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는 고려시대 공양왕의 묘. 1995년 9월 18일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모두 4기의 무덤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의 무덤이고 2기는 왕자의 무덤, 나머지 1기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 전한다. 능의 규모는 지름 13m 정도이며, 능 앞에는 길이 107cm, 너비 63cm의 상석 1개가 있다.
공양왕은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폐위되었고, 태조 3년(1394)에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삼척으로 간 뒤 교살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도 공양왕릉이 있는데, 이처럼 두 곳이 거론되는 이유는 공양왕의 재위 시기가 조선 건국과 맞물려 있어 문헌이 빈약하므로 정확한 고증이 어려운 까닭이다.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와 1855년(철종 6) 김구혁(金九赫)이 쓴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이곳이 공양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척 궁촌(宮村)에서는 3년마다 어룡제(漁龍祭)를 지내는데, 그에 앞서 반드시 공양왕릉 앞에서 먼저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다.
공양왕(恭讓王)
제34대 고려 국왕(고려의 마지막 국왕)
재위 1389년 12월 10일 ~ 1392년 8월 8일 (양력)
전임 창왕
휘 왕요(王瑤)
이칭 간성왕(杆城王)
별호 정창군(定昌君), 공양군(恭讓君)
시호 공양(恭讓)
신상정보
출생일 1345년 3월 9일 (양력)
사망일 1394년 5월 17일(49세) (양력)
사망지 : 조선 강원도 삼척현
부친 : 정원부원군 왕균
모친 : 국대비 왕씨
배우자 : 순비 노씨
자녀 : 2남 3녀 [세자 석(奭), 차남 우(瑀), 숙녕궁주, 정신궁주, 경화궁주]
능묘
고양 공양왕릉(고릉)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6
삼척 공양왕릉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번지
공양왕(恭讓王, 1345년 3월 9일 (음력 2월 5일) ~ 1394년 5월 17일 (음력 4월 17일), 재위: 1389년 (음력 11월 15일) ~ 1392년 (음력 7월 12일))은 고려의 제34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본관은 개성, 성은 왕(王)이고 휘는 요(瑤)이며, 즉위전 작호는 정창군(定昌君),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이다. 폐위된 이후 공양군(恭讓君)으로 칭해졌으며, 조선 태종이 왕으로 추증하면서 공양왕(恭讓王)으로 일컬어졌다.
공양왕은 고려의 제20대 국왕인 신종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 왕균과 충렬왕의 서장자인 강양공 왕자(王滋)의 손녀인 국대비 왕씨의 차남이다.
정원부원군 균(鈞)과 그 부인 국대비 왕씨의 둘째 아들로서, 그는 부계와 모계 모두 고려의 왕실이었으며, 외가로는 충렬왕의 4대손에 해당된다. 왕후는 교하(交河) 사람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노진의 여식인 순비 노씨이다. 어려서 정창군(定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형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여 사돈인 관계로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써 왕위 계승자로 천거되었다.
친명파 신진 사대부인 이성계와 정몽주 등은 1389년(왕창 1년)에 왕창을 폐위시킨 직후에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온건 개혁파였던 정몽주 등의 신하들은 공양왕을 보필하며 고려를 재건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정도전 등은 역성 혁명을 꾀하고 있었고 정몽주가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李芳遠, 훗날의 조선 태종)에게 길거리에서 난자당해 죽자(친구 장례식 조문하고 바로 문 나오자마자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 이후 온건 개혁파 신료들의 응집력이 약화되어 조정은 와해되었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 등은 공양왕을 폐하고 왕위가 양위되어, 고려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후 7월 11일에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에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돼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났다.
폐위 후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에 머무르다가 1394년(태조 3년) 3월 14일에 강원도 삼척 궁촌리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4월 17일 궁촌리 마을입구 고갯길에 있는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세자 왕석과 함께 시해되었다.
함씨 집안 야사에는 공양왕의 최후가 좀더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1394년 3월에 함부열은 삼척으로 두 번째 유배되는 간성왕의 뒤를 따랐다.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간성왕을 시해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다. 역사 기록에는 중추부사 정남진이 내려왔다는데, 함씨 집안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함부열의 형 형조의랑 함부림도 동행했다고 한다. 함부열은 마주친 형에게 간청하여 다른 왕족의 시신만 거두게 하고 간성왕을 간성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정남진과 함부림은 도저히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간성으로 자객을 보내 공양왕을 시해했다. 그게 공양왕 삼척 사망일인 4월 17일에서 8일이 더 지난, 4월25일의 일이라는 것이다. 살해된 간성왕은 금수리 수타사에서 가까운 고성산 기슭에 묻혔다고 한다. 매장을 주도한 사람은 함부열이다. 함부열은 유언으로 간성왕 밑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 지내기 전에 왕 무덤에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1416년 태종은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
능묘
공양왕의 능으로 전하는 묘소는 두 개가 있다. 공양왕의 능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강원도 기념물 제71호)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사적 제191호)[8] 두 곳에 있다. 삼척의 공양왕릉은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에 위치한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 이장한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順妃 盧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의 즉위 3년만인 1394년에 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다.
공양왕릉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