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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519_목요일_06:00pm
주죄 / 원앤제이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원앤제이 갤러리ONE AND J. GALLERY서울 종로구 가회동 130-1번지Tel. +82.2.745.1644www.oneandj.com
천녀유혼● 사진이 부여하는 기만의 미몽에서 내가 깨어난 것은 다분히 니키리(Nikki Lee)의 히스패닉 프로젝트에서 기인한다. 1999년 초여름, 엔와이유(NYU) 대학원을 갓 졸업한 니키리가 히스패닉 프로젝트를 마치고, 그 결과물을 일반 스냅 사진처럼 보여줬는데, 나는 그 사진 속의 라티노 여성이 니키리라는 것을 전혀 상상 조차 못했다. 그냥 히스패닉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그들의 삶의 단면을 찍어 온 그저 그런 사진으로 보고 재미난 사진이라고 심드렁하게 말했었다. 니키리와 그때 그녀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주었던 친구가 매우 기뻐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내가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와 멀티컬처럴리즘(multiculturalism)에 "열공"하고 있던 나로서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철학이나 사회과학적 이론으로 힘겹게 배우고 있던 세계가 눈 앞에 산뜻한 비주얼로 딱 나타났으니, 내가 얼마나 놀라고 흥분했겠는가. 아티스트가 찍는 사진이 아니라 찍히는 사진을 보면서 사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바탕이었던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성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던 것이다. 신디 셔만(Cindy Sherman)도 낸 골딘(Nan Goldin)도, 쳉광치(Tseng Kwong Chi)도 에이드리언 파이퍼(Adrian Piper)도 니키리를 경유해서 이해하게 되었고, 사진이 왜 예술이 되는지도 그때부터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 그 후 니키리는 그녀가 전속된 레슬리 통크나우 갤러리(Leslie Tonkonow Artworks + Projects)에서 이 프로젝트 시리즈로 개인전을 열면서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뉴욕 미술계에 데뷔를 하였다. 그 이후 "파트(Part)" 시리즈와 "일명 니키리(A.K.A. Nikki S. Lee)"라는 가짜 다큐멘터리 디지털 영화를 만들어서 사진과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속성을 전복 시키면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모습들을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다. 뉴욕 미술계에서 확고하게 입지를 굳힌 니키리는 시케마 젠킨스 갤러리(Sikkema Jenkins & Co.) 로 이적하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새로운 작품시리즈인 "레어어스(Layers)"를 발표하였다. 이전의 작품들이 사진의 형식으로 구성은 되었지만, 그 예술적인 아우라가 사진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찍히는 방식, 즉 니키리가 사진에 찍힐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 퍼포먼스에 놓여 있는데 반해, 레이어스 시리즈에서는 무명의 초상화가들이 그린 그녀의 초상화 세 점을 겹쳐 놓으면서 사진을 찍어서 포개진 초상화의 차이를 예술적 효과로서 제시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에서부터 레이어스에 이르기까지 지난 12년간 니키리가 보여준 예술적 궤적에는 아이덴티티의 복잡 미묘함과 그 가상성의 문제가 언제나 핵심에 놓여있었다. 프로젝트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감수성과 문제 의식이 이후 작업에도 지속적으로 깔려있는 것이다. 프로젝트 시리즈에서 니키리는 펑크, 레즈비언, 라티노, 노인, 화이트 트레쉬, 스트립 댄서, 여피 등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사람으로 변신하여 나타난다. 혼자가 아니라 그 집단들의 일원으로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 사진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선 찍고 싶은 사회 하위 집단을 정한 후, 그 집단의 일원처럼 자신의 외모뿐만 아니라 몸짓이나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컨트롤하여서 포즈를 잡고, 자신이 찍히는 지점을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는 전문 포토그래퍼가 아닌 비전문가인 친구나 지나던 행인에게 부탁을 하여 사진을 찍는다. 사진기도 관광객들이 주로 들고 다니는 일명 "똑딱이"라고 하는 단순한 카메라로 찍게 하여 그 사진을 찍은 날짜까지 프린트가 되게 하고, 그 찍힌 결과도 역시 아마추어가 찍은 사진답게 구성이 허술하게 나온다. ● 사회 내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실제적인 시간과 장소가 구체적이며 그 정확한 순간이 증거로 찍혀 있는 사진,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들의 생활의 단면이나 특정한 사건이나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평범한 사진으로 보이는 "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다"는 현장성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소위 "인증샷" 이외의 다른 목적이 배제된, 즉 사진을 찍는 사람의 구체적 의도는 배제되고 사진이 가진 기계적 속성에서 비롯되는 비결정성과 찍히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되는 불확정성이 겹쳐져 사진은 더욱 날것처럼, 아마추어적인 것처럼, 비예술적인 것처럼 보인다. 낸 골딘이나 래리 클락(Larry Clark)처럼 주제가 날 것인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보이지 않게끔 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진짜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하려는 의미에서의 날 것인 것이다. 아마도 내가 처음 그 사진들을 보고 속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서 나와 이야기 하고 함께 커피도 마시는 니키리와 함께 그 사진을 다시 보았을 때, 나는 매우 팽팽한 긴장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매우 즉흥적인 스냅 사진의 외양 속에 엄밀하게 연출된 구성으로 인하여 의미는 아이러니로 중첩되어 깔려 있고, 그 속에서 과잉으로 드러나는 현실감은 오히려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여피(yuppie) 프로젝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은 문화적으로 하위문화 집단, 사회적으로는 비주류 집단들이다. 뉴요커로 표상되는 이미지로부터 배제되거나, 희화화되거나 문제시 되는 사림들인 것이다. 기껏해야 섹스 앤 더 시티나 프렌즈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들러리 혹은 배경이 되는 정도의 사회 구성원들이다. 그런 하위 집단에 매우 이질적인 외부인인 니키리가 꼬리가 일곱 개나 달린 여우처럼 둔갑을 하여 그 구성원들의 일상 속에서 천연덕스럽고 생생하게 포즈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의 개입이 주는 긴장으로 인해 사진 속의 사람들은 돌연 생기를 띠면서 생생하게 빛을 발하게 되고, 급기야 이 배제된 사회 집단 자체가 스스로 사회일반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당당한 세계로 제시되는 것이다. 니키리의 개입으로 인해 메인 컬처와 서브 컬처가, 주류 사회와 비주류사회가 등치 되고, 멀티컬처럴한 사회가 다원적 세계로 변해버린 것이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피 프로젝트는 다른 프로젝트와 반대의 지점에서 스스로를 일반 사회로부터 고립 시켜서 독립한, 실제로 뉴욕을 표상하는 사회 집단으로서 백인 여피가 하나의 서브 컬처고 비주류 사회라는 것을 니키리의 개입을 통해 드러낸다. 스스로 자신들을 특권화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지배 집단 속에서 니키리가 제아무리 완벽하게 변신을 해도, 흑인이나 라티노로 변신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아시아 여성으로서 그녀의 인종적 정체성은 명확하게 부각되고, 그와 같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그녀의 절망적 변신 때문에 백인 여피 집단이 얼마나 배타적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면서 백인 사회를 지탱하는 백인성(whiteness)이 하나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즉 메인 컬처나 주류 사회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배타적인 사회적 구성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주류/비주류 간의 구분 자체를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중첩되고 지적으로 엄밀한 그녀의 작품이 매우 통쾌한 감각을 제공하는 핵심이 바로 이 지점인 것이다. ● 프로젝트 시리즈에 비해서 파트 시리즈는 내용에서는 더욱 내밀하고 형식에서는 매우 파격적이다. 작품의 대상이 사회 집단에서 남과 여의 관계로 이동하였고, 사진의 일부를 칼로 잘라내는 파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남자들과 일상적으로 찍은 사진에서 남자의 손이나 몸의 일정 부분을 제외하고 칼로 남자가 찍힌 부분을 잘라내어 버린 것이다. 흔히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이는 치정 살인 사건을 보도할 때 개제하는 "단란한 한 때"를 보여주는 것 같은 사진에서 남자는 잘려나가고, 관객들은 그 제거된 남자의 이미지를 니키리의 외모나 표정, 제스처, 나아가 그 사진이 찍힌 현장을 바탕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얼핏 보면 변심하거나 헤어진 남자 친구를 저주하며 잘라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주도 면밀하게 남자를 잘라내면서 그 남자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키고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잘려나간 남자를 사진에 남아있는 여자와 그 배경을 바탕으로 추적하고, 그 남자의 이미지를 복원하는 가운데 그 남녀의 관계를 구체적 내용으로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려진 사진은 어떤 관계이든 시간 속에서 끝이 있다는 냉엄한 사실을 감상적으로 환기시킨다. 프로젝트 시리즈와 비교하면 훨씬 노골적인 지적 쾌감을 주면서 그 쾌감을 감상적으로 몰고 간다. 다른 세계로 뛰어 드는 모험성과 그에 수반되는 활력이 보다 내면적이고 감상적인 지성으로 대체된 결과인 것이다.
파트 시리즈에서 보여준 니키리의 내밀하고 지적인 퍼포먼스를 미루어 볼 때, 그 다음 프로젝트를 영화로 진행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인 것이다. 현전(presence)을 부재(absence)를 통해 나타내고, 아이덴티티를 집단이나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카메라를 미디움으로 수행하던 그녀가 보다 역동적인 매체인 영화를 가지고 천착한 대상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영화, "일명 니키리"에서 그녀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관객들에게 누가 진짜 니키리인지 맞추어 보라는 도발을 감행한다. 피상적이고 감각적이며 유행에 민감하고 노는 것 좋아하는 외향적 니키리를 지적이고 사색적이며 성숙한 니키리가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가짜 다큐멘터리를 "진짜" 니키리가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영상 작업이다. 일종의 "가짜 아티스트에 대한 진짜 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진짜 아티스트에 대한 가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면서 영화 속의 두 니키리가 다 진짜 니키리가 아니면서 동시에 둘 다 니키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손오공의 머리털과 같은 두 개의 분신 니키리들을 내려다 보는 초월적 니키리가 심각하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니콜라이 하트만(Nicolai Hartmann)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장난과 동시에 진지함이고, 모든 것이 마음 밑바닥부터 숨김없이 드러나 있음과 동시에 깊숙이 숨겨지지 않으면 안되는" 아이러니로 니키리는 일체의 피한정성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자신의 아이덴티티, 예술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은밀한 방식으로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경향성은 레이얼즈 시리즈에서 더 강화된다. 세계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 도시의 거리에서 암약하고 있는 초상화가 세 명에게 각자 자신의 초상화를 빛이 투과되는 종이 위에 그리게 한 다음, 그 세 장의 초상화를 라이팅 박스 위에 겹쳐서 올려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 결과 각기 다른 초상화가가 그린 니키리 초상의 윤곽선들이 겹쳐지면서 본래 얼굴의 윤곽이 허물어지고 다양한 형상의 니키리가 겹쳐서 드러난다. 게다가 뉴욕에서 살고 있던 니키리의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파리에서 그려진 초상화에는 파리 여성처럼, 마드리드의 초상화에서는 스페인 여성처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초상화에서는 아르헨티나 여성의 분위기로 묻어나오면서 각 도시의 지역성이 뉴욕에 살고 있는 니키리의 지역성을 대체하면서 니키리는 의도하지 않게 초상화가들이 살고 있는 세계 속에 흡수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세계화가 전지구화로 되고 온라인망이 온 몸의 신경망 마냥 촘촘하게 연결된 후기 산업사회 속에서 니키리는 빛의 속도로 가는 세계 각 도시마다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식으로 말하자면 "동시편재적 부재"를 드러내는 셈인데, 이런 부재의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고뇌감을 느끼게 하여 순간의 시간성에 대한 각성으로 이끌어 간다. 그 속도 덕분에 사물을 느끼고 체험하는 속에서 발생하는 감각이 마비되면서 추상화되고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사물을 느끼고 체험하는 감각과 접속되면서 인격의 본질 자체가 요동치는 것이다. ● 요컨대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아이덴티티로서 형성되고 확보되기가 버거운 것이다. 이렇게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니키리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탐구가 레이얼스로 일단락되면서 니키리의 작품 세계의 전모를 이해할 기회가 생겨난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던 그녀는 사진이 가지는 리얼리티에 대한 믿음이 해체되고, 그 사실성 자체가 사진 속에서 은폐되어 있다는 자각 속에서 부재를 증명하는 알리바이로서 사진이라는 미디움을 능숙하게 사용해 왔다. 즉 니키리는 사진을 버림으로써 사진이 가지는 본질을 스스로의 퍼포먼스를 통해 구현해 온 것이다. 거기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재로서의 존재를 그녀는 사진을 찍히는 자리에서 역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빈틈이 없도록 철저하게 리얼리티를 부여한듯한 외관을 통해 자기 스스로가 허구가 되어서 사진이 가진 외관상의 진실성을 그 성격에 반대되게 이용한 것이다. 자의식적으로 구성되고 조직되고 허구화된 방식으로 니키리는 어디에나 편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섹시한 여자귀신이 사방세계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 신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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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니키 리는 이제 한국에서 살고 있다는데, 다음 작업이 궁금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