교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니 백 목사님 사모님이 제게 심각한 표정으로 “신광교회가 성장되면 연동교회도 잘 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는 겁니다. 농담이 아니더라구요. 진짜 떨게 되었습니다. 저를 소개하는 그 교회의 장로님께서 제게 영상 축하 메시지를 부탁했는데 영상이 아니라 직접 오겠다고 하셨다고 하면서 온 교우가 기뻐했습니다. 축하 화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축하꽃다발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축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얼굴을 보이는 것입니다. 얼굴은 어떤 것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연예계에서는 ‘얼짱’과 ‘몸짱’에 이어 ‘동안’이 유행했습니다. 이제는 ‘쌩얼’이 대세라고 합니다. ‘쌩얼’이 뭐냐 하면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을 뜻한답니다. 이런 대세는 연예인은 물론 일반에까지 널리 퍼진 맨 얼굴 열풍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화장품회사가 큰일났지요? 세계 여러 굴지의 화장품 회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화장품 판매가 성공하면 세계 어디에서도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화장품 신상품 시험 무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원래 외모에 관심이 많잖습니까? 그러니까 화장품이 잘 팔리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들끼리 하는 얘기를 옆에서 들어보니 “우리 나이에는 화장이 생명이다” 그러자 “맞아” 그럽디다. 그러면 화장품은 생명줄입니까?
우리교회는 이미 ‘쌩얼’ 다 했잖아요? 40일 특별새벽기도회 때 화장기 없는 얼굴로 40일을 봤는데 좋데요. 어떤 분은 잘 못 알아보겠는 분도 있긴 합디다. 그래도 특별새벽기도회 며칠 지나고 은혜 받고 나니까 화장 안 해도 새벽마다 얼마나 즐거웠습니까? 생 얼굴 보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책을 다시 쓰신다고 합니다. 너무 사람들이 성형을 많이 해서 알아보지 못해서 다시 만든다고 합니다. 화장이 지나쳐 분장도 하고 변장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맑고 깨끗한 본래의 얼굴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국인은 세계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민족입니다. 피부가 모든 나라에 다 맞습니다. 음식도 못 먹는 게 없습니다. 입도 세계 모든 발음 다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제 ‘한국의 평화’, ‘Pax Koreana’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얼굴은 누가 봐도 좋아한답니다. 조금 피부가 검은 사람은 흑인이 자기 친구인줄 알고, 얼굴이 조금 흰 사람은 백인이 자기 친구인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 얼굴은 가장 유리하다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목적은 예배드리는 자들의 얼굴을 변화시키는데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하면 얼굴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됩니다. 얼굴만 봐도 기쁨이 충만합니다. 부부도 함께 살면 얼굴이 닮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데도 얼굴이 변치 않는다면 문제이겠지요.
왜 얼굴보다 이름을 더 빨리 잊는지 아십니까? 왜 인용문 자체는 잊어버려도 인용문이 페이지 어디쯤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되는 걸까요? 영상기억이 문자기억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편지보다 얼굴이 기쁜 이유입니다. 얼굴을 대하는 것이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입니다. 얼굴을 대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람은 돈이 없이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무재칠시(無才七施)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시(身施)입니다. 몸으로 돕는 일입니다. 둘째는 심시(心施)입니다. 마음을 함께 하여 돕는 일입니다. 셋째는 안시(顔施)입니다. 편안한 얼굴과 웃음으로 대하는 일입니다. 넷째는 안시(眼施)입니다.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아 주는 일입니다. 다섯째는 언시(言施)입니다. 좋은 말, 격려하는 말, 칭찬하는 말, 따뜻한 말을 해주는 일입니다. 여섯째는 상좌시(狀座施)입니다. 남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일입니다. 일곱째는 방사시(房舍施)입니다. 내 집의 빈방에 하룻밤을 편하게 재워주는 일입니다.
편안한 얼굴과 웃음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서 아무 말하지 않아도 얼굴만 보여도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사실은 위로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얼굴과 가슴이 다가가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4에는 장래 천국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훗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찬송에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 얼마나 좋으랴”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대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보기만 해도 좋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최상의 기쁨을 누리는 소망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
신 5:6-15, 요 4:21-26 / 이기복 목사(하늘문교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가장 큰 축복이요 권리는 예배와 헌신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 감격을 체험하게 되면 예배생활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가장 큰 이유가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예배만 잘 드려도 신앙생활의 2/3는 잘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째 책인 창세기의 전체 내용도 예배와 직결된 내용입니다. 창세기에 인류의 시조 아담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했는데 뱀의 유혹을 받았고 뱀의 말에 순종함으로 결국 예배에 실패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중 카인은 예배의 실패로 살인극을 벌였고 하나님의 버림과 영원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먼저 제단을 쌓는 예배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복의 근원이 되었고 삶이 형통하게 되었으며 모든 인류의 믿음이 조상이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8:1에서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고 말씀했을 때 “섬길 것이라”는 단어가 원어로 “예배드린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 “They may worship me”라고 하였습니다(출 8:1). 출애굽의 가장 큰 목적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레위기는 전체가 예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번제로 시작되는 5가지 제사가 모두 예배에 대한 규례요 율법입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가장 중요시 한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너희가 예배할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결단했습니다. 여기도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시편은 가장 긴 성경이지만 예배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예배시간마다 시편을 교독하고 가사로 하여 찬송을 부릅니다. 성경의 마지만 책인 요한 계시록에서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 안에서 모든 역사가 최고의 절정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배는 하나님의 자녀의 첫째 되는 본분입니다.
예배라는 말의 본뜻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의 워십은 라틴어에서 왔는데 “하나님께 가치를 돌린다”는 뜻입니다. 즉 피조물이요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외에는 예배의 대상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를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배는 모든 삶의 핵심이었고 예배를 올바로 드리지 않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출애굽당시 성전인 성막은 예배의 우선권을 강조하도록 설계되고 지어졌습니다. 광야생활에서도 옮기는 곳마다 성막을 세우고 예배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예배와 제사의 원전이라고 하는 레위기는 일곱 장에 걸쳐 성막을 무려 243절이나 자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성막은 오직 예배를 위하여 설계된 하나님께서 백성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이동 중의 백성들의 진영(陣營)의 배치는 중앙에 있는 성막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예배를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2.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올바른 예배를 가르치셨습니다. 4:23절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했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짓 예배나 형식적인 위선적인 예배가 아니고 참으로 진실하게 예배드리는 온전한 예배, 진정성이 있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신령한 예배란 영적인 예배이고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정직의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하고 정직하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온전한 예배란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감사와 기쁨과 감격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무감각한 예배 감사와 기쁨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오늘날 무미건조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예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3. 예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드려도 되고 안 드려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바이로메타 즉 측정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올바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나라나 백성들을 엄하게 심판 하셨습니다.
삼상 13:8-14절에 사울왕이 40세 때 불레셋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블레셋은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6천명이요 백성은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전쟁을 하기 전에 제단을 쌓아야 하는데 사무엘 제사장이 오지를 않자 사울 왕이 급한 마음에 번제를 드리기를 마치매 사무엘이 왔습니다. 사울의 잘못된 예배행위는 결국 왕위를 빼앗겼으며 사울의 시대가 끝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함을 가르쳐 준 사건입니다. 왕이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과 그의 후손들은 왕위를 상실하였습니다.
4. 예배를 생명처럼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기본적이고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찾으신다”의 헬라어는 “제테이”인데 “집요하게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예배를 온전하게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찾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경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최고의 방법은 예배입니다. 이렇게 귀한 예배를 내 생명처럼 여기고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하나의 의식으로 의무나 형식적으로 드립니다.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도 하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기도 합니다.
생명처럼 귀하게 여긴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신앙과 열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신명기 6:4-5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곧 예배로의 부르심으로 예수님께서도 모든 계명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막 12:29-30절에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5. 끝으로 합당치 못한 예배를 경계해야 합니다.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잘못된 예배를 경고하십니다. 삼가 조심하여 잘못된 예배를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잘못된 예배일까요?
1. 우상을 숭배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영적인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신들을 하나님처럼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 샤머니즘의 신앙생활을 한다거나 조상을 신으로 섬기는 일이나 잘못된 풍습을 쫓는 것 일월성신(日月星辰)이나 자연물을 섬기는 것 등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이 무엇이든 척결해야 합니다.
2. 형식적인 예배와 위선적인 예배입니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형식적이고 습관화된 예배,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를 배격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신랄하게 책망하고 경고한 것은 바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예배를 책망하셨습니다.
3. 자기의 습관과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령의 충만함과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한 채 자신의 방식이나 잘못된 습관에 의한 예배입니다. 특히 교단의 교리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고 고착된 고집과 관습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이었지만 자기의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다가 죽었고 사울 왕과 웃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 Sunday 그리스도인의 예배입니다.
먼저는 오로지 주일 낮 예배 한번만으로 예배생활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생활은 모든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고 성도들의 세속화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주일 예배는 하나의 과정이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날로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지 않고 눈먼 것, 병든 것, 체면치례적인 모든 것을 싫어하십니다. 합당한 예배를 드립시다.
5. 조심하고 삼가야 할 일입니다.
그 외에 예배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일, 늦는 것을 습관처럼 하는 것, 기도시간에 다른 행동을 하는 일, 예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가는 행위 등 고쳐야 할 부분들이 많습니다. 또 철저히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헌금과 헌물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경건하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생활을 통하여 은혜와 복을 받는 성도가 됩시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신 5:6-11 / 이영훈 목사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사랑의 주 예수님께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한 번도 주님이 안 계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최선의 모습이 예배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주님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찬양하면 우리 삶 속에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찬양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복음성가 89장 ‘왕이신 나의 하나님’)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서 “주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내 자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이름이 홀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나서 죄 중에 살다가 죄 중에 죽어갈 그러한 불쌍한 존재였는데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 자녀 삼아주셔서 오늘 이 시간,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일생이 감사의 일생 되게 하시고, 주님을 찬양하는 일생 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여, 우리의 연약함을 바라보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게 하여 주시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주여, 주님 도와주옵소서.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설교말씀>
할렐루야. 저는 오늘 신명기 5장 6절로 11절 말씀 가지고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아멘.
여러분,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한 해가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생을 한 번밖에 살지 않기 때문에 정말 보람되게 의미 있게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행복함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참된 자유함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참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어나서 예수 믿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어요. 예수 믿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에 가장 큰 행복이요,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영생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불못인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우리만 예수 믿고 천국 갈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해서 함께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의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에 대한 계명인데 오늘은 1, 2, 3계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1. 구원의 하나님
첫째로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신명기 5장 6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야훼라
“네가 노예 생활을 할 때, 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너희를 구원해 내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할렐루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죄악 세상에 살고 있을 때 내가 너를 택하여 지명하여 불러서 너를 구원하여 낸 네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사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요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우리들의 노력으로 우리들의 행위로 우리들의 선한 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1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님이 말씀합니다. “인간의 노력에 기인한 선행으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보다 종이배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 하고자 하는 편이 낫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아무리 우리가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선한 일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놀라운 운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그 은혜에 감사해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 살아가는 동안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의 일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의 일생을 주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늘 우리 삶 가운데 제일 우선순위이고 가장 힘써야 될 내용이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명하심
오늘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명하신 이 말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봅니다. 5장 7절에,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만 섬길 것이지, 사람들이 만들어낸 여러 신들을 섬기고 그 앞에서 빌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참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도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이사야 45장 18절에,
나는 야훼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느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제일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을 섬겨요.
제가 일본에서 사역할 때 일본에 얼마나 많은 신들이 있는지 800만 신이 있다고 그래요. 숫자를 어떻게 세었는지 모르겠어요. 사카타라고 하는 농촌에 제가 성도의 집을 방문했는데 대대로 농사를 짓는 집안입니다. 남편은 일본 분이고 부인은 우리 한국 분인데 부인 되시는 분이 예수를 믿고 그 집에서 교회를 시작해서 동경교회에서 보내주는 비디오테이프를 틀면서 교인들을 30명을 모아놨어요.
그런데 그 집에 들어가는데 보니까 아직 남편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 같아요. 들어가는 집 여기서부터 벽 전체 저 끝까지 뭐가 많이 걸려 있어서 가만 보니까 다 대대로 조상 때부터 섬기던 신들이에요. 가미라고 그러는데 신들이 쫙 있어요. 어느 신이든지 한 번 맞기만 하면 되니까.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한참 가서 빌어야 돼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러한 형상들이 우리의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깎아서 만들어 놓고 “복 주세요.” 비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자신들이 빌어요. 보세요. 로마서 1장 22절, 23절은 설명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신들을 많이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볼 수 있는 신이 또 어떠한 신들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사람들은 쾌락의 신을 섬깁니다. 눈으로 보이는 신이 아닌데 마음에 잠시 잠깐 쾌락을 주는 것이 있으면 막 거기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마약이 나쁘고 마약을 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약에 손을 대는 거예요. 찰나적인 쾌락을 위해서.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박해서 부자 된 사람 봤어요? 도박하면 모든 재산을 탕진하는데 찰나적인 쾌락을 위해서, 찰나적인 만족을 위해서 도박장에 달려갑니다. 쾌락의 신이 있죠. 세상의 권력의 신, 권력만 잡으면 된다. 세상의 인기, 명예의 신. 이렇게 잘못된 것들에 빠져서 삶에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많은 신 가운데 가장 큰 신이 물질의 신입니다. 맘모니즘. 이것은 출애굽 시대부터 우리가 잘 알 수가 있어요. 광야 길을 가는데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시간이 걸리니까 그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신을 만들어 달라고 그랬습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그들이요. 금귀걸이, 금가락지 뽑아서 녹여서 깎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우리를 구원할 신이다.” 빌었어요.
기가 막힐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역사로 유월절 사건과 홍해를 가르는 사건과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또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아침엔 만나로 또 고기가 필요하면 메추라기로 저들을 먹이시고 저들을 마시게 하시고 거기까지 인도하셨는데 잠깐 모세가 사라졌다고 금가락지 뽑아서 만들어서 “우리 신이다.”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뽑아서 만들어 놓은 것이 금송아지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신이 되고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의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탐욕이 생겨서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은 것을 끌어모으려고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그저 돈을 끌어모읍니다. 남이 피해를 입던 어떻게 되었든 돈을 끌어모으고 물질로 인해서 친구가 원수가 되고, 아버지 장례식 때 자식들끼리 싸우고, 어느 사람은 물질에 눈이 멀어가지고 보험을 많이 들게 해서 자기 남편도 죽이고. 그런 일도 있어요. 그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돈 때문에, 그 돈이 뭐라고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물질의 신을 섬기면 결국 자기가 패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과 우리 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6장 24절에,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게 되면 물질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주시냐? 쓰라고 주시는 겁니다. 움켜쥐고 못 쓰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참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데요. 베풀고 나누면 또 주시고, 베풀고 나누면 또 주시고, 베풀고 나누면 또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어놓으면 쌓을 곳이 없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의 신을 섬기지 말고 물질을 주신 하나님을 섬기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더해주십니다.
미국 내 부자 88위에 뽑혔던 장도원 회장님이 계세요. 포에버 21이라고 하는 패션 브랜드가 있는데요. 포에버 2,1 여러분 보신 적 있습니까? 전 세계에 매장이 있는데 아주 주님을 잘 섬기는 귀한 우리 회장님이신데 1981년도, 30여 년 전에 미국에 이민을 갔어요. 가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건물 관리원도 하고 주유소에서 휘발유 넣어주는 주유원도 하고 커피숍 종업원도 하다가 84년도에 조그만 옷가게를 로스앤젤레스에 냈습니다.
그런데 언제 그분이 복을 받게 되었느냐? 교회 다니면서 은혜를 깨달았어요. 은혜를 체험했어요. “나 같은 죄인이 구원 받으니까 너무 감사하구나.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래서 1년에 꼭 몇 주간 휴가를 내서 단기선교를 갑니다. 브라질에, 남미에 가서 선교도 하고 저 중국 조선족도 선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어요. 내가 이렇게 예수 믿고 주의 복음을 이 먼 곳까지 와서 전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께서 내게 주신 물질을 다 주님께 드려 선교하길 원합니다.” 10분의 9를 하나님께 드리고 본인은 10분의 1만 갖고 사업을 경영하고 모든 것을 운영해나갔는데요. 얼마나 축복해 주시는지 막 폭발적으로 사업이 잘 되기 시작해서 전 세계 매장 500개를 내고, 미국에서 부자 88위까지 뽑히게 되고,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커플 38인에 올라가게 되고 하나님 은혜로 그렇게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당신이 미국에 이민 와서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큰 재벌이 되었습니까?” 그가 말씀하기를요.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제가 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밖에 없습니다. 뭐가 성공이고 부자인지는 잘 모르지만, 저는 하나님이 축복하신 이유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합니다. 선교를 위해서 많은 물질을 드리고, 스스로 가난한 삶을 겪어왔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십계명 해설에서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붙들려 있는 것이 바로 당신의 신이다”
여러분, 여러분 삶 속에 오직 주 하나님만 섬기고 물질과 탐욕의 신을 제해버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을 명하심
오늘 우리에게 세 번째로 주신 말씀은 제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5장 8절로 9절에,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야훼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랬습니다.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마라.” 온 우주 만물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데 그 만드신 것을 가지고 또 무엇을 만들어서 섬긴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삶에 큰 죄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사야 40장 18절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그런데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많은 우상들을 만드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만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다 우상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에요. 순서를 바꾸면 다 우상입니다. 남편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남편이 우상이에요.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자식이 우상입니다.
제가 어느 날 CTS TV에서 소강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그 교회에 아주 충성하고 헌신하는 귀한 직분 맡은 분이 주일날 해외에 나가서 예배를 안 드리고 운동을 하는 데에 갔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가서 운동하는 것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예배를 빠지고 운동에 나갔다가 거기서 변을 당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아주 물질로 봉사를 많이 했던 분인데 그래서 목사님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그분 때문에 많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면 다른 어떤 것을 첫 번째 순서에 두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주시는데 순서를 바꿔놓으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유재혁 목사님의 [길 잃음과 길 찾음]이란 책에서 이와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우상이란 돌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신들의 형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 즉 ‘매일의 삶 가운데 가장 갈망하는 것들’이다. 우상숭배의 가장 깊숙한 마음의 동기는 결국 자기 자신이며 인간의 죄의 본성과 그에 따른 우상숭배의 뿌리는 결국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 무엇을 만들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다 죄입니다. 내 마음에 탐욕이 들어오면 탐욕이 죄고 우상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랬어요. 그런데 실제로 그 우상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 자신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뭘 만들어놓고, 나 자신을 위해서 가서 빌고, 나 자신을 위해서 점치는데 가서 점을 치고. 참 사람들이 돈을 쓸데가 없어서 그런데 가서 돈을 쓰고 있어요. “저 어떻게 될까 좀 잘 봐주세요.” 그 점치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자기 운명을 맡기고. “앞으로 제 운명을 잘 살펴봐 주세요.” 참 답답한 일이에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주관하겠어요. 무당이 아무리 잘 맞춰도 미래를 모릅니다. 무당은, 귀신이 역사하면 과거를 봐요, 과거. 그러나 미래를 못 봐요. 속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는 철저히 ‘나’라고 하는 이 우상을 제거해야 됩니다. ‘나’는 뭐냐? ‘옛사람의 나’, “내가 제일이다.”, “나밖에 없다.” ‘어디 가든지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주장대로 안 되면 화를 내고 다투고 싸우는 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됩니다.
이 ‘내’가 얼마나 문제인지 사도 바울이 로마서 보니까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늘 자신의 그 옛날 사람의 모습, 그러니까 그가 은근히 자기가 가진 것들을 자랑하려고 하는 그 교만한 마음이 있었겠죠. ‘내가 어떤 가문에서 자랐는데. 내가 어떻게 공부를 많이 했는데. 내가 어떻게 가진 능력이 많고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는데.’ 알게 모르게 그것이 솟아올랐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죽였어요. 어떻게 죽였느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 자기 자신을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여러분의 교만과 고집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못 박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안의 주님만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는요, 이렇게까지 고백했어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가 죽으라고 하면 “왜 죽어요?” 그럴 텐데,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랬어요. 옛사람이 죽는 겁니다. 고집이 죽고, 교만이 죽고, 불순종이 죽고, 미움이 죽고, 내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이 죽고, 상처가 죽고, 다 죽는 겁니다. 과거 속의 내 삶의 모습은 얼마나 상처 많고 문제가 많은지 몰라요. 죽어야 돼요.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마가복음 8장 3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할 때 우리에게 심판이 임합니다. 신명기 8장 5절로 6절에,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야훼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주여, 오늘부터 날마다 ‘나’라고 하는 우상을 제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만 높이게 하여 주옵시고, 주님만 자랑하게 하여 주옵시고, 주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복을 주세요. 은혜를 주세요. 잘되게 만들어 주세요.
4.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 것을 명하심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 11절에,
너는 네 하나님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야훼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새 번역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신명기 5장 11절에 새 번역 내용은,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이 이름에는 그분의 존재를 뜻하고 그분의 인격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도 “제 아버지 이름은 ‘이 자, ○ 자, ○자’ 함자가 이렇습니다.”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조심해서 우리가 언급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와 감격으로 불러야지 아무렇게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96편 8절에
야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될 것입니다. 감사, 찬양, 존귀, 영광을 우리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됩니다. 다윗 왕은 대단한 하나님의 축복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힘쓴 왕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시편 150편 중의 73편을 다윗이 지었는데요, 대부분 찬양과 기도입니다. 4천 명 성가대를 만들어서 주님을 찬양했어요. 3천 년 전에, 3천 년 전에. 4천 명 찬양대, 4천 명 관현악단. 아, 생각해보십시오. 온 예루살렘이 뒤흔들릴 정도로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 이름 위에 올려드렸어요. 할렐루야!
우리가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마는 이 성경에 히브리 원어에 야훼라고 써 놓은 이름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는 한 번도 불린 적이 없습니다. ‘YHWH(야훼)’라고 써놓고 읽기를 ‘Adonay(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주님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옮겨 쓸 때에 야훼의 이름이 나오면 손을 씻고 와서 이름을 옮겨 썼습니다. 이름이 여러 번 나오면 여러 번 가서 손을 씻어서 또 옮겼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겼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이 존귀케 되기를 원합니다.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서 우리의 찬양 속에서 우리 예배 속에서 주님의 이름이 존귀케 되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돼요. 우리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시편 18편 1절, 그 고백을 우린 기억합니다.
나의 힘이신 야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그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그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기를 원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나와서는 생활은 저렇게 엉망진창이네. 쯧쯧쯧.” 그렇게 우리를 비난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그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고 있는 브라질 축구선수 카카(Ricardo Kaka)를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선수는 골을 넣을 때마다 우승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위의 유니폼을 벗으면 그 안에 ‘I BELONG TO JESUS(난 예수님께 속했습니다)’하는 그 표시가 나옵니다. 이것을 TV 카메라가 잡아서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봐요.
지금 이탈리아 팀 ‘AC 밀란’의 세계적인 축구스타인데 미국 TIME 지가 선정한 ‘2008년도 세계를 움직이는 10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고요, ‘2007년도 FIFA의 올해의 선수’였고, 2006~2007년 유럽 챔피언리그에서 최다득점을 해서 우승을 이끌었고, 2002년, 2006년, 2010년 세 대회의 연속 월드컵 브라질 대표선수로 뽑혔습니다.
그런데 그가 언론과 인터뷰할 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집에서 뿐만 아니라 경기 전과 후에 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습니다.” 그가 성공한 비결, 그가 이렇게 축구를 잘하게 된 비결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내가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이렇게 잘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에 그가 진출해서 그는 모든 시합에 이 속옷 런닝에 ‘I BELONG TO JESUS’라고 하는 자막이 쓰인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께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축구화에는 또 뭐라고 쓰여 있느냐? ‘JESUS IN MY FIRST PLACE(내 삶의 첫 번째 자리는 예수님입니다)’ 할렐루야!
그의 고백은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내가 축구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이유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전 나중에 축구선수를 그만두면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며 영광 돌리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브라질의 대표 팀으로 뛸 때는 펠레 선수 그 넘버 10번을 받아갖고 뛰는데 나중에 축구선수 한 다음에 목사가 된다니까 목사 되면 우리 교회 초청해서 한 번 간증시켜야 되겠어요.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첫째도 우리 주 하나님, 둘째도 우리 주 하나님, 마지막도 우리 주 하나님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을 함께 고백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이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회복하려면
신 5:6-21 / 이수관 목사
여러분은 십계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십계명 하면 긍정적인 생각, 아 좋다. 아름답다.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하는 귀한 유산이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 고리타분하다. 지켜야 되는 것은 알지만, 요즈음 세상에 무슨 십계명을 얘기하냐 하는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사실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저 자신에게 십계명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십계명은 저에게 왠지 모를 중압감같은 것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까 아마도 안 지킬때 따라오는 벌의 인상이 강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이 연상이 되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 가면서 이 십계명 안에도 우리를 생각하고 시종 일관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지없이 녹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부터는 이 십계명 한구절 한구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느껴 본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미국에서 십계명은 수난을 받고 있습니다. 십오년쯤 켄터키 법원에 설치되어 있던 십계명 상은 특정 종교를 선전한다는 이유로 철거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텍사스 의사당에 있던 십계명 조형물은 다행이도 종교적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무사했지만 지금도 계속 법정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봐도 좀 두렵고 부정적인 데 안믿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들 우리 자신부터 십계명에 대한 오해를 좀 풀 필요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 기사를 가지고 십계명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본래의 가르침을 돌아 보고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십계명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쪼록 여러분들도 십계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오늘 이후부터는 그 오해를 풀고 십계명의 구절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세상은 무너지고 있다
요즈음 우리는 도덕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우리 주위에서 생기는 현상들을 보면 금방 동의가 됩니다. 이혼률은 40%가 넘은 지 상당히 지났고, 결혼한 남자의 50%가 혼외 정사의 경험이 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또한 10년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하던 동성 연애자가 목사님으로 안수를 받는 등, 도데체 이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 세대에게 내려 올 때 더 심해 집니다. 몇달 전에 제가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소말리아의 법원에서 어떤 살인범을 사형시키기로 결정을 했는데 법원의 판결에 따라, 16살난 피해자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그 사람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방법으로 칼로 여러군데를 찔러 공개처형을 시켰다는 기사를 읽고 섬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야, 소말리아가 아무리 이슬람 국가라지만 좀 심하다’하는 생각을 했는데 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Internet 기사에 대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대부분 청소년들이었겠지요. 그 중 몇몇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형제도를 도입해서 어떤 어떤 놈들을 이렇게 죽여야 한다고 얘기를 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 사람들이 9:1 정도로 그에게 찬성표를 던지는 것을 보고는 정말 옳고 그름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정신적인 지주가 없기 때문이다
자, 왜 이렇게 빠르게 도덕이 무너져 가고 옳고 그름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에게 도덕의 기초를 제공하던 정신적인 지주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윤리적으로 사고를 하고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가이드 해 줄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즉 어떤 권위와 사상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지나오면서 새로운 사상들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우리를 안내하던 그 도덕적 지주를 잃어 버린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 뭡니까? 절대 가치, 즉 항상 옳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 헤밍웨이였던것 같아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좋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도덕적인 것이며, 여러분이 나쁘다고 느끼는 것이 부도덕한 것이다.” 즉 도덕과 부도덕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자유방임의 사조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그동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지주들을 다 버렸고 그 이유로 어떤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 없어져 버렸고, 그렇게 옳고 그름이 잣대가 무너지고 나니까 모든 면에서 총체적으로 무너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 십계명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십계명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옳고 그름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핵심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옛날에는 Computer 같은 전자 기기를 사면 이렇게 두꺼운 설명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찮으니까 읽어 보질 않지요. 그리곤 110v로 되어 있는 것을 220v에 꼽았다가 퍽 하고 나가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자 제조 회사에서 Idea를 낸 것이 바로 Quick Start Guide라는 것입니다. 정말 기계를 고장내지 않기 위해서 적어도 이것은 읽고 사용하라는 한장 짜리 설명서 인데 이것을 넣어주고 난 후 반품을 확 줄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십계명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Quick start guide 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가 고장안나고 살수 있는, 즉 십계명은 아주 폭넓은 하나님의 법의 가장 핵심을 적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라서 십계명은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윤리적 신조와 도덕적 기초를 제공해 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부분 십계명을 잘못 사용하고 있고 그래서 생긴 오해 때문에 십계명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십계명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려면
- 율법적인 혹은 상황적인 적용을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십계명이 우리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려면 두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첫번째 잘못은 십계명을 율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에는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을 얘기합니다. 바리세인들이 그랬지요.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열심을 보였고, 지켰을 때 오는 만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소원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이지요. 예를 하나 들자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한 속뜻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냥 일을 안한다는 것과 그에 관련된 Rule을 지키는 것에만 기뻐하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만족해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세인들을 보고 의롭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0)
그런데 우리가 십계명을 율법적으로 지키기 시작하면 거의 틀림없이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계명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것도 그렇고, 가족예배를 드리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율법이 되어 있는가 아닌가를 보려면 내가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가 안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기면서 새벽기도를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새벽기도를 하나 안하나를 가지고 그의 믿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율법적으로 그것을 지키고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가 이렇게 십계명을 율법적으로 접근하고 그래서 사람을 판단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십계명이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잘못 사용하는 예는 십계명을 상황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요즈음은 상황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죄냐 아니냐를 십계명을 가지고 판단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즈음은 상황이 하도 복잡하니까 일률적으로 죄다 아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상황 윤리라고 부릅니다. 좋은 예가 동성연애자에 대한 요즈음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상황적인 적용을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동성연애는 죄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율법적인 적용이므로 그러지 말고 상황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런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동성 연애자 목사님도 나오고, 동성 연애자 신부님도 나오고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툭하면 사랑을 내 세웁니다. 사랑만 실천할 수 있으면 규범이던 법이던,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타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상황 윤리는 결국 십계명을 죄인지 아닌지도 판단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외면을 당하고, 상황 윤리를 내세우는 사람들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서 십계명은 전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원리적인 적용이 중요하다.
자, 그러면 율법적인 적용도 아니고 상황적인 적용도 아니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이 십계명에 품으셨던 원뜻을 발견하고 그 원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십계명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럴 때 이 십계명을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십계명의 본뜻을 한번 살펴봅시다.
3. 십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킬 것인가
- 십계명은 관계를 정의한 것이다
십계명을 얘기하면서 하나님은 6절의 하나의 선언을 얘기하시고 7절부터 십계명을 하나하나 나열하십니다. 따라서 이 선언은 십계명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얘기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이 말을 하실 때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때 계명을 주시고 난 후 그것을 잘 지키면 내가 너희를 이집트로 부터 구원하겠다 라고 하지 않으시고, 먼저 구원을 해 내신 후에 계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고, 그 다음에 계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의 근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어하거나 벌주려는 것이 아니고 이제 너와 나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그 회복된 나와 너희의 관계를 좀 더 깊게 그리고 윤택하게 하자는 그런 목적으로 십계명을 주셨다는 겁니다. 즉 십계명은 하나님과 우리가 좀더 깊은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십계명이 그런 관계를 정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또한 십계명의 구조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우선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종적관계에 대해 규정하고 있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우리와 이웃과의 횡적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우선순위로 종적 관계가 횡적인 관계보다 먼저 언급됩니다. 뭡니까? 마태복음 22:37-40 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지요. 생명의 삶을 들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신앙 생활의 핵심은 두가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즉 똑 같이 중요하니,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라는 얘기지요. 그러면 사랑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똑바로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채우고 채울 때 그 사랑이 흘러 넘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순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먼저있다 라고 배웠지요. 십계명도 바로 그 관계를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을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따뜻한 사랑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따뜻한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을 기억하고 거기서 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을 이웃을 정죄하는데 사용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십계명이 자꾸 두려운 대상이 되고, 내 마음 속에서 멀리하고 싶은 대상이 되는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데 사용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대신 우리는 십계명으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고 이웃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만드는 가이드라인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 십계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배려와 사랑이 느끼시고 이것으로 이웃을 축복할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 십계명은 결국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 그럼 한구절 한구절 어떤 의미인가 한번 보겠습니다. 첫번째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유일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완전한 헌신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국가, 당, 사업, 공부, 가족, 야망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에 대한 마음보다 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야, 하나님 욕심도 많으시다. 그 어떤 것 보다도 나에게 충성을 다해라. 무슨 중세 시대때의 악덕 영주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조금만 들여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신앙 생활을 해 보신 분이면 다 아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을 보낸다고 얼마나 대단한 헌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뭘 그렇게 할 수 가 있습니까? 못해요. 기껏해야 새벽기도 좀 하는거, 기껏해야 금식 좀 하는거, 그것 밖에 더 있습니까? 대신에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삽니까?
저는 7절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생각을 한번 해 봤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인가요? 내 앞에서, 즉 내 면전에서는 그러지 말라는 말입니다. 뭐예요? “야, 섬길라면 나 없는데 가서 해. 내 면전에서는 제발 그런 짓 좀 하지마.” 뭐 그런 뜻 아니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의 면전에서 딴짓을 하면 그러시겠습니까? 다시 얘기해서 우리는 순수하게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그거 다 아세요. 그러면서도 왜 나에게 완전히 헌신하라고 하는가? 우리를 보호하고 싶으신 거에요. 우리는 내 욕심에 한번 미치면 끝가지 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 국가에 미치고, 사업에 미치고, 공부에 미치고, 야망에 미치면, 결국 끝까지 가서 우리 자신이 망가지니까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두번째 계명은 첫째와 비슷하니까 건너뛰고 세번째 계명으로 가봅시다. 여기서 함부로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함부로 보다는 헛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내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즉, 형식적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위선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말로만 “하나님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행동은 전혀 안 따라 오는 위선적인 고백 그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너희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 말속에 우리의 무성의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1:25에서 계명안에 자유가 있는데 행동이 따라오지 않는 위선적인 고백을 일삼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안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결국 말로만 그치는 무성의한 신앙으로는 네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알 수가 없으니 어짜피 신앙 생활 하려면 그러지 말라는 얘기지요.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네번째 계명은 12절부터 15절입니다. 이 구절 역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배려가 절절히 흐르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얼마전 설교에서도 살폈지만 단순히 일을 쉬고 레져를 즐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이 말을 조금 더 원문에 맞게 해석하면 안식일의 거룩성을 유지하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분해 놓은 것이라는 뜻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따라서 그 참뜻은 내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적인 일을 멈추고 하루를 쉬면서 그날을 하나님의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식일을 지킬때 우리는 나의 일과 나의 계획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여러분 한번 어떤 일을 휴식없이 3일만 일해 보십시요. 금방 그일이 나에게 우상같이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남편이 Job도 좋고 그래서 풍족한 사람이예요. 그런데 이 부인이 어쩌다가 시간급을 받는 일을 하게 되었데요. 그래서 휴식없이 3일을 일했는데 아마 무척 힘들게 일했던 모양이예요. 그리고 나서 이 부인이 고백을 하는데 그 다음 돌아오는 주일날에 벌은 돈의 십일조를 내려고 하니까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하면서 손이 떨리더래요. 그 일급 받은 걸 말이예요. 평소에는 그것보다 수십배는 내면서 말이지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거예요. 오죽하면 게으르기 쉬운 우리에게 반대로 쉬라고 하셨겠어요.
따라서 특별히 바쁜 사람들은 반드시 주일은 쉬어야 합니다. 주일날 일상의 것을 내려놓고 교회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특별히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므로 그것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동시에 주님의 구원을 생각해보고, 그러면서 한곳에 가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점검하고, 또 이웃과의 관계도 점검하고 그럴때 정말 의미있는 주일 성수가 되리라 믿습니다. 만약에 나는 도저히 주일은 쉴 수가 없다 하시는 분들은 차선으로 이런 정신에서 다른 날을 정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계명부터는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를 정의 했습니다. 간단간단하게 그 정신만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이 구절은 물론 부모를 공경하라는 의미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더 큰 뜻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가정의 모습을 얘기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즉 질서가 있고 안정된 영적으로 잘 훈련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녀를 최선을 다해서 양육하고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고 그렇게 가정을 만들라는 본뜻이 있는 겁니다.
여섯번째 계명, 17절입니다. “살인하지 못한다.” 이 구절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뜻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더 큰 뜻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존귀하게 대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5:21-22절에서 이 구절을 재 해석하시는데 보면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지켜지려면 화, 증오, 그리고 경멸도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곱번째 계명, 18절입니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덕적 순결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속뜻은 순결을 지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가서 부부가 한몸이 되라는 것입니다. 한몸이 되기 위해서 정말 서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하나였던 것 처럼 그런 하나되는 부부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속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덟번째 계명, 19절입니다. “도둑질 하지 못한다.” 누구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직하고 청렴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을 거저 얻을려고 해서도 안되고, 내야될 세금을 내고, 지불해야 할 임금을 정확히 주고, 또 모든 Business에서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아홉번째 계명, 20절 “이웃을 모함하는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모함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 가서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판단하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명예를 존중해 주기를 애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번째 계명, 21절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 뭡니까? 내가 있는 상황에서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으로 풍족해 할 줄 아는 법을 배우라는 하나님의 속뜻이 담겨있는 구절입니다.
어때요, 하나하나 그 규정들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결국 이 모든 계명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네가 너의 욕심으로 행하지 말고, 나와 영적으로 교제하며, 그 관계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럴때 오는 자유를 맛보므로써 네가 행복하게 되기를 원한다. 즉 십계명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규정입니다.
세상은 가치관과 올코 그름의 기준이 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로 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이 십계명의 원뜻을 알고 마음에 심을 때 우리의 행동과 생각의 기초가 될 것이고, 그럴때 우리는 흔들리는 사조(思潮)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기초를 가진 사람의 아름다움을 반석위에 세운 집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그런 반듯한 기초위에서 사는 우리의 모습이 아름답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십계명의 원리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보다 큰 죄
신명기 5:7~10, 유다서 1:7~8 / 김홍도 목사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거나 군대생활을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윗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또 하나 윗사람이 무엇을 제일 싫어하는지 잘 살펴서 그 분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항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12:2) 하면서 살도록 늘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죄를 범치 않도록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제법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우매해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는 죄를 범하면 그동안 잘한 것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한 분입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항상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고 또 하나님도 항상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아니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이 무엇보다 가증히 여기시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죄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보기에는 별로 죄 같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는 엄청나게 큰 죄가 있습니다.
1. 가장 큰 계명을 범하는 죄
귀신 앞에 절하거나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은 남을 죽이거나 도적질하는 것도 아니고 별로 죄같이 보이지 않지만 살인죄, 간음죄, 도적질히는 죄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는 죄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서 제일 첫 번 계명이 출애굽기 20장 3절의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는 말씀인데, 즉 하나님 외의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섬기는 죄가 가장 큰 죄라는 것입니다. 무당 데려다 굿하거나 경 읽고 점치는 것 들이 다 이 첫 계명을 범하는 죄입니다. 돌아가신 조상 앞에 제사하고 점치는 것도 이 첫 계명을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 하노라”고 했습니다. 조상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다른 신의 이름을 한번만 부르면 죽지 않는데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순교한 사람이 많고 한국 기독교 역사상 조상숭배하지 않는다고 집에서 쫓겨나고 핍박당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두 번째 큰 계명은 출애굽기 20장 4~6절에 길고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 죄 같지 않으면 무섭고 큰 죄입니다.
예수님 믿기 시작한 사람은 술, 담배 끊는 것보다 먼저 이 죄부터 짓지 말아야 합니다. 신명기 4장 15~20절에 보면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짐승의 형상이든지, 새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하시고 또 하늘의 해나, 달이나, 별한테 경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18잘 10~12절에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 하고, 14절에도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첫째와 둘째 계명을 범하는 죄는 마치 자기 아내가 남의 남자와 잠자고 간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전에 순복음교회 최자실 목사님은 집안에 인형도, 마스코트도 들여놓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대로 저의 모친은 아들이 죽는다고 해도 죽을테면 죽으라고 하면서 굿도 하지 않고 경도 안 읽었습니다(신30:15-18).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시편 144편 15절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6편 4절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6.25의 참변을 겪은 이유도 평신도도 아닌 목사들이 신사참배 즉 우상숭배를 한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 18~20절에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참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공기를 만지거나 볼 수 없는 것 같이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시각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제7계명보다 더 큰 죄
제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14)는 계명인데 이 계명을 범하는 것도 큰 죄이지만 이보다 더 큰 죄는 동성연애의 죄입니다. 로마서 1장 24~2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행하는 것은 부끄러운 죄요, 상당한 보응을 받는 무서운 죄입니다. 성경에 동성연애는 하나님이 몹시 미워하는 죄로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죄입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롯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19장 5절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고 하니까 롯이 자기의 두 딸을 내주면서 그러지 말라고 하자 싫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천사들은 준수한 남자의 모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자는 싫다고 하면서 잘생긴 남자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동성연애자들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악이 더할 수 없이 관영했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19장 24절에,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불태워 멸해버렸습니다.
유다서 1장 7~8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different flesh, strange flesh)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다음절에는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베드로후서 2장 6~7절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8장 22~25절에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고 했고, 레위기 20장 13절에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즉 동성연애나 짐승과의 교합, 수간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가증하면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태워버렸겠습니까?
이번에 뉴올리언스에 몰아닥친 카트리나 허리케인으로 수천 명이 죽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가져온 것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뉴올리언스는 해마다 동성연애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작년에 33번째 동성애 축제가 있었는데 125,000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34번째에는 더 큰 규모로 모일 예정이었으나 2일 전에 카트리나 허리케인이 그 도시를 뒤덮어버렸습니다. 작년에는 13만~30만 명이 모여 축제를 벌였는데 수익금만 9,500만 달러를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영국에서는 이런 동성애자들이(남 gay, 여 lesbian) 목사 안수를 받도록 허락한 교단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악령의 역사입니다.
어느 일류대학에 다니는 부잣집 딸이 동성애에 빠져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아서 폐인 취급을 했다고 합니다. 청소년, 소녀들이 보이 스카우트나 걸 스카우트 같은 데 합숙하다가 그런 죄에 빠지는 일들이 있다고 하니 자녀들을 잘 감시하시기 바랍니다.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켜 무서운 심판을 불러들이는 무서운 죄입니다.
3. 위선의 죄(hypocrisy)
죄 같지 않으면서 무서운 죄 중의 하나가 위선의 죄입니다. 위선이란 겉으로는 선하고 착한데 속에는 죄악이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회칠한 무덤같이 겉은 하얗고 깨끗한데 속에는 썩은 송장이 가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강도, 도적놈도 받아주시고 창녀도, 세리도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하시며 받아주셨는데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즉 위선자들은 무섭게 책망하고 저주까지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고 마태복음 23장에 일곱 번이나 저주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강도, 창녀, 세리들은 대표적인 죄인들이지만 겉이나 속이나 같습니다. 의로운 체하고 남을 속이지는 않습니다. 겉이나 속이나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하기도 쉽고 진리를 잘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위선자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깝습니다.
위선자는 그 성격이 마귀와 가깝습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속임수를 잘 씁니다(요8:44). 또한 거짓 선지자나 사탄의 사자의 성격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러라”고 했습니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것이 거짓 선지자, 이단의 특징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사단의 역군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인데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의의 일군, 거짓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세상에 실수가 없고 완전한 사람은 없지만 언제나 정직하고 솔직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꿈에라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나, 정직함과 진실함을 잃어버리지 않나, 항상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다윗은 무서운 죄를 범했지만 정직하게 회개하고 늘 진실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6절에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라” 했고, 10절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악령은 거짓 영이며 속이는 영이라고 한다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진실한 영이므로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항상 거짓을 버리고 진실하고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죄 아닌 것 같으면서 큰 죄는 위선입니다.
첫 계명을 범하는 죄
신 5:7-10 / 김홍도 목사
어떤 사람이 큰 권세를 가지고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오랫동안 여행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그 큰 권세와 재산을 가진 사람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 분을 만족케하고 그분 마음에 쏙 들게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사람을 높이기도 낮추기도 하시는 분이요, 국가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생사화복도 홀로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분을 기쁘시게만 해드리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신명기 6장 4-5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마음에 들도록 살려면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미워하시고 진노하시고 무엇을 가장 격분해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큰 권세와 재물을 가진 자와 함께 여행하면서 기껏 잘 행동하다가 잘못하여 그 분이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고 격분하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다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고 가증이 여기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첫 계명과 둘째 계명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섬기지 말라”하는 것과 “우상을 만들지 말고 거기다 절하지 말라”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싫어하시면 하늘에나 땅에나 물 속에 있는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1. 제일 큰 죄입니다.
무슨 죄나 다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이지만 그 중에도 가장 싫어하시는 큰 죄는 바로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 앞에 절하는 행위입니다. 본문 신명기 5장 7절부터 보면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하셨습니다. 그 죄가 얼마나 큰 죄이기에 그렇게까지 강조 하셨겠습니까?
부모가 지은 다른 죄는 부모가 그 벌을 받지 자식들까지 벌주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이 죄는 삼 사대까지 그 죄를 갚겠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이 죄를 안 짓고 하나님만 잘 섬기면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 숭배하는 죄가 그렇게 크기 때문에 다니엘이 사자 굴속에 집어넣어 죽인다고 까지 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왕이 만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무속에 집어던져 태워 죽인다고 하는데도 “그런 것은 대답할 필요도 없고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하고 풀무불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셔서 머리터럭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나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역대 열왕 중에 누가 선한 왕이고 누가 악한 왕이냐 하는 것은 도덕적 기준에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방신을 섬기고 우상숭배를 했느냐 안했느냐 또 얼마나 이방신을 타파하고 우상들을 때려 부수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느냐에 따라서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살인죄, 간음죄, 도적질 같은 것만 큰 죄로 여기지만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우상 숭배하는 죄는 그것들보다 열배, 백배 더 큰 죄입니다.
2. 영적인 간음죄입니다.
십여 년 전에 새신자 중에 비석공장을 개업했다고 하면서 개업예배를 봐달라고 해서 찾아가 예배를 드렸는데 차려놓은 떡을 먹으면서 살펴보니까 한쪽 귀퉁이에 부처상이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를 만들어 파는 것은 제일 무서운 죄니까 그런 것을 만들지 말라”고 했더니, 초신자라 성경을 몰라서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 사업은 부처상을 깎아 팔고 수출도 해야 돈을 잘 벌수 있습니다” 하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 부인이 아들 딸 잘 낳고 살림도 잘하고 음식도 잘하는데 한 가지 소청이 있다고 합시다. “밤마다 처녀 때 사귀던 애인을 데려다 옆방에서 잠자게 해주세요”하고 허락해 달라면 당신은 허락하겠습니까?하고 물어봤더니 “그것은 절대로 안되지요. 아들 딸 못 낳는 것도 봐줄 수 있고, 살림 잘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남자와 잠자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지요” 그러길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다 절하는 죄는 그와 같이 큰 죄이고 영적인 간음죄입니다. 살인죄, 간음죄, 도적질 보다 열배, 백배 큰 죄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무서운 죄입니다”하고 타이르며 우상을 만든다면 축복 기도한 것을 다시 취소기도 하겠다고 한 일이 있습니다. 신명기 13장 6-11절에 보면 “네 동복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한 자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3. 마귀, 귀신에게 절하는 죄입니다.
흔히 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하며 절하는 것은 효도하는 일인데 왜 못하게 하느냐고 의문을 가지는 불신자나 초신자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21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조상 숭배는 원수 마귀에게 절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므로 이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하여 효도해야 하는 것이고 그 영혼이 구원 받아 천국으로 가시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뒤에 소 잡아 제사 드리는 것보다 살아 계실 때 닭 한 마리라도 잡아 대접하는 것이 참된 효도 입니다.
불신자들 제사 지낼 때 위패를 보면 “○○○神位”라고 써 놓은 것만 봐도 돌아가신 부모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절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점을 치거나 복술자나 요술쟁이를 찾아다니는 것도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관상도 손금도 토정비결도 보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를 범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10절부터 보면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라고 엄히 명령하셨습니다. 열왕기하 17장 17-18절에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하는 무섭고 가증한 죄입니다.
4. 우상숭배와 귀신숭배는 더 큰 고통
을 받는 일입니다.
시편 16편 4절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결혼한 여자가 남편 앞에서 전 애인의 이름을 자꾸 부른다든지 하면 남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며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과 고통만 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푸닥거리하고 무당과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귀신 섬기던 사람들을 연구해 보니까 그 후손들이 정신병자나 불구자, 장애인들이 많이 생겼더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 18-20절에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 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돌과 나무로 깎아 만들고 금이나 은으로 입힌 것이 무슨 유익을 주겠습니까?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킬 뿐입니다.
이렇게 가증한 우상인데 단군 우상을 공립학교에 500여 군데나 세우고 철거를 하지 않고 도리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겠습니까? TV에 걸핏하면 무당들이 나오고 굿하는 장면이 전통문화란 미명하에 소개되니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나라에 점쟁이가 수십만 명이나 되는데 최근엔 인터넷을 통하여 연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재앙 받을 일입니다.
5.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 섬겨야 복을 받습니다.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 나님 뿐이시므로 그 분을 잘 섬겨야 그 나라도 그 가정도 다 복을 받습니다. 시편 144편 15절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하셨고, 시편 145장 20절에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를 다 다녀 보십시오. 교회가 많이 세워지고 종탑이 우뚝우뚝 많이 세워진 나라는 문명하고 GNP가 높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쫓아내고 교회를 다 파괴한 공산주의 국가는 예외 없이 비참하게 망했고 또 망해 가고 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짐승을 신이라 섬기는 나라, 테러를 일삼고 사람 죽이는 것을 신에게 복 받고 천국 가는 일이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종교를 믿는 나라들은 현재 석유가 나와서 몇몇 사람은 잘 살고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문맹자가 많고 무지몽매하고 미개하고 비참한 나라들입니다.
이사야 45장 5-7절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 무리로 알게 하리라…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2절에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도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다른 종교, 다른 사람으로는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문도 오직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0장 7-9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세교회가 가장 경계할 무서운 사탄의 사상은 예수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진리를 부정하는 후기근대주의(Post-Modernism), 독선주의가 되면 안된다고 하는 상대주의(Relativism), 모든 종교를 다 포용해야 된다고 하는 포용주의(Toleration)등 입니다.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즉 짐승은 세계 종교를 하나로 만들고 세계 정부를 하나로 만들어 평화롭게 살자는 그럴듯한 사상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고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자기를 경배케 만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5절에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를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 하더라…큰 이적을 행하되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하였습니다. 말세에 특별히 경계할 무서운 죄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게 하고 우상 앞에 절하게 하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우상숭배는 가장 큰 죄입니다
신명기 5:8-10, 7:25-26 / 김삼환 목사
저는 이번에 캄보디아에 다녀오면서 그 나라가 우상 숭배에 너무 깊이 빠져 있고 또 조상들이 우상 숭배한 죄 값으로 오늘날 그 자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캄보디아는 한 때 세계를 통치하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중국에 있는 황제가 캄보디아 황제에게 가서 면담을 하려고 해도 거절을 당하고 돌아갈 정도로 태국을 다스렸고 라오스와 캄보디아, 베트남 모두를 다 다스렸던 아주 부강한, 힘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로 저들의 영광은 짧게 지나가고 그 백성들은 오늘날까지 저주 아래 놓여 있는 비참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지구에 보면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또 우리 나라도 잘 살고 지식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했지만 그 전보다 우상 숭배는 몇 배나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1982년도에 우리 나라 무당은 불과 2만 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집계가 되어 있는데 작년에는 우리 나라에 점하고 무당 하는 이런 사람들만 50만 명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지 방송마다 인용하고 있고 방송국에 직접 나오고 있고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내가 최고의 호텔인 신라호텔 들어 가 보니 로비에 무당 점쟁이가 앉아서 사람을 맞이하고 있더라고요 아예 책상을 하나 주었어요. 너무 어이가 없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도 시골 산간 벽촌에서도 무당 하면 얼굴을 못 들고 다니고 부끄러워하는 이 시대에 이렇게 무당들이 활개를 치고 특급 호텔에서 특별 대접을 받을 정도로 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전국에 목회자 인구가 6만으로 잡고 있는데 무당의 수가 50만 이라고 하면 이 나라는 보통 잘못 된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또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우상 숭배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또 점보는 교인들도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한심한 교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런 교인들이 없는 줄 알고 그런 죄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고 우상 문화와 정면 대결하여 우상에서 민족을 건져내는, 기드온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원래 신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신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의 신이시요. 온 인류와 우리 인간의 역사를 지배하시는 유일하신 이 우주에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믿어야 될 분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야 되고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그를 만나고 사랑하고 의지하면 우리 인간은 인간의 가치와 용맹과 지혜와 능력이 나타나지만 우상을 숭배하면 그 순간부터 인간은 비겁하고 약하고 미약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이든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명의 모양이라든지 물고기 모양이나 짐승의 모양이든지 만드는 것은 우상입니다. 섬겨도 안됩니다. 절을 해도 안 된다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믿을 때에 이런 것에서는 다 벗어나게 되고 또 하나님 한 분만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나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섬김의 대상이나 우러러 볼 존경의 대상은 아닌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 없을 때, 한 분을 잘 안 믿을 때 인간은 약하게 되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8백만 우상이 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것은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또 이 귀신이 불안하고 완전하지는 않아요. 또 계속해서 귀신을 더 만들고 더 섬기고 더 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믿지 않는 것은 인간 스스로에게 불안과 걱정과 긴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어렸을 때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감기만 들어도 어느 귀신이 노해서 그렇다 생각을 하고, 아니 살다 보면 감기도 들고 몸살도 나고 할 수 있는데 남편이 지게를 지고 오다가 넘어져도 이건 귀신이 그랬다 생각하고는 또 쌀자루 들고 찾아가야 됩니다. 항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24시간 자나깨나 늘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은 우상을 섬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약하고 인간이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또 유혹을 받아서 우상을 만들게 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말씀을 하는 우상 숭배는, 마치 부인이 아내가 남편을 두고 정부를 만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아예 그런 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으로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못 보고 진노하시고 섭섭해하시고 질투하시고 분노하시는 말씀이 신명기 4장 24절, 6장 15절, 그 외에도 많은 곳에 그런 말씀들이 나옵니다. 아내가 남편을 떠나서 남편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데에 만족을 느끼는 것은, 만족이 없지요 사실은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고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주지만 유혹을 받는 것이지요. 그로 인하여 안정과 평안은 깨어지게 되고 깨끗한 삶은 오물을 끼얹게 되고 행복한 가정은 파괴되며 하나님이 주신 복된 가정은 그로 인하여 다 무너지게 되듯이 우상 숭배는 모두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고 파괴하는 것이고 더러워지는 것이고 잃는 것이고 파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첫 째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십계명에도 1계명, 2계명이 무엇이냐 하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거든요. 온 세계 인류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데 우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만드는 거예요.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보시는데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고 섬겨보세요 얼마나 하나님이 속상해 하시고 섭섭해하시는지요.
두 번째 계명은 어떤 우상이든지 만들어도 안되고 절하거나 섬겨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면 하나님은 대적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4장 20절에 보면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내렸다가도 다시 저주를 또 내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변치 않지만 우상 숭배의 경우에는 약속이 무너진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마 제일 싫어하는 것은 아마도 교만과 우상 숭배이지 않겠느냐, 그래서 교만한 나라도 하나님 믿기가 어렵고 우상 숭배하는 나라도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3백년, 4백년 되어도 전도가 안됩니다.
제가 캄보디아를 가 봐도 참 이 나라가 어렵겠다 하는 이유는 불교가 그 나라에 우상이에요. 90%를 차지하고 있어요. 또 그 조상들은 전부 뱀을 섬겼어요. 나라가 온통 다 뱀이에요 집도 뱀이고 장난감도 뱀이고 그릇도 뱀이고 왕궁도 뱀이고 다리를 놓았는데 뱀의 머리 일곱개가 양쪽에 들고 있고 다리 건너 난간은 전부 뱀 몸뚱이로, 앉으려고 해도 뱀 위에 앉는 거예요. 세상에 비행기에도 뱀을 그려놓았어요 일곱 개의 머리가 들고 있는 뱀을 그려놓았어요. 나라가 온통 뱀으로 다 덮여 있어요. 그러니 이렇게 자원이 많고 가능성이 있는 나라도 정말 짐승같이 살아가는 불쌍한 나라예요. 음식을 먹고 뼈다귀를 다 발라서 버린 것도 그걸 빨리 주워서 빨아먹으려고 달려드니 말이죠 이 얼마나 불쌍한 나라입니까 가난해도 그렇게 가난한 나라가 어디 있느냐 말이에요. 우상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7장 15절, 27장 15절, '가증스럽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혐오스럽다'는 말이에요. 혐오스럽다는 말이 뭐예요? 느낌이 싫고 아주 꺼림칙하고, 그런 거예요 우상 숭배는. 그래서 '시쿠즈'라고 하는 이 말은 이스라엘 땅에도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 들어 와서 바알 이라든지 아스다롯 이라든지 그모스 라든지 밀곰 이라든지 몰록 이라든지 이러한 것을 가지고 힌놈의 골짜기에서 섬겼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이 가증한 것이라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양이 혐오스러워요. 저도 이번에 그 우상들을 보니까 정말 혐오스러워요. 아주 싫어요, 싫어요. 짐승이라도 토끼를 그린다든지 양이라든지, 얼마나 좋아요. 사람이라도 좀 점잖게 그리면 얼마나 좋아요 전부 그렇게 벽마다 혐오스러운 것만 그려 놓았어요. 우상 숭배하는 나라 어디든지 가보세요 혐오스러워요.
둘째, 우상은 더럽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절 "대저 이방인에게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아" 그랬어요. 그래서 돼지를 가져다 놓고 하여튼 바치는 제물조차도 더러워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냄새나는 돼지를 3일 동안 냄새가 나고 부패한 음식을 가져다 놓고, 제사 지내는 장소가 더럽고 제물이 더러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돼지고기는 먹지도 말라 그랬어요. 기르지도 못하게 하셨어요. 귀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돌이나 나무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 수공물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섬기고 믿고 의지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에요. 공장에서 대량생산해서 돈주는 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우상이에요.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거예요. 우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에요.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이 우상 숭배를 간단하게 보면 안됩니다. 우상은 하찮은 것이고 더러운 것이고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사람은 이런 것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 보세요. 음식을 좋아해도 혐오스러운 음식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해야 좋은, 깨끗한 생활로 들어가서 사는 것이지 사람의 생활이 더럽고 이런 혐오스러운 길로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항상 그런 문화를 사랑하고 또 그런 문화에 미혹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우상 숭배 때문이고 남쪽 유다가 망한 것도 우상 숭배 때문입니다. 북쪽 나라에 우상 숭배가 누구로 말미암아 들어 왔느냐하면, 물론 조금씩은 들어와도 가장 전성기를 이루는 것은 아합 때입니다. 두로와 시돈에 엣바알 제사장의 딸인 이세벨 이라고 하는 여자를 아합이 자기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여자가 들어올 때에 우상을 가지고 왔는데, 이 우상들의 크기는 제가 보니까 밀곰이나 아스다롯이나 바알 같은 것을 보면 보잘것없어요. 정말 주먹에 한 4분의 일도 안 되는, 보잘것없는 것들이 들어와서 결국 그 나라를 망치는 거예요. 사람이 좋은 데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좋은 음악에 유혹을 받아 길거리를 다니면서 명곡을 부르는 사람 보셨어요? 좋은 음악은 안 틉니다. 전부 나쁜 음악에 젖어 들고요, 좋은 음식을 모두 사모합니까? 우리 한국 사람 태국에 가서 전부 다 원숭이 고기하고 뱀 고기 먹으려고 얼마나 몰려가고요. 나쁜 것을 더 좋아합니다. 좋은 일에 유혹 받는 게 아닙니다. 나쁜 일에 유혹 받는 거예요. 이런 혐오스런 우상이 우리 나라도 안 번질 것 같은데 이렇게 이 사회에 몇 배나 더 빠르게 번져 나가는 것은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합이 최고로 잘 살 때에 번영할 때에 엣바알의 딸을 데려와서 그 여자가 가져온 조그만 우상이 나라를 덮기 시작하고 궁중을 덮어서 결국은 아합이 우상 숭배하게 되고 궁중에다가 큰 바알의 당을 짓고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일순간에 우상 숭배가 퍼져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지요? 엘리야 제사장은 하나 밖에 없고 바알과 아스다롯 제사장은 8백 5십 명이 갈멜산에서 싸움이 붙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여자 하나가 문제예요. 그 하나로 인하여 결국에는 남편도 비참하게 전쟁에서 죽지요. 자기도 비참하게 개들이 시체를 핥지요 아들 다 죽지요 수많은 아들들 다 칼에 죽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북쪽 이스라엘은 722년에, 그녀가 874년에 결혼해서 한 150년 지나 가지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완전히 망해버립니다. 그리고 이 딸이, 이세벨의 딸이 남쪽 유대 나라에 여호사밧의 며느리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남쪽 나라 또 망치잖아요. 우상 타고 여인에 의해서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 이세벨의 딸이 또 남쪽으로 유대와 남쪽 나라를 이 두 여인이 완전히 망쳐 버리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여러분, 이 우상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하찮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나라를 버리시고 심판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은 개인이나 민족이나 가정, 모두에게 불행한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 누구였지요? 라헬입니다. 라헬이 하란을 떠날 때 드라빔이라고 하는 조그만 우상을 아버지의 것을 훔쳐서 숨겨 가지고 내려옵니다. 결국 이 야곱의 부인 가운데 라헬이 제일 먼저 아기를 낳다가 죽게 되는 것은 학자들은, 우상을 가지고 와서 그로 인하여 베냐민을 낳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내 몸에 어떤 것이든지 우상이 될 만한 것은 다 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상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됩니다. 절대로 만들어서도 안되고 물론 절하거나 섬겨서도 안되고 가까이 하거나 사귀지도 말아야 하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을 사귀어서도 안됩니다. 내 가족 가운데 누구든지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은 불쌍히 여기지 말고 반드시 죽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3장 6-9절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만약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 네 부인이라도, 아니 네 자녀일지라도, 형제간일지라도, 생명을 나누는 둘도 없는 친구라도 우상 숭배하면 불쌍히 보지도 말고 덮어 주어서 숨길 생각도 하지 말고 애석하게 여기지도 말고 반드시 죽이라는 거예요.
왜? 이것은 너와 네 민족이 망하는 길이라는 거예요. 다 망하는 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잘 믿는 길이 뭡니까? 우상 숭배에서 빠져 나올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하는 사람을 사귀지도 말고 가까이 하지도 말고 우상 숭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대적이 우리를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밑으로 가만히 들어오는 이 우상이 이스라엘을 망치고 세계를 망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상 숭배는 첫째로 본인에게 고통이 옵니다. 노예예요. 우상이 그를 잡는 거예요. 우상을 하나 만들면 거기에 누가 오느냐? 거기는 신이 없어요. 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더러운 사탄의 졸개들, 귀신들이 그쪽으로 와요. 어디든지 섬기면 귀신은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귀신의 종이 되고 지배를 받아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면 모든 귀신이 떠나가지만 귀신은 섬기면 섬길수록 성경에도 보면 일곱 귀신이 찾아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어요. 마리아도 일곱 귀신이 떠나간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가 마리아입니다. 귀신은 많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면 어떤 대적도 두려울 것 없지만 하나님이 없는 자에게는 귀신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귀신이 따라 오면 그 사람에게는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생활은 불의하게 하고 혼란하게 하고 마음은 안정이 되지 못하게 하고 온갖 몸과 마음과 삶에 질병과 환난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탄의 역사인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대로 부인이 남편을 떠나 정부를 사귀는 것은 잠깐 좋을는지는 몰라도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라는 거예요. 저는 그런 상담을 많이 받습니다. 어떤 분도 학교 동창들 만나서 모였는데 동창들이 "얘 너는 아직도 그걸 모르냐"는 거예요. 여자 분들은 동창회 조심해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동창회 조심해야 해요. 모든 탈선을 동창회가 사닥다리 역할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그랬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너무 그런 것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친구들이 "얘 너는 아직 춤 한번도 안 추어 보았냐" 이래서 친구를 따라 어느 호텔에 들어가서 어느 아저씨하고 춤을 추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처음에는 떨리더니만 몇 번 해보니 그렇게 좋더래요. 그래가지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좀 좋아지게 되니까 한 순간이고요. 그 사람은 그 다음부터는 협박하고 온갖 집안에 돈 다 빼앗기고 남편한테 안 들키려고 하니 돈 때문에 살아날 길이 없고 친정에 있는 것 다 가져다 집어넣고요 형제들 것 다 가져다 넣고요 지옥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너무너무 불쌍해요. 이런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는 하나님 외에 이 세상이 좋다는 생각을 가져서도 안되고 어디에 뭐 있는가 곁눈질하지 말고 믿음으로 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상 숭배하면 하나님께 복을 못 받아요. 신명기 28장 14절이 축복의 장이잖아요. 그러나 신명기 28장에 보면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너희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아야 내가 이 복을 다 주겠다"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네 성이 복을 받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네가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신명기 8장 19절, 6장 14-15절, 오늘 읽어드린 모든 말씀도 우상 숭배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갔던 캄보디아의 앙고라 왓트는 세계 7대 불가사의입니다. 불가사의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너무 신비하다는 말이에요. 7대 불가사의 첫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이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고 오늘 이 앙고라 왓트도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아무리 사람이 능력이 많아도 이런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신비하게 생각하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지요. 이 앙고라 왓트는 수리아바르만 2세가 2십 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서 2십 년 동안 건축한 것이 바로 이 사원입니다. 1130년부터 1150년까지 사방을 1킬로로 저 멀리 있는 쿨람 이라고 하는 곳에서, 45킬로 밖에서 돌을 가져다가 지었어요.
요사이 자동차가 있어도 이렇게 하기 어려워요. 전체 성 탑 높이가 62m 예요. 첨성대처럼 요렇게 쌓아 가는 탑이 아니에요. 어마어마한, 수 천명 만 명이 들어가는 그 성을 어떻게 그렇게, 그리고 그냥 돌이 아니에요. 하나하나가 빈틈없이 연필로 쓰듯이 조각이 다 되어 있어요. 수천 만 개 돌을 다 그렇게 새길 수 있는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었어요. 그러나 우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 다음 1181년부터 1218년까지 자야 바르만 7세 라고 하는 분이 얼굴사원을 지었어요. 이 분은 그 당시 있던 참족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여 크메르 왕국을 건설했어요. 그러나 이 분이 들어서고 이 나라가 시작되면서부터 백 년 정도밖에 못 가고 이 나라는 이 사원을, 얼굴사원을 지었는데 전부다 얼굴이에요.
그로 인하여 그 다음에 이 나라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이것이 신비한 거예요. 사람이 살았던 자리는 반드시 후대에 남게 되어 있고 전달 되게 되어 있는데 1200년경에 이 나라가 망한 다음에는 그 주변이 여기에 나라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온 세계가 6백 년을 지나서야 알게 되었느데 지금 발굴 된지가 얼마 안됩니다. 여기에 사람이 있었는지를 몰랐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이에요. 이렇게 세계를 지배한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백제, 신라, 삼국 조그만 흔적도 우리가 찾아내고 있는데 이 나라는 이 거대한 빌딩이 완전히 숲 사이에 가려져서 인류가 전혀 모르게 6백 년을 지나왔으니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망했는지 어떻게 사라졌는지 모르는데 과학자들에 의하면 마지막 전부 글은 안 남기고 종이는 안 남겼지만 조각은 남겼는데 조각에다 마지막 사람이 문둥병으로, 자야 바르만왕 까지도 문둥병이 걸린 것이 그 조각에 나왔어요.
서서히 문둥병에 귀가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리면서 마지막 조각을 끝내는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이 끝나는 걸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성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온두라스의 마야 문명, 그래서 중미는 마야 문명이라고 합니다. 남미는 잉카 문명이라고 합니다. 잉카 문명에 마추피추에 가보면 너무 놀랍습니다. 이집트에는 피라미드이요 룩소입니다. 터키에 에베소라든지 인도라든지 사마리아라든지 우상의 도시 우상의 나라는 지금까지 전부 저주를 받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자손들이 하나라도 지금 인류 앞에 먹고사는 민족이 없습니다.
우상의 특징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우상의 특징은 첫째로 수많은 백성을 강제로 동원해서 사원을 지었습니다. 두 번째는 오랜 역사에 우상 문화는 다른 것은 하나도 못하고 우상만 짓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다른 것도 있어야 하는데 궁궐도 없어요. 우상의 사원만 남는 것이지 룩소도 보세요. 피라미드도 보세요. 다른 것 하나도 없이 그것만 남는 것이지 다른 것은 없는 거예요. 세 번째, 통치자의 불안에 의해서 언제나 우상은 번성하고 우상은 만들어집니다. 악령에 대한 불안, 죄에 대한 불안, 사후에 대한 불안, 적에 대한 불안 언제나 이러한 불안이 그걸 지어서 그래서 결국 이 사원에 누가 묻히느냐 하면 황제가 왕이 묻히는 거예요. 이집트의 룩소도 가보면 전부 자기가 묻히려고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기독교처럼 주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서 나누어주시고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이런 생명의 길이 아니라 자기 하나만 죽어도 또 그 안에서 살려고, 그래서 이런 사원의 무덤을 뒤져보면 별의별 보화들이 나오는 것은 다 갖고 들어가는 거예요. 네 번째, 언제나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거예요. 우상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우상 섬기는 것은 이기적인 목적 때문이에요. 오늘 왜 우상이 자꾸 발달하느냐? 왜 점쟁이가 늘어나느냐? 그건 간단합니다. 자기 하나 잘 되려고 그런 거예요. 다섯 번째, 인류에 아무 유익을 주지 못했어요. 이런 문명은 어떤 것도 유익을 주지 못했어요. 여섯 번째, 후손에게는 영원히 저주가 임하게 되는 거예요. 계속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그 땅과 그 나라에 임하게 되는 거예요. 배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똑같이 멸망을 당하여서 우리 인류를 향하여 우상을 숭배하면 안 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앙고라 왓트를 하나님께서 백 년 전에 드러나게 하셨어요. 우리로 우상은 아무리 장엄해도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다는 걸 우리 인류에게 보여 주시는 거예요.
만 왕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잘 믿는 길이 영원히 살고 구원을 받으며 승리하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남기려는 생각을 일절 버리고 아름다운 발걸음을 남겨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위용있는 우상을 숭배해서 우상을 남기지 말고 순하고 깨끗한 그리스도를 닮은 삶이 되어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우상은 무엇이냐? 우리 주변에 우상은 무엇이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데는 항상 부작용이 많고 문제가 많고 인간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사랑해 보세요. 물질로 인해 사람은 얼마나 좁아지고 어리석은 자가 되고 강퍅한 자가 되고 수고하고 고통 당하고, 또 돈을 벌 수도 없고요. 하나님보다 오락을 사랑해보세요. 쾌락을 사랑해보세요. 음란을, 술 취하는 것을 사랑해보세요. 요사이 술 얼마나 모두 좋아해요. 나는 이번에 오면서 비행기에서 신문을 보고 한 주간 못 보다가 또 뭐가 났나, 우리 나라는 떠나면 항상 불안해요 뭔 일이 또 안 일어났나, 그래서 빨리 신문을 들춰보니 몇 가지가 크게 났는데 그 하나가 386세대 술 먹고 난리 난 것이 나오더라고요.
'386'하면 우리 나라 최고의 지성인들이고 젊은이들 가운데도 아주 의식화되어 있고 이 나라의 장래를 이끌어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분들이 망월동에 5.18 전야제에 가서 그날 밤에 질펀하게 술 먹고 윤락녀하고 놀아나다가 걸렸다는 거예요. 제가 지난주일 다니엘에 대해서도 설교했지요 기본이 잘 되어야지요. 여기에 한 분이라도 예수 믿고 다니엘처럼 '나 안 먹겠다' 이런 말하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다 살아날 수 있었는데, 누가 '야 우리 이러지 말자' 하는 친구가, 믿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서 이야기해도 전체 386 다 살렸을 텐데, 요 몇 명이 자기만 아니라 386을 다 지옥으로 다 끌고 가는 거예요. 정치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냉정한지 모릅니다. 국민이 인정해 주는 것도 간단한 동기에 의해서 '와' 그러고 밀어주고 도장 찍어 주다가 저버리는 것도 한 순간에 국민이 돌아가는 걸 알아야 됩니다. 술이라는 것 얼마나 무섭습니까 사람이 속상하고, 그들도 정치하고 답답한데 한 잔 하는 것 이해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술 한 잔, 속상할 때 한 잔 하고 싶은 마음 없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술잔에 빠지지 않는 길이 무언지 아세요? 작년에도 얼마나 나왔습니까 수많은, 나라를 다 흔드는 것이 술판에서 다 나오지 않습니까 얼마나 무서운 게 술판입니다. 술판이 이런 권력만 빼앗아 가요? 술판은 건강도 빼앗아 가고 가정도 무너뜨립니다. 작년에도 보세요 술 먹고 말해서, 술 먹으면 원래 말이 막 나와요 술 먹으면 술기운으로 나오기 때문에 자기 말이 아니에요 술이 막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고도 저지르고 말도 함부로 해서 실수도 하고 사업도 무너지고 가정도 무너지고 나라도 흔들고 자기들이 오랫동안 쌓았던 공든 탑 다 무너지는게 술판인데 말이죠 그래도 술 먹겠어요? 술잔에 안 빠지는 길이 뭐냐? 하나님을 잘 믿는 길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 술판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눈에 드러나면 그 사람은 믿음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그렇게 아세요. 저도 어려서부터 친구들하고 놀면서 술의 유혹, 강제로 먹이는 유혹 한없이 받았지만 한 잔 안 먹었어요. 내가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주님을 내 맘에 모시고 나니까 이 곳에 술을 혼합시킬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어린 마음이지만 그렇게 살수는 없더라고요. 저는 안 먹었어요. 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힘들어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그거 못하는 거예요. 우상 숭배 안 했어요 왜?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어디 가서 절 할 수 있겠느냐 말이에요. 주일 학생인데도 안 했는데 하물며 여러분, 하나님을 그렇게 시시하게 믿습니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자를 그렇게 믿고 살아가십니까?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으며 살아갈 때에 여러분은 모든 죄, 우상 숭배, 불의와 재난에서 건질 뿐만 아니라 최고의 승리와 영광의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일을 바르게 지키자
신 5:12-15 / 임덕순 목사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만 바쳐야 하는 특별한 날에 관하여 성경은 두 군데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입니다.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우리에게 십계명을 내려 주셨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에 관한 말씀이고, 제2계명은 예배의 방법에 대한 말씀이며, 제3계명은 예배자의 정신에 관하여 말씀했고, 그리고 4계명은 예배의 시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5계명 이하는 예배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안식과 예배를 위하여 7일중의 한날을 따로 구별해 주셨습니다.
창2:2-3에 보면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에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섬기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지으시고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면 이 땅에 자기가 다스려야 할 물질이라도 섬겨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이 뒷받침해주고 있고 오늘 사람들이 무언가에 올인 하는 모습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일하는 존재입니다.
엿새 동안에 힘써 일하라는 명령은 인간이 근로적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달란트에 따라서 사명감을 갖고 자기 맡은 분야에서 힘써 일해야 합니다.
인간은 범죄 이전에도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었습니다(창2:15). 그것은 행복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범죄 후에는 그것이 고역이 되었습니다.(창3:17) 그래서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먹고 살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살후3:10)
그래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그 전에 먼저 엿새는 힘써 일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엿새 동안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된고, 한 주간을 성실히 살던 사람이 안식일을 지난 엿새와 구별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날로 지켜야만 가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규칙적인 휴식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힘써 일한 뒤에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유지하고 힘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휴식이 필요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엿새는 힘써 육체의 일을 하라 하셨고 일곱째 날은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그동안 돌보지 못한 영혼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휴식 없이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 보다 하루를 쉬고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일본은 주일과 토요일을 없애 버리고 월월화수목금금이라 하면서 1억 인구가 열심히 일하면 2차 대전에서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한지 2년도 못되어 망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계명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네 집 우양도 일하게 말라고 하셨는데, 짐승들도 일주일 내내 일만 시키면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주일에 하루는 육체를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정해 주셨습니다.
이 날은 세상의 모든 시달림에서 벗어나 휴식을 얻는 날이며, 몰두하던 일들로부터 규칙적으로 적으로 해방을 받는 날입니다.
휴식을 통하여 육신도 회복하고 정신적 여유를 가지며,
하나님과 교제하면 용서와 평안과 힘을 얻도록 해주신 복된 제도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날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마2:27)
목수가 대패질을 하면서 다듬던 나무를 자주 쳐들어 보아야 반듯하게 깎을 수 있듯이 우리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바른지를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 보아야합니다.
이날은 하나님이 복 주신 날이지만, 세상 것을 얻으려 하면 소득 없는 날입니다.(출16:21-30)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시는 행동으로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식일 혹은 주일은 왜 거룩한 날로 여기라고 하셨을까요?
1) 창조 감사일(출20:11) 하나님이 우리와 만물을 창조하고 쉬셨으니 너희도 쉬면서 너의의 창조를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2) 구원 감사일(신5:15) 이스라엘을 사망의 애굽에서 구원하여 인도하였고, 너희도 죄에서 구원하였으니 너희 구원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인류 전체의 죄를 해결하고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했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승리와 소망의 날이 되었습니다.
4) 내세 천국을 향해가는 나그네 길에서 천국의 안식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행복한 날입니다. 그러니 이 날이 보통날이 아니라 특별히 거룩한 날입니다.
엿새 중에서 하루를 거룩한 날, 즉 구별된 날이라 하고 그날에는 개인을 위한 노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날로 삼으라 하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왜 주일성수의 명령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하나님께서 시간의 1/7은 내 것이니 손대지 말라고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출31:13-17에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7일중 하루를 당신의 몫으로 여기시며, 사람은 그날에 대한 주권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날을 도둑질한 날도둑눔이 되고,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결코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앞에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경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본래 두려운 날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날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렘17:27에 나옵니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주일날 쉬어도 우리의 삶에 문제가 없도록 하나님이 대책을 세우십니다.
출 16:25-29에 보면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6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7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실제로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지 않았으나 그 전날 이틀 분을 거두는 방법으로 미리 세워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업하는 사람도 주일 지키면 사업 망할까봐 겁 낼 필요가 없고 믿고 맡기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주일은 예배 시간 한 시간만 안식일이 아니라 종일이 주일입니다. 월요일이 24시간이요 화요일도 24시간인 것처럼 주일도 24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전 두 시간이 주의 날이요 나머지는 내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늦잠을 자고 10시에 일어나서 대충 준비하고 나와서 11시 반 예배 한번, 그것도 지각하며 참석하고 돌아가서는 주일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일은 하루 종일 주일이고, 성경은 종일토록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오전 예배 한번 드리고 오후에는 가 버리는 사람이 태반이지요? 나중에 장로가 되어야 할 안수집사님들 중에도 주일오후에는 예배 다 빼먹으면서 나는 왜 장로 안 시켜 주느냐고 하는 분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한 토막이 아니라 하루를 다 드리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잘 하고 있다고, 성도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오해 하신 것입니다.
칠일 중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이 옳을까요?
“구약시대에는 주간의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명하셨고, 그리스도의 부활 후부터는 매 주간의 첫날을 명하셨으니 바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이나 로마서 등을 종합하면 이 말씀이 정확하게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의 첫날에 해당하는 주일은 신약시대의 안식일이 맞습니다.
이날은 인간을 위하여 제정해 주신 것이고(막2:27) 인간을 축복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며(출31:13) 이 날의 제정자와 주인은 주님이십니다.(마12:8) 이날은 사람들이 자기의 유익과 편리를 위하여 정하고 모이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날입니다. 내 스케줄에 맞춰 주일을 지킬 것이 아니라 주일에 내 스케줄을 맞추어야 합니다.
창2:2-3을 보면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기를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복을 주셨고,
우리에게도 그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포로생활 중에도 이날을 지키며 약속하신 주님이 오시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출20:11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고 쉬셨으니 그러므로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5:15에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구원하였으니,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똑같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날짜가 그날이니까 지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의미가 있으니까 지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우리가 그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이유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해 주시고 쉬신 날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날이기도 하기에 그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구약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날짜에 있지 않고 의미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그날 육신의 일에서 해방되어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가지면서 창조자요 구원자인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구약의 모든 예언이 이루어지고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그가 우리의 죄 짐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그분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인류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그날을 하나님 섬기는 날로 정하고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추측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주님은 안식 후 첫날 아침에 부활하셨고, 우리의 구주이심이 확인된 그 후부터는 구주되신 주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부활하신 그날에 믿는 자들이 다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지 않고 주의 날이라 불렀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5주간인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며 다섯 번을 나타나셨는데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안식 후 첫날, 즉 주의 날이었습니다.(요20:19, 26, 막16:9 등등)
게다가 주님이 승천하시고 대신 오신 성령님이 강림하신 오순절 날도 토요일인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인 주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매주 첫날에 모여서 자기들의 구주인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고 그 날을 주의 날이라 불렀으며, 그날에 헌금도 드렸습니다(고전16:2)
그리고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주의 계시를 받던 날도 그날 이었고, 그는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계1:10)
그리고 롬14:5절이나, 갈4:10절에 보면, 왜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을 지키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날을 지키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삶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여러 타당한 이유로 우리는 일주일의 첫날인 일요일,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주원을 완성해 주신 그날을 “주의날”로 부르며, 그날 창조주가 되시고 구원주도 되시는 삼위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모범에 의하면 “주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날 종일을 거룩하게 쉼으로 할 것이니 다른 날에 합당한 여러 가지 세상일과 오락까지 그치고 그 시간을 공사 예배에 바쳐 사용할 것이요, 그 외에는 부득이한 일과 자선사업에 사용할 수 있느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주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다른 날에 하는 일들을 그날에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58:13에는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라고 하여, 세상적인 재미와 유흥을 위해서 사용하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렘17:27에는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라고 하심으로 육신의 소득을 위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대한 경고도 하셨습니다.
렘17:27에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일도 못 지키면서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 순간에 소멸시키겠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주인이 빼앗아버리시면 남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출31:15에는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니,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가혹한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한 날이라고 제정하셨는데 우리가 “뭐가 특별해요 그날이나 저날이나 똑같지 뭐”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뒤섞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람을 태우고 죽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여기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지난주일 사58:14에서 말씀드린대로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되 만민이 우러러 보는 성공을 주시며, 너희가 약점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용서하고 내 것을 삼아서 복을 주리라는 약속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문제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사랑과 축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일을 거룩한 날이라고 정해야 하고 그날 종일 하나님 섬기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1) 세상일을 놓고 쉬라. -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과 직원들 까지 쉬게 하고 짐승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2) 엿새 동안 힘껏 일을 해서 주일을 지킬 수 있게 준비하라. - 엿새 동안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안식일에도 다른 일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3) 예배를 드리는 데 주력하라. - 공식예배에 참석하고, 개인으로 기도하고, 성경읽기, 찬송과 묵상을 하여야 합니다.
4) 이웃에게 봉사하라. - 심방과 섬김과 봉사의 모임에 참여하여 주님처럼 남을 섬기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예배모범을 보면,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옳은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배모범은 장로교 헌법에 기록되어 있는데, 전문 18장 중 제 1장이 주일을 지키는 문제이고, 그 1장은 6절로 되어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1.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 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집회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좋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말도 금함이 옳다.
3. 먹을 것 까지도 미리 준비하고 이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별히 자기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5.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기도 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성경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어떻습니까? 잘 하고 계십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쉬라 명하신 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하나님께 돌아와 은혜를 누리고 서로 섬기라고 명하신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우리 한가람 성도들은 잘 지켜서 복을 받읍시다. 이 날을 잘 지키기 위하여 엿새 동안은 게으름피지 말고 힘써 일하고, 주일은 모든 일을 쉬고 경배와 공부와 봉사와 사랑의 교제에 힘써나갑시다.
이것이 올해 새로워질 또 하나의 분야입니다. 주일은 종일토록 주일이니 오전예배만 드리고 돌아가지 말고 점심시간에는 성도들끼리 교제하고 오후예배도 참석하며 온종일 하나님 마주보는 하루를 삼아서 매주간 주님 은혜로 복을 받아 누리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일성수와 하나님의 복
창 2:1-3, 신 5:12-15, 사 58:13-14 / 이기복 목사(하늘문교회)
그리스도인이 되면 가장 먼저 달라진 생활이요 가장 기본이 되는 주일성수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한 주간 7일 중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主日:Lord’s day)로 지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일명 성일(聖日) 즉 구별된 날, 거룩한 날, 안식일 이라고 합니다. 주일을 성별하야 지키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바르게 섬기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복 받는 일을 위해 정해주신 축복의 제도요 날입니다. 가정하여 만약 이 세상에 주일제도가 없었다면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에게 사는 것이 재앙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쉬기도 하고 다시 재충전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날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옛날 원시시대나 농경시대에는 오로지 일하고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요 낙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 농경시대에는 주일날이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날이고 가장 많은 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가족들이 공동으로 함께 일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초대교회 당시에도 주일날 일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일이 엄청나게 힘든 시대가 있었습니다. 농번기에는 주일날 온 식구가 교회 나가 예배드리고 쉰다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하던 일을 멈추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장사도 가장 잘 되는 날이었고, 각종 행사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소위 말하는 일요일 날 결혼식도 가장 많았고 가족 행사도, 직장 행사도 가장 많이 가졌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주말과 주일날 가게도 문을 닫고 모든 사람들이 주말부터 쉰다는 아주 이국적인 말을 들으면서 참으로 팔자가 좋은 나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그러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 5일제도가 정착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일 때문이 아니고 사람들이 놀고 즐기기 위해 주일을 잘 지키는 일이 힘이 들고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더 철저하게 신앙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일을 주일답게 지켜야 복을 받습니다.
1. 주일은 안식하고 복 받는 거룩한 날입니다.
주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제정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우주 만물을 조성하시고 창조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히 좋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7일을 안식일로 정하셨습니다. 창 2:2-3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 날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성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made it holy” 히브리어로 “엘로힘 와예바레크 오토 와예카데쉬”라고 했습니다. 태초부터 안식일을 구분하시고 그 날은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주일을 안식하면서 복 받고 거룩하게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안식을 하지만 믿지 않는 백성들은 주일 날 육체의 만족을 위하여 즐기는 날로 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고 복을 받는 일에 있어서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의 삶의 기본원칙으로 십계명을 주셨는데 1-4계명의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5-10계명의 인간에 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10가지 계명 중에 가장 내용이 길고 자세하게 주신 계명이 바로 제4계명인 안식일 계명입니다. 출20:8-11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다,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복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의 설교인 신명기 5:12-15절에서도 똑같이 이 계명을 가르치고 반드시 지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 이 계명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기독교는 유대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기다리던 메시야로 탄생하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즉 예수교 또는 기독교 종교가 된 것입니다. 유대교는 한 마디로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종교이면서 기독교의 모태와 같은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민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에 계신 날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지키는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성경은 안식 후 첫날이라고 말씀하였고 그 날이 오늘날 주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인 오늘의 주일날에 모이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부활승천 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도 곧 주일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고전 16:2절의 말씀과 같이 “매주 첫날”입니다. 달력에도 보면 모든 세계가 통일하여 주일로 시작이 되고 주일은 다른 말과 구별하여 빨간 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오묘하고 신비한 역사입니다(마28:1,막16:2,눅24:1,요20:1,행20:7).
전에 우리가 안 믿을 때나 지금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모든 날이 월요일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날을 “일요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먼저 주일로부터 시작을 하여 토요일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3. 주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주일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가장 행복한 날, 축제의 날입니다. 기독교는 축제의 종교라고 하는 것도 매 주일 축제적인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주일 동안 가정에서나 직장과 사회에서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을 하다가 모든 일들을 접어놓고 마음과 복장과 믿음으로 주일 준비를 하고 성경 찬송가를 가슴에 안고 교회를 향하는 그 발걸음과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경건하고 멋있는 모습입니까? 지금은 자동차를 이용하여 교회에 나오지만 과거에는 주일 예배 시간이 되면 거리에 교회로 향하는 성도들의 발걸음이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농촌에서도 그 날만은 온 식구가 깨끗하게 옷을 차려 입고 교회를 향하는 모습들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예배당 입구에서 반가이 맞이해 주는 목회자나 교회 임원들의 친절한 모습과 다 같이 모여서 힘차게 찬송을 하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정말 천국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행복과 축복을 마다하고 주일 날 나들이를 가고 세상 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일 예배를 준비하고 드려야 할까요?
1) 먼저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성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성경 본문에 이 날은 거룩하고 복 받는 날이라고 하였으니 먼저 다른 날과 다르게 성별하여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일주일 동안 주일을 기다립니다. 금요일은 속회를 드리고 토요일은 주일 에비일로 준비를 합니다. 주일을 대비하여 하나님께 드릴 헌금도 미리 준비를 하고 의복도 에비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주일을 기다립니다. 그동안 소홀히 하였다면 금년에는 주일성수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 교회는 새성전에 입당을 하고 매주 토요일은 교구로 돌아가면서 교회 대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각종 기념일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제단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는 그 정성과 마음은 정말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2) 속죄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이 차고 넘치는 예배를 드립시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구원의 감격과 한 주간에도 부족하여 죄와 허물이 많은 죄인들이지만 예배를 통하여 속죄함을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은총을 생각할 때 저절로 감사가 나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가슴 뭉클한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3)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예배를 드립시다.
한 주간도 우리 자신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 은혜를 주셨고 건강을 주셔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당연히 감사와 찬송이 차고 넘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목회자를 만나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반가이 맞을 생각을 하니 감사하고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무슨 말씀으로 영의 양식을 공급 받을 것인지 궁금하면서 기대하고 기다려지는 예배가 상상만 하여도 기쁨과 감사가 차고 넘치게 됩니다.
4)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예배를 준비합시다.
주일을 맞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과 열정 그리고 가족과 같은 우리 성도들을 만난다는 감격과 설렘을 가지고 주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사랑이 빠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와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예배가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예배입니다.
5) 3가지 금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58:12절에 구체적으로 금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첫째 네 발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즉 성일에는 갈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배시간만 아니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둘째, 오락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세상적인 오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셋째,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어생활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언어생활도 정화가 되어야 합니다.
4. 주일을 성수하는 자가 받을 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실 뿐 아니라 자손 천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주일을 거룩한 날로 잘 지키고 예배하는 나라와 백성들은 세계 어디를 가 보아도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해적이었던 나라나 가난하여 먹기 살기도 힘들었던 나라들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일까지 일하게 하였던 공산주의 나라나 주일을 철저히 부인하는 북한은 가장 못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개인이나 가정 그 나라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사야 58:14절에 다음과 같이 3가지 축복을 약속 했습니다. 즉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 입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복을 받습니다. 주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최고의 복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인생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고 삶의 희열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제미가 없고 못살겠다고 하루에 38-40명씩 자살을 하는 세상인데 정말 주일을 기도하고 준비하여 잘 지키십시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2)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척박하고 국토가 비좁고 광야와 사막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변은 온통 적군들로 둘러싸인 이스라엘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며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된 것은 그들의 신앙 때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지난 60-70년대 얼마나 못살았고 세계에서 가장 뒤쳐진 나라였습니다. 원조를 받으러 전전긍긍하던 때입니다. 일본에게도 굴욕적인 한일정상회담을 해서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무장을 하고 복을 받은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저력이 있는 나라요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주일도 없이 일하던 옛날과 달리 이제는 주 5일제를 하면서도 이렇게 큰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높여 주신 것입니다.
3)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야곱의 기업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장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정말 빈손 들고 외삼촌 집으로 피난을 가서 머슴살이를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가 되었고 가장 많은 재산을 모은 재벌이 되었습니다. 12아들을 거느리고 금의환향한 입지전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뀌어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국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야곱의 기업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복을 부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일주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나라나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지만 일주일에 5일을 일하고 주일을 성수하는 나라나 백성들은 잘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은혜의 나라를 대망하자
신명기 5:12-15 / 연규갑 목사
성경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과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계시의 점진성으로 인해 구약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시가 시대를 따라 점진적으로 확장이 되고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시대를 따라 하나님의 계시가 단편적으로 보여지면서 그 모든 계시들을 종합해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인의 몸을 통해 오셨습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구약성경의 말씀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사역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내용을 성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할 때마다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증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의 실체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난 시간들로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살펴보는 안식일을 포함한 그 안식일 시스템들도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즉 이 모든 안식일 시스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안식일(주일)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더 나아가 이 안식일 시스템들은 장차 이루어진 또 하나의 위대한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식일 시스템은 이제 우리에게 남은 하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나타날 마지막 사건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 즉 우리가 오늘 주일을 지키는 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시작되는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천국의 잔치를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일을 지킴으로 인해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의 예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는 우리가 주일을 지킴에 있어서 단순히 오늘 하루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장차 누려야 할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지켜야 함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의 나라를 대망하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억하며 지켜야 할 안식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 집 안에 있는 종들과 나그네들,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한 안식년을 지킴으로 인해 내 백성 가운데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들에게 이르기까지 그 혜택을 나누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일들은 분명 선한 일인데, 그 일을 행하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동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동기를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종노릇하는 데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이유를 근거로 우리에게 이 선한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 곧 십계명이 성경의 두 곳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출애굽기 20장 8-11절인데, 이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직접 주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으로 신명기 5장 12-15절인데, 이 때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모세 앞에 있는 자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과 출애굽 당시 20세가 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세대들입니다. 아들이 저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정복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들 새로운 세대에게 과거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셨던 십계명을 명령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5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말씀에는 그리 다를 바가 없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고,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모세의 명령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내용을 보면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0절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본문 14절에서 동일하게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말씀 뒤에 출애굽기에서 나타나지 않는 표현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특권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권, 오직 신들과 신적인 존재들(왕이나 그 반열에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안식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에서 이 말씀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말씀으로 들릴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안식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나의 안식을 통해서 내 집에 있는 종들에게도 그 안식의 혜택을 나누어주고 함께 누리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안식일의 의미가 얼마나 깊고 풍성한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1절에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는(כִּי)”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로 이하의 말씀이 주어졌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천지 장조입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에서는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로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해서 살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하나님이 안식의 근거로 출애굽을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의 안식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분명 15절만을 따로 떼어서 살펴본다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은 14절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14절의 말씀에 대한 이유와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며 안식해야 하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14절 끝에 등장하는 내 집의 남종과 여종이 나처럼 안식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은 나만 먹고 마시면서 즐기고, 기뻐하며, 축제를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안식을 누리는 것처럼 내 종들도 함께 그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종들로 하여금 나처럼 안식을 누리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분이 종인데, 나를 위해서 일하는 자들인데, 내가 쉬고 안식한다고 그들에게도 나와 똑같은 안식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바로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불과 40년 전의 모습과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 저들은 애굽에서 노예였습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라고는 누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것도 본문의 표현을 따르면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억지로 저들을 붙잡고 이끌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나올 수 없기에, 애굽과 바로가 저들을 보내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직접 저들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즉 이스라엘이 그토록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총을 집 안에 있는 종들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님의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신명기 15장 12절 이하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안식년의 규례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이 안식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아주 귀한 일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종으로 팔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는 일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다른 사람의 종으로 팔리는 일이 발생하게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들은 안식년이 되면 아무런 대가 없이 종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이전의 자기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으로 팔릴 때는 안식년까지의 남은 기간을 계산해서 팔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들을 해방시킬 때, 또 지켜야 할 규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종들을 해방시킬 때, 빈손으로 나가게 하지 말고 그에게 후히 주어서 그것을 가지고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그 종이 빈손으로 나가면 또다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다시금 종으로 팔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본문에서 그렇게 해야 할 이유로 출애굽 사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희년에 있어서는 더욱 확장되고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38, 42, 55절을 이어서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희년의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또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 이는 분명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의 종에서 구원하시고 해방시켜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이를 내 이웃에서 선을 행하는 동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하나님이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결과를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마땅히 구원받은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안식일, 곧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일을 지킬 때,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 감사하고,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를 잊어버리거나 빼놓고 주일을 이야기하고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주일을 지킴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내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복음을 나누고,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비록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그 은총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Ⅱ. 영원한 안식을 대망하며 지켜야 할 안식일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면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주일은 과거의 사건, 곧 우리의 구원 사건에만 그 의미를 제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원의 사건은 현재에서 반복적으로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에 있을 위대한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우리가 누리게 될 크고 최종적인 구원의 잔치를 대망하며 지키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요, 주일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이 희년을 말씀하시면서, 출애굽 사건, 구원 사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희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백성들에게서 산 땅을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종으로 팔린 자들을 모두 자유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때의 상황을 그려봅시다. 주인의 집에 매여서 살았던 지난 날을 뒤로 하고 이제는 자유인의 신분으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주인이 준 풍성한 곡식과 재물들을 등에 지고 문을 나서고 있습니다. 그 종들의 얼굴을 본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의 다 가진 듯 할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기쁨과 행복의 눈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떠나가는 종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등에 짐을 지고 기쁜 마음으로 떠나가는 그 종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끝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애굽에서 얻은 보화와 재물을 등에 지고 애굽을 떠날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바로 이것을 지금의 상황에서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즉 안식년이나 희년을 지키면서 해방의 기쁨을 누리를 저 종들을 보면서 과거 내가 누렸던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과거에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현재에서 내가 내 이웃에게 베푸는 선행을 통해서 다시금 경험하는 것입니다. 결국 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이나 안식년, 희년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과거에 베푸신 은총을 현재에서 반복하고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현재에 그 구원의 기쁨을 반복해서 구현해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러한 현재에서 반복적으로 구현해 내는 이 사건은 또한 미래에 있을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대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 10-11절에 보면 희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희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바로 자유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종으로 매인 자들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종으로 팔리기 전 자신의 모습으로 완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희년의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아주 귀한 말씀이 뒤이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3장 23절에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토지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영영히 팔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너무나도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너희 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은 지금까지 자기의 소유가 없이 살았습니다. 노예가 무슨 재산이 있습니까? 또 광야에서 저들이 소유할 토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저들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정복하고 거기에 정착해야 합니다. 땅을 분배받고, 그 땅을 경작해서 나와 내 가족이 먹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받을지라도 그 땅에서 토지 소유자, 곧 지주(地主)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너희는 거류민, 즉 잠깐 머물다가 떠나야 하는 자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나그네처럼 잠시 동거하는 자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땅에 이스라엘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류민, 즉 나그네라고 하는 신분은 언제나 돌아갈 본향이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나그네는 언젠가는 자신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입니다. 아무리 이곳이 좋아도 여기에서 영원히 머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 있는데, 히브리서 11장 9-10절에서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 그리고 그 약속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삭과 야곱,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가나안 땅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땅을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곳이요, 하나님이 지으신 곳입니다. 오늘 우리의 표현대로 한다면 천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 땅에서 안주하려고 하지 말고, 미래에 있을 그 영원한 나라, 저들의 조상들이 바라보았던 그 하나님의 도성을 대망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희년에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우리가 본 레위기 25장 10절의 말씀을 가지고 선지자 이사야는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날에 펼쳐질 “대 자유”의 사건으로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이사야 61장 1-2절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갇힌 자에게 놓임”이라고 하는 표현은 레위기 25장 10절에 등장하는 “자유”와 같은 개념입니다. 또한 레위기에 등장하는 “이 해, 곧 희년”을 이사야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이 해와 날은 여호와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종말론적 표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마지막 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인용하심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펼치고 읽으셨는데, 그 본문이 바로 이사야의 글이었습니다. 그 본문을 다 읽으신 예수님이 무리를 바라보시면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4:21). 예수님은 당신이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과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이루신 그 구원 역사, 그리고 다시 오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그 대망의 주의 날. 그 은혜로운 날들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고 명령하신 그 희년과 그 희년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안식일을 포함한 그 시스템 속에 포함된 모든 날들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그리고 그로 인해서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대망하면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9-11절에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4장 11-13절에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안식을 결코 얻을 수가 없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안식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를 우리에게 믿게 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 삼으신 성령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대망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 주일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더욱 강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안식일과 주일
신 5:12-15 / 김태복 목사
현대에 와서 많은 성도들의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성수주일을 어찌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전의 교인들은 성수주일의 자세가 분명했습니다. 주일날은 일체 일하지도 않고, 일체 물건도 사지도 팔지도 않았습니다. 주일날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남은 시간들도 온종일 성경 읽기나 전도만 있고 일체 오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성수주일을 그렇게 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더 나가서는 요즈음 ‘5일 근무제’가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주일의식이 점점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일 1부예배를 토요일 날 드리는 교회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5일 근무제’가 본격화되고 우리나라의 경제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다면 더욱더 많은 교인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금요일이나 토요일 아침에 야외로 놀러가는 가족들이 급증함으로 교회가 점점 비어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시대일수록 더욱 깨어서 성수주일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수주일을 하되 현대적인 삶에서 성수주일의 진정한 자세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생각할 문제는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 주일로 바뀌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즉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가 구약의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안식교에서는 구약대로 지킨다고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직장도 빠집니다. 아주 잘못된 모습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토요일 안식일 대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즉 주일을 예배를 드리는 날로 정했습니다. 누가 정했습니까? 예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도 일요일이요, 부활하신 후에 열 한 제자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실 때에도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신 날도 일주일 첫날인 오순절 날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를 보면 일주일 중 첫날인 일요일에 예배드리려 모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20:7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모였더니”라고 했고, 고전16:2에도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라고 했습니다. 계1:1에 보면 사도 요한이 주의 날, 즉 주일에 성령에 감동하여 계시를 받고 계시록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열 두 사도 교훈집」이라는 문서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주님의 날 함께 모여 떡을 떼며 성만찬을 가질 것을 기억하라”고 권하고 있고, 순교자 저스틴은 주후 155년경에 기록한 자신의 편지에서 이교도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공동예배를 주일마다 가집니다. 왜냐하면 주일이 일주일의 첫 날이기 때문이며, 이날 하나님은 어둠을 바꾸시고 우주를 만드셨으며,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도 같은 날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이후에 하나님이 지정하신 안식일은 토요일이 아니고 일요일 즉, 주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이 왜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목적은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시고 쉬신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천지창조에 대한 찬양이 예배의 중요한 중심이었습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출20장과는 달리 신5:12-15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유가 조금 달라져서 구원하심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서 안식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오늘 5:15에서도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구약의 안식일 의미는 천지창조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요, 더 깊은 의미에서는 구약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인 메시야의 대망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는 예수님이 오시므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죄악에 빠졌던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거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구속사업을 마치신 것입니다. 그 완성하신 날이 부활하신 주일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시대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지만, 신약 이후 은혜 시대에 와서는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구약에서는 안식일 법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전의 두 방이 있었는데 첫째 방인 성소에는 진설병을 놓는 떡 상이 있고 촛대가 있습니다. 그 떡 상위에는 언제나 열 두 개의 떡이 있는데 매 안식일마다 그 떡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떡은 아론과 제사장들만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성소 안에는 지성소가 있는데 법궤가 그 안에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고 지성소에는 일년에 꼭 1번씩 대제사장만 들어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일 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폐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시고 흠 없는 양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라는 지성소에서 단번에 희생 제사를 드리심으로 구약의 법은 폐하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로 성전 안에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의 피나 그 이름을 가진 자는 영원한 지성소인 하늘 보좌 앞에 나가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구약의 제사제도, 안식일의 법은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새 법, 주일의 법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날에 와서는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옳습니까?
세 가지로 배울 수 있습니다.
1.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지키어야 합니다.
십계명 1-4계명은 어느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 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1계명은 참된 예배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요, 제2계명은 참된 예배방법으로 우상숭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요,
제3계명은 예배의 태도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요, 제4계명은 예배하는 날을 지정해 주셨는데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이 앞에 가장 귀한 일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날의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이기 때문에, 이 날은 모든 일을 그만 두고 예배드리는 날로 드리어야 합니다.
물론, 주일날 하는 일 중에 교육이나 봉사, 전도나 선행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우는 구역장이 지나치게 강요해서인지, 구약예배는 열심히 참석하는 데 주일날 예배는 등한히 합니다. 아닙니다. 다른 날 예배보다도 주일날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를 드리었으나 신약에서 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 곧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에 꼭 참석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십시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수없이 예배를 드리는데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은 세상에 가 있습니다. 그런 예배는 가증한 예배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노릇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시간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김정일 목사님이 쓰신 글에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설교를 시큰둥하게 듣던 자매가 어느 주일날은 설교시간에 열심히 받아쓰더랍니다. 그러니 목사님도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자 다른 자매님이 묻기를 “자매님, 오늘부터 목사님의 설교를 기록하면서 듣기로 하셨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목사님 설교요? 아니에요. 곗돈 순번을 짜고 있었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니 됩니다. 주일날에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드리는 일인 줄 아시고 단정한 복장으로 예배 전에 나오셔서 준비기도하시고 예배 중에 찬송이나 기도, 말씀 듣는 일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시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주일성수는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함인 줄 믿어야 합니다.
주일의 의미 속에는 분명 안식일의 의미가 깊이 흡수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주일날은 영육 간에 안식하는 날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일은 예배하는 날일 뿐 아니라 영육이 쉬는 날입니다. 사실, 주일날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나면 영적으로 쉼을 얻을 뿐 아니라, 영적인 즐거움이 생기어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58:13 “안식일은 즐거운 날이라”고 한 말씀대로 주일은 영적으로 즐거운 날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육신의 피곤 때문에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않고 온종일 잠을 자거나 다른 오락에 빠지면, 이상하지요. 영적으로 심한 불안과 죄의식에 빠지면서 심신이 더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드리는 한 시간 동안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어 보십시오. 영적인 기쁨과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은 육신의 모든 것을 쉬는 날로 하나님이 제정하셨습니다. 어느 교인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빼앗아 돈도 못 벌게 하고, 어디 놀러가지도 못하게 만드시는 분이라’고 불만을 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날을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날로 만드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람의 육체적 리듬이나 정신적 리듬은 7일 만에 하루를 쉬는 것이 좋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로열 아카데미에서 사람이 일을 하다가 며칠 만에 하루 쉬는 것이 좋은가, 여러 각도에서 연구해 보니 결론은 7일 만에 한번 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주동자들은 무신론자들인데, 혁명이 끝난 후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0일 만의 하루를 쉬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결산해 보니 10일 만에 휴일제는 전 국가적으로 40%나 결손을 내고만 것입니다.
소련의 공산당들도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7일 만에 하루 쉬는 것을 8일 만에 하루 쉬게 함으로 1일 노동량도 늘릴 겸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을 막으려는 술책을 폈습니다. 후에 계산해 보니 전국가적으로 생산지수가 30%나 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7일 만에 하루 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요, 인체나 정신의 리듬입니다. 다시 말하면 7일 만에 하루 쉬는 것이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는 것에 비해 더 큰 능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국 초기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황금이 난다는 소식이 들려오므로 너도 나도 서부로 마차나 말을 타고 떼 지어 몰려갔습니다. 가기만 하면 누구나 땅도 마음대로 차지하고 무진장의 사금을 캘 수 있다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황금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주일에 쉬는 법도 없이 계속 달리고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청교도 신앙을 가졌던 분들은 7일 만에 하루는 꼭꼭 쉬면서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계명대로 “네 집에 있는 육축도 쉬게 하라”는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 결과, 경쟁에서 엄청나게 손해를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던 자들이나 말들은 중도에서 지치거나 병이 생김으로 오히려 늦게 도착함으로 오히려 7일마다 쉬었던 청교도들이 건강과 아울러 많은 금을 캐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장수하는 민족은 유대인들입니다. 그 비결은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안식일은 일체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깊은 교제와 묵상으로 하루를 보내며 하루를 온전히 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의 노예가 아닙니다. 삶에는 리듬이 필요합니다. 7일 만에 한번 쉬면서 안식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하라고 주신 날까지 허덕허덕 일하다가 피곤해서 병들고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분들은 사정상 주일날 1부예배만 드리고 직장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저도 하나님 뜻대로 영육이 안식하고 싶습니다. 제게 안식할 수 있는 직장과 여건을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귀한 길을 열어주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3.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로 지키어야 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방법은 예배를 드리고 육신이 안식하는 날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성수주일 하는 적극적인 방법은 주일은 주님의 날이니, 주님을 위해 일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에 대해서 많은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안식일에 대해서 거의 언급이 없고 주일을 어떻게 지키라든지, 주일에 일하지 말라든지 하는 말씀이 그 많은 예수님 말씀과 바울의 서신에 없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주일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6일은 우리를 위해 일합니다. 그러나 주일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날입니다. 주님을 위해 하루를 드리니까, 주님은 우리의 6일을 은혜와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때로 교회 안에서 성수주일에 대한 많은 논쟁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에는 일하지도 말고 매매도 말고 오락도 말라고 명하고 있음으로, 현대에 와서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일체 돈거래를 말라고 하니, 원거리 계신 분들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오는 것이나 자가용 가진 분들은 주일날 기름을 사 넣는 것도 문제요, 교회를 오가면서 식사를 사먹는 것이나, 심지어 교회의 식당에서 식권을 사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더 나가서는 각 기관이 주일날 장사하는 것도 문제가 되어 의견이 분분하게 됩니다. 때로 당회에서도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로 의견다툼이 일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때에 오직 한 가지 대답은 “주님을 위한 일이냐,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냐?”에 따라 판가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골교회에 있을 때 한번은 성수주일 문제로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새로 건축한 다음에 구 교회당 앞에 있던 종각을 신 교회당 앞으로 옮겨야 하는 데 장로님이 교인들이 많은 때에 옮기자고 했더니 기도를 많이 하는 여전도사님이 한 분이 주일날 종각을 옮기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교인들이 두 파로 나누어 옳으니 그르니 다투게 되었습니다. 잘못하면 장로님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여전도사님이 쫓겨 가게 생겼습니다. 보다 못해서 목사 된 지 얼마 안 된 입장이지만, 제가 나서서 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장로님에게 물어보기를 “주일날 종각을 옮기는 일에 신앙양심상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까?:라고 하자, 장로님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곱만치도 가책이 없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여전도사님을 조용히 불러다 설득했습니다. “전도사님, 저는 전도사님의 너무나 순수한 신앙에 감동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마, 전도사님은 신앙양심상 주일날 종각 탑을 옮기는 것에 너무나 마음이 걸릴 줄 압니다. 그러나 장로님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가책이 없다고 하십니다. 장로님이 직장에 다니는 분이고 또 주일날 남자들이 가장 많기 때문에 주일날 옮기자는 것이 장로님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자는 것이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주일날 종각 옮기는 문제로 교인들이 둘로 나누어 시험에 들게 되는 것이나 평소 사람들이 별로 없는 사이에 그 종각 탑을 옮기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교회가 큰 어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더니, 여전도사님이 “성경을 잘 아시는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 의견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해서 주일날 온 교인들이 동원해서 무사히 그 종각 탑을 옮긴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수주일의 기준을 주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과 가장 많이 부딪힌 것은 안식일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예수님이 번번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비난하거나 말거나 자기 할 도리를 다 하셨는데 그 기준은 하나님을 위하는 날로 삼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병자도 고치고 여행도 하시고 봉사와 선행을 하셨습니다. 요5장에서 보면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묵은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셨습니까? 담대히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주일날 버스를 타던, 혹은 부득이 해서 돈을 쓰던, 음식을 사먹던 각자 신앙의 양심에 따라 ‘이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아닌가?’로 판단하면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날로 지키십시오.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6일을 크게 은혜와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나 학생들은 제일 큰 어려운 문제가 주일에 공부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월요일이 시험이 있을 때는 더 큰 혼란에 빠집니다. 그럴지라도 6일은 열심히 공부하고 주일은 주님을 위해서 일하면서 나의 일들은 쉬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6일 동안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가도 말씀드린바 있지만, 홍정길 목사님이 쓴 「십계명 강해」에는 이영표라는 학생의 간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학생이 경복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일날은 절대 공부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명문고교에서는 매일 시험을 봅니다. 부모는 주일날 공부하지 않겠다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네가 일요일에 공부를 하지 않음으로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약속하기를 “두 달 동안 내가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는 것으로 인해서 성적이 떨어진다면 제가 교회 출석을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영표 학생은 성적이 전교에서 중간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 후 지난 후에는 10등으로 뛰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3이 되니까 자기 스스로가 주일날 공부를 해야 하느냐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주일날 교회에 오면 아예 집에 안 들어갔다고 합니다. 집에 가면 책이 손에 잡힐까 해서 그랬습니다. 주일날 공부를 안 하니까, 월요일 시험성적이 15등으로 떨어집니다. 화요일에는 10등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수, 목, 금 토 나흘 동안에는 1등으로 올라갔고 결국 졸업할 때는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서울 의대에 들어갔는데 간증하기를 “공부라는 것은 많은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주일 하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때 마음이 산란할 때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주일에 교회에 가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은데 마음이 산란해서 공부를 안 됩니다.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하면 하나님이 강하게 붙들어 주심으로 그렇게 집중이 잘 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주일은 온전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날로 삼으십시오. 주일은 영육 간에 안식하는 날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주일은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날로 드릴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6일을 은헤와 복으로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자
신 5:15 / 최승윤 목사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설교입니다. 신명기의 키워드는 "기억하라" 입니다. 신명기 안에 "기억하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구절을 살펴보면 재미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명령, 교훈을 말할 때 먼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4:18절 이하에 보면 추수를 할 때 한 단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고아나 과부가 그것을 가져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라. 포도나 감람나무의 실과를 거둘 때도 남아 있는 것을 다시 가서 말끔히 거두지 말고 남겨두어서 과부와 고아들이 거둘 수 있도록 해라. 이 명령을 하면서 모세는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을 하지 말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적당하게 남겨두어라 해도 될텐데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강조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12절)는 계명,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지를 출애굽 사건을 근거로 해서 계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5절)
여러분, 모세가 왜 그렇게 했을까요?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지 말아라”라는 식일까요?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다음에 살아야 할 모든 삶은 출애굽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돕는 것이 단지 좋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믿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단지 좋은 일이라면 할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계명으로 주셨다면 그것은 구원얻은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구원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가셔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영원히 종살이를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종살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가 없는 삶입니다. 자유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된 노역을 해야만 합니다. 쉬고 싶을 때 쉬고,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동물과 같은 삶입니다. 먹여주는 것도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루 이틀 종살이 한 것이 아니라 400년 혹은 430년 동안을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 정도면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은 전혀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종살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끊임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모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노력을 했으니까요. 그러나 400년 동안 노력했지만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느 누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400년 동안 종살이를 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 머리 속에는 자기 스스로 종이라고 규정하는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을 것입니다. 400년 동안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자유를 얻어야겠다는 생각조차 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두 번 해보다가 어려우면 포기합니다.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길어야 한 삼 년, 혹은 오 년 정도 하나요? 실패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절망의 깊이는 점점 깊어집니다. 결국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우리와 그들이 다르지 않습니다.
자유를 위한 구원의 소망이 완전히 없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냥 구원해 내신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말씀 한 마디로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을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려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똑히 보도록 하셨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애굽, 어떤 나라도 대적할 수 없을 것같은 초강대국 애굽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10가지 재앙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천하를 지배하고 있었던 바로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을 자신들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애굽과 바로를 무력하게 만든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홍해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실패의 근본 원인은 바로 망각, 잊어버림에 있었습니다.
배은망덕이라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이요,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행한 아름답고 선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감사도 없고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지배를 합니다. 그런 배은망덕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사사기 2:10절) 사사기의 저자는 사사기의 어두운 역사의 원인을 한 마디로 그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호세아 13:4절-6절)
망각, 잊어버림은 모든 실패의 근본 원인입니다. 미래를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일들을 해결하고 극복해 나가는 지혜와 힘도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크고 놀라운 일을 기억해 낼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대해서 갖는 확신은 막연한 기대나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데서 나오는 확신과 담대함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으로 바라고, 상상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과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볼 때 가질 수 있는 분명한 확신,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과거를 기억해 내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면서 왜 출애굽 사건을 등장시키고 있습니까?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단지 일을 하지 않는 날입니까?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노는 날이 안식일의 핵심입니까?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기억해 내야만 합니까? 자신들이 종으로 살았던 애굽에서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이었는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애굽의 압제와 억압 아래에서 얼마나 부자유하게 살았던가? 그런 생활이 얼마나 사람을 동물로 만들고, 기계로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었는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런 비인간적이고 비참하게 살았던 삶을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구원해 내셨다는 사실, 구원해 내셔서 지금의 자유를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안식일마다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6일 동안 일하는 사람과 7일 동안 일하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결과는 단순하게 비교해 볼 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농경이나 유목을 하는 노동 집약적인 사회에서는 그것이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상황이 급박하면 급박할수록 하루를 일하지 않고 논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안됩니다. 하루에 4000불 정도 매상이 나는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4000불을 포기하고 가게를 문닫고 하루를 쉴 수 있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4000불이 아니라 10000불이라고 해봅시다. 그것을 포기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쉰다는 것은 단지 4000불을 포기했다는 것뿐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이 내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입니다. 4000불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4000불이 없어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실 것이요, 그 사실을 믿을 때 하루를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4000불을 포기하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4000불이 있으면 그 4000불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지만 그 4000불은 대개의 경우 욕심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국 내 삶의 안전보장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의 눈에 고아아 과부의 어려움이 눈이 들어오겠습니까? 눈에는 들어오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묵살하겠지요.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은 있지만 내가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머니를 열어서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짓눌러버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을 잊지말고 기억하라고 모세가 신신당부 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잊지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을 잊어버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동물처럼 되고, 기계처럼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물처럼 되고, 기계처럼 된다는 것은 자유도 모르고, 참된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종살이라는 것은 육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것도 있고, 심령적인 것도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고 밤낮 먹고 사는 문제, 돈 문제에만 신경을 쓰고 산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평안도 없고, 안식도 없습니다. 단지 돈 버는 기계요, 돈 버는 기계 노릇을 하면서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기만의 만족을 누리면서 사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챨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쿠르지 영감처럼 텅빈 큰 집에서 혼자 쓸쓸하게 사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과의 소통도 모르고, 자기 집 밖에서 노는 가난한 아이들의 즐겁게 노는 모습도 그는 모르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금접시에 좋은 음식을 먹고 산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삶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을 매일 매순간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것과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 자신이 살았던 삶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삶이었는지, 죄인으로 살았던 삶이 얼마나 탐욕적이었는지 모른다면 거기에 어떻게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 얼마나 교만했으며,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는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어떻게 감격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출발은 바로 죄인의 상태를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시절, 얼마나 무지하게 살았는가? 얼마나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는가? 주위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고,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를 쓰면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 얼마나 나를 허망하게 만들었는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복인가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없고, 찬양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죄인이었던 상태의 비참함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은혜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요, 모르기 때문에 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라는 것을 맛보아 알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과거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다면 신앙생활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요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있으면 자랑하고, 없으면 분노하고,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먼저 자기가 의지할 것을 찾아나섭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쉽게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모든 가르침이 억압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마음에는 용서도 없고, 용납도 없습니다. 있다면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는 모든 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내게 유익이냐 손해냐를 따지게 될 것입니다. 이익이 있으면 움직이고, 이익이 없으면 노력하지 않습니다. 노력하고 애를 쓰는 것은 단지 내게 유익함이 있을 때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익과 계산으로 따지면 손해보는 장사입니다. 십자가는 철저하게 인간의 욕망과 본성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래서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거부하며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순간 부활의 영광 또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지금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현재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우리들이 그 사건을 날마다 고백하고 감사하고 선포할 때 현재 사건으로 우리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건을 주일마다 매 순간마다 기억해 낼 때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안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과거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서 지금, 바로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우리를 모든 억압에서 자유케 할 것이요,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고, 이기심 가득한 우리들의 본성을 거부하며 살게 만들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참다운 인간의 심성으로 우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날마다 새롭게 깨닫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날마다 기억해 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망각하기 쉬운 존재들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어버려야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믿음은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도 모르고, 단지 제도와 형식에만 익숙한 그러나 아무런 힘도 없는 그런 신앙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아침마다, 매순간마다 의식적으로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고백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아 성령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우리 입에서 찬양이 끊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복음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과 깨달음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힘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여러분 안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감사가 넘치고, 담대함과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믿음의 진보와 성장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실패의 원인이 망각에 있었다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바로 지금, 이곳에서 기억해 낼 때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소중하고 값진 은혜가 날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차곡차곡 쌓여져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