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태릉선수촌 내 탁구장을 찾았다. D-60. 올림픽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요즘은 강훈련의 연속이다. 선수들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일까. 마치 시합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공이 왔다 갔다 할 때 나는 '핑퐁 핑퐁' 소리와 야무진 파이팅! 소리는 듀엣 가수의 환상적인 화음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한동안 훈련하는 선수들을 넋 빠진 얼굴로 쳐다봤다. 보고만 있어도 왠지 흐뭇했다. '밝고 씩씩한 청년' 유승민(23) 선수를 만났다.
♦ '탁구신동'에서 '간판스타'로
유승민을 실제로 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쭈욱 봐 와서 그렇겠지. 게다가 외모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학생 같은 마스크도 여전하고, 스포츠머리도 참 낯이 익다. 한 가지 확실하게 변한 건 '실력'. 미완의 대기였던 유승민은 어느덧 한국 남자탁구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탁구신동'으로 불리며 가능성을 인정 받았던 어린 선수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으랴.
유승민이 처음 태극마크를 단 게 97년(중학교 3학년)이니 벌써 국가대표 8년 차 고참이 됐다. 국가대표 경력으로 따지면 이철승, 오상은 다음 차례. 하지만 나이는 남자선수 중에서 가장 어리다. 혹시 나이 어린 고참으로서 어려운 점은 없을까. "나이 많은 형들이랑 오래 생활하다 보니까 편해요. 팀워크도 좋은 것 같고요". 사실 기자도 금세 눈치챘다. 10분 가량의 쉬는 시간 '남자들의 수다'는 접시를 깨고도 남을 정도였다. 집에서 '무녀독남'인 유승민에게 동료들은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일 듯. 그렇다면 어린 나이부터 주목 받아서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은 뭐가 있을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셔서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반면 외국선수들은 저를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봐서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나와요. 특히 중국 선수들은 제 경기테이프를 수십 개씩 갖고 있더라고요".
♦ 좋은 복식 파트너, 이철승
유승민은 이철승과 5년째 호흡을 맞춰오고 있다. 각종 대회에서 우승도 여러 번 일궈냈고,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음부터 '찰떡호흡'을 자랑했던 건 아니다. "대선배랑 하니까 제가 무지하게 긴장을 많이 했죠. 근데 많이 하다 보니까 점점 나아지더라고요".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무려 10년. 거기다 소속팀(삼성생명)에서는 이철승(플레잉 코치)과 코치-선수 관계이니 보니 오히려 부담 안 가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래도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편하지 않냐"고 했더니 딱 한 마디 한다. "서로 잘 해야죠".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이철승과는 5년간 태릉선수촌에서 한 방을 썼다. 그런데 몇 개월 전 김택수가 코치로 부임하면서 룸메이트가 임재현(상비군) 선수로 바뀌었다고. "후배랑 쓰니까 좋냐"고 물었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다. "훨씬 편해요. 처음 (이)철승이 형이랑 방 같이 썼을 땐 제가 고등학생이었거든요. 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5년 만에 해방된 유승민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형이 옆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 지 몰라요. 제 맘 아시죠?".
♦ 시드니 올림픽 VS 부산 아시안게임
유승민은 시드니 올림픽을 '최악', 부산 아시안게임을 '최고'의 대회로 꼽는다. 최연소(18세) 출전기록을 세우며 참가한 시드니 올림픽. 하지만 메달 꿈은 속절없이 날아갔다. 단식 1회전 탈락, 남자복식 4위. 복식경기 앞두고 유독 긴장을 많이 했다. '나 때문에 게임을 망치면 안 되는데..' 부담감에 잠을 못 잤다. 컨디션도 영 꽝이었다. "제 기량의 70%도 채 발휘하지 못했어요. (이)철승이 형 혼자 다 하려다 보니까 힘들었던 것 같아요". 특히 복식은 두고 두고 아쉬움이 남는다고. "4강까지 올라가서 4강에서 중국 조(왕리친-얀센)에 지고, 3,4위전에서 프랑스 조(장 필립 가티엥-패트릭 쉴라)에 또 졌어요".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지는 병역면제 혜택도 날아갔다. "억울하고 분해서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못했어요".
하지만 기회는 또 찾아왔다. 2년 후 부산아시안게임. 유승민은 남자복식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전 상대는 김택수-오상은 조. 같은 팀이지만 봐주고 이런 거 없었다. 서로 눈에 불을 켜고 했다. 갈비를 구워도 될 정도로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결국 이철승-유승민 조가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으로 이겼다. 마침내 그토록 열망하던 금메달과 병역면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시드니 악몽'도 훌훌 날려 버렸다. '까까머리' 유승민은 이철승의 품에 안겨 어린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그때 '적'으로 만났던 김택수는 이제 대표팀 코치. "혹시 갈구지는 않냐"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 "하하. 장난으로 그러실 때는 있어요. 근데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같이 선수생활을 해서 편하고, 대화도 많이 하고 좋아요". 그리고 슬쩍 한 마디 덧붙인다. "훈련을 너무 힘들게 시켜요".
♦ 올림픽, 기대하세요
유승민의 기량은 한창 물이 올라 있는 상태. 이집트오픈 단식에서 정상에 오르며 프로투어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 열린 코리아오픈, 싱가포르오픈에서도 연거푸 4강에 진입했다. "이집트오픈 우승으로 자신감을 많이 얻었어요. 자신감이 붙은 상태에서 과감하게 플레이 하다 보니까 잘 풀린 것 같아요".
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될 장벽이 있다. 바로 세계 탁구를 휘어잡고 있는 중국 선수들. "실력적으로 조금 밀리는 건 사실인데, 올림픽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남은 기간동안 철저히 준비를 해야죠". 어차피 정상급 선수들의 실력은 '습자지 한 장 차이'. 게다가 탁구는 워낙 변수가 많은 종목이라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다. 물론 목표는 금메달이다. 유럽세가 약한 복식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고, 단식도 시드배정이 유리해 기대해 볼 만하다. 세계랭킹을 보면 유승민이 현재 4위, 중국선수들(마린, 왕리친, 왕하오)이 1,2,3위라서 초반 승부를 피해갈 수 있다. 이번 달 브라질오픈, US오픈에서 마지막 담금질을 하게 될 유승민의 마음은 벌써 아테네로 가 있는 듯 했다. 장난꾸러기 막내동생같은 유승민, 화이팅!
♦ 프로필
생년월일: 1982년 8월 5일 신장/몸무게: 177cm, 68kg 소속: 삼성생명 국가대표 경력: 97년(중학교 3학년)부터 현재까지 주요경력: 2001년 스웨덴오픈 단식 준우승 2002년 중국오픈 복식 우승 2002년 브라질오픈 단식 준우승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남자복식 금메달 혼합복식, 단체전 은메달 2004년 크로아티아오픈 복식 우승 2004년 이집트오픈 단식 우승 별명: 옥동자 취미: 음악감상, 컴퓨터게임 종교: 기독교 가족관계: 부모님 여자친구: 있음(김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