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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2451
“신선이 되고자 한 사람과 100일을 함께했다”
전쟁과 중공군 참전을 예견한 노인은 달리던 열차를 염력으로 세웠다. 포탄 세례로 천지가 진동한 한반도에 신선과 도깨비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던 걸까?
1953년의 7월 27일은 6·25 한국전쟁에 마침표를 찍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이다. 한반도 유사 이래 경험하지 못했던 3년여 동안의 대참사를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남다르게 기억한다. 1950년 전쟁 발발 당시 그는 까까머리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다. 전란을 피해 숨어든 지리산 자락에서 ‘신선이 되고자 했던 도사’와 그를 둘러싼 신비한 이적(異跡)을 경험하게 된다.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 기억은 생생하기만 하다.
옛날엔 신선(神仙)이 현실에 존재했다고 보나?
“그건 모를 일이다. 없었다고는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있었다고 할 수도 없다. 꼭 있었다고 하려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없고….”
그런데도 신선이 실존했다는 얘기를 들려준 사람의 말을 믿는가?
“내게 그 말을 해준 사람을 믿는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신선이 되면 영원히 사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경지인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이 쏟아지던 7월 10일 낮 서울 남산의 서울 클럽에서 만난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75)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이 잘 되지 않는 세계의 존재 가능성에 주목했다. 라 교수는 “우주에는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면서 신선이나 도깨비 같은 세계도 완전히 ‘아니다(No)’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학총장을 지낸 사회과학 분야의 석학(영국 케임브리지대 정치학 박사 출신)인 그가 ‘신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의 실존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기자는 다시 물었다.
신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는 과학적으로 분석되거나 입증되지 않는데도 그런가?
“서양의 과학은 사물을 보는 방법이다. 분석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고 해서 그것만이 세상을 보는 방법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과학자들도 자기 방식으로 나온 결론을 현실이라고 얘기는 하지만 그걸 절대적 진리라거나 세상의 전부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월적, 초자연적 존재가 언젠가는 증명될 수 있다고 문을 열어두는 것인가?
“과학은 일종의 가설이고 그 가설이 반증(反證)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옳다고 여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가설은 자주 뒤집힌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과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해, 갈릴레이는 또 아이작 뉴튼에 의해, 그 뉴튼의 과학은 아인슈타인의 과학에 의해 수정되거나 변경됐다. 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적 결론이란 아직 반증되지 않은 가설’이라고도 했다.”
과학적 결론은 반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
라 교수와의 문답은 그가 공리주의의 대가 존 스튜어트 밀을 인용했을 때 거의 막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근대화의 진전에 따르는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기적의 사례가 점차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밀은 ‘진정한 의미의 기적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기적으로 칭했던 일들도 실은 우리가 몰랐을 뿐 자연과학의 범주에 속했던 것일 수 있다는 게 밀의 생각이었다. 자연의 법칙을 알면 알수록 예전에 기적이나 불가사의하던 일들도 사람이 법칙을 이용해 해낸다.”
한마디로 자연과학은 아직 미완(未完)이기에 섣불리 지식의 절대성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게 라 교수의 논지였다.
이런 주장은 학문의 결과물만은 아니다. 어릴 적 유사한 체험이 그의 사고체계를 더욱 견고하게 다듬었고 믿음에 대한 강도를 더했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서울의 한 초등학교 4학년생이던 라종일은 가족과 함께 경남 하동 지리산 자락의 한 마을에서 서너 달 동안 피란살이를 했다. 어린 라종일은 이곳에서 이후 인식체계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도인(道人)과의 만남이다. 훗날 라 교수가 “신선이 되고자 했던 사람과 100일을 지냈다”고 술회하는 그 사람이다. 그 도인을 일러 “그는 현자였다. 이사·결혼 택일은 물론이고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일부터 심지어 신통력을 요하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는 60년도 더 된 얘기를 단지 기억에만 담아두지 않았다. 세인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지만 2010년에 펴낸 <낙동강>이란 책에도 남겼다. 전쟁의 비애와 참상은 기본이고 전쟁을 보는 주민들의 시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에 더해 도인이 철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키고자 달리는 기차를 세웠다든가 인간을 괴롭히던 도깨비들을 혼내며 꾸짖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되살렸다. 라 교수는 “단기간에 급변한 한국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은 변화에 적응하기도 벅찬 탓에 과거는 빨리 잊어버리게 됐다”면서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옛날 얘기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피란 시절 지리산 골짜기에서 들은 얘기들을 필사적으로 기록하려 든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들렸다.
라 교수는 저서에서 자신을 유달리 아끼고 정을 나눠준 도인에 대한 기억부터 풀어놓았다. “노인은 마을의 현자였고, 사람들은 그를 ‘도사님’이라고 불렀다. 누구나 무슨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곤 하였다. 병이 들어 아플 때나, 부모의 묏자리를 찾을 때에 혼사나 이사에 적합한 날을 받아야 할 때라든가. 말하자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노인을 찾아갔다. 노인은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간단한 처방전을 주었다.”
<낙동강>의 압권은 신선이 되는 과정
여기서 그쳤다면 이 도사라는 분은 어느 마을에나 있게 마련인 시골 마을의 정신적 지주나 초보적 의술을 행하는 학식이 높은 양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이상이었다. 라 교수는 마치 자신이 보기나 한 듯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창 때 노인은 달리는 기차를 세울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현장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어느 날 노인은 한 곳을 바라보다가 급히 소매 속에서 필기구를 챙기더니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쓰고 주문을 왼 다음 그 쪽지를 허공을 향해 날려 내보내는 것이었다. 쪽지가 날아가는 방향에 철로가 있었는데 전속력으로 달리던 기차가 귀청이 떠나가는 소리를 내면서 급정거를 하는 것 아닌가. (…) 노인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조차 애써 피하려 하거나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부인하기도 하였다. 딱 한 번 그 일에 관하여 직접 설명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는 특별한 상황이었다. 기차가 바로 한 모퉁이만 돌았더라면 철길에서 조약돌을 주우며 놀고 있던 아이들을 치었을 것이다.”
<낙동강>의 압권은 신선이 되는 과정을 담은 내용이다. 이 도인은 당시 어린 라종일에게 자신이 한때 신선이 되려다가 실패한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라 교수는 <낙동강>에서 이렇게 전했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에 한 칸짜리 방을 마련하고 내부를 모두 검정색으로 칠해서 햇볕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수련자가 검정색 실을 공중에 대각선으로 걸면 일단 준비가 끝난다. 수련자는 적어도 100일간을 오랜 학습으로 익힌 주문을 외우거나 자신과 우주에 관한 깊은 명상만을 하면서 지내야 한다. (…) 한동안 정진을 하노라면 방안에 걸쳐 있는 검정색 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선이 되려는 수련자는 몸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영양분을 섭취할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주로 말린 솔잎 가루 같은 생식으로 연명한다. 주문의 암송과 명상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여 몸의 기를 한데 모으는 훈련을 한다. 어둠 속에서 검은 실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가 고비의 시작이다.
“100일 정도가 지나면 수련의 진도에 따라서 방 한쪽 구석에 작은 점 같은 빛이 나타난다. 수련자는 여기에 어떤 관심도 보여서는 안 된다. 날이 갈수록 빛은 점점 수련자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렇지만 수련자는 그 빛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수련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 사이에 빛은 천천히 다가와서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수련자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신선이 탄생하는 것이다.”
도인은 마지막 순간에 좌절한다. 뜻하지 않은 훼방꾼이 나타난 것이다. 라 교수는 <낙동강>에서 결말을 이렇게 맺었다. “그의 몸 가까이로 천천히 다가온 빛이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거의 입술에 닿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는 그것이 오랜 수련의 마지막 단계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때 어두운 적막을 뚫고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그가 눈을 뜬 것이 결정적 실수였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움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결국 인간에 대한 연민을 초탈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해 실패했다는 귀결이다.
산골 오지에서 미군과 중공군의 개입을 예언
그가 책에서 설명한 신선은 이런 존재다. “신선은 인간과의 접촉을 매우 꺼리며 그들 사이에서도 자리를 함께하는 일이 드물다. 신선은 혼자 있어도 스스로 충족하고 즐겁지만 슬픔이건 행복이건 어떤 격렬한 감정에는 지배받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연민이나 동정 등으로 마음을 상하는 일도 없다. 인간 세상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큰 재난이 덮쳐서 사람들이 크게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신선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
라 교수에게 도인은 그 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인간계로 돌아온 기인이었다. 라 교수는 “신선은 자연과 함께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 바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우리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우리가 인간 세상을 떠나 깊은 숲이나 산속에 갔을 때 그는 바로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다”고 적었다.
같은 맥락에서 전래동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도깨비를 언급한다. “도깨비는 귀신이 아니다.” 라 교수는 이렇게 도깨비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도깨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한 끝이고 우리와 마찬가지의 여러 원소로 되어 있느니. 단지 방식만이 다르지. 귀신과는 달리 도깨비는 세상에 특별한 사연이 없다.” 우리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한 끝이 자연의 다른 요소와 결합하면 도깨비가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도깨비를 만났다는 것은 자연의 장난에 속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하간 도깨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자연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즐겁게 지내다가 다시 자연의 일부로 스러지기도 한다.”
당시 라 교수의 가족은 노인을 좀처럼 미더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신에 빠진 사람이거나 돌팔이로 폄하하기도 했다. 어쨌든 “누구든 부정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고 라 교수는 기록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신문이나 방송이 통할 리 없던 산골 오지에서 노인은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전쟁이 한반도에서 터지리라 예견했다는 것이다. <낙동강>은 노인이 했다는 예언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백성들이 일찍이 경험한 일이 없는 무서운 싸움이 벌어진다. 그건 눈과 얼음의 추운 땅, 북쪽에서 시작하지만 온 천하가 모두 이 싸움판에 말려들 것이다. 일찍이 들어본 일조차 없는 먼 나라의 무서운 싸움꾼들이 모두 몰려온다는 말이다. (…) 하늘에서 불비가 쏟아진다. 산과 들이 불에 그슬리고 강이 불탄다. (…) 가족이 길바닥에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일가친척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서 서로 생사도 모른 채 살아갈 것이다.”
지금도 신선이 되려다 만 얘기를 믿느냐는 질문에 라 교수는 “믿는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도사라는 분이 상상력이 풍부해서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스타일은 아닐까? 라 교수는 이에 대해 “그는 과장하는 분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된다. 마을사람들에게서도 들은 얘기가 많다”고 덧붙였다.
기자가 라 교수를 만나던 7월 10일 아침 <중앙일보> 홈페이지에는 뇌과학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 이븐 알렉산더 박사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검색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한 이 기사에서 알렉산더 박사는 “신과 사후 세계는 있다”고 주장했다.
원래 알렉산더 박사는 ‘인간의 의식은 뇌의 작용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에 따라 영적 체험이나 신비주의적 사건을 ‘환상’으로 배격하던 철두철미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임사 체험(near-death experience)을 한 후 그의 사고체계는 180도 바뀐다. 2008년 11월 박테리아성 뇌막염으로 뇌의 기능이 정지된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회생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진흙으로 가득 찬 느낌의 암흑 상태에 한동안 머물다 금빛·은빛 빛줄기를 퍼뜨리며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둥근 물체의 틈을 통과해 빛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과 신의 조건 없는 사랑을 존재 전체로 경험했다”고 말한다. 이후 자신이 가진 과학·의학 지식을 동원해 임사체험에 대한 증명을 시도한 게 바로 2012년 출간된 <나는 천국을 보았다>였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은 목적 없는 화학반응으로 탄생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영적인 우주에 살고 있는 영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거짓된 물질주의 패러다임(물질만이 존재하며 뇌의 물질적 작용이 의식을 창조한다)을 거부하고 더 큰 영적인 풍요를 지닌 견해를 포용하라고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영적인 경험에 대한 실증 데이터가 많다. 과학의 진보는 원거리 투시나 텔레파시 등 보이지 않는 것들의 과학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간다.”
한국에는 왜 오컬티즘이 없을까?
라 교수는 알렉산더 박사와 같은 뇌과학자나 신경외과 전문의가 아니다. 그는 사회과학을 하는 교수다. 자연과학으로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는 전문가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주영·주미 대사,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국가정보원 차장 등 고위 공직을 두루 거쳤고 우석대 총장, 한양대 석좌교수를 지낸 등 석학이기도 하다.
‘신선’, ‘도깨비’ 운운하는 주장으로 명성에 흠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라 교수는 “전쟁 당시 내가 만난 사람들과 접한 얘기는 어린 시절 중요한 경험이자 삶의 일부”라고 굳이 부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내 얘기를 오컬티즘(occultism ·신비주의)이라고 해도 괜찮다”면서 “이런 얘기들이 그냥 사라져가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소회를 피력했다. “콜럼비아가 낳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집안 어른들에게서 들은 얘기를 모티브로 삼아 펴낸 <백 년 동안의 고독> 등에서 귀신 얘기를 다룬다. 한국에도 그런 스토리 콘텐트가 많은데 다 잃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 접한 일들을 글로 남기고자 했다. 논문을 써보라고? 그건 인류학자의 몫 아닌가. 나는 그럴 실력이 없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라 교수는 <낙동강>에 기록한 얘기를 한국 오컬티즘의 한 갈래로 남겨두고자 했다. 신비주의로 번역되는 오컬티즘은 한국에서는 그 명맥을 점차 잃어간다. 급속한 근대화와 압축성장 과정에서 전래되어온 얘기들이 사라지거나 망실되고 있음을 아쉬워했다. “70~80대 연배는 내가 한 얘기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있었던 얘기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자신과 자연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런 얘기들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
1950년 6월의 한국전쟁은 팔순을 앞둔 라 교수의 의식세계를 반 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규정하는 듯하다. 라 교수는 억울하게 죽어가면서도 할 말을 다 못했을 사람들에 우직하게 천착했다. 2013년에는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2016년에는 <장성택의 길-신정의 불온한 경계인>을 펴냈다. 라 교수는 이들 책을 통해 역사의 숨겨진 진실과 남북 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되짚었다. 더불어 강민철, 장성택 두 사람 모두 분단과 국가 폭력의 희생자라는 점에 주안점을 뒀다. 그는 <장성택의 길> 서문에서 “그가 처참한 방식으로 사형을 당해 시신이나 무덤조차 없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에 관한 글을 쓸 생각을 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라 교수는 나아가 “이국의 감옥에서 오랜 수형 생활 끝에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죽어 사라진 젊은이(강민철)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주목을 받으면서 처형돼 사라진 사람이든 간에 이야기로 라도 세상에 남아야 한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 어떤 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인식의 원형을 2010년 출간된 <낙동강>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라 교수는 도인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지는 법은 없느니라. 그 어떤 것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잠시 형상을 바꿀 뿐이니라. 시기가 오면 다른 형상으로 바꾸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바로 엊그제 수많은 생때같은 젊은 목숨이 이곳에서 헛되게 사라졌지만 이 세상에서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속에 절실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 채로 한 번도 그것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젊은 생명들이 있었을 것이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거라. 바람, 모래, 물, 공중에 나는 새들이 모두 불쌍한 젊은이들이 차마 내뱉지 못한 사연들을 담고 있지 않겠냐?”
그래서일까? 라 교수는 자신이 글 쓰는 이유를 무당의 역할에 비유했다. 그는 “죽은 사람이 다 못한 얘길 무당이 대신 해주듯 작가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전쟁 당시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외국인들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저서 <낙동강>은 영문으로 먼저 집필했다. 영문 제목은 ‘The Wizard of River Nakdong’이다. 그 시절 낙동강에는 신선이 살았다고 서양인들에게 외치고자 했던 것이다.
라 교수는 1980년대 미국의 한 영문 잡지에 ‘To be a human being’이라는 글을 기고했다고 한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열망’쯤으로 해석되는 이 글에서 라 교수는 한국의 전래 우화(寓話)에 나오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동물들의 얘기를 다뤘다. 라 교수는 “동물에서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한다는 건 역으로 겉은 사람일지라도 짐승 같은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하고자 했다”면서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기란 참 어렵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라고 집필 과정을 설명했다. 과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한국의 ‘옛날 이야기들’을 그 글에 소복이 담았다고 그는 전했다.
- 글 박성현 기자 (월간중앙 201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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