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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스크랩 [종교개혁주일설교 3편]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
하늘천사 추천 0 조회 16 14.10.23 06: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종교개혁주일설교 3편]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은 10.31일 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미국에서는 할로윈 데이로 알려져 있다. Trick or treat! 요즈음에는 한국에도 할로윈 데이가 퍼져서 이때가 되면 백화점 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각종 행사를 거행한다고 한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Wittenburg 대학의 구약 및 히브리어 교수였던 34세의 젊은 신부 마틴 루터는 뷔텐부르그 성당 문에 로마 카톨릭의 문제를 지적하는 95개조항의 테제가 적힌 종이를 붙였다. 그는 이 일이 장차 유럽대륙을 뒤흔드는 종교개혁운동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모순에 대해 신학자의 입장에서 발전적인 논의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당초 생각과는 달리 이 95개조의 테제는 종이로 인쇄되어 순식간에 유럽 대륙 전역에 퍼졌다. 그 동안 로마 카톨릭의 부패에 대해 참고 있었던 귀족과 평민들이 힘을 합해 종교개혁의 불길을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뜨렸다. 이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나라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지만 공통된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3개로 압축된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이다. 오늘은 이 3개의 신조를 살펴봄으로써 종교개혁기념주일의 의미를 되살려 보고자 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authority by scripture alone(딤후 3:16~17, 벧후 1:20~21)

 

중세 시대 로마 카톨릭에서는 교황의 말을 성경 말씀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는 교황의 말이 성경 말씀 보다 우위에 서기도 했다. 그래서 교황은 성경을 해석할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카톨릭은 개신교가 사용하는 정경 66권 외에 외경을 정경처럼 인정하고 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했다. 그 대신 교황의 말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성경 66권은 약 1,500년간의 기간에 걸쳐 약 40여명의 각기 다른 저자들이 기록한 책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저자들이 기록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66권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책이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저는 성경을 읽을 때 마다 이 책은 사람의 지혜로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의 지혜와 힘만으로는 이토록 아름답고, 정교하고, 영감이 풍부한 성경을 기록할 수 없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는 하나님의 입김이 들어 있다.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따지고 들려는 마음을 일단 내려 놓고 자세히 성경을 읽어 보라. 그러면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권위도 넘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 잘못된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세상의 좋은 책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한다. 아니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치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신앙을 부인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 그런 사람들의 신앙은 마치 닻을 잃어 버린 배처럼 세상 풍랑에 따라 이리 저리로 흔들리기 마련이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내다보는 창문이다. 기독교인은 성경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성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또한 성경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내면을 바라보고,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여러분들이 늘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오직 믿음(sola fide) justification by faith alone(갈 2:16, 에 2:8~9)

 

마틴 루터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카톨릭 신부가 된 사람이다. 그가 법대생이었을 때 집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들판에서 천둥을 동반한 폭풍을 만났다. 그는 피할 곳이 없는 가운데 자기 바로 옆에 떨어지는 벼락으로 인해 극도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카톨릭의 성녀중의 한 분인 성 앤의 이름의 부르면서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살려 주면 장차 신부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였다. 그는 그날 살아났고 그의 서원대로 나중에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된 후에는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선행을 하려고 할수록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로마서 1:17절에 나오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통해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로마서 1:17절에 나오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구절은 원래 구약 성경 하박국 2:4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창15:6절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거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에 이르게 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선지자 하박국, 사도 바울이 얻은 진리는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율법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칭의 교리는 교회시대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살렸다.

 

선행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100% 다 지켜야 한다. 1%, 아니 0.001%라도 어기면 선행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샬롯에서 한 건축업자가 다운타운에 100층 짜리 빌딩을 짓기 시작했다고 하자. 그런데 공사가 다 끝났는데 99층은 아무런 하자가 없었지만 딱 한 층이 잘못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시청의 건축과 직원은 이 건물에 공사준공허가를 주겠는가? 그 답은 No이다. 100층 모두가 아무런 하자가 없어야 준공허가가 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선행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가? 아니면 여러분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었는가? 여러분 중에 자신이 구원을 얻은 것은 여러분이 행한 선행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가? 아마 그런 분들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에 이르게 했다. 여러분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의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칭의 교리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오직 은혜(sola gratia) salvation by grace only (엡 2:8~9, 딛 2:11, 엡 2:4~5, 롬 3:23~24)

 

은혜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헬라어로 카리스인데 여러분의 노력 없이 누군가가 주는 선물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구원은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관한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여러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를 오래 동안 믿다 보면 스스로 은혜의 사람이 된다. 다른 말로 겸손의 사람이 된다. 나의 나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사람들 앞에 겸손해 진다. 여러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솟아 나오는가? 가뭄에 메말라 붙은 시내처럼 은혜가 메말라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말과 행동에 가시가 있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찌르고 있지는 않는가? 여러분의 은혜의 샘이 메말라 있다면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권면한다. 그 분 곁에 가까이 갈수록 여러분의 말라 있던 은혜의 샘에 다시 생수가 흘러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마을에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나무는 가뭄이 와서 다른 나무들은 다 말라가더라도 이 나무만은 늘 싱싱한 잎을 자랑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 뿌리를 파헤쳐 보니 놀랍게도 그 뿌리가 근처에 있는 큰 호숫가까지 닿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처럼 여러분이 생수의 근원이 되신 예수께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여러분이 마음껏 마시고, 또 다른 사람들도 와서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은혜가 샘이 넘쳐나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있게 된다.

 

성도 각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은혜가 흘러 넘쳐야 한다. 은혜의 강물이 메마른 교회에는 갈등과 분열과 냉담과 비난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 차게 된다. 이 모든 부정적인 기운을 물리치는 길은 교회 안에 오직 은혜의 샘물이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것이다.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어떤 죄인이라도 환영을 받아야 한다. 우리도 원래는 죄인이었지 않은가?

 

오늘 이 자리에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온 모든 이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의 모든 답답한 마음을 주님께 내어 놓을 수 있기 바란다. 이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여러분이 이 제단에 나와 기도할 때 주님이 친히 여러분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실 것이다. 그 분이 여러분을 고쳐 주실 것이다. 죄인 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오직 은혜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그런 구원의 감격이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 모두가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결 론

 

종교개혁주의자들이 가졌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하는 이 모토들은 지난 500년이나 되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개신교의 중요한 모토로 남아 있다. 그것은 이 세 가지 모토가 성경에 기초하는 불변하는 진리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1521년 4월 마틴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찰스 황제 앞에서 자신이 쓴 책과 한 말에 대해 최후 변론하라는 통첩을 받았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쓰고 그 재판에 참석했다. 그는 마지막 최후 변론을 앞두고 하루 말미를 달라고 했다. 그는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고민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황제 앞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와 여기 계시는 폐하의 신하들께서 단순한 답을 원하시기 때문에 한 치도 거리낌 없이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교황과 종교회의들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나는 내가 쓴 것을 어느 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는 자기 생명을 걸고 신앙 양심을 지켰다. 루터의 이 정신이 개신교의 정신이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우리의 신앙은 이 세 가지 모토들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것이 종교개혁가들이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신앙적 유산이다. 이 신앙적 유산을 잘 간직하고, 후대에 물려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캐롤라이나 한인교회

 

 

/ 멋을 회복하는 길 (2)

 

 

(단 9:15-19) “15.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16.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강한 손으로 주님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은 명성을 얻으신 주 우리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짓고,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지난날에 우리를 구하여 주셨으니, 이제 주님의 성 예루살렘 곧 주님의 거룩한 산으로부터 주님의 분노를 떠나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의 죄악 때문에, 예루살렘과 주님의 백성이 우리 주위에 있는 민족들에게 멸시를 받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이제 주님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십시오. 무너진 주님의 성전을 복구하여 주십시오. 성전을 복구하셔서,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해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눈을 크게 뜨시고, 우리가 황폐해진 것과 주님의 이름을 빛내던 이 도성의 고통을 굽어보아 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들어 주십시오.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만민이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니,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 도성과 이 백성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비 이야기>

 

지난 월요일에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인데도 새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래 삼국지 이야기에서 조금 각색이 된 듯하지만, 아주 멋있게 들려서 오늘 설교를 이 이야기를 다시 인용하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유비가 길을 가다가 추운 겨울에 징검다리도 없는 작은 강을 직접 건넙니다. 옷을 걷고 얼음이 얼 것 같은 차가운 강물을 겨우 건넜는데, 건너온 강 저편에서 노인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부릅니다. “야, 이 젊은 놈아, 이리로 다시 좀 건너와서 나를 좀 건너다오. 이 늙은 사람을 그냥 두고 너만 갈 수 없지 않느냐?”고 고함칩니다. 유비는 다시 차가운 강물로 되돌아가서 그 노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건너온 길을 다시 돌아가자고 합니다. 자기의 등짐을 그 곳에 놓아두고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오히려 나무랍니다. 기가 찬 유비는 하는 수 없이 노인에게 그럼 여기에 좀 기다리라고 하고 혼자 건너갔다가 오겠다니까,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놈아, 내가 너를 언제 보았다고 너를 믿고 내 등짐을 맡기느냐? 나를 등에 업고 같이 가야지!” 등짐을 가지고 도망이라도 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지요. 유비는 그 노인을 다시 등에 업고 강을 건너서 등짐을 찾아서 강을 다시 건넜습니다. 강을 건넌 다음에 노인이 유비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두 번이나 강을 건넌 것이냐?” 유비가 대답합니다. “나는 두 배로 고생하는 것과, 모두를 잃는 것 중에서 두 번 고생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다시 그 노인을 등에 업고 가지 않았다면 첫 번째 행한 것이 모두 날아가 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 노인은 감탄하며 유비에게 앞으로 큰일을 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충고를 하겠다며, 첫째는 이런 마음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너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겉으로 나타내지 말라고 합니다. 유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이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참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이런 멋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신학자 중에서 제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 유동식 교수님입니다. 그 분은 영성을 순수한 우리말로 “멋”에서 풀어갑니다. 우리의 영성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고, 이것은 멋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멋이 있어야 합니다. 멋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뭐가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나눔)를 통해서 예수를 닮아간다는 것은 멋진 삶입니다. 여기에는 거짓이 없고, 장벽이 허물어집니다. 서로에게 열린 자유로운 삶을 통해서 멋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높아져서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기쁨들이 나누어지는, 이런 멋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요,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말씀으로 인한 멋진 삶>

 

구약성경을 다시 볼 필요가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그 안에서 평화를 배웁니다. 그래서 이웃과 평화하고 자연과도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람들은 몰려올 수밖에 없어요. 평화에 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안식의 법을 잘 지키고, 희년을 즐기면서 사는 그것이 곧 선교였어요. 나그네를 잘 돌보아주는 그것이 곧 선교였습니다. 멋을 지켜나가면 사람들은 멋이 있는 백성들에게 모여들게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가까이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으면서, 외국에 선교사 파송하는 것으로만 선교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멋진 삶을 증거 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삶에 나타난 멋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백성으로 멋진 삶을 누리는 것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했느냐 하면 그 멋을 잃어버렸을 때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무시하는 것은 멋을 잃어버리는 것이었어요.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고아나 과부와 같은 약한 자들을 멸시했으며 나그네를 돌보지 않았을때,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말씀을 멸시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였습니다.(이사야 1:2, 예레미야 25:8-9)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르는 것인데 이것은 멋이 없는 추한 모습이지요. 주님은 주님의 자녀들의 이런 모습에 견디기 어려워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해 주십니다. 탕자를 있는 그대로 용납해주시는 인자한 아버지처럼 우리를 용납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버지의 가족으로 살면 그 가족으로 사는 멋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멋을 갖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은 실망하시고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징계를 하셔서라도 우리가 그 멋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한 번 보십시오. 한국교회의 모습을 이 영화를 통해서 한 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본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분이 나빴다고 하데요. 기분이 나쁠 수밖에요. 교회가 정말 멋이 없는 집단으로 그려졌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분은 당연히 나쁘지요. 우리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어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입니다. 그대로 입니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보고 반성하고 대책을 세워야합니다. 우리의 것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멋을 되찾아야 합니다. 밀양은 남편을 잃고 온 희망을 걸고 살아가던 자식마저 유괴범에게 살해당하는 극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서, 가장 어려운 이웃이 누구를 의지하고 살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가 그 최후의 피난처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귀중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공동체가 교회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멋 아니겠냐는 겁니다. 교회는 원래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멋입니다.

 

<재즈와 그리스도>

 

재즈를 하는 사람들은 재즈분위기를 갖고 있지요. 지난주일 저녁은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재즈공연을 보았는데, 게스트로 참여한 로버트이라는 사람은 얼굴만 보아도 재즈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구겨진 양복, 야릇하게 기른 구렛나루, 곱슬머리 위로 빵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양복 윗저고리 주머니에 물통이 들어 있었고, 물통에는 보리차 빛깔의 물이 들어 있었고, 한 번씩 그 물을 꺼내서 마시는 자유로움 가운데서, 하모니카와 트럼펫을 손에 잡기만 하면 어김없이 재즈 빛의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음악에 취해서 눈물을 흘리고, 흥을 이기지 못해서 발로 엉성한 앞차기를 하는 모습까지 모두가 재즈였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빵모자에서 나왔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음악에 취한 그가 모자를 벗어던지고 연주를 하는데, 여전히 그에게서 재즈가 흘러나왔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소리를 내도 재즈처럼 들렸고, 어떤 행동을 해도 재즈 냄새가 묻어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저는 계속 로버트 생각을 했습니다. 재즈가수에게 재즈가 흘러나오는 것이 멋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멋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로버트에게 흘러나오는 재즈처럼,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흘러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흘러나와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것이 멋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다움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덕 Virtue라고 합니다. 덕(Virtue)의 헬라어는 “-다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덕을 세우는데 힘을 써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롬 14:9, 살전 5:11) 이것이 멋입니다. 이 멋이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풍성한 복을 누렸지만, 이것이 없을 때 멸망했습니다.

 

<개혁은 곧 회복이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인데,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개혁이라기보다 사실은 복고입니다.(리차드 니버) 원래 교회로 회복이고, 원래의 멋을 회복한 것이었지요. 당시에 중세교회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다움이 없었어요. 멋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다움이 나타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멋이 회복된다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기쁨이 활력이 되어서 놀라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종교에 눌려있던 인간을 해방한 날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500여년이 된 자랑스러운 전통입니다. 거대한 종교에 눌려있던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뜻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바람이 일어나자 문화와 예술이 부활하여 세상에 활력이 살아났고, 학문이 꽃을 피우고,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술혁명의 밑거름을 놓았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교회에 대항하는 사람들로 취급되어서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했지만,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을 모든 것보다 귀중하게 취급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말씀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 귀중하게 취급하는 교회에 의해서 박해를 당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다가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신 주님을 따르는 길이었으니까요.

 

이런 개혁(복고)들은 말씀으로 가능했고 말씀을 읽는 자들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런 기도는 변화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말씀의 인도에 따라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멋이 들어 있습니다. 어디엔가 안주하다가 갇혀버리는 삶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행하는 길을 알지 못하고, 내일의 변화에 자신을 내 맡긴 것처럼,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변화합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처럼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 나갑니다.” “Reformed church is always being reformed"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은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중심에 예루살렘의 회복이 들어있고, 이것은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회개는 변화를 전재로 합니다. 회개의 히브리말의 원 뜻은, “돌아서다” “길을 바꾸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 멸망한 역사의 아픔을 품고, 이제 길을 바꾸겠다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기꺼이 그 곳에 함께 하겠다는 열망을 품은 기도였습니다. 그냥 말로만 소원을 던지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런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어릴 때 버스를 타면 제일 앞에 어린 아이가 기도하는 사진이 붙어 있고, 그 곳에 “오늘도 무사히”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고가 많이 났으면 그런 그림을 부치고 다녔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진의 모델이 다니엘이라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시작한 것인지? 또 그것이 다니엘이라는 말이 진짜인지 모르지만,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임에는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내용은 단순히 “오늘도 무사히”정도는 아닙니다. 그 보다는 멋을 회복하자는 귀중한 기도였습니다. 그 멋은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였고, 번영과 멸망에 대한 선택이었습니다. 단순히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헌신이 들어간 기도였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는 변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 기도였습니다.

 

지난 주 동안에 캘리포니아의 산불로 집이 2,000채 이상 불타고, 주민 100만 명 이상이 피난을 했었습니다. 집을 잃은 한 한인가족은, 자신의 집과 함께 “26년간의 삶”이 날아가 버렸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금번에 이렇게 큰 산불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말하면서 지구온난화를 말하기도 합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서 비가 예년의 20%도 내리지 않은데다가, 기온은 또 90-100도를 오르내렸기 때문에 풀과 나무들이 너무 바짝 말라서 불에 너무 잘 붙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제 매스컴에서 이런 재난에 대비해서 집을 콘크리트로 만들고 방화유리창을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토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만약 산불의 근본원인이 지구온난화에 있는데, 이런 방안을 세운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점이 되지 않지요. 다니엘은 기도는 집을 콘크리트로 만들고 유리창을 방화유리창으로 만들자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생활양식을 바꾸어서 근본적으로 안전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다니엘의 기도였습니다. 큰 집 튼 차를 따고 다니는 것이 멋진 삶이 줄만 알았는데, 그로인해서 만들어낸 공해가 엄청난 재해를 만들 수 있음을 자각하고, 이제 회개하고 삶의 규모를 줄여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곳에 먼저 있겠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가장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다 따라 올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하시려고 이 카드를 사용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가 멋있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삶을 회복하기를 바라십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했던 개혁자들의 정신이 우리에게 되살아나기를 소원해 봅니다. 말씀을 버림으로 멸망했던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의 회복을 간절하게 원했던 다니엘의 기도를 우리가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멋을 볼 수 있습니까? 돌을 들고 있는 살기가 등등한 군중 들 가운데 죽음의 그림자에 눌려있던 간음한 여인에게 다가가신 주님, 그 곁에 서서 계시던 그 주님의 멋을 우리가 회복한다면 우리 교회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이런 기대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열망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비처럼 고귀한 것을 가지고 살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자랑하지 않는, 멋이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이런 주님 그리스도의 멋이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도 멋진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멋이 회복되도록 참된 기도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성만 목사(갈보리 장로교회)

 

 

/ 참된 신앙을 위한 투쟁 (3)

 

 

(롬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납니다. 이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표준새번역]

 

우리 신앙고백과 영성

 

우리 빈들공동체는 지난 26년 전 <세상에 수많은 교회 가운데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새로운 교회>가 되게 하자는 고백으로 출발했습니다. 빈들공동체가 창립예배를 드릴 당시까지만 해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오늘 이 정도까지는 비난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빈들공동체 창립예배를 준비하던 초기 교우들은 한국의 주류교회를 보면서-교회가 저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군부독재독재시절이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은 군사독재권력을 향해 침묵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엄혹한 시기에 교회를 창립하면서-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이 교회는 어떤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인지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자기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어두운 세상 희망의 불을 밝히지 못하는 교회-이웃의 아픔을 보듬기 위하여 가슴을 열지 못하는 교회-적어도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창립하면서 빈들공동체는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향해서, 그리고 무사안일해져가는 교회를 향하여, 무관심과 타성에 젖은 우리 자신을 향해서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그 사명을 다하겠다는 고백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26년이 지났습니다.

 

빈들공동체는 절실하게 <빈들의 소리>가 필요했을 때 온 힘을 다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해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빈들의 소리>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한 탓입니다. 군사독재시대가 끝나고 민주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 창립20주년이 되면서 시대에 맞게 새롭게 빈들공동체 신앙고백문을 손질했습니다. <생명살림과 화해와 평화>를 우리 선교의 방향으로 삼고-<빈들의 소리>는 그 내용 가운데 하나로 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수많은 교회 가운데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새로운 교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애쓰고 수고한 것 보다 더 많은 걸 우리에게 주셨을까? 이런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해온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좋은 성전을 주셨을까? 기드온의 300용사라는 부흥의 비전에는 당신의 섭리가 어떻게 거기 깃들어 있을까? 저는 빈들공동체 창립교인이고, 또 담임목사로써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축복들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질문들을 다 아우르는 하나의 해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많은 축복은 때가 언제인지 모르나-빛을 잃어가는 한국교회를 다시 거룩하고 순결하게 개혁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를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

 

오늘은 494주년 종교개혁주일예배로 드립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 대자보를 비텐베르그 성당의 정문 벽에 붙여 부패한 교회를 비판합니다. 이렇게 출발한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면죄부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받은 사제가 그 당사자의 죄를 보속-죄짐을 벗겨주는 선행이나 고행-하기 위한 과제를 내줍니다. 그러나 보속행위도 사람들에게 온전한 참회가 되기에 부족했습니다. 교리적으로-누구든지 영세를 받았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대부분은 괴롬과 고통이 많은 연옥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 연옥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던지-경건한 사람일지라도 값비싼 면죄부를 사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면죄부의 폐단이 극에 이른 것은-‘95개조 반박문'이 나붙기 4년 전-1513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10세 때였습니다. 레오10세가 교황대관식을 마친 이후에 <산 조반니 인 라테라 대성당>으로 행차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여기에 지출한 돈은 전임교황 율리오 2세가 남기고 간 교황청 재산의 4분의 1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치는 그의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레오 10세의 무분별한 사치로 교황청의 재정은 고갈이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오 10세는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발행합니다. 이 면죄부가 루터개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붙였던 <‘95개조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대자보를 부치고 난 다음 몇 년 뒤-1521년 1월3일 루터는 파문을 당합니다. 파문을 받은 루터를 심문하기 위해 1521년 보름스(Worms) 종교재판에서 루터는-<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며 맞섭니다. 보름스 종교재판에서 루터는 <내가 여기에 섰나이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는 기도를 남깁니다. 지금도 루터가 생존했던 집에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곳에 그리스도가 계시니라.>는 경구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개혁신앙-오직 믿음 / 오직 은혜 / 오직 성경

 

종교개혁은 부패한 제도교회의 왜곡된 교리에 철퇴를 가했지만 결론은 신앙과 영성의 개혁이었습니다. 루터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면죄부를 사야하고-면죄를 사기 위해서는 돈을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교회에 대항해서 ‘아니요!’라고 외쳤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린 보혈의 공로요-구속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개혁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오직 은혜로(sola Gratia)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세웠습니다. 여기에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가 더해져 개혁신앙의 세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 <오직 믿음으로>

 

믿음은 맡기고 살아가게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의지하고 기대게 합니다. 인생의 문제를 자꾸 생각하면 근심이 생기지만-주님을 자주 생각하면 인생문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주님 사랑과 구속의 은총을 자주 생각하며-주님께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삶이 믿음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으로> 자신을 주님께 맡겼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사람의 공로보다 새롭게 강조되고-신앙의 근본을 말씀에 세운 건 종교개혁의 위대한 공로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는 주님 앞으로 감히 나아갈 수조차 없는 존재였습니다. 오직 은혜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오직 성경으로>

 

루터 종교개혁이 우리 신앙과 영성생활에 미친 가장 지대한 공헌은 단연 <성경>입니다. 당시에는 보통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구별된 소수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그들이 바로 사제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사제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이유-어떤 이름’으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구별된 소수>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을 독점하고 있던 사제들에 대항하여 <만인사제론>을 주창합니다. 루터의 <만인사제론>으로 우리 신앙과 영성생활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직접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 이후에-라틴어로만 읽던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신앙과 영성 가운데 한축인 <오직 성경으로>는 세계 각국이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이 남긴 지대한 공헌입니다.

 

성경말씀이 우리 신앙의 기준이 되게 한 것은 오늘 날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루터 종교개혁의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루터를 포함하여-루터 이후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일반 대중의 언어로 바꾸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인류의 역사에 실현된 하나님 구원의 영적인 혁명이었습니다.

 

말씀 선포와 교회를 통한 양육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난 두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를 통한 양육>입니다. 특별히 말씀의 선포-즉 설교는 교회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 말씀선포(설교)

 

교회가 제정한 교리를 지키는 것이 믿음생활로 생각한 사람들이-종교개혁으로 믿음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롬10:17)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종교개혁자들은 들려지는 말씀인 설교를 강조했습니다. 설교에서 인간의 말 그 자체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 주일 설교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듣는 말씀-설교>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시에 악기사용을 금지하고, 교회의 장식물이 되는 성상이나, 그림들을 극도로 배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여 경청함으로써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예배에 임재하시는 성령께서 기꺼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아멘’으로 화답하며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교회를 통한 양육

 

성 어거스틴은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이를 받아들여 교인은 어머니의 품에서-교회에서 양육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우리를 낳고 먹이시고 키우시는 어머니입니다. 우리를 낳았다는 말은 우리를 구원시켰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든지 우리는 구속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지만 교회를 통해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떠난 구속의 은총은 없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은 <나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매 주일예배 예배에서 선포되는 설교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매번 예배 때마다 선포되는 설교 말씀이-아직 믿음이 어린 이들에게는 영적인 이유식이 되고-장성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영적인 밥이 됩니다. 어머니인 교회에서는 예배때 마다 이렇게 말씀으로 교인을 양육합니다.

 

교회가 영적인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키운다는 말은 교회 안에서 <거룩한 성도의 교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거룩한 성도의 교제>는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는 거룩한 성령의 양육 프로그램입니다. 우리의 영은 서로를 보면서 성장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서로에게 서로가 기대면서 함께 성장하게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좋은 교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교회 전체를 아름답게 합니다. 이처럼 <거룩한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는 양육자들입니다. 함께 있어 같이 자라는 모판의 모처럼-그렇게 교회공동체는 우리 모두의 은사가 우리 모두를 교회공동체 안에서 키워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라도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을 지키는 투쟁

 

종교개혁은 참된 신앙을 지키는 투쟁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보면서 저는 절망과 좌절감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언론이나 영화에 노출되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주님이 기대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떻게 주어진 은총인데-저렇게 싸구려 구정물이 되게 만드는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들이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고-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를 능멸하는 현상은 우리가 다시 종교개혁의 길로 나아가야한다는 사실이 아니고는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예배를 드린 맘몬우상숭배는 오늘 타락의 징후를 드러낸 일부 교회의 모습입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제게 가장 큰 울림의 가르침을 주신 스승은 찬송가323장<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를 작사하신 고(故) 이호운목사님이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분은 내가 학교를 입학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우연하게 그분이 쓰신 글을 찾아 읽으면서-벌써 돌아가신 그분께서 살아있는 교수들보다 더 크게-제 가슴을 울리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제가 목사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늘 성찰하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사자들이요, 평화의 사신이요, 진리의 예언자요, 어린양의 목자들이요, 상한 심령들을 위한 제사장들이요, 위로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모든 부정과 불의와 부패를 뜯어 고치고 새것을 세우는 혁명아적 새 시대의 건설자입니다. 여러분은 새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교회와 인간사회를 혁신하는 투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정을 혁신하고 불의를 몰아내며 부패를 밝히는 용감하고 참신한 개혁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전감신학보-고 이호운 학장>

 

이호운목사님의 가르침을 짧은 한 줄로 요약하면 <종교개혁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 분은 신학생들에게 앞으로 목사가 되면 꼭 이런 목사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부름 받은 목사의 소명이라는 겁니다. 고 이호운목사님의 이 가르침은 제 평생 가슴에 새기며 가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를 빈들공동체로 부르시고 <기드온300용사>의 비전을 세워주신 까닭도 하나님께서 오늘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시려는 거룩한 섭리 가운데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개혁신앙을 위한 투쟁

 

오늘 종교개혁주일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많은 영감을 준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이 말씀이 현재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납니다. 이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제들이 읽었던 라틴어 성경이었습니다. 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마틴 루터는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는 부분에서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여 이 부분에서 <오직(sola)>이라는 단어를 첨가했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義)에 이른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은 제도와 교리를 바꾸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제도개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된 신앙의 회복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참된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개혁신앙은 수없는 사람들의 피와 목숨으로 지킨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가 개혁신앙안에서 바로 서기 위하여 각자 자기 몫의 투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주일에

 

가장 개혁이 절실한 건 무엇보다 내 신앙입니다. 돈이 최고라는-아름답게 분칠한 세상의 가치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오늘 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투쟁 없이는 온전한 주님의 자녀로 결코 살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부지중에라도 주님이나 교회보다 내가 더 커져있을 때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과 은혜와 말씀으로-참된 그리스도인을 위한 선한 싸움을 해내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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