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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여자를 만나면 남자는 언제나 사랑을 꿈꾸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없다.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
위에 말은 ‘첫만남’만을 염두하고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비록 이성이긴 하지만 친구로 지내던 얘가 언제부턴가 갑작스레 달라져 보인다.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이 느낌은 친구에게선 느낄 수 없는 걸거다. 아마 이런걸 ‘매혹적으로 보인다’ 라고 하면 맞을려나?
‘매혹적이다’. 사전에서 이 뜻을 찾아 보니 ‘남의 마음을 사로잡아 호리는 힘이 있는. 또는 그런 것’ 이란다.
나는 이제 그 얘에게 사로 잡힌 것일까?
지금 여기는 센트럴시티, 서울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이다. 방금 지금쯤 여기에 도착했어야할 얘한테 문자가 날라왔다. 차가 막혀 40~5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훗~. 이런! 점심예약은 취소해야겠네.”
어제 큰마음 먹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그 얘와 식사를 할 땐 항상 내가 좋아하는 한식만 먹었기 때문이다. 말은 자기도 한식이 좋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 자기 생일에 설렁탕 먹자고 해도 웃으며 따라오던 여자는 이 얘가 처음이였다.
“그나저나 여기서 어떻게 기다려야되냐?”
인산인해(人山人海).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자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사람들은 내 머릿속에 한자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심각하게 많았다.
난 심각하면 잠이온다. 아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거나 밥을 먹고 나면 잠이 오는거니까,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고 봐야 옳다.
“저기서 점심먹을 곳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에휴~”
맥도날드 주문대에 6열 종대로 헤쳐 모여있는 인원이 약 100여명 정도, 오므토 토마토(omutotomato) 앞에 한 줄 서있는 인원이 약 50명, 저기 일본어로 써있는 우동집앞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인원이 약 20명, 그 옆 OutBack 앞은….
“헐~. 저기는 좀 들어가야 하나?”
분수대를 끼고 있는 터미널 광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선 동태가 확인 안되자 식당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바로 ‘국민카드 10% DC’라는 팻킷이 보이고, 그 넘어로 예약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엑!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되요? 말도 안되!”
“네, 손님. 지금 예약 해도 아무리 빨라야, 40~50분후에나 식사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앞에 연인으로 보이는 두사람이 뭐라 궁시렁 거리며 되돌아가는 것을 이쁘장하게 생긴 여직원이 배웅해준다. 나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은 밀려있는 손님들을 보고 발길을 되돌리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덕분에 내 예약 차례가 빨리 돌아왔다.
“40~50분은 기다려야 한다구요? 흠…. 그럼 1시 40분 정도면 되겠내.”
“손님, 이곳은 시간 예약은 안되는데요.”
내 앞 사람들의 발길을 돌릴땐 그렇게 친절해 보이던 웃임이 갑자기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헐~. 그럼 여기서 50분을 기다리란 말이에요?”
“아니요. ‘외출’은 가능하니. 꼭 그러실필요는 없습니다.”
“아~그렇군요. 그럼 여기 쇼핑 좀 하다 올께요. 1시 50분쯤 돌아오죠.”
그러고는 밖으로 나온다. 도대체 시간 예약이 안된다고 한건 무슨뜻인지? 놀아도 이 안에서 물건사며 놀라는건가?
버스 하차장 앞에서 기다리지 마란다. 표파는 승강장이 있는 곳에서 편안히 티비 보며 기다리란다. 아까 문자로 그러라 그랬다. 나한테 그 얘가….
“그러지 뭐. 근데 얘, 나 티비 안보는거 뻔히 알면서 티비보래…. 훗~. 잠이나 자야겠다.”
지하 상가보단 사람이 적었지만 터미널 역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북적북적’, ‘시끌시끌’ 했다.
“저기가 좋겠네!”
어렵지 않게 잠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옆에 사람들이 다과를 즐기면서 대화 할 수 있도록 4인용 철제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찍어둔 테이블 앞에 섰다. 거기엔 혼자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여자가 먼저 와 있었다. 그 여자 바로 앞에서 가방을 벗었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던지듯 놓고 바로 그 위로 엎드려 버린다. 빠르게 이루어진 일련의 동작이 글쓰던 여자에게 멋있어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내 꿈깨라는 듯 팬굴리는 소리가 사라져 버린다. 고개를 들어 보니 무언가를 적고 있던 여자는 어느세 가방을 챙겨 들고 저만치 가있다.
“헐~. 신속한데….”
무언가를 적고 있던 여자가 주는 신속함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잠들어 버린다. 그것보단 곧 올 그 얘와 함께 할 시간을 위한, 육체적(?)휴식이 더 절실하므로….(밝히건데 난 피곤하면 정신이 없다. 정말 하나도 없다. 그래서 평소에 짬짬히 잠을 자줘야 한다.)
오른쪽 허벅지가 흔들린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효리의 ‘emotion’이 작게 들려온다.
‘…아…. 도착했구나.’
왼손으로 머리를 한번 긁적인 후. 오른쪽 입가에 흐르던 침을 가방위에 깔아 두었던 손수건으로 닦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그래 알았어.”
지금 매표소 앞으로 오고 있단다. 난 머리를 한번 정리해준 후 지금까지 베계로 쓰던 가방을 매며 빠르게 몸을 반회전 시켜 일어섰다.
매표소쪽에는 여전히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승강장 쪽은 알 수 없는 드라마를 하품하며 보는 사람로 북적였다. 지금 여기는 눈앞이 흔들릴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런 시야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그 얘가 오고 있는게 보인다. 하지만 그 앤 아직 나를 발견 못 한듯 두리번 거리며 이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안녕!”
“어? ! 그래~. 잘 찾았내.”
“훗~. 딱…보면 알지 뭐. 그래. 오는데 안…힘들었고? 배… 많이 고프지?”
“그래, 배고프다. 근데 너 좀 피곤해 보인다?”
“아~. 방금 자다 일어나서 그래. 음…. 생각보다 일찍 왔내. 잠깐 화장실 좀 가자. 세수 좀 하게.”
“그래. 저기 있겠다. 절루 가자.”
‘비몽사몽간에도 레스토랑 예약 시간을 챙기는 이 꼼꼼함…은 내게 아닌데. 헐~. 아직 잠이 덜깼나? …그나저나 이 얘 오늘 옷차림 참…. 시원하군.’
“민소매내. 헛!”
헛! 소리와 동시에 손으로 입을 막는다. 또 나왔버렸다. 잠충이 금단현상.(정신없을때 생각이 언어화 되는 나만의 병)
“내~참! 왜?”
바닥에 침을 찍~. 뱉고 왼쪽다리를 건들거리며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말투다.
“아~아니. 그냥….”
왼손으로 머리를 글적이며 버벅거리는 날 남자 화장실쪽으로 몰아 넣어 버린다. 부드럽게 우악스러운 그 얘 손에 떠밀려 화장실에 들어온 난 세면을 한 후 거울에 잠시 넋을 놓아 본다.
‘그나 저나…. 저 얘 키가 저렇게 컸었나? 힐은 안신었던데….’
방금 나를 떠밀던 그 얘의 눈높이는 분명 나와 같았다. 이제까지 몰랐었는데 그 앤 나와 키가 비슷하다.
“푸핫! 이제야 잠이 깨내. 빨리 밥먹으러 가자.”
예약 시간 10분 정도 남았지만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나란히 출발한 우리는 서로 어깨를 부딧치지 않도록 서로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했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피하며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됐었다. 순간 모 광고에서 여자친구 손을 붙잡고 달리는 장면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랬던거냐? 일부러 하는 염장질이 아니였던거내?’
알 수 없는 공감을 씹는 사이 식당 앞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예약석 줄에 들어선 내게 그얘가 말한다.
“여기였던거야? 점심? 으…나 실은 장염 때문에 많이 못먹는단 말야. 그러지 말고 우리 나가서 비빔밥이나 먹자.”
“그래? 헐~. 진작 말하지. 알았어! 나가자.”
비빔밥은 괜찮고 스테이크 하우스 음식은 왜 장염 걸린 사람이 먹으면 안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난 무언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위가 잘 보이지도, 다른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뛰어난건지? 바보가 되버리는 건지는 잘 보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얘에게 그만큼 집중하고 있다는건 확실하다.
밖은 공기부터가 다르다는걸 확인하고 바로 백화점으로 들어와야 했다. 아마 지금 밖에서 식당고르다간 ‘배고픔’에 ‘염제(炎帝)의 땡깡’까지 더해져 식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탈진 해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린 센트럴 시티 10층에 있는 식당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10층 식당가도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식당가를 한바뀌 뺑 돌아보니 젊은이들 먹거리식당은 기본이 20~30분은 기다려야 했다.
“나 때문에 배고프지? 어떻게~. 너 배고픈거 못참잔아!”
“하~. 당신걱정이나 하세요. 나보단 네가 배고프지…. 아침은 먹었어?”
“응!. 우리집은 아침 안먹으면 밖에 나올수가 없어. 아! 저기 좀 한가해 보인다. 절루 가자.”
‘절루? 이 얘 혀가 좀 짧았나? 발음이 좀…. 귀여울라고 그러네.’
발걸음을 재촉한 우리는 그나마 한적한(?) 한식 식당 앞에 섰다. 식당 유리 외벽에 ‘전주비빔밥’ 이라는 녹색글씨가 무척이나 크게 보인다.
“정말 비빔밥 먹게 됐내. 훗~. 축하한다.”
“별말씀을…, 안으로 드시지요~.”
왼손으로 웃옷의 목부근을 누르고 고개를 살포시 숙인체 안내하는 그 얘 오른손을 따라 식당안으로 들어섰다.
식당메뉴는 간단했다. 종류별로 비빔밥이 몇가지 있었지만, 다 거기서 거기 인 것 같았다. 식당 기본 메뉴인 산채비빔밥을 시킨 우리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한동안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내내 눈 둘곳이 마땅치 않았다. 한숟깔 뜨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서 식사를 하는 그 얘가 무척이나 신경쓰이는 것이다.
‘큼~. 목걸이에 반지가 걸려있내? 금반진데…. 누구거지? 큼~. MP3가 아이리버 목걸이형이네 예전에도 저거였던 것 같은데. 아직도 쓰나보내? 물건 안망가트리고 잘 아껴쓰는데. 큼~. 거참~. 신경쓰이니 목이 다 마르네.’
“왜 그래? 맛없어?”
“아니. 맛있어. 어서 먹어.”
“그래. 너도 어서 먹어. 아! 참! 우리 극장 예매표 받는데서 기다려야 되는거 아니니? 오늘 사람 많은 것 같으니까 빨리 먹고 일어나야겠내.”
“헐~. 예매 했는데 줄을 왜 서?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예약표 끊어주는 기계가 여러대라. 걱정안해도되?”
“예약표 끊어주는 기계? 서울은 그런게 있니?”
“하~. 이거 무슨. 광주도 그렇게 하잔아?”
“아니. 광주는 예매해도 표 받을려면 예매소로 가야해. 거기서 예약표 받아. 와!. 역시 서울이라 다르긴 다르구나. 히~. 이거 광주촌년 여기 와서도 촌띠를 내네”
“광주 촌년. 하~. 말하는거 하곤.”
다음 스케줄을 확인한 우리들은 아무일 없었던 듯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이거 위의 대화가 마치 다음에 일어날 이벤트의 순서를 누군가에게 알려 주고자 별필요성 없이 나누어진 대화같군.
“극장표 네가 예매했으니까. 밥은 내가 산다니까 그러내. 이러면 너 광주올때 내가 비싼거 사줘야 하잔아.”
“헐~. 괜찮아요. 백조가 무슨 돈이 있다고. 광주가도 안그럴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어. 영화볼려면 한시간 정도 남았지? 그럼 차나 아이스크림은 내가 살게. 자~. 가자!”
카운터에서 밥값 계산때문에 벌인 가벼운 실랑이는 다음 행선지를 점심 얻어먹은 쪽에서 결정짓는 선으로 마무리 했다.
극장이 있는 지하1층은 패스트 푸드점이나 패밀리레스토랑(아까 예약했던 식당도 여기에 있다.), 커피숍, 아이스크림 가게, 서점, PC방 기타등등. 먹고노는 시설은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다 갖추고 있었다.
우린 적당히 비어있는 찻집이나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았으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렇게 10분 정도 돌았을까? 눈에 익은 집이 보인다.
“와!. 저기 여기도 있다. 코엑스에만 있는줄 알았는데. 우리 저기 가보자.”
“코즈니?”
“뭐해? 들어가자니까.”
처음 삼성동 코엑스에 갔을때가 생각난다. 광주 촌놈 눈둘곳을 몰라.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던 것을 안내해준 친구가 어찌나 챙피해 하던지. 그 중에서도 특히 이 'Kosney'라는 곳은 신기한 선물용품들이 넘쳐나 촌놈 박이터지는 줄 알았던 곳이다. 그때 그곳…. 정말 즐거웠었다.
“어머! 왠일이니? 어머머! 저것봐. 하~. 이거. 이것 이렇게 하는거 맞지?”
개가 쓰는 장신구를 자신의 손가방에 꽂아보는 이 얘. 좀만 더하면 저기 있는 향기낼때 쓰는 말린 꽃을 머리에 꽂을 기세다.
“워워~. 진정하고 천천히 구경해. 그리고 그거 개 앞머리 묶을때 쓰는거야. 훗~.”
“…아! 어쩐지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어.”
“정말? 훗~. 아깐 강아지 마냥 좋아하더니.”
“에휴~. 그래 나 광주촌년이야. 놀려 먹으니 좋아?”
토라진 듯 고개를 숙이는 그 얘의 등을 가볍게 다독이며 매장안쪽으로 이스코트(escort)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대버렸다. 하지만 곧 어색함을 느낀 난 바로 손을 거두어 드린다.
이게 더 어색한가? 여름이라 더울까봐 그랬을 것이다. 민소매의 옷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 어색함은…. 그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그런거다.
그나저나 이제까지 몰랐었는데 이 얘 어깨가 참 가늘다. 이 얘가 이렇게 가냘펐었나?
봉준호 감독의 ‘괴물’. 갑자기 ‘와탕카’라는 만화에서 이 영화를 패러디한게 생각난다.
그 만화에선 어느날 한강에 나타난 괴물이 사람들을 잡아먹자, 정부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하는데 각 장관들이 서로 자기네는 할일이 없다고 발뺌할 때 어느 정관이 뭐 이런 사소한 문제가지고 고심을 하느냐며 한가지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인 즉슨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내자는 것이였다.
“40대 김씨 괴물 잡아먹고 정력증강”, ‘부재 : 괴물먹고 대물됐다.’
신문기사 다음 컷에서 작살을 들고 괴물에게 달려드는 남성들의 웃는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설마 실제 영화도 그런 이야기는 아니겠지?
앞으로 볼 영화에 대한 저런 짧은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우린 'Kosney'에서 영화 상영시간 10분 전까지 물건들만 정신없이 구경하다, 음료수나 팝콘같은건 살 생각도 못하고 화장실만 들렸다가 바로 극장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영화 괴물은 지금까지 내가 본 한국 영화 중 단연 최고였다. 실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듯한 괴물의 움직임에서 보여준 화려한 특수효과, 평범한 캐릭터를 아주 독특하게 소화한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 그리고 영화 소재만큼이나 황당한 했지만 나름대로 빈틈없는 이야기 구성, 전개. 이정도면 정말 최고의 작품이라 말할수 있을 것 같다.(참고로 난 ‘왕의 남자’를 아직 못 봤다.)
“괴물, 그래픽이 좀 떨어진 것 같지 않니? 컴퓨터 그래픽(이하 CG)이라는게 너무 티나던데.”
“무…무슨 소리야. 난 우리나라 CG 수준이 이정로 올랐는지 정말 몰랐어. 그 밖에 내용 구성이나 스토리 전개도 깔끔했다구. 이 영화 정말 훌륭한 작품이야.”
“…아까 CG 만든회사 보니까. 외국 기업같던데.”
“…윽!”
그래, CG는 네 말이 맞다 치자, 하지만 나머진 아직 인정못해, 라는 의미의 신음소리를 내본다. 그런날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는 이 얘.
“…그리고 너. ‘용가리’ 재미있게 봤지?”
초등학교때 심형래 주연?감독의 ‘우뢰매’에서 느낀 감동을 용가리에서도 느껴버린 나로썬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뻔 했지만, 질문의 시기와 이 얘의 어감에서 유추해보건데 그래선 내가 상당히 부족한 놈으로 인식 될 것 같다.
“요…용가리…는 SF 영화고. 이건 휴먼 드라마잖아. 장르가 다른데 비교를 해선 안되지.”
주춤한 내 대답을 듣고 게슴츠레한 눈꺼풀에 미소까지 번져버린다.
“…재미있게 봤단 소리군.”
“하…하…. 아까 사주기로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야지. 에구! 덥다. 너무 흥미진진하게 봐서 땀까지 나네.”
영화야 재미있게 보면 됐지. 굳이 다른 영화와 비교하면서 그 수준을 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하나의 작품으로써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연기한 배우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며, 안보이는 곳에서 밤낮 고생한 스텝들에 대한 예의도 아닐것이다. 또한 한국 영화의 제작 기술과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인 헐리우드 블러버스터 영화 기술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고 이 영화. 딱 봐도 휴먼드라마 아닌데…. 이건 누가 봐도 괴수영화에 가까운 복합 장르잔아”
아무래도 영화는 혼자 봐야 그 진정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한편의 멋진 소설처럼 말이다.
그 얘가 거짓말 조금 보테서 입을 두자나 내밀고 아무말도 안하고 있는 나를, 그나마 사람이 적어 조용한 카페에 데려다 놓고 웃으며 말한다.
“아이구~. 삐졌엉? 뭐 사주까? 바나나우유? 아님 아찌끄림?”
난 마실거리로 바나나유유와 아이스크림을 제일 좋아한다. 평소라면 좋다구나 말하겠지만 지금 난 기분이 별로 안좋다.
“누가 삐져! 그리고 내가 무슨 얘냐? 그런거 먹게.”
“그래? 그럼 몸에도 좋은 차 마셔라. 저기요 여기 녹차 되죠?”
“…딸기 러쉬…먹을께.”
딸리 러쉬는 신선한 생우유에 싱싱한 생딸기를 갈아 넣은 음료를 말한다. 취양에 따라 떠먹는 요구르트나, 녹은 초코릿을 넣고 휘휘저어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 라고 어디서 들은 것이 생각나 그것을 한번 먹어 보기로 한다. 쓸데없는 생각만 안났어도 녹차 마시는 건데말이다.
“하~여간. 여기 딸리 러쉬랑 딸리 요구르트 하나씩이요.”
딸기 요구르트는 딸기러쉬와 비슷한 먹거리인데 주가 되는 딸기는 같으나 생딸기 대신 약간 설익은 딸기를 쓴다. 대신 딸기를 러쉬처럼 갈아 넣지는 않고 4등분에서 8등분으로 썰어 넣는게 기본이다. 또 신선한 생우유를 넣는 대신 차가운 떠먹는 요구르트가 또 다른 주가 되어, 그 시원한 맛과 달콤한 딸기향이 기가막히게 어우러진….
“이젠 바나나에서 딸기로 옮긴거니?”
제대로된 녹차는 5가지 맛이 나는데 녹차 애호가들은 차 한 모금에서 쓴맛, 떫은 맛, 신만, 짠맛, 단맛을 순서대로 느낄수 있다고 한다. 보통 찻잎을 따는 시기는 5~6월인데, 그중 곡우절 이전에 딴 것을 우전차(雨前茶)라 하여 녹차 중 최고급 상품으로 쳐준다. 이 차는 보통 녹차보다 가격이 10배 이상….
“…나 물가져 올께.”
느낌이 이상하다. 이제 혼자서 하는 썰렁한 농담은 이쯤 해야할 것 같다. 솔직히 이러는 나도 별로 즐겁지 않고, 앞으로 한시간도 안남은 저 얘와의 시간을 이런식으로 낭비는 것도 싫다.
물 가지러간 그 얘가 물과 주문한 음료까지 한꺼번에 들고 와버렸다.
“부르지 그랬어. 가져오다 떨어 뜨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얘가 들고 있는 챙반을 빠르게 안아 들었다.
“아이고. 미안한 줄은 아나부내. 그래도 입이 들어가서 다행이내. 아직까지 안들어갔으면 확~”
“확~?”
내가 마지막 의태어를 방금 이 얘가 하던 동작 그대로 따라 하며 말하자, 약간 당황스러워 하며 자리에 서둘러 앉아 버린다.
“흐음~. 그래. 서울 생활은 별 문제 없니?”
“확~? 뭐?”
“에유! 요걸 그냥~.”
오른손으로 삐죽이 내밀어진 내 주둥이를 노리는게 예삿 솜씨가 아니다. 집에서 고양이를 여러마리 기른다고 하더니 그내들 한테 고양이 권법이라도 배운건가?(‘고양이 권법’ 람마1/2 8권참조)
“어…어!어! 별문제 없어.”
왼발로 입을 가리며 고양이 마냥 눈을 좁히고 대답하는 나. 냥~. (실제 이 소리는 안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좀 진지해지자. 영화 보고 나서부터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구니? 나이가 내일 모래면 서른이다. 지금부터 긴장 좀 하지 그래.”
“헐~. 자기는…. 알았어. 이제 너도 친구들 만나러 갈 시간 얼마 안남았으니. 서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나 좀 이야기 하자. 그리고 내 이야기 보단 네 이야기 좀 하자. 나야 내세울만한 직장은 아니지만 취직도 했고, 나름대로의 계획도 예전에 너한테 말해 줬었으니까.”
“그래. 좋아! 하~. 뭐부터 이야기 할까? 뭐 별이야기있겠니? 신세한탄이나 해보는거지. 그동안 넌 이 두개 다 먹어라. 난 물 마실테니까.”
러쉬와 요구르트를 네게 밀어준다.
“…어. 그래.”
지금부터 쓸데없는 생각말고. 들어주자. 지금은 들어주는게 내 할일이다.
준비 됐다는 내 눈을 확인한 후,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학교 4학년, 남자나이 스물 일곱이면 그래도 여유있게 취업준비 할 수 있을 텐데…
…중략…
그저 그런 이야기….
그저 그러니까 뻔한 이야기….
뻔하니까 분명 그저 그런 이야기….
…
나니까 하는 이야기….
나라는 상태가 들어주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
…
자신의 이야기지만 내가 들었으면 하는 이야기….
자신이 들어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에겐 할 수 있는 이야기….
…
그렇게 제 3자가 들으면 재미없을 이야기….
….”
약 40분 동안 내가 한말은 ‘어’, ‘그래’ 밖에 없었다.
난 그동안 이 얘에 대해서 너무 많은걸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반성의 느낌표 보단 의문의 물음표가 먼저 떠오른다.
“너…. 나를 굉장히 편하게 생각는구나? 나라면 여자에게 그런 이야기 못할 것 같은데.”
“에이~. 설마 너 나한테 말 못할거 있니?”
“…어…니!”
긍정과 부정의 혼합형. 침묵과 확답의 중간형태. 지금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의문이, 내 안에서 감정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 변화는 혼란스러웠다.
때마침 그 얘의 손가방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 이젠 헤어짐을 준비할 시간이다.
“알았어! 좀 있다 출발 할께. 헤~. 얘들이 이제 하나둘씩 약속 장소로 모인다는데, 이거 너무 일찍부터 모이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시간 오후 6시. 겨울이라면 모르겠는데 한 여름의 술자리 약속이라면 약간 이른 감이 없지 않다.
“…promy네?”
“아? !. 이거 아빠가 주신거야. 무슨 여자얘가 핸드폰 줄 하나 없냐면서.”
요즘 한창 잘나가는 별다방(?)이나 BR 삼십일(?)에서 거저 주는 휴대폰 줄이다. 나름대로 그 기능을 충실히 할 것 같지만, 왠지 싸구려라는 느낌이 가시진 않는다.
“다 먹었지? 일어나자!”
“어! ?. 그래.”
혼란이 진정됐다. 갑자기 예전부터 누군가에게 선물 해주고 싶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근데 여기를 왜? 또 들어가. 뭐 살거 있니?”
“아! 갑자기 살게 생각나서. 저기 어디 있던 것 같던데….”
이 얘에게 휴대폰 줄을 선물해 주기 위해, 아까 들렀던 ‘Kosney’에 다시 왔다.
예전 삼성동 코엑스 ‘Kosney’에서도 같음 물건을 봤었다. 보석으로 된 휴대폰 줄. 미적 감각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운 내 눈에도 상당히 예뻐보이는 것이였다. 그때,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꼭 선물해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이거 사게? 너 핸드폰 줄 있잔아?”
“그래. 근데 넌 없잔아. 그게 뭐니, ‘promy’가. 사주는 거니까. 여기있는 걸로 바꿔. 골라봐.”
전시된 휴대폰 줄은 여성들이 들고 다니는 파우더 통보다 약간 작고, 기침 가래에 즉방인 용각산(난 왜 이정도 밖에 생각 못할까?)꽉보다 좀 큰 케이스 위에서 형형색색을 뽐내고 있었다. 정식 상품명은 ‘쥬얼리 휴대폰 줄’ 이라고 진열대 위에 크게 써있다.
“의왼걸. 네게 이런 센스가 있다니. 그럼 하나 사양않고 고를께.”
말은 별일 아닌 듯 담담히 하지만 좋아하고 있다는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 기운이 내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할 정도다. 역시 선물은 받는 쪽보단 해주는 쪽이 더 기분 좋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10여분 정도 신중을 기하더니 드디여 자신의 휴대폰 줄이 될 녀석을 집어 올렸다. 아담한 은빛 링에 분홍색을 반사하는 보석이 줄줄히 박혀 있는 장신구다.
“핑크내? 이쁜데, 저기요! 이걸로 주세요”
자신의 옷 색깔과 같은 빛을 내는 휴대폰줄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흐뭇해 한다.
그나저나 이제까지 몰랐었는데 이 얘 붉은색 계통을 좋아 하나보다. 이 얘가 이렇게 색감이 화려했었나?
교대로 향하는 3호선 지하철이 들어 온다. 이걸 타고 환승역인 교대에서 서로 반대방향 열차를 타야한다. 난 삼성동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 가고, 이 얜 친구들이 기다리는 신림역으로 가는것이다.
교대역에 도착했다. 방금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곳에서 각자의 행선지로 향하는 2호선 열차로 갈아 타야 한다. 마주보고 나있는 2호선 환승 출입구 통로의 중간지점에서 우리 두사람이 섰다.
'참~내. 무슨 견우와 직녀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불만에 잠시 투덜거려 본다.
“그럼, 내일 잘 내려가고 저녁에 술먹다 돈 떨어지면 전화해. 지금 회사가서 전날 완전히 처리 못해, 조금 남은 일만 하면 되니까. 금방 끝날거야.”
“하~. 누가 들으면 내가 말술인줄 알겠다. 알았어, 지금 회사가야 한다는게 좀 암울하긴 하지만, 암튼 오늘 하루 즐거웠어. 조심히 잘 들어가.”
회사 갔다 와서 자기네 친구들과 가볍게 한잔하자고 운을 띄워 보지만, 아직은 그런 자리에 날 데려가고 싶지는 않은 가보다. 빈말이라도 같이 가잔말을 안해주는 이 얘에게 조금 섭섭해 질려고 그런다.
"휴가 19일 부터니까 광주 내려가면 연락할께."
"그래…. 꼭 연락하고, 그때 만나면 오늘 못한 술…내가 살께."
빈말이라도 같이 가잔 말을 못해서 미안한가보다. 내가 서운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걸까? 묘한 여운이 느껴진다.
마지막 여운 덕분에 웃으면서 잘가라는 인사를 해줄 수 있었다.
“그럼…. 안녕!”
“그래…. 안녕!”
그 얘가 돌아 섰다. 난 안보일 때까지 눈으로 그 얘를 배웅해 준다. 이런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얜 나한테 이런적이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거라 추측해본다. 저 얜 날 좋아하니까…. 아니 좋아 했었으니까?
방금 이 얘를 만나 헤어진뒤, 그 당연했었던 심증이 이젠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거기다 어쩌면 이제 입장이 바뀌게 됐는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덧붙여 본다.
2006년 08월 13일 일요일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였던 어제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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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의 허구성 때문에..소설방에 올릴까 하다가..문학작품이 아닌관계로..이곳에 올려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