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던 격동의 19세기, 영화는 산업혁명의 끝부분에서 발명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화는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모두 흡수해서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신기한 볼거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예술적 장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초창기 영화예술 종사자들은 이미 수천년동안 인정받은 타 예술장르와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문학과, 배우들이 나와서 그것을 연기한다는 점에서는 연극과, 그리고 프레임 안의 회화적 특성을 강조하거나 무성영화 안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연극과의 유사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지금도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고전 명작들 혹은 현대 희곡들이 영화화된다. 말론 브란도와 비비안 리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지난 여름 갑자기]는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을 영화화 한 것이고, 존 포드 감독의 [귀향] 등 유진 오닐의 대표작들도 영화화 되었다. 뮤지컬 [시카고]처럼 브로드웨이 힛트 연극들은 자주 영화화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차범석의 [산불]은 여러번 영화화 되었다. 근래에도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강우석 감독의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도 모두 대학로 힛트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오구]가 만들어졌다.
[오구]가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점은 연극 연출가가 직접 영화연출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처럼 미타니 코키가 자신의 연극을 영화로 연출한 경우는 있지만, 우리는 [오구]의 이윤택 감독이 처음이다. 배우이며 연출가인 박광정도 하일지의 소설을 자신이 연출한 [진술]을 다시 영화화하기 위해 제작자들을 만나고 있지만 아직 크랭크인되지 못했다.
연극과 영화는 표현방식이 다르다. 연극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들의 감정의 흐름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즉 카메라로 생각하면 2시간동안 지속적으로 배역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영화 연기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카메라의 빨간 불이 들어오는 몇 초, 혹은 몇 분동안 연기를 하면 된다. 연극 연기자들이 TV나 영화 매체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서서히 감정을 끌어올리는 연극적 방법과 다르기 때문이다.
연출도 마찬가지다. 연극 연출은 관객의 눈 앞에 무대 전부가 열려 있다. 카메라 프레임으로 치자면 롱숏이다. 하지만 영화는 롱숏만 가지고 구성되는게 아니다. 복선을 암시하거나 그 중요성을 관객들에게 강조하는 클로즈업을 비롯해서 다양한 프레임으로 감독은 영화의 의미를 창출한다. 카메라도 그렇다. 연극 무대의 눈높이에서 찍는 아이 레벨 샷뿐만이 아니라, 하이 앵글, 로우 앵글 등 다양한 각도, 그리고 다양한 움직임으로 카메라를 이용한다.
영화 [오구]는 연극 [오구]의 신명나는 강렬한 현장성 대신, 내러티브의 충실한 전달에 더 치중한다. 가령 연극적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그 효과를 영화적으로 극대화 한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의, 제한된 공간에서의 몰입과 응집력이 결여되어 있는 대신, 관객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것은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 장점과 연극 무대만의 독특한 힘이 사라진다는 단점이 혼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처럼 어떤 영화들은 더 연극적으로 다가가려고 시도한다. 또 어떤 연극은, 무대 전면에 스크린을 설치하거나 다량의 모니터를 설치하여 영상작업을 병행함으로써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려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아무리 흥행에 성공한 연극이라고 해도 대량복제 시대의 영화매체가 갖는 대중적 호소력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연극은 관객들에게 현장에서 직접 호소하는 강렬한 호소력이 존재한다. 따라서 영화와 연극은 서로가 갖지 못한 부분을 흡수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향후 서로의 영역이 더욱 겹쳐지거나 넘나들면서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