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인 이진경씨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노동 없이 생산이 가능한 새로운 개념의 자본론’을 부르짖었는데 여기에 대한 반박론을 펼친 것이 저자의 글이다. 저자가 반박에 나서게 만든 권위 있는 이론적 배경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나온다. 따라서 본 책의 내용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이진경씨와 김동수의 상호 다른 해석을 견주어놓은 것이다. 저자인 김동수씨가 펼쳐내는 [자본론]의 진수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경제법칙은 그 성질상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다. 이는 곧 경제법칙은 인간의 의지나 욕구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나타나고 작용한다. 물론 경제법칙은 자연법칙과 다른 점이다. 자연법칙은 인간의 참여 없이 그 스스로 나타나지만, 경제법칙은 인간의 생산활동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이 생산양식의 생산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경제법칙도 밝혀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본적인 경제법칙은 잉여가치법칙이다. ‘잉여가치’라는 말은 ‘사용가치’라는 말과 더불어 차별 지으면서 등장된다. ‘사용가치’란 자연 재료에다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어 생겨나는 가치이다. 사용 가치를 낳게 하는 노동을 ‘유용노동’이라고 하는데 이 ‘유용노동’은 ‘필요노동+잉여노동’으로 나뉠 수 있다. 필요노동이란. 노동자에게 주어진 욕망 충족에 필요한 사용 가치의 양만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이다. 그렇다면 잉여노동이란 노동자 본인에게 필요이상으로 강요당하는 노동이라는 말이다. 이 잉여노동이라는 ‘유용노동’에 의해서 생겨난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이고 자본가들은 오로지 이 ‘잉여가치’를 노리고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가들의 생산해내는 사용가치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품화되어 시장에서 돈으로 교환될 때, 그 상품가격에 담겨있는 잉여가치(이윤)를 획득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잉여가치가 보다 더 많이 확보하는 방안으로 그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개인적 소비로 다 써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본을 추가적으로 늘리는 데 보태게 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용가치를 만들어낸 노동자들은 어떤 위상을 지니게 되는가? 그들은 자본가들의 눈에는 그저 자본가들의 돈 힘에 의해서 호출 당하는 진열되어 있는 상품이 된다. 상품 생산은 자본가들의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로의 투자가 이루어지는데 불변자본이란, 생산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자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계나 토지나 건물이나 원자재나 원재료를 말한다. 상품화 되어서 에너지 원료로 쓰인 가스나 석탄이나 기름의 가치는 그대로 상품 속에 담기게 되니 불변자본, 혹은 같은 말로 ‘생산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자본은 가치를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전시킨다.(고정자본은 불변자본을 두고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기계는 고정자본이지만, 원재료 같은 것은 유동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가변자본이란 생산과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힘의 크기가 변하는 자본을 말하는데 노동자와 그 노동력을 뜻한다. 이 가변자본만이 가치를 변동시킨다.
상품이 생산되면 그 안에는 상품가치가 담기게 되어 있는데, 노동자들이 받는 노임의 가치만큼의 가치를 얻는다면 자본가들로서는 자본을 투자한 이유가 상실된다. 따라서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필요이상의 노동을 강요를 해서 그 잉여노동시간으로 획득된 가치에 대해서 이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되가져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간의 괴리를 낳게 하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란 다름 아닌, 생산과정에서 얻어지는 사용가치와 전혀 상관없이 시장 내에서의 ‘가치’가 따로 존재해서 ‘가격’이라는 이름을 달고 팔린다는 사실이다. 즉 노동자가 얼마나 수고했느냐와 상관없이 시장에서는 구매자가 거의 없으면 헐값이 팔릴 수밖에 없고 그것이 시장에서는 자기 노동력이 가격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즉 사용가치란 노동자의 수고에 의해서 얻어지지만, 시장 내의 가치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품화 되지 못하는 상품이란 사용가치가 아예 전혀 없는 것이 된다. 노동력도 일종의 상품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시장 원리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장 원리에 또 따라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가들이 그렇게 신경 쓰게 되는 ‘수익률’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생산과정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에 합리적인 자본구성인 ‘유기적 구성’을 갖추어 ‘잉여가치율’이 높은 상품을 생산해도 다른 자본가들의 제시한 수익률 시장에서 경쟁해야만 한다. 즉 ‘수익률’ 자체도 자본가들의 개인적 요구만을 고집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어느 자본가인들 높은 수익을 마다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들의 욕심은 시장 원리에 준해서 고분고분해야 한다. 이것이 ‘평균수익률’이다.
자본가들은 이 평균수익율을 염두에 두면서 더 큰 수익을 위해 잉여가치를 다시 다음번 생산과정에 투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잉여가치는 한 번씩 생산과정이 순환할 때마다 계속 불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단 시간 내에서 자본 회전을 빨리 가져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늘어난 잉여가치는 다음번 생산과정 순환에 ‘축적된 자본’으로 투입되게 된다.
예를 들면, 자본가가 10,000(8,000 불변자본c +2,000 가변자본 v)의 자본을 투하하여 12,000가치를 생산한다면 전체 과정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동일한 조건에서 잉여가치 전체(2,000s)를 생산에 재투자한다고 결정했다면 확대된 생산에서의 자본의 가치구성은 9,600(8,000+1,600)c+2,400(2,000+400)v가 되고 이것이 다시 회전하면 다음과 같다.
Ⅱ: 9600c+2400v+2400s=14400C : S′=100%
이것이 바로 ‘확대재생산’이다. 단순한 단순재생산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필요이상으로 노동을 해서 얻어진 잉여가치가 다시 무상으로 자본가들의 재산에 누적이 되어 그것으로 인해 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재투자되는 것이다.
노동력의 판매에 의해 노동은 노동자로부터 이탈하여 자본가의 소유로 되었으므로, 노동의 대상화 결과인 물질적 부는 타인의 소유물인 자본으로 되고, 자본가의 소유인 상품은 노동력의 구매수단으로서 노동자에게 제공되어, 자본가가 향유할 부의 원천인 궁핍한 임금노동자를 재생산한다. 이 반복된 재생산의 결과, 노동자는 자본가를 재생산하고, 자본가는 노동자를 재생산함으로써 자본 관계 자체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이중의 이익을 얻는다. 노동자에게서 받는 것은 그가 향유하는 부의 직접적 원천인 잉여가치이다. 다른 한편 자본가가 지불하는 화폐는 생산적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유지에 사용되어, 자신의 부를 영원히 증식시켜 줄 계급을 얻는다. 이렇게 하여 노동자는 이 자본가 혹은 저 자본가에게 속하지는 않지만 자본가계급에는 속하는 것이다.
계급이란 인격과 신분 자체의 차별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노동이 없이 자본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면 이런 계급도 소실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두 다 자본가가 되는 방도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이진경씨는 ‘자본을 넘어서 자본’이라는 책을 내었다가 김동수씨로부터 보 책을 통해서 반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경씨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가치를 따지지 말고 분배의 관점에서 자본을 재조명해보자는 것이다. 즉 자본의 독점성을 해체하여 독점성에서 오는 절대 이윤을 분배를 통해 평준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분배는 유통이다. 유통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 낸다면 구태여 기계로 인한 생산과정에 종속된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반격은 이렇다. 상품을 구매할 돈이 없다면 어떻게 유통이 성사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돈, 즉 화폐란 상품이 지니고 있는 사용가치와 교환될 때만 비로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용가치의 생산, 즉 상품 생산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통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상품의 순환과정이라는 말이다.
생산적 노동이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귀결되는 것이 마땅한데, 생산성 향상이란 곧 자본주의의 자기필연성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단순히 사용가치 생산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잉여가치 생산의 원천이라는 새로운 유용성을 가지고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고, 노동력이어야말로 이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역사적 발견에 의해 자본은 그 존재를 자기필연성에 매개된 것으로 표시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물을 다루는 시대에서 벗어나 인간이 인간을 다루어야만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되고, 타인의 노동에 의존한 방식이다 는 점에서 ‘인간들만의 자기 완결적 사회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다른 대안적 사회 양식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타인에게 제공할 이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생존에 필요할 상품을 구매할 화폐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같이 노동하면서도 그 노동의 가치의 동등과 차등의 불일치가 반복적으로 상승해가는 과정이 인간 사회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 복음적 평가 )
경제학은 인간의 질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노동하는 것을 긍정해야지 만이 인류 문명의 화려한 발전상을 해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악한 일인가?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세계가 나쁜 세계일까? 성도 두 명만 남아 예배드린다고 과연 주님 보시기에 지옥 갈 짓인가? 큰 병원에 환자가 하나만 있다고 해서 나쁜 병원인가? 자식 없이 홀로 사는 여인의 가정이 저주받은 가정인가?(갈 4: 24) 경제적인 노동의 효율성을 따지자면 나쁜 상황일 수밖에 없다. 노고의 가치를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노고의 보상은 이마에 흐르는 땀이나 해산의 아픔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인간의 노동만이 활개 치는 곳이 아니다. 인간들이 기대한 모든 노고의 성과는 허무로 돌리고(전 1:2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오로지 하나님의 노동의 결실을 향하여 질주하는 곳이 이 세상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주님의 노고로 맺힌다. 인간들은 주께서 밀어내시는 대로 밀리면서 살 뿐이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의로서 인정받고(롬 4:6), 열심히 일한 것이 죄로 인정받는다.(약 4:16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미 죽은 자에게 있어 가치란 주님의 생명뿐이다. “이 땅에서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