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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朝鮮史]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비사[祕史]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병란[兵亂]중에 역사[歷史]의 큰 화란[禍亂]을 남긴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사[祖先史]의 마지막 왕조[王朝]인 조선[朝鮮]을, 청[淸]나라의 그늘에 가리우고, 근세[近世]에 이르기까지 그 어두운 역사[歷史]의 암흑[暗黑]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어두운 역사[歷史]는, 조선사[朝鮮史]를 무력화 시키는 자들에게 심대한 빌미를 제공하고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삼전도비[三田渡碑]이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인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지금도 서울에 남아 반도[半島] 조선[朝鮮]을 고착[固着]화 시키는데 주요 역사[歷史]의 증거[證據]로 그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다.
조선[朝鮮]의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청[淸]나라의 대병에게 마지막으로 항전[抗戰]을 벌인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오늘도 서울의 외곽에서 서울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청군[淸軍]의 30만 대병과 맞서 항전[抗戰]을 벌인 남한산성[南漢山城]이 과연 지금의 반도[半島]에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 맞는 것일까 ?
인조[仁祖]는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왕자[王子]를 포함하여 왕실[王室]의 인척을 강도[江都]로 들어가게 하고, 자신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청군[淸軍]과 일전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전세[戰勢]의 불리함을 들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내려와 강도[江都]로 가고자 하였으나 중지하였다고 역사[歷史]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청[淸]나라의 대병이 이미 한양[漢陽]의 경도[京都]를 점령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진격하고 있는 전시[戰時]의 급박한 상황에서, 지금의 서울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경도[京都]라고 한다면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수 없는 기록[記錄]이다.
지금 서울의 지형[地形]과 지세[地勢]로 볼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남[南]쪽이고 강도[江都]는 한양[漢陽]의 서북[西北]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경도[京都]는 그 중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歷史] 교육[敎育]은 강화도[江華島]가 강도[江都]라고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으며, 역사서[歷史書]의 원전[原典] 기록[記錄]이 되레 거짓이 되는 웃지 못할 역사[歷史]의 혼돈[混沌]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당시[當時]의 상황이 지금의 서울이라면, 인조[仁祖]는 강도[江都]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청[淸]나라의 군영[軍營]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에 청[淸]나라의 30만 대병이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도[일명, [강화도,江華島,] 江都]를 들어 갈수 있겠는가 ?
역사[歷史]속의 강도[江都]가 강화도[江華島]라고 하지만 이 또한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산물이다. 역사서[歷史書]에는 강도[江都]라고 하는데 강화도[江華島]는 무엇인가 ?
강도[江都]는 강[江]이 흐르는 인근[隣近]의 도읍지[都邑地]요, 강화도[江華島]는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섬을 말하는 것이니 강도[江都]가 강화도[江華島]라고 하는 근거[根據]는 무엇인가 ?
당시[當時]에 청[淸]나라의 군사는 기병[騎兵]이 주력이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전란[戰亂]을 겪으며 인조[仁祖]를 보필했던 조선[朝鮮]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을 통해서 들어나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전쟁 상황을 보면, 청[淸]나라의 주력이었던 수[數] 십만[十萬]의 기병[騎兵]부대는 조선[朝鮮]의 서북[西北]에 있는 수[數] 많은 조선[朝鮮]의 성곽[城郭]들을 그대로 지나쳐 도성[都城]인 경도[京都]에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서울에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있으니, 조선[朝鮮]의 왕조[王朝]는 반도[半島] 있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은 반도[半島]에서 일어났고, 지금의 서울이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이라고 !........... 그러나 그러한 혹자에게 반문을 한다면,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當時]의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江都]가 현재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江華都]가 맞는가라고 ?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역사[歷史]에 치욕[恥辱]을 남기 병자호란[丙子胡亂]의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江都]가 반도[半島]의 조선[朝鮮]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삼전도비[三田渡碑]는 다른 곳에서 옮겨져 왔거나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산물인 것이다.
더 나아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한양[漢陽]은 반도[半島]가 아니며,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을 그린 소위 고지도[古地圖]라는 것들은 모두 조선사[祖先史]의 역사[歷史]를 말살[抹殺] 하려는 자들의 소행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은 것이다. 한곳이 무너지면 흔적[痕迹]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가장 큰 병란[兵亂]이었으며, 조선사[朝鮮史]의 영역[領域]에서 일어나 나라를 세운 청[淸]나라에 굴복한 통한[痛恨]의 역사[歷史]를 간직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어느 지역에서 역사[歷史]의 자취를 간직하고,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말해 줄 것인가 ? 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찾는다면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의 도읍지[都邑地] 찾아가는데 지름길의 역할을 할 것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조선인[朝鮮人]의 손으로 기록[記錄]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와,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대신[大臣]들과 선유[先儒]들이 기록[記錄]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따라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찾아 이를 논증[論證]하고, 강도[江都]는 어디에 있었는가를 유추[類推]하여 조선사[朝鮮史]의 비사[祕史]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계기를 삼고자 한다.
만인[萬人]이 다 알고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조선사[朝鮮史]에 관계된 많은 기록[記錄]들이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하려는 자들에 의하여 교감[校勘] 편집[編輯]되고, 중요[重要]한 내용들은 누락[漏落]되고 변조[變造] 되었으며, 멸실[滅失]되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안개속에 가려지고 혼란[混亂]스러운 내용들이 난무[亂舞]하고 있다.
허나 그러한 내용들 속에서 진실[眞實]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기록[記錄]들을 실, 낫으로 엮어서 피폐[疲弊]된 역사[歷史]의 본 모습을 찾고, 조선사[朝鮮史]를 어둡게 드리우는 위선[僞善]과 거짓된 가면을 벗겨, 오늘도 우리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江都]를, 조선사[朝鮮史]의 본래의 위치[位置]로 환원[還元]시켜, 역사[歷史]의 본원[本源]으로 되돌아오게 해야 할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인조[仁祖] 33권[卷], 14년[年] 1636년[年] 병자[丙子], 12월[月] 14일[日] 갑신[甲申]
甲申, 開城留守馳啓 賊兵已過松都 於是 遂定去邠之議, 命禮房承旨韓興一 奉廟 社主及嬪宮, 先向江都 以金慶徵爲檢察使 李敏求爲副令 陪護嬪宮之行 [중략]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播遷]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예방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명하여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을 받들고 먼저 강도[江都]로 향하게 하였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嬪宮]의 행차를 배행[陪行]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중략]
인조[仁祖] 33권[卷], 14년[年] 1636년[年] 병자[丙子], 12월[月] 14일[日]갑신[甲申]
日晩, 大駕將發 而太僕人盡散 內乘李星男 牽御馬而來 駕到崇禮門 聞賊兵已到良鐵坪 上御南大門樓 令申景禛結陣于門外 崔鳴吉請赴虜陣 以觀變, 遂遣鳴吉 請成於虜 以緩其師 [중략]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상[上]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陳]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鳴吉]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중략]
上還從水溝門 出向南漢山城 是時 變出倉卒 侍臣或有步從者 城中人父子 兄弟 夫婦相失 哭聲震天 初更後 大駕到南漢山城 金瑬勸上移避江都 洪瑞鳳 李聖求亦贊之 李弘冑以爲 勢必狼狽 不可僥倖 他人皆不知有此議 兵房承旨李景曾密言于執義蔡裕後 裕後遂請對 執不可 景曾請招問金瑬 [중략]
상[上]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城] 안 백성은 부자, 형제, 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도착하였다. 김류[金瑬]가 상[上]에게 강도(江都)로 옮겨 피할 것을 권하였는데, 홍서봉[洪瑞鳳]과 이성구[李聖求]도 그 말에 찬동하였으며, 이홍주[李弘胄]는 형세로 보아 반드시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병방승지[兵房承旨] 이경증[李景曾]이 집의 채유후[蔡裕後]에게 이 일낭패하게 될 것이니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두 이런 의논이 있는 을 은밀히 말하였다. 유후[裕後]가 드디어 청대[請對]하여 불가하다고 쟁집[爭執]하므로, 경증[景曾]이 김류[金瑬]를 불러 물어볼 것을 청하였다. [중략]
瑬曰 孤城駐蹕 外無所援 芻糧亦乏 江都則在我便好 在彼難犯 而且伊賊 意在上國 必不與我久相持 臣故曰 幸江都便 上仍與瑬附耳語問曰 路由何地 曰 當由果川 衿川 [중략]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고립된 성[城]에 계시면 외부의 구원도 없게 되고 마초와 양식도 부족할 것입니다. 강도[江都]는 우리에게 편리하고 저들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또 저 적은 뜻이 상국[上國]에 있으니, 반드시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강도[江都]로 가시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이어 김류[金瑬]의 귀에 대고 하문하기를,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하자, 아뢰기를, 과천[果川]과 금천[衿川]을 경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중략]
上曰 江都去此甚遠 何以得達乎 瑬曰 若以輕騎踔過衿 果之野 則足以得達矣 三司皆爭之 不能得 遂定移駕之計 一夜之間 城中鼎沸 [중략]
상[上]이 이르기를, 강도[江都]는 이 곳에서 무척 먼데 어떻게 도착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경기[輕騎]로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의 들을 가로질러 가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삼사[三司]가 모두 간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어가[御駕]를 옮길 계획을 정하니, 하룻밤 사이에 성[城] 안이 온통 들끓었다. [중략]
인조[仁祖] 33권[卷], 14년[年] 1636년[年] 병자[丙子], 12月 15日을유[乙酉]乙酉
大駕曉發山城, 將向江都 時 雪風甚緊 山路 乃舍 氷滑 馬不得着足 上 氷滑 乃舍 馬步行 度其終不得達 遂還入城 [중략]
대가[大駕]가 새벽에 산성[山城]을 출발하여 강도[江都]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上]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城]으로 되돌아 왔다. [중략]
兩司啓曰 命將出師 專爲固邊禦敵 而賊兵渡江之後 無一處遮遏, 縱賊深入 以至廟社播越 車駕倉皇 國家之大變 臣民之至痛 爲如何哉 請都元帥金自點 副元帥申景瑗 平安兵使柳琳 義州府尹林慶業 竝命依律定罪 上不從 [중략]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오로지 변방[邊防]을 굳게 지키고 적[敵]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적병[敵兵]이 강[江]을 건넌 뒤로 어느 한 곳도 막아내지 못한 채 적을 깊이 들어오도록 버려둠으로써 종묘사직[宗廟社稷]이 파월[播越]하고 거가가 창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가[國家]의 큰 변란이요, 신민[臣民]의 지극한 고통이니,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부원수 신경원[申景瑗],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림[柳琳],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을 모두 율[律]대로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上]이 따르지 않았다. [중략]
인조[仁祖] 34권[卷], 15년[年] 1637년[年] 정축[丁丑], 1월[月]1일[日] 신축[辛丑]
朔辛丑 上在南漢山城行宮 [중략]
상[上]이 남한산성[南漢山城] 행궁[行宮]에 있었다. [중략]
인조[仁祖] 34권[卷], 15년[年] 1637년[年] 정축[丁丑], 1월[月]1일[日] 신축[辛丑]
虜汗合諸軍 結陣于炭川 號三十萬 張黃傘登城 東望月峯 俯瞰城中 [중략]
청[淸]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城]에 올라 동쪽으로 월봉[月峯]을 바라보고 성[城] 안을 내려다 보았다. [중략]
인조[仁祖] 34권[卷], 15년年 1637년[年] 정축[丁丑], 1월[月]8일[日] 무신[戊申]
禮曹啓曰 頃日行禱祀于溫祚王 倉卒苟簡 群情皆以爲未盡 宜更擇日 遣重臣 虔誠致祭 且人窮反本 疾痛必呼父母 崇恩殿睟容 今方奉安于城內寺刹 自上親祭 以祈冥祐似當 上從之 [중략]
예조[禮曹]가 아뢰기를, 지난번 온조왕[溫祚王]의 도사[禱祀]를 행할 때 엉겁결에 구차하게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미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시 날짜를 가려 중신[重臣]을 파견해서 경건하게 정성껏 치제[致祭]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궁해지면 근본[根本]을 생각하게 되고 병이 들어 아프면 부모를 부르게 마련입니다. 숭은전[崇恩殿]의 수용[睟容]을 방금 성[城] 안의 사찰에 봉안하였으니, 상[上]께서 친히 제사를 지내어 명명[冥冥]한 가운데 신[神]의 가호[加護]를 비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중략]
인조[仁祖] 34권[卷], 15년[年] 1637년[년] 정축[丁丑], 1월[月]22일[日] 임술[壬戌]
世子下封書于備局曰 泰山旣垂於鳥卵之上 國步誰措於磐石之堅 事已急矣 予旣有弟二人 又有一子 亦可奉宗社 予雖死於賊 尙何憾焉 其以予出城之意, 言之 [중략]
세자[世子]가 봉서[封書]를 비국[備局]에 내렸다. 태산[泰山]이 이미 새알[鳥卵]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國家]의 운명을 누가 경돌[磬石]처럼 굳건하게 하겠는가.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賊]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城]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중략]
인조[仁祖] 34권[卷], 15년[年] 1637년[年] 정축[丁丑], 1월[月]22일[日] 임술[壬戌]
虜人聲言 分兵犯江都 時 氷澌塞江 人皆以爲虛張 而徵諸路舟師 命留守張紳統之 忠淸水使姜晋昕領船先至 守燕尾亭 紳治船于廣成津 裝載未完 [중략]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留守] 장신[張紳]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중략]
虜將九王 抄諸營兵 號三萬 車載三板船數十 進屯甲串津 連放紅夷砲 水陸軍劻勷不敢近 賊乘虛急渡 紳 晋昕 慶徵 敏求 皆望風而走 將官具元一 謀欲斬紳, 驅兵下陸決戰, 紳覺而防之 元一痛哭, 投海而死 中軍黃善身 領數百軍 在津頭後山 遇賊軍潰死之 [중략]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江]을 건넜는데, 장신[紳], 강진흔[晋昕], 김경징[慶徵], 이민구[李敏求]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이 장신을 참[斬]하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紳]이 깨닫고 이를 막았으므로 구원일[具元一]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중략]
賊分屯城外高阜 中官負元孫 出避在城, 朝士一時跳散 大君募勇士出擊 不能敵 或死或帶傷而歸 俄而 大兵圍城, [중략]
적이 성[城] 밖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중관[中官]이 원손[元孫]을 업고 나가 피했으며, 성[城]에 있던 조사[朝士]도 일시에 도망해 흩어졌다.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出擊]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 왔다. 얼마 뒤에 대병[大兵]이 성[城]을 포위하였다. [중략]
虜王遣人呼于城下曰 屠城易耳 頓兵不進者 詔命也 皇帝已許和 急遣官來聽 大君謂韓興一曰 彼言不足信 而和事則已聞之矣 試往觀之 卽馳往陣所 則曰 大臣來 乃可也 大君令君 尹昉往焉 [중략]
노왕[虜王]이 사람을 보내어 성[城] 밑에서 소리치기를, 성[城]을 함락시키는 것은 쉽지만 군사를 주둔시키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조명[詔命] 때문이다. 황제[皇帝]가 이미 강화를 허락하였으니, 급히 관원을 보내 와서 듣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군[大君]이 한흥일[韓興一]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말은 믿을 수 없으나 화친하는 일은 이미 들었다. 시험삼아 가서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즉시 말을 달려 진소[陣所]로 가니,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와야만 한다. 하였으므로, 대군[大君]이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에게 가도록 하였다. [중략]
肩輿入陣中 稱老病垂死不爲禮 左右露刃劫之 虜王止之 仍言朝廷成和之事 請與大君相見 歸報則大君曰 彼以好意誘我 固不可測 而曾聞東宮請行 苟可以解急 吾何以畏死 遂行至陣門 [중략]
견여[肩輿]로 진중[陣中]에 들어가 늙고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음을 핑계대고 예모를 갖추지 않으니, 좌우에서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였으나 노왕[虜王]이 중지하게 하였다. 이어 조정이 화친을 이룬 일을 말하고 대군[大君]과 서로 만나 보기를 원하였다. 돌아와서 보고하니, 대군[大君]이 이르기를,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일찍이 듣건대 동궁[東宮]께서도 가기를 원했다고 하니, 진실로 위급함을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진문[陣門]으로 갔다. [중략]
虜王令譯者導之 入致敬禮焉 日晩 大君與虜王 聯騎入城 留兵城外 分路東西 令彼我勿相雜糅 戢其軍兵 無得殺戮 令諸陣許還被擄士女 請大君修簡于行在 令宰臣馳啓 [중략]
그러자 노왕[虜王]이 역자[譯者]로 하여금 인도해 들이게 하고 경례[敬禮]를 하였다. 저물녘에 대군[大君]이 노왕[虜王]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성[城]으로 들어갔는데, 군사들은 성[城] 밖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은 동서[東西]로 길을 나누어 피차간에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군병을 단속하여 살륙을 못하게 하였으며, 제진[諸陣]으로 하여금 사로잡힌 사녀[士女]를 되돌려 보내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대군[大君]에게 행재소[行在所]에 글을 올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치계[馳啓]하도록 청하였다. [중략]
越二日 譯者還言 國王將見皇帝 仍還都城 大君 宮嬪 諸宰可還京 臨發 國舅西平府院君 韓浚謙子孫 避在宮內 自裁者十餘人 翌日 虜王還渡江 蒙兵作亂 焚掘殺掠 殆盡無遺 都提調尹昉 奉廟社主 落留城中 埋安于廟下 至是, 爲蒙兵所掘 仁順王后神主見失 [중략]
이틀이 지난 뒤에 역자[譯者]가 돌아와 말하기를 ‘국왕[國王]이 장차 황제[皇帝]를 만나 보고 인하여 도성[都城]으로 돌아갈 것이니, 대군[大君]과 궁빈[宮嬪] 그리고 여러 재신(宰臣)도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출발할 즈음에 국구[國舅]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자손으로서 궁내[宮內]에 피신해 있다가 자결한 자가 10여 인이었다. 이튿날 노왕[虜王]이 도로 강[江]을 건너갔는데, 몽병[蒙兵]이 난을 일으켜 거의 남김없이 불지르고 파헤치며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도제조 윤방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성중[城中]에 뒤떨어져 머물면서 묘[廟] 아래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몽병[蒙兵]이 파헤쳐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신주[神主]를 잃어버렸다. [중략]
인조[仁祖] 34권[卷], 15년[年] 1637년[年] 정축[丁丑], 1월[月] 22일[日]임술[壬戌]
前議政府右議政金尙容死之 亂初 尙容因上敎 先入江都 及賊勢已迫 入分司 將欲自決 仍上城南門樓 前置火藥 麾左右使去 投火自燒 其一孫 一僕從死 [중략]
전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金尙容]이 상[上]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인하여 성[城]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 [중략]
尙容字景擇 號仙源 尙憲之兄也 爲人重厚謹愼 事宣廟 歷踐淸華 遇事犯顔極言 光海時 不參廢母之論 禍且迫而不懼 及上反正 寵遇尤重 位至鼎軸 而恒思斂退 雅操如一 雖相業無稱 而足以矜式一時 及至顚沛之際 爲殉義之先 江都人士 服其忠烈 立祠以祭之 [중략]
상용[尙容]의 자는 경택[景擇]이고 호[號]는 선원[仙源]으로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묘[宣廟]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해야 할 일을 만나면 임금이 싫어해도 극언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박두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上]이 반정[反正]함에 이르러 더욱 중하게 은총을 받아 지위가 정축[鼎軸]에 이르렀지만,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국가[國家]가 위망에 처하자 먼저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강도[江都]의 인사들이 그의 충렬[忠烈]에 감복하여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중략]
前右承旨洪命亨 少有才名 爲流輩所許 屢踐從班 去邠之日 未及扈駕 追入江都 從金尙容 死於南樓之火 後贈吏曹判書 [중략]
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은 젊었을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번 종반[從班]을 역임하였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던 날, 미처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뒤따라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문루[南門樓]의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뒤에 이조 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중략]
生員金益兼 參判槃之子也 魁司馬 有才名 將母避兵于江都 及賊至 從金尙容於南樓 其母將自裁 招與相訣 益兼泣曰 吾何忍見母死 遂不去 與之俱焚 別坐權順長 參判盡己之子也 與益兼俱往南樓 金尙容將自焚 使之避去 不聽而同死 後皆命贈官 [중략]
생원 김익겸[金益兼]은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재명[才名]이 있었다. 어미를 모시고 강도[江都]에 피난 중 적이 이르자 남문루[南門樓]에서 김상용[金尙容]을 따랐다. 그의 어미가 장차 자결하려고 불러다 서로 이별하자 익겸이 울면서 ‘내가 어찌 차마 어미가 죽는 것을 보겠는가.’ 하고, 마침내 떠나지 않고 함께 타죽었다.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은 참판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다. 김익겸[金益兼]과 함께 남문루[南門樓]에 갔는데, 김상용[[金尙容]이 장차 스스로 불에 타죽으려 하면서 그들에게 피해 떠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함께 죽었다. 뒤에 모두 관직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중략]
司僕寺主簿宋時榮 佐郞邦祚之子也 素有操行 以忠孝自厲 江都陷 先自治襲斂之具 神氣安閑 卽自縊死 前司憲府掌令李時稷 延城府院君 石亨之後也 性謙愼 公直 及賊入城 謂宋時榮曰 吾輩讀古人書 今日尙可苟生乎 時榮先死 自臨爲殯, 鑿兩坎 虛其一曰殯我 於是 [중략]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은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로 본래 조행[操行]이 있었으며 충효[忠孝]를 스스로 힘썼다.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먼저 스스로 염습[斂襲]할 기구를 마련해 놓은 뒤 신기[神氣]를 편안히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전 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은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후손으로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했으며 공평하고 정직하였다. 적이 성[城]에 들어오자 송시영[宋時榮]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인[古人]의 글을 읽었는데, 오늘날 구차스럽게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시영[宋時榮]이 먼저 죽자 스스로 가서 초빈한 뒤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그 중 하나를 비워두고 말하기를, 나를 묻어라, 하였다. [중략]
作書寄其子憬曰 長江失險 北軍飛渡 醉將恇㤼 背國偸生 把守瓦解 萬姓魚肉 況彼南漢 朝暮且陷 義不苟活 甘心自決 殺身成仁 俯仰無怍 嗟爾吾兒 愼勿傷生 歸葬遺骸 善養老母 縮跡鄕關 隱而不起 區區遺願 在爾善述 遂自縊死 [중략]
이에 글을 지어 그의 아들 이경[李憬]에게 부치기를, 장강[長江]의 요새[要塞]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장강[長江]을 건넜는데,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파수하는 일은 와해되고 만 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더구나 저 남한산성[南漢山城]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천지[天地]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 아, 내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며 고향에서 숨어 살고 나오지 말라. 구구하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네가 나의 뜻을 잘 잇는 데 있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중략]
敦寧府都正沈誢 變初入江都 自矢捐生之志 受敵之日 其家人艤船請避 不聽 手寫遺疏曰 不意兇賊 今日渡甲津 宗社已亡 事無可爲者 臣與夫人宋姓 同死於鎭江 誓不負厚恩耳 遂冠帶 北向四拜 自縊死 其妻亦盥沃易服 偕死 [중략]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심현[沈誢]은 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江都]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 뜻을 맹세하였다. 적의 공격을 받던 날, 그의 가족이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피하도록 청하니, 듣지 않고 직접 유소[遺疏]를 쓰기를, 뜻하지 않게 흉적이 오늘 갑진[甲津]을 건넜으니, 종사[宗社]가 이미 망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臣]은 부인[夫人] 송성[宋姓]과 함께 진강[鎭江]에서 죽어 맹세코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하고, 드디어 관대[冠帶]를 갖추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처도 손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함께 죽었다. [중략]
上見遺疏曰 國家於沈誢 別無深恩厚澤 而臨亂死節 先於重臣 若非大賢 何以至此 其妻宋氏同死之節 亦甚可嘉 令該曹竝旌門 錄用其子孫 以表忠烈 [중략]
상[上]이 유소[遺疏]를 보고 이르기를, 국가[國家]가 심현[沈誢]에게 별로 은택을 내려 준 일이 없는데, 난리에 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죽기를 중신[重臣]들보다 먼저 했으니 대현[大賢]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그의 처 송씨가 함께 죽은 절개 또한 매우 가상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함께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여 그 충렬[忠烈]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였다. [중략]
前司憲府掌令鄭百亨 觀察使孝成之子也 其高祖以下四世 皆以節孝旌閭 孝成年老 病且革 避兵于江都 賊入城 百亨守其父不去 及賊大掠 知不免 具朝服 望山城四拜 自縊死 其兩妾亦同死 [중략]
전 사헌부 장령 정백형[鄭百亨]은 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인데, 그의 고조[高祖] 이하 4세[世]가 모두 절의[節義]와 효도로 정려[旌閭]되었다. 정효성[鄭孝成]이 연로한데다 병까지 위독하여 강도[江都]에 피난하였는데, 적이 성[城]에 침입하자 정백형[鄭百亨]이 그의 아비를 돌보며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게 노략질하자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서 조복[朝服]을 갖추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바라보며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두 첩도 함께 죽었다. [중략]
前工曹判書李尙吉 變初入江都 在村舍 聞賊兵渡江 馳入城 卒爲敵所害 尙吉以先朝耆舊 歷兩司之長 後以年八十超資 至是死焉 禮曹啓請旌表 [중략]
전 공조 판서 이상길[李尙吉]은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江都]에 들어가 시골 집에 있었는데, 적병이 강[江]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성[城]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상길[李尙吉]은 선조[先朝]의 기구[耆舊]로서 양사의 장관을 역임하였고, 뒤에 나이 80이 넘었다 하여 초자[超資]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예조[禮曹]가 정표[旌表]하도록 계청하였다. [중략]
忠義閔垶 驪陽君 仁伯之子也 江都被陷之日 先刃三子 三婦後自殺 其餘儒士 婦女之聞變自決者 遇賊不屈而死者 不可殫記 [중략]
충의[忠義] 민성[閔垶]은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의 아들이다. 강도[江都]가 함락되던 날, 먼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벤 뒤 자살하였다. 기타 유사[儒士]와 부녀[婦女]로서 변란을 듣고 자결한 자와 적[賊]을 만나 굴복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중략]
인조[仁祖] 34권[卷], 15년[年], 1637년[년] 정축[丁丑] 2월[月] 1일[日]신미[辛未]
上接見龍 馬兩將於養和堂 龍骨大以皇帝命 進高麗玉印及申景瑗副元帥之印 上謝之 仍言蒙古尙在都城 侵掠人物 龍骨大卽使從胡 驅出蒙古於城外 令眞㺚守門 且曰 皇帝明當班師 不可不來送 [중략]
상[上]이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를 양화당[養和堂]에서 접견하였다. 용골대가 황제[皇帝]의 명으로 고려 왕인[高麗王印] 및 신경원[申景瑗]의 부원수[副元帥]의 인[印]을 올리니, 왕[王]이 사례하였다. 상[上]이 이어 몽고[蒙古] 사람들이 아직도 도성에 있으면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한다고 말하니, 용골대가 즉시 종호[從胡]로 하여금 몽고[蒙古] 사람들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게 하고, 진달[眞㺚]로 하여금 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황제[皇帝]가 내일 돌아갈 예정이니, 나와서 전송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중략]
上曰 諾 仍請刷還被擄人 龍骨大曰 皇帝自當有處分矣 上又言歲貢難辦之狀 兩將曰 貴國事勢 帝所目覩 當自再明年始行矣 [중략]
상[上]이 알았다고 하고, 인하여 사로잡힌 사람을 쇄환하도록 요청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황제[皇帝]께서 직접 처분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또 세공[歲貢]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말하자, 두 장수가 말하기를, 귀국의 형세를 황제[皇帝]께서 직접 보셨으니, 의당 재명년[再明年]부터 시행할 것입니다. 하였다. [중략]
농암집권지이십사[農巖集卷之二十四]
강화부남문선원선생순의비기[江華府南門仙源先生殉義碑記]
嗚呼 此爲江華府城南門 故右議政文忠公仙源金先生殉義之地也 先生諱尙容 安東人 萬曆十八年庚寅 登第 歷事累朝 位宰相 以忠厚正直 爲士類所宗 崇禎丙子 北虜入寇 上將幸江都 先生時已去相 且老病 命從廟社主先行 於是張紳爲本府留守 而檢察使金慶徵 副使李敏求 受命任軍事矣 [중략]
아, 이곳은 강화부성[江華府城] 남문[南門]으로, 고[故]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선원 김 선생이 순의[殉義]한 곳이다. 선생의 휘[諱]는 상용[尙容]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만력[萬曆] 18년인 경인년[庚寅年]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대의 임금을 차례로 섬기며 재상을 역임하였는데, 충후[忠厚]함과 정직함으로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았다.숭정[崇禎] 병자년[丙子年]에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와 상[上]이 강도[江都]로 행차하려 할 적에, 선생은 그 당시 이미 정승 자리에서 물러난 데다 늙고 병들었으므로, 상[上]은 선생에게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신주[神主]를 따라 먼저 가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장신[張紳]이 강화부[江華府] 유수[留守]였는데,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가 왕명을 받고 군무[軍務]를 담당하였다. [중략]
旣而大駕迫虜先鋒 倉卒入南漢城 賊築長圍守之 內外不通 諸道勤王師至者 輒皆潰賊 又分兵窺江都 紳 慶徵等 恃有天塹險 不以爲意 慶徵尤驕恣 人有以軍事諫者 輒盛氣逆折 [중략]
얼마 지나지 않아 대가[大駕]가 오랑캐의 선봉에 쫓겨 황급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적[賊]은 이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주위에 성책[城柵]을 둘러치고 안팎을 지키며 모든 길을 통제하였는데, 성[城]에 접근하는 근왕병[勤王兵]들은 번번이 궤멸되고 말았다. 적은 또 군대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엿보았는데, 장신과 김경징 등은 강도[江都]가 천혜[天惠]의 요새[要塞]임을 믿고 개의치 않았다. 김경징은 더욱 교만 방자하여 군무에 대해 간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화를 내며 지레 꺾어 버리곤 하였다. [중략]
先生奮而謂曰 行在受圍日久 鄭世規敗 道路傳言已死 湖西無主事者 副使宜急往 收散卒糾義旅 督湖南兵在後者 以赴君父之急 機不可緩 又言南漢消息斷絶 宜亟募死士 起居官守 十往必有一達 臣子之義 豈忍束手坐觀 慶徵等相與詆之曰 自有權此者 非避亂大臣所得與 一無所聽施 [중략]
선생은 분개하여 성상[聖上]께서 머무시는 곳이 포위된 지 여러 날이 되었다. 그런데 정세규[鄭世規]는 패하여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호서[湖西]에서 군무를 주관할 사람이 없다. 부사가 급히 가서 흩어진 병졸을 수습하고 의병[義兵]을 규합하며, 후방에 있는 호남[湖南]의 군대를 독려하여 위험에 처한 임금께 달려가야 한다. 조금도 시기를 늦춰서는 안 된다.라고 이르고, 또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소식이 끊겼으니, 한시바삐 목숨을 바칠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성상[聖上]의 안부를 살펴 오게 해야 한다. 열 번 가면 한 번은 반드시 성[城]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신하[臣下]의 의리상 어찌 차마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 등은 서로 함께 비방하며 “이 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피란 중의 대신[大臣]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하고는, 한 가지도 따라 시행하는 것이 없었다. [중략]
或謂先生 事去矣 盍具舟備緩急 先生歎曰 主上在圍中 安危不可知 宗社元孫 皆在此 萬一不幸 有死而已 安所偸生 居數日 有報賊大至 紳 慶徵猶不信曰 唉怯夫 江水流澌 賊安能飛渡 詰朝 賊果從甲串渡江 我兵望之 不戰自潰 慶徵等一時奪舸遁去 [중략]
어떤 자가 선생에게 일이 이미 글렀습니다. 어찌 비상시를 대비하여 배를 준비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선생은 탄식하기를, “주상[主上]은 포위되어 안위[安危]를 알 수 없고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원손[元孫]은 모두 이곳에 있으니, 만에 하나 불행한 사태가 생기게 되면 죽음이 있을 뿐, 내 어디에서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겠는가. 하였다.며칠 뒤에 적군이 강도[江都]로 대거 몰려온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장신과 김경징은 믿지 않고 참 겁쟁이로구나. 강물에 얼음덩이가 떠다니는데 적이 어찌 날아서 건너겠느냐. 하였다. 이튿날 동틀 무렵 적이 과연 갑곶[甲串]으로 강[江]을 건너오자, 아군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궤멸하고 말았다. 김경징 등은 일시에 배를 빼앗아 타고 도망갔다. [중략]
賊遂平 行至城下 先生顧與家人訣 登城門樓積硝黃 據其上解衣授傔人 麾左右使去 放火自燒死 孫壽全時年十三 在側 命僕掖歸 挽衣泣不去曰 當從翁死 尙何歸 僕亦不去同死 別坐權順長 進士金益兼 先約同志 分隷城門協官軍 爲死守計 至是 竟與先生俱死 實丁丑正月二十二日也 [중략]
적이 마침내 평탄하게 성[城] 밑에 이르자, 선생은 가족들에게 이별을 고한 다음 성문[城門] 누각[樓閣]에 올라 화약을 쌓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서 옷을 벗어 종에게 건네고, 좌우에 있는 자들을 물리쳐 멀리 가라 하고는 불을 놓아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당시에 열세 살 난 손자 수전[壽全]이 곁에 있었는데, 선생이 종에게 데리고 돌아가라고 명하였으나 옷깃을 잡고 울며 떠나지 않고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어디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하였다. 종도 떠나지 않고 함께 죽었다. 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과 진사 김익겸[金益兼]은 이 일에 앞서 뜻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성문[城門]을 나누어 살피며 관군과 협력하여 목숨을 바쳐 지킬 각오를 하였는데, 이때에 마침내 선생과 함께 죽었으니, 때는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22일이었다. [중략]
蓋先生旣沒 而國家旌其閭曰忠臣 之門又立祠于府城南七里 賜額忠烈 權公金公及他死義者 李公尙吉以下十一人 皆得腏食 崇報之典 備矣 上之二十四年戊寅 我伯氏承命爲本府留守 至則首謁祠下 [중략]
선생이 별세한 뒤에 나라에서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하고 또 강화부[江華府]의 성 남쪽 7리 되는 곳에 사당을 세워 충렬[忠烈)]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에 권공과 김공 및 기타 의[義]를 위해 죽은 자들로 이공 상길[李公尙吉] 이하 11인이 모두 제향을 받게 되었으니, 은덕에 보답하는 전례[典禮]가 제대로 갖추어졌다 할 것이다.금상[今上] 24년인 무인년에 우리 백씨[伯氏]가 명을 받들고 본부[本府]의 유수[留守]가 되었는데, 본부에 당도하자 맨 먼저 사당[祠堂]을 알현하였다. [중략]
旣又登南門 喟然太息曰 夫以魏公子之能下士也 而大梁東門 人猶志之不倦 太史公至書于策 況以先生忠節赫赫 爲百世人紀所賴 而此可以無識乎 於是伐石爲碑 高四尺 大書以篆之 樹于門之側 俾昌協記其本末 [중략]
이윽고 또 남문[南門]에 올라 크게 탄식하며 위[魏]나라 공자[公子] 신릉군[信陵君]은 선비들에게 겸손했던 것만으로도 그가 활동했던 대량[大梁] 동문[東門]을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였으며, 그 사실을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역사에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선생이 이룬 혁혁한 충절[忠節]은 먼 후대[後代]에 이르도록 인륜이 보존되는 바탕이 될 것이니,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돌을 다듬어 높이 넉 자 되는 비석[碑石]을 만들고 앞면을 큰 글씨로 새겨 남문[南門] 곁에 세우고는, 나 창협에게 이 일의 전말에 대해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중략]
昌協竊惟忠義之於感人也深矣 自丁丑至今六十餘年 其遺老盡矣 而此南門者 人猶指而相語曰 某公死於此 往往談說其時事如昨日 而士大夫往來道此府者 亦必先問南門何在 爲之感歎歔欷而不能去 自是而言 則雖無碑 宜可也 而要以表揭遺跡 使人人者 一倍瞻視。而雖百世之遠 無或忘失 則碑又安可無也 [중략]
나는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충의[忠義]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크다. 정축년[丁丑年]부터 지금까지 60여 년이 흘러 당시 일을 직접 보았던 노인들은 다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이 남문[南門]을 가리키며 서로들 아무 공이 이곳에서 죽었다. 하고 왕왕 그 당시의 일을 마치 어제인 양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왕래하다 이 부[府]를 지나가는 사대부들도 반드시 먼저 남문[南門]이 어디냐고 물어 찾아와서는, 감탄하고 탄식하며 떠날 줄을 모른다. 이로 보면 비석[碑石]이 없어도 괜찮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요컨대 그 유적[遺跡]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저마다 한층 더 우러러볼 수 있게 하고 백대[百代]의 먼 훗날까지도 행여 잊어버리는 일이 없게 하는 점으로 보면, 비석[碑石]이 또 어찌 없어도 된다 하겠는가. ? [중략]
顧前政未有以此爲意者 豈其以保障爲急而不暇於此也 然而知節義之壯人國家 有甚於城池甲兵 則今日之爲 其孰曰非急務哉 伯氏名昌集 實先生之弟文正公淸陰先生諱尙憲之曾孫 然後之人 若復以是而疑此擧之或私也 則又非知大公之道者也 [중략]
이곳을 다스린 사람 중에 아직까지 이러한 뜻을 품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마도 국가[國家]의 최후 보루[堡壘]를 견고[堅固]히 하는 데에 급급하여 이 일에까지 마음을 쓸 경황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절의[節義]가 성지[城池]나 무기보다 훨씬 더 나라를 굳건히 한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의 이 일에 대해 그 누가 급선무가 아니라고 하겠는가.백씨의 이름은 창집[昌集]으로, 사실 선생의 아우 문정공[文正公] 청음[淸陰] 선생 휘 상헌[尙憲]의 증손이다. 그러나 후세[後世] 사람이 만약 이 점을 가지고 이 일이 혹 사사로운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면, 그는 또 지공무사[至公無私]의 도리를 아는 자가 아닐 것이다. [중략]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
지리지[地理志] 서문[序文]
東國地志 略在 三國史 他無可稽 我世宗大王命尹淮 申檣等 考州郡沿革 乃撰是書 歲壬子書成 厥後離合不一 特擧兩界新設州鎭 續附于其道之末云 [중략]
우리 나라 지지[地志]가 대략 삼국사[三國史]에 있고, 다른 데에는 상고할 만한 것이 없더니,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윤회[尹淮]·신장[申檣] 등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의 연혁을 상고하여 이 글을 짓게 해서, 임자년[1432]에 이루어졌는데, 그 뒤 주군[州郡]이 갈라지고 합쳐진 것이 한결같지 아니하다. 특히 양계[兩界]에 새로 설치한 주[州]·진[鎭]을 들어 그 도[道]의 끝에 붙인다. [중략]
지리지[地理志]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
日長山城在州治南 高險 周回三千九百九十三步 內有軍資庫井七 遇旱不渴 又有旱田水田共一百二十四結 三國史云 新羅文武王始築漢山晝長城 [중략]
일장산성[日長山城]은 주치[州治]의 남쪽에 있다. 높고 험하며, 둘레가 3천 9백 93보[步]요, 안에 군자고[軍資庫]와 우물 7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도 물이 줄지 아니한다. 또 밭과 논이 있는데, 모두 1백 24결[結]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한산[漢山]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 고 하였다. [중략]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백제[百濟]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또 도읍[都邑]을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 옮겼다 지금의 경도[京都]는 당[唐]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쳐서 없애고, 당[唐]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신라[新羅]가 그 땅을 점차 거두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고쳐 한산주[漢山州]라 하고, 또 남한산주[南漢山州]라고도 불렀다. [중략]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漢州]라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는데 광주[廣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가 되었다가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에 다시 목[牧]이 되었다. 본조[本朝]에서는 이를 따랐다.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다. [중략]
군명[郡名], 남한산[南漢山], 한산주[漢山州], 한주[漢州], 회안[淮安], 봉국군[奉國軍]. [중략]
형승[形勝], 한수[漢水]의 남[南]쪽으로 토양이 기름지다. 백제[百濟] 시조[始祖] 온조[溫祚]의 말이다. 고적[古跡]편에 나타나 있다. 면이 모두 높은 산이다. [중략]
고적[古跡], 온조왕고성[溫祚王古城]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왕도[王都]에 늙은 할미가 변화하여 남자가 되고, 다섯 호랑이가 성[城]안에 들어왔으며, 왕[王]의 어머니가 돌아갔다. 왕[王]이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國家]가 동[東]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北]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강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적은 데다가, 더욱 지금 요사스러운 조짐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세상을 버리시니 사세가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반드시 장차 도읍[都邑]을 옮겨야겠다. [중략]
내 어제 나가서 한수[漢水]의 남[南]쪽을 순시하여 보니, 토지가 비옥하다. 마땅히 그곳에 도읍[都邑]하여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7월에 한산[漢山]에 나아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백성들을 옮기고, 9월에 성[城]과 궁궐[宮闕]을 세웠다. 일장산성[日長山城] 바로 신라[新羅] 때 주장성[晝長城]이다. 문무왕[文武王]이 쌓은 것인데, 안에 여섯 우물과 시내가 있다. 주위가 8만 6천 8백 척, 높이는 24척인데 석축이다. [중략]
제영[題詠], 사면운산옹관사[四面雲山擁官舍] 이색[李穡]의 시[詩]에, 사면의 구름산이 관사를 옹위하였는데, 한 줄기 강물은 어대[漁坮]를 둘렀더라. 하였다.
창산녹수장의구[蒼山綠水長依舊]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푸른 산과 푸른 물은 길어 예와 같은데, 푸른 기와와 붉은 기둥은, 몇 번이나 새 것으로 바꾸었는고. 하였다. [중략]
대동지지[大東地志] 광주[廣州]
연혁[沿革], 인조[仁祖] 원년에 유수[留守]로 승격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4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고 관청을 성[城]안으로 옮기었다 수어사[[守禦使]를 설치하여 광주[廣州] 등의 진[鎭]을 절제하게 하고 군무[軍務]는 목사[牧使] 겸 방어사[防禦使]가 보게 하였다. 11년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고 15년에 부윤[府尹]으로 고쳤다. 효종[孝宗] 3년에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6년에 폐지하였다. [중략]
숙종[肅宗] 6년에 다시 겸하게 하였으나, 다시 폐지하였다. 9년에 유수[留守]로 승격[陞格]시키고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고 또 경력[經歷]을 두었다. 전영[前營]을 여주[驪州]로 옮기고 16년에 다시 부윤[府尹]을 두어 방어사[防禦使]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전영장[前營將]을 두고 경력을 없앴다. 17년에 다시 수어부사[守禦府使]를 겸하게 하고 21년에 이를 폐지하였다. [중략]
영조[英祖] 26년에 수어사[守禦使]를 폐지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으며, 경력을 두고 전영을 이천[梨川]으로 옮기었다. 35년에 유수[留守]와 경력을 폐지하고 수어사[守禦使]를 두어 경청[京廳]을 설치했는데, 부윤府尹] 겸 방어사[防禦使] 전영장[前營將] 수성장[守城將]은 옛과 같다. 정조[正祖] 19년에 유수[留守]로 승격하고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고 나가서 본성[本城]을 진무하게 하였다. 따라서 경청[京廳]은 폐지하고 진[鎭]을 여주[驪州]로 옮겼다. [중략]
궁실[宮室], 행궁[行宮], 상궐[上闕], 하궐[下闕], 좌전[左殿], 우실[右室] 등이 있다. 재덕당[在德堂], 한남루[漢南樓], 인화관[人和館], 사근평[肆覲坪], 행궁[行宮] 관해 좌승당[坐勝堂], 일장각[日長閣], 수어영[守禦營], 제승헌[制勝軒] 등이다. [중략]
가정선생문집권지육[稼亭先生文集卷之六]
청풍정기[淸風亭記]
至正己丑夏四月 覲省還鄕 行次樂生驛 廣牧白君和父走書而邀之 且曰 官舍之北 得古淸風亭基 作四柱屋 實一州之勝 請記之 余行忙姑復之 曰後當如京 可一至而寓目焉 爲記未晚也 [중략]
지정[至正] 기축년[己丑年] 여름 4월에 내가 근친[覲親]하러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낙생역[樂生驛]에 머물렀는데, 광주 목사[廣州牧使] 백군 화보[白君和父]가 서한을 보내 초청하면서 말하기를, 관사 북쪽에 옛날 청풍정[淸風亭]의 터가 있기에, 네 기둥을 세워서 집을 하나 지었는데, 실로 한 고을의 승경이라 할 만하다. 그대가 그 기문[記文]을 지어 주면 좋겠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가는 길이 바빠서 우선 회답하기를, 뒤에 서울에 갈 것이니, 그때 한번 가서 구경해 보고 기문을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중략]
明年至廣則白君已召還 而李君某代任半歲矣 時方酷熱 氣息如縷 乃登所謂淸風亭 倚柱而披襟 精神淸爽 毛髮蕭颯 如蟬蛻溷濁而出乎塵埃之外 [중략]
그런데 이듬해에 광주[廣州]에 갔더니 백군은 이미 부름을 받고서 조정에 돌아갔고, 이군[李君] 모[某]가 반년 전에 후임자로 와 있었다. 그 시절이 바야흐로 혹독하게 더운 때라서 기식[氣息]이 가늘게 이어지는 것이 실낱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른바 청풍정[淸風亭]이라고 하는 곳에 올라가서 기둥에 기대어 옷깃을 풀어 헤쳤더니, 정신이 상쾌해지고 모발이 쭈뼛해지는 것이 마치 매미가 썩은 도랑 속에서 껍질을 벗고 진애[塵埃] 밖으로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중략]
李君置酒從容言曰 四柱之制 簡則簡矣 朝夕陽暉 東西雨脚 坐客病焉 余翼其兩旁 而作南榮各五尺 北亦如之 稍廣且深 旣圬而將丹碧之 而子適至 盍擧觴落之 而書歲月以志 [중략]
이군[李君]이 술자리를 베풀고는 조용히 말하기를, 네 개의 기둥으로 세운 그 규모가 간단하기는 간단하나, 아침저녁으로 햇빛이 비치는가 하면 동[東]쪽과 서[西]쪽으로 빗발이 들이쳐서 이 자리를 찾는 손님들이 모두 아쉽게 여기곤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 양쪽에다 처마를 잇대고 남[南]쪽에 각각 다섯 자의 추녀를 달았으며 북[北]쪽도 그렇게 하였더니, 조금 넓어지면서 깊숙한 맛이 우러났다. 이에 흙손질을 끝내고서 단청을 하려는 참에 그대가 마침맞게 찾아와 주었다. 그러니 술잔을 들어 낙성[落成]을 축하하고 연월[年月]을 기록하여 기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중략]
余旣許白君矣 乃問亭之廢幾年 而父老無有知之者 則今之起廢實同於刱新 春秋書作 有謂不宜作者 又謂魯長府何必改作 聖人垂敎之意微矣 [중략]
기문[記文]을 써 주기로 한 것은 내가 이미 그 전에 백군[白君]에게 허락한 터였다. 그래서 정자[亭子]가 무너져서 없어진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물어보았더니 부로[父老] 중에도 아는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 무너진 옛 정자[亭子]를 다시 세운 것이야말로 정자[亭子]를 새로 처음 세운 것과 같다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지었다[作]’라고 쓴 것 중에는 그렇게 지으면 안 되었다는 의미로 말한 경우도 있고, 또 노[魯]나라 장부[長府]를 하필 새로 지어야 하느냐고 말한 그 속에도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내린 은미한 뜻이 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략]
余觀廣之爲州 三面皆高山 北雖曠遠 地勢夷下 公廨民居 如在井底 賓客之來 寧病于卑陋 而不知跬步之間有此爽塏 則此亭之作 當不在貶例 [중략]
내가 광주[廣州] 고을의 형세[形勢]를 살펴보건대, 삼면[三面]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북[北]쪽이 비록 광활하게 멀리까지 보이기는 하였으나 지세[地勢]가 낮고 평평하였으므로, 공해[公廨]와 민가가 마치 우물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빈객이 이곳에 와서 볼 적에 어찌 비루한 곳보다 괴롭게 느끼기야 하겠는가마는, 몇 걸음도 되지 않는 사이에 이런 상쾌한 정자[亭子]가 있을 줄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정자[亭子]를 지은 것은 성인[聖人]이 볼 때에도 비난의 대상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余於是書 若夫淸風之義 白說盡之 余不復贅 白君同年 李君執友 爲政俱有廉勤聲 庚寅仲夏 記 [중략]
그래서 내가 이렇게 쓰게 된 것인데, 청풍[淸風]이라고 이름 붙인 그 뜻에 대해서는 내가 정자[亭子]에 처음 올라갔을 때에 그냥 토로해 본 느낌 속에 다 들어 있으니, 다시 췌언[贅言]을 하지 않으리라. 백군[白君]은 나와 동년[同年]이요, 이군[李君]은 나의 집우[執友]인데, 정사[政事]를 행하면서 모두 염근[廉勤]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경인년[庚寅年] 중하[仲夏]에 적다. [중략]
홍제전서[弘齋全書卷一]
남한치첩입망[南漢雉堞入望] 여재안중[如在眼中] 음차기성윤[唫此寄城尹]
層巒疊石漢南城 西將臺高可按兵 請看三田頑石立 當時奇計媿陳平 [중략]
층층 봉우리와 겹겹 바위 위의 한남성[漢南城]이여, 서장대[西將臺] 높직하여 군대를 주둔시킬 만하네, 삼전도[三田渡에] 완악한 빗돌 서 있는 걸 보게나, 당시에 진평[陳平] 같은 기계[奇計] 없었던 게 부끄럽구려. [중략]
역사서[歷史書]와 선유[先儒]들의 문집[文集]을 통하여 드러나는 내용들은, 한국[韓國]에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화도[江華島]는, 인조[仁祖]가 겪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江都]가 아니다.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어찌 반도[半島]에서 나라를 세웠으랴 !
지금의 한강[漢江]이 한수[漢水]라면,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은 한강[漢江]의 남쪽에 있는데,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한수[漢水]의 북[北]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다는 기록[記錄]을 어떻게 이해 할수 있겠는가 ?
이러한 기록[記錄]을 남긴 계곡선생[谿谷先生]은 인조대왕[仁祖大王]의 당대[當代]에 천하[天下]를 울리던 신동[神童]으로서, 유학자[儒學者]이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으로 공신[功臣]에 책봉[冊封]되었고 조선[朝鮮]의 4대 문장가[文章家]로 알려진 분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지리지[地理志]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그 어느 곳에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대하여 그 대략[大略]만 실려 있을 뿐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대하여 자세히 알수 있는 내용이 전무[全無]하다.
구글 위성사진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올리는 것이니, 참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에 있는 남한산성[南漢山城] 출처 구글어스
서울에서 남쪽으로 보는 남한산성[南漢山城] 출처 구글어스
남한산성[南漢山城]과 서울 출처 구글어스
인조[仁祖] 34권[卷], 15년[年] 1637년[년] 정축[丁丑], 1월[月]22일[日] 임술[壬戌]
世子下封書于備局曰 泰山旣垂於鳥卵之上 國步誰措於磐石之堅 事已急矣 予旣有弟二人 又有一子 亦可奉宗社 予雖死於賊 尙何憾焉 其以予出城之意, 言之 [중략]
세자[世子]가 봉서[封書]를 비국[備局]에 내렸다. 태산[泰山]이 이미 새알[鳥卵]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國家]의 운명을 누가 경돌[磬石]처럼 굳건하게 하겠는가.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賊]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城]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중략]
제남[濟南]의 동남에 위치한 제[齊] 장성이라고 하는 산성[山城] 출처 구글어스
제남[濟南]의 동남에 위치한 제[齊] 장성이라고 하는 산성[山城] 출처 구글어스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正祖] 8권[卷], 3년[年] 1779 을해[己亥], 8월[月] 7일[日] 임오[戊午]
御行宮 上謂守禦使徐命膺曰 此地形勝, 可謂天險 而只緣武備之不修 一遇烟塵之警 收拾不得 豈地利之不足歟 此城 乃完豐府院君李曙所築乎 命膺曰 仁廟甲子始築 丙寅畢役矣 上曰 周回畿許步 命膺曰 城內則六千二百九十七步 外則七千二百九十五步 [중략]
행궁[行宮]에 나아가 임금이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에게 이르기를, 이곳의 형승[形勝]은 천험[天險]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비[武備]가 닦이지 않아서 한 번 전란[戰亂]을 당하면 수습하지 못하니, 어찌 지리[地利]가 부족한 것이겠는가 ? 이 성[城]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쌓은 것인가 ? 하고 물으니,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인묘[仁廟] 갑자년[甲子年]에 쌓기 시작하여 병인년[丙寅年]에 일을 끝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둘레가 몇 보[步]쯤인가 ? 물으니,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성[城] 안쪽은 6천[千] 2백[百] 97 보[步]이고 바깥은 7천[千] 2백[百] 95보[步]입니다. 하였다. [중략]
上曰 汗峰城築 在何時 命膺曰 肅廟癸丑 守禦使吳始復 始築;乙酉 閔鎭厚爲守禦使時 毁撤 先朝己未 趙顯命改築矣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汗峰]에 성[城]을 쌓은 것은 어느 때인가 ? 물으니,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숙묘[肅廟] 계유년[癸丑年]에 수어사[守禦使] 오시복[吳始復]이 쌓기 시작하였는데 을유년[乙酉年]에 민진후[閔鎭厚]가 수어사[守禦使]이었을 때에 훼철[毁撤]하였다가 선조[先朝] 기미년[己未年]에 조현명[趙顯命]이 개축[改築]하였습니다. 하였다. [중략]
上曰 丙子 虜人登此峰 放大砲乎 命膺曰 其時砲丸 至擊行宮殿柱矣 上曰 若登此峰 則俯瞰城中云 此處築城 以防敵人之先據 誠不可已矣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丙子]에 노인[虜人]이 이 봉우리에 올라 대포[大砲]를 쏘았는가 ? 물으니,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그때 포환[砲丸]이 행궁[行宮]의 전주[殿柱]를 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봉우리에 오르면 성[城] 안을 굽어볼 수 있다 하니, 이곳에 성[城]을 쌓아 적인[敵人]이 먼저 점거하는 것을 막는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다. [중략]
南將臺, 乃山城之主峰 而其爲要害 甚於汗峰 故判書閔鎭厚建白築城矣 中間廢棄 至先朝壬申 留守李箕鎭 又爲筵白, 仍築兩墩臺 今則無城 而只有墩臺乎 命膺曰 城則已爲中廢 只有墩臺 而一墩可容百人 此若專力固守 則於山城 爲掎角之勢矣 [중략]
남장대[南將臺]는 산성의 주봉[主峰]이고 그 요해[要害]가 되는 것이 한봉[汗峰]보다 심하므로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성[城]을 쌓을 것을 건백[建白]하였으나 중간에 폐기되었고, 선조[先朝] 임신년[壬申年]에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또 연중[筵中]에서 건백하여 이어서 두[兩]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이제는 성[城]은 없고 돈대[墩臺]가 있을 뿐인가 ? 물으니,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성[城]은 이미 중간에 폐기되고 다만 돈대[墩臺]가 있을 뿐인데 한 돈대[墩臺]에 1백[百] 인[人]을 용납할 수 있으니, 이것을 전력[專力]하여 굳게 지키면 산성[山城]과 기각[犄角]의 형세[形勢]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중략]
上曰 南漢本名日長山 而國朝中葉以後 始稱淸凉山 人以爲 淸兵來侵之徵云 此言果有之乎 命膺曰 此是故老相傳之言也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남한[南漢]은 본디 이름이 일장산[日長山]이었으나 국조[國朝] 중엽 이후에 비로소 청량산[淸凉山]이라 칭하였는데, 사람들이 청[淸]나라 군사가 와서 침범할 조짐이라 하였다. 이런 말이 과연 있는가 ? 물으니,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로[故老]가 서로 전[傳]하는 말입니다. 하였다. [중략]
정조[正祖] 8권[卷], 3년[年] 1779 을해[己亥], 8월[月] 9일[日] 경신[庚申]
庚申 上在南漢御西將臺 行城操 命時 原任大臣 守禦使入侍 上曰 先大王庚戌行幸時, 歷臨此臺 今日予又來此 山川依舊 觸物興懷 予心益切愴慕 丙子 賊兵乘夜負板登城 我軍覺之 灌以湯水 無不摩爛而退云 此地卽其處乎 [중략]
임금이 남한[南漢]에 있었다. 서장대[西將臺]에 나아가 성조[城操]를 행하였는데,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수어사[守禦使]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대왕[先大王] 경술년[庚戌年]행행[行幸] 때에 이 대[臺]에 들르셨고 오늘 내가 또 여기에 왔는데 산천이 옛날과 다름없어 사물에 접하면 감회를 일으키니, 내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슬프고 사모하게 된다. 병자년[丙子年]에 적병이 밤을 타서 널빤지를 지고 성[城]에 오르는 것을 아군이 발각하고 끓인 물을 부으니 모두 문드러져 물러갔다 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인가 ? [중략]
領議政金尙喆曰 然 其時仁祖大王 夢見溫祚王 來告賊兵登城 聖祖驚覺, 卽命偵之 果如其言 令將士擊却 斬獲甚衆, 還都日 特命建溫祚廟 春秋享祀 事甚靈異矣 殿下旣臨此地 仰惟昔日 聖心之感慕 當復如何 第念人君之孝 異於匹庶 此武王所以善繼善述 而爲天下達孝也 必以聖祖之盛德 至善 爲法於今日 而恩盡繼述之道焉 [중략]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때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꿈에 온조왕[溫祚王]이 와서 적병이 성[城]에 오른다고 알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조[聖祖]께서 놀라 깨어 곧 명하여 정탐하게 하셨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아서 장사[將士]를 시켜 격퇴하게 하셨는데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으므로, 환도[還都]한 날에 특별히 명하여 온조묘[溫祚廟]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하게 하셨으니, 일이 매우 영이[靈異]합니다. 전하께서 이곳에 와서 옛날을 우러러 생각하시니, 성심[聖心]이 느껴 사모하는 것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임금의 효도는 여느 사람들과 다르거니와, 이것은 무왕[武王]이 잘 계술[繼述]하여 천하의 달효[達孝]가 된 까닭이니, 반드시 성조[聖祖]의 성덕[盛德], 지선[至善]을 오늘날에 본받아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다할 것을 생각하소서. 중략]
至北門樓 宣饌諸臣 敎曰 此城形便 今始周覽 城在衆峰之巓 左右山谷 崎嶇峻急 可謂天險之地也 實爲緩急可恃 而初不得一與敵人決戰 終未免城下之辱 蓋地利之不足恃 有如是矣 然 易 稱 王公設險以守國 若使地利人和 俱得其宜 則何患乎淸兵乎 [중략]
상[上]께서 북문루[北門樓]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하교[下敎하기를, 이 성[城]의 형편을 이제야 비로소 두루 보았다. 성[城]이 뭇 봉우리 꼭대기에 있고 좌우의 산골짜기가 언틀먼틀 가파르니 천험[天險]인 땅이라 하겠다. 참으로 급할 때에 믿을 수 있는 곳인데, 당초에 한번 적과 결전[決戰]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성]이 떨어지는 치욕[恥辱]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지리[地利]를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역경[易經]에 왕공[王公]은 험조[險阻]를 베풀어 나라를 지킨다. 하였거니와, 지리[地利]와 인화[人和]가 다 그 마땅한 것을 얻었다면 어찌 청병[淸兵]을 걱정하였겠는가 ? 하였다. [중략]
御枕戈亭 謂守禦使徐命膺曰 完豐府院君李曙築城時 得此亭於榛莽茂沒之中云 然否 命膺曰 事載本州邑誌 而此是溫祚故城 故人以爲溫祚王所建矣 [중략]
침과정[枕戈亭]에 이르러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에게 말하기를,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성[城]을 쌓을 때에 덤불이 우거진 가운데에서 이 정자[亭子]를 찾아냈다 하는데 그러한가 ? 하고 물으니,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일이 본주[本州]의 읍지[邑誌]에 실려 있는데, 여기는 온조왕[溫祚王]의 옛 성[城]이므로 사람들이 온조왕[溫祚王]이 세운 것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중략]
還御鍊兵錧謂大臣曰 今者動駕 寔遵列聖朝攸行之例 程路近百餘里 日字爲七八日 百官、軍兵之驅馳勞苦 實爲矜慮 至於三邑民人 其所憫念 尤非尋常 且顒望之餘 若無實惠 則何以慰民情 而安予心乎 列聖朝行幸 皆有特恩 予亦仰遵德意 今秋大同, 幷命蠲減 以爲一分救濟之道 山城之民 尤不可無別般施惠之政 卿等旣已登筵 凡所矯弊釐瘼之道 相與講究稟定也 明將回鑾 予心戀戀不能忘矣 [중략]
연병관[鍊兵館]에 환어[還御]하여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이번 동가[動駕]는 참으로 열성[列聖] 때에 행하신 전례를 따른 것이나, 길이 1백여 리에 가깝고 날짜가 일여드레가 되어 백관[百官]·군병[軍兵]이 달려온 노고가 참으로 가엾고 염려된다. 세 고을의 백성[百姓]으로 말하면 그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욱이 심상한 것이 아니고 또 바라던 끝에 실혜[實惠]가 없다면 어떻게 백성[百姓]의 뜻을 위로하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겠는가 ? 열성[列聖] 때의 행행[行幸]에는 다 특별한 은혜[恩惠]가 있었으므로 나도 덕의[德意]를 우러러 따라서 올 가을의 대동[大同]을 모두 견감[蠲減]하라고 명하여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방도로 삼았으니, 산성[山城]의 백성[百姓]에게는 더욱이 특별하게 은혜[恩惠]를 베푸는 정사(政事)가 없어서는 안된다. 경들은 이미 연석[筵席]에 입대[入對]하였으니, 무릇 폐단[弊端]을 바로 잡을 방도를 함께 강구하여 품정[稟定]하라. 내일은 회란[回鑾]할 것이므로 내 마음이 연연[戀戀]하여 잊을 수 없다. [중략]
命膺曰 山城民人之弊 莫如保恤庫債錢事也 當初給債 雖出於取息補用之計 而今則行之已久 本錢已盡 利息猶存 至於徵隣 徵族 闔境騷擾 自將校 胥吏 下至軍卒 平民 而無一人得免於此弊者矣 上曰 當一幷蕩滌 以紓其倒懸之急 [중략]
서명응이 말하기를, 산성[山城] 백성[百姓]에게 폐단[弊端]이 되는 것은 보휼고[保恤庫]의 빚돈만한 것이 없습니다. 당초 빚을 준 것은 비록 이식을 받아 보태어 쓸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제는 시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본전은 이미 다하였는데 이식은 오히려 남아 있어서 이웃에서 거두고 겨레붙이에게서 거두기까지 하므로 온 경내[境內]가 소요합니다. 장교[將校], 서리[胥吏]로부터 아래로 군졸, 평민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이 폐단[弊端]을 면할 자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탕척[蕩滌]하여 몹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늦추어 주어야 하겠다. 하였다. [중략]
左議政徐命善曰 恤民之聖意 孰不欽仰 而此若全數蕩滌 則經用之見縮 可悶也 上曰 肅廟嘗下敎曰 苟利於民 雖肌膚何惜 先大王 每以此敎 稱道於絲編之間 予小子在傍承聞 至今莊誦 自予嗣服 仰體二聖之德意 凡於便民利民之事 奚但肌膚不惜乎 國用之見縮, 不足顧恤也 [중략]
좌의정(左議政) 서명선(徐命善)이 말하기를, 백성[百姓]을 돌보시는 성의[聖意]는 누구인들 흠양[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이를 전수 탕척[蕩滌]한다면 경용[經用]이 줄어질 것이니,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숙묘[肅廟]께서 일찍이 하교[下敎]하시기를, 백성[百姓]에게 이롭다면 살갗인들 어찌 아까우랴 ! 하셨고, 선대왕[先大王]께서 번번이 이 하교[下敎]를 사륜[絲綸] 사이에 일컬으셨다. 나 소자[小子]가 옆에서 듣고 지금까지도 배송[拜誦]하고 내가 사복[嗣服]하고부터는 이성[二聖]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몸받거니와, 무릇 백성[百姓]을 편하게 하고 백성[百姓]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어찌 피부가 아깝지 않을 뿐이겠는가 ? 국용[國用]이 줄어지는 것은 돌볼 것도 못된다. [중략]
仍敎曰 駕臨本府 先問民瘼 所謂保恤庫取利錢 爲最錮弊云 宜施蘇革之政 俾有息肩之道 前後城內民人債錢蕩滌 文券燒火 仍謂命膺曰 此旣蕩滌 則支放之需 不可無推移給代之道 [중략]
이어서 하교하기를, 거가[車駕]가 본부[本府]에 와서 먼저 민폐[民瘼]를 물었는데, 이른바 보휼고[保恤庫]의 취리전[取利錢]을 가장 깊은 폐단[弊端]이라 하니, 소생시키고 개혁하는 정사[政事]를 베풀어 부담을 벗는 방도가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전후 성[城] 안 백성[百姓]의 빚돈을 탕척[蕩滌]하고 문권[文券]을 불사르라. 하고, 이어서 서명응[徐命膺에게 이르기를, 이것을 탕척[蕩滌]하고 나면 지방[支放]에 드는 것을 다른 데에서 옮겨 채워 주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중략]
命膺曰 保恤庫債錢四千兩之特敎蕩滌 誠是城民生死肉骨之恩也 惟是留營支放四百兩 不可無區處之道 以臣所請 得廣州結錢一千四百兩 劃送保恤庫 以充支放等需用 或有用餘貯留該庫 以備不虞之費 從之 [중략]
서명응이 말하기를, 보휼고[保恤庫]의 빚돈 4천 냥을 탕척[蕩滌]하라고 특별히 하교[下敎]하신 것은 참으로 성[城]안 백성[百姓]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뼈에 살을 붙이는 듯한 은혜입니다마는, 유영[留營]의 지방 4백 냥은 구처[區處]할 방도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신이 청하여 얻은 광주[廣州]의 결전[結錢] 1천 4백 냥을 보휼고[保恤庫]에 획송[劃送]하여 지방 등의 수용[需用]에 충당하고 혹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해고[該庫]에 저축하여 두어 뜻밖의 비용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중략]
命膺曰 日昨筵中 俯軫行幸操鍊時 臣營責應之浩繁 劃給關西小米二千石 而昨年 海西添餉小米 以價賤不能賣 臣與道臣 往復相議 仍留黃、鳳兩邑 以守廳穀 使之糶糴矣 [중략]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일전에 연중[筵中]에서 행행[行幸]과 조련[操鍊] 때 신의 영문[營門]에서 책응[責應]하는 것이 많은 것을 염려하시어 관서[關西]의 좁쌀 2천 석을 획급[劃給]하셨습니다마는, 지난해 해서[海西]에서 관향[管餉]에 보탠 좁쌀도 값이 싸서 팔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과 도신[道臣]이 왕복하여 상의해서 그대로 황주[黃州], 봉산[鳳山] 두 고을에 두고 수어청[守禦廳]의 곡식으로 조적[糶糴]하게 하였습니다. [중략]
今番責應錢穀 一皆取用於臣廳管餉錢穀 無他稱貸之事 若又賣彼償此 則轉換之際 自多弊端 今番費入 直爲據實會減於管餉錢穀 而城之十五年不行 輒因費入之難辦 今此關西小米二千石 一依海西小米例 仍留該邑糶糴 以三千石耗三百石 請逐年作錢 儲蓄於留營 以爲城操後試射放 犒賞之費 從之 [중략]
이번에 책응한 전곡[錢穀]은 모두 신의 청[廳]의 관향전곡[管餉錢穀]에서 가져다 썼으므로 달리 빌린 일이 없는데, 또 저것을 팔아서 이것을 갚는다면 옮겨다가 바꿀 즈음에 절로 폐단[弊端]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비용으로 든 것은 곧바로 사실에 의거하여 관향전곡[管餉錢穀]에서 회감[會減]하되, 성조[城操]를 15년 동안 행하지 않은 것은 비용으로 드는 것을 장만하기 어렵기 때문이였으니, 이번 관서[關西]의 좁쌀 2천석도 한결같이 해서 좁쌀의 전례에 따라 그대로 고을에 두고 조적[糶糴]하여, 3천 석의 모곡[耗穀] 3백 석을 해마다 돈으로 바꾸어 유영[留營]에 저축하여 성조[城操]한 뒤에 시사[試射], 시방[試放]하고 호궤[犒饋]하고 상주는 비용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중략]
命膺曰 山城古有所捧釜鼎 錢二百八十兩 間年貿炭 留鹽, 或埋或燔 而皆內外營校吏輩經紀 故所謂炭鹽 有名無實 自今付之留營別將 炭則依前埋置 鹽則依江華 黃州例 作鹽山 庶有實效 從之 命府尹宋煥億率父老而進 命承旨慰諭之 [중략]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산성[山城]에는 예전에 부정전[釜鼎錢]을 받아들인 2백 80냥이 있어서 한 해 걸러 숯을 사고 소금을 사서 혹 묻거나 구웠거나, 다 내영[內營], 외영[外營]의 장교, 서리들이 경영하므로 이른바 탄염[炭鹽]이라는 것이 이름만 있고 실속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유영 별장[留營別將]에게 맡겨 숯은 전대로 묻어 두고 소금은 강화[江華], 황주[黃州]의 예[例]에 따라 염산[鹽山]을 만들면 실효[實效]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윤[府尹] 송환억[宋煥億]에게 명하여 부로[父老]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중략]
정조[正祖] 8권[卷], 3년[年] 1779 을해[己亥], 8월[月] 9일[日] 경신[庚申]
致祭溫祚王廟 顯節祠 永昌大君 明惠 明善 淑靜 淑敬 明安公主 忠獻公金昌集墓 完豐府院君李曙 文忠公閔鎭遠祠 險川 北門 雙嶺戰亡處 王十里辛亥餓死人 [중략]
온조왕묘(溫祚王廟)와 현절사(顯節祠]와 영창 대군[永昌大君], 명혜 공주[明惠公主], 명선 공주[明善公主],숙정 공주[淑靜公主], 숙경 공주[淑敬公主], 명안 공주[明安公主],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묘[墓]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사당과 험천[險川], 북문[北門], 쌍령[雙嶺]의 전망[戰亡]한 곳과 왕십리[王十里]에서 신해년[辛亥]에 굶어 죽는 사람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중략]
정조[正祖] 8권[卷], 3년[年] 1779 을해[己亥], 8월[月] 11일[日] 임술[壬戌]
敎曰 在前溫泉 豐德 驪州等遠道動駕 回鑾後皆有陪從錄冊子 陪從群臣 以至將士之姓名摠數及輦路事實 無小無大 纖悉備載 作爲徵後之道 昨於山城 略已提敎 此乃仰述之一道 今行陪從錄 守禦使徐命膺著成以進 [중략]
하교[下敎]하기를, 전에는 온천[溫泉], 풍덕[豊德]여주[驪州] 등 먼 길에 동가[動駕]하면 회란[回鑾]한 뒤에 모두 배종록[陪從錄] 책자가 있어 배종한 뭇 신하로부터 장사[將士]에 이르기까지 성명[姓名]과 총수[摠數] 및 연로[輦路]의 사실을 크고 작은 것을 물론하고 상세히 갖추어 기재하여 뒷 사람을 징계[徵戒]하는 방도로 삼았다. 어제 산성[山城]에서 대략 거론하여 하교[下敎]하였거니와, 이것은 우러러 계술[繼述]하는 한 방도이니, 이번 행차의 배종록[陪從錄,]을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이 지어 바치라. [중략]
又敎曰: “所重乎山城者, 夫豈但爲陰雨之備而已? 駕到日取見邑誌, 貿貿踈略, 不堪憑信。 況南北漢, 均是合障, 北城則有誌、有刊本, 獨此南城, 無是云。 卿於此等典攷, 嘗所留意, 則古事往蹟之雜出見聞者, 彙類分帙, 作成一書, 以圖壽傳之方, 不害爲尙文獻之一端。 卿其遵此編摩 [중략]
또 하교[下敎]하기를. 산성[山城]을 중히 여기는 까닭이 대저 어찌 전란[戰亂]에 대비하기 위한 것일 뿐이겠는가 ? 거가[車駕]가 갔을 때에 읍지[邑誌]를 가져다 보니 분명하지 않고 소략하여 믿을 만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남한[南漢], 북한[北漢]은 다 같은 보장[保障]인데, 북성[北城]에는 지[誌]가 있고 간본[刊本]이 있으나 남성[南城]에만 이것이 없다 한다. 경은 이러한 전고[典攷]에 대하여 일찍이 뜻을 둔 바이니, 옛 사적[史蹟]이 견문[見聞]에 여러 가지로 나온 것을 분류[分類]하여 한 서적을 만들어 길이 전할 방도를 꾀하는 것이 문헌[文獻]을 숭상하는 한 가지가 되는 데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경[卿]은 이를 따라 편집하라. 하였다. [중략]
칠성대[七星臺]의 제남[濟南] 동남[東南]에 있는 산성[山城] 출처구글어스
계곡선생집권지팔[谿谷先生集卷之八]
남한성기[南漢城記]
南漢山城 在京城東南四十里 漢水之陰 北距廣州故治五里而遙 本百濟舊都也 按地志百濟溫祚十三年 自慰禮城移都于此 歷十二世三百八十餘年 至近肖古王二十六年 又移南平壤。南平壤卽今之京都也 [중략]
남한산성[南漢山城] 은 경성[京城] 동남쪽 40리[里] 지점 한수[漢水]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광주[廣州]의 옛날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리[里]가 약간 더 되는 거리에 있다.이곳은 본디 백제[百濟]의 옛 도읍지였다. 지지[地志]를 상고해 보건대,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뒤 12세[世] 38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남평양[南平壤]이 바로 지금의 경도[京都)]이다. [중략]
自肖古之遷 歷濟,羅迄麗氏千有餘歲 城之興廢 不可復攷 曁我朝受命 治躋大猷 兵革不用 其於山谿城郭之固 宜若無所事也 壬辰倭難以來 訏謨石畫之士 多有意於是城 而當國者莫克建白 豈亦有所待歟 [중략]
그런데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백제[百濟], 신라[新羅] 그리고 고려조[高麗朝]가 끝나는 1천여 년 동안 이 산성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다.그 뒤 아조[我朝]에서 천명[天命]을 받으면서부터는 태평 정치가 크게 이루어져 병혁[兵革]을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 견고한 산성 역시 볼 일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고 난 이후로 원대한 계책을 생각하는 인사들이 이 산성에 깊은 관심을 쏟아 왔는데, 정작 당국자[當國者]들은 이에 대해 제대로 건백[建白]하지도 않았으니, 어쩌면 의지할 바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략]
今上踐阼之明年 有逆适之變 國家多虞 議者多言畿輔近地 宜有保障 首相李元翼,延平府院君李貴建言 請修是城 初命靑原君沈器遠掌其事 請役游手 用度帖以攝僧徒 尋遭喪去 [중략]
그런데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신 이듬해에 역괄[逆适] 의 변란이 일어나면서 국가에 많은 근심이 있게 되자, 기보[畿輔] 근처에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의논들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이에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건의하여 이 산성의 수리를 청하기에 이르렀다.그리하여 처음에 청원군[靑原君)]심기원[沈器遠]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가 놀고 먹는 인원들을 공사에 투입하려고 하면서 도첩[度帖]을 이용해 승도[僧徒]들을 포섭하다가 곧이어 상사[喪事]를 당해 그만두고 말았다. [중략]
摠戎使完豐府院君李曙代其任 乃廣召諸名僧覺性,應聖等 各摠其徒 分地賦功。而牧使文希聖,別將李一元,裨將李光春等寔監董之 [중략]
이에 총융사[摠戎使]인 완풍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대신 맡고는 바로 명승[名僧]인 각성[覺性]과 응성[應聖] 등을 널리 불러들여 각자 그 승도들을 총섭[摠攝]하게 한 뒤 지역별로 나눠 공사를 분담케 하였는데, 이때 목사[牧使] 문희성[文希聖]과 별장[別將] 이일원[李一元]과 비장[裨將] 이광춘[李光春] 등이 실제로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중략]
城之四周 基址宛然 蓋溫祚舊築也 乃因而增之 酌其夷險 爲之崇庳 以甲子九月經始 丙寅七月工告訖功 [중략]
산성의 사방 주위로 기지[基址]가 완연한 곳은 대개 온조왕[溫祚王]이 옛날에 쌓았던 곳이다. 바로 이를 기초로 그 위에 증축하면서 평탄하고 험난한 지형을 참작하여 고저[高低]의 높이를 맞추어 나갔는데, 갑자년[甲子年] 9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병인년[丙寅年] 7월에 완공을 고하였다. [중략]
城周若干丈尺 女墻千七百堞 設四門 其暗門倍之 中刱伽藍七區 館廨倉庾靡不備具 [중략]
산성은 둘레의 총 길이가 약간 장척[丈尺]이요, 여장[女墻]이 1700첩[堞]이며, 4문[門]을 설치한 외에 갑절이나 되는 암문[暗門]이 시설되었고, 그 속에 가람[伽藍] 일곱 곳이 새로 건립되었는가 하면 관해[館廨]와 창유[倉庾] 등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중략]
大抵南漢之山 中平而外隆 襟抱固密 體勢雄厚 城冠山巓 据隆而包平 城中井泉甚多 冬夏不竭 山谷諸水 合爲大澗 東注于水門 [중략]
대저 남한산[南漢山]은 가운데가 평평한 반면 밖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등 그 에워싼 형세[形勢]가 치밀하기 그지없는 가운데 웅혼[雄渾]한 자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산성[山城]은 바로 산 정상의 능선들로 이어져 높은 지세에 웅거하면서 평평한 지대를 포용하고 있다. 또한 성[城] 안에 늘 샘솟는 곳이 매우 많아 겨울이건 여름이건 마르는 날이 없는데,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들은 대간[大澗]으로 합쳐져 동[東]쪽 수문[水門]을 통해 빠져 나간다. [중략]
門之外 崖谷盤錯 羊腸百折者數十里 四面山勢 嶄截不可躋攀 而惟東南隅山脚稍坡陁 爲設砲樓三 乾維有小峯 可瞰城內 爲建一臺 築甬道以屬之城 遂移州治于此 儲胥民物 隱然爲一雄鎭 [중략]
문[門]의 바깥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溪谷]들이 곳곳에 서려 있고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수[數] 십리[十里]를 두고 이어져 있다. 산세[山勢]는 사방이 온통 깎아지른 듯하여 어떻게 부여잡고 올라갈 길이 없는데, 오직 동남[東南]쪽 모퉁이 산기슭만은 약간 경사져 있을 뿐이라서 포루[砲樓] 세 곳을 설치해 놓았다. 이와 함께 건방[乾方] 에 있는 작은 봉우리에서 성[城] 안을 내려다 볼 수가 있었으므로 누대[樓臺]를 하나 세운 다음 용도[甬道]를 쌓아 성[城]과 연결시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주치[州治]를 이곳으로 옮겨 인력과 물자[物資]를 비축[備蓄]함으로써 은연중에 하나의 웅진[雄鎭]이 형성되게 하였다. [중략]
易稱王公設險 以守其國 而春秋傳莒恃陋而不脩城郭 君子以爲罪之大者 然囊瓦城郢則沈尹戍譏之甚切何哉 本末兼擧則城固所以保民 苟不能衛。城無益也 [중략]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왕공[王公]이 요새지[要塞地]를 설치하여 그 나라를 지킨다. 하였고,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보면 거[莒] 나라가 외진 것을 믿고 성곽[城郭]을 수선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군자[君子]가 큰 죄라고 하였다. 그런데 낭와[囊瓦]가 영[郢] 땅에 축성을 하자 심윤수[沈尹戍]가 그지없이 절실하게 비난을 하였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본말[本末]이 아울러 이루어지면 성곽[城郭]으로 백성들을 물론 보호할 수 있겠지만 백성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 경우에는 성곽[城郭]이 있어도 아무 보탬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중략]
洪惟我聖上 應運中興 再正人紀 懲毖禍難 委任忠藎 深惟陰雨之備 大築斯城 使千年荊棘之墟 赫然改觀 遂爲京都輿衛 此殆氣數冥應 天人合發之會 其於設險守國之義 亦可謂得矣 [중략]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聖上]께서 중흥[中興]의 운세를 맞이하여 인륜[人倫]을 다시 바로잡으신 뒤 화난[禍難]을 경계하여 충직한 신하들에게 임무를 맡기시면서 사전 대비책에 깊은 관심을 보여 이 산성[山城]을 대대적으로 수축[修築]하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천년[千年] 동안 가시덤불에 묻혀 있던 폐허의 땅이 일약 면목을 일신하면서 마침내 경도[京都]를 방어하는 요새지[要塞地]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진정 기수[氣數]가 암암리에 응하고 천인[天人]이 합발[合發]한 일대 기회로서, 요새지[要塞地]를 설치해 나라를 지킨다.[設險守國]는 주역[周易]의 뜻과도 합치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중략]
繼自今 內而廊廟輔弼 外至封疆將帥之臣 協心殫慮 共恢良圖 要使人和地利兩得其益 則斯城也不待墨翟之械 而可以永保金湯矣 [중략]
지금 이후로 안으로는 낭묘[廊廟]에서 보필하는 신하들로부터 밖으로는 봉강[封疆]을 지키는 장수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합하고 지려[智慮]를 다하여 공동으로 좋은 계책[計策]을 시행함으로써 인화[人和]와 지리[地利]의 유익함이 서로 조화되게끔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 성[城]이야말로 묵적[墨翟]의 기구를 빌리지 않고서도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위력을 영원[永遠]히 과시하게 될 것이다. [중략]
不然徒恃山嵒之重阻 樓櫓之壯固 而曰孰敢侮予 抑末也 國家所以築斯城 爲遠大計者 夫豈其然 敢以是諗諸君子 其前後幹役有勞諸人 別記于下 [중략]
만약 그렇지 않고 한갓 험준한 산세[山勢]나 견고[堅固]한 성루[城樓]만은 믿고서 누가 감히 나에게 덤벼들까. 한다면 정말 졸렬한 짓이라 하겠다. 그러나 국가[國家]에서 이 성[城]을 수축[修築]하여 원대한 계책[計策]을 삼으려 했던 그 본의로 볼 때 어찌 그렇게 되기야 하겠는가. 감히 이런 내용으로 군자[君子]들에게 고하는 바인데, 그동안 공사[工事]를 주관하며 공로[功勞]를 세운 제인(諸人)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로 기록하였다. [중략]
태산[泰山]으로 알려진 지금의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 이 산동성[山東省]은 태산[泰山]과 공자[公子]의 곡부[曲阜] 성[城]으로 치장되고, 소위 고지도[古地圖]로부터 지금까지 노[魯]나라와 제[齊]나라로 그려지고, 또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다. 산동성[山東城]에 있는 모든 고성[古城]들은, 산성[山城]을 포함하여 제[齊]나라, 노[魯]나라 고성[古城]으로 둔갑되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는 상관없이 위선[僞善]과 거짓으로 포장되고 있으니,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가느다란 한줄기 광명[光明]의 등불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대륙사[大陸史]의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의 기록[記錄]과도 정면으로 위배[違背]되는 일일뿐만 아니라, 거짓과 위선[僞善]과 교묘[巧妙]하고 간사[奸邪]함이 판치는 세상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는 화[禍]를 자초[自招]하고 있는 일이다.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이후로, 수[數] 천년[千年]의 인간[人間]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진실[眞實]을 가리고 위선[僞善]과 거짓이 판을치고 간사[奸邪]하고 사악[邪惡]함이 세상을 덮고나서 비극[悲劇]을 초래하지 않은 예가 없는 것이, 역사[歷史]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敎訓]이다.
지금의 북경[北京]이 어떻게 연경[燕京]이 될수 있으며, 명[明]의 북경[北京], 청[淸]의 연경[燕京], 원[元]의 대도[大都]가 될수 있겠는가 ? 이는 대륙사[大陸史]의 원전[原典]을 깡그리 무시하고 소설을 쓰고 있는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우리의 선대[先代] 조상님들이 기록[記錄]한 역사서[歷史書]와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의 대신[大臣]들과 선유[先儒]들이 남긴 기록[記錄]을 보더라도,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의 중심지[中心地]는 지금의 중국[中國] 대륙[大陸] 이었다.
명[明]이 망[亡]하고 청[淸]이 일어나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가장 굴욕[屈辱]적인 국난[國亂]을 겪은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근세[近世]에 이르러,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으로 조선[朝鮮]만이 명운[命運]을 다한 것이 아니라, 일만년[一萬年]에 이르는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가, 침략자[侵略者]들에게 난도질을 당하고 역사[歷史] 자체가 소멸[消滅]되는 비운[悲運]을 겪고 말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오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 역사[歷史]는, 진실[眞實]의 가면을 쓰고 거짓과 위선[僞善]으로 국민[國民]의 정신[精神]을 무력화 시켜, 조선사[朝鮮史]의 혼[魂]과 얼을 단절[斷絶] 시키고, 위대[偉大]한 선대[先代]들의 웅혼[雄渾]한 기상[氣像]과 도도히 흐르는 역사[歷史]의 혼[魂]과 연원[淵源]을 끊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고, 영원[永遠]히 식민[植民]의 속국[屬國]으로 전락[轉落]시키는 사악[邪惡]하고 간교[奸巧]한 역사[歷史]일 뿐이다.
황도[皇都]를 세웠으면 당연히 황제[皇帝]의 나라이며, 육룡[六龍]을 몰고 다녔으면 당연히 천자[天子]의 나라일 것이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천하[天下]를 호령했으면 또한 마땅히 천자[天子]의 나라가 아니던가 ? 유석시조[惟昔始祖] 추모왕지창기야[,鄒牟王之創基也] 출자북부여[出自北夫餘] 천제지자[天帝之子]라고 했으니, 마땅히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는 천자[天子]이며 황제[皇帝]의 나라가 아니 겠는가 ?
태산[泰山] 줄기의 제[齊]장성이라고 하는 인근[隣近]의 산 정상에는, 거대한 천제단[天祭壇]이 태고[太古]의 풍상[風霜]을 이겨내고 지금도 그 자태를 웅연[雄然]히 갖추고 천하[天下]를 굽어보고 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산의 정상에 있는 단[壇]을 용봉[龍峯]이라고 부르지만, 언제 용[龍]이 천제단[天祭壇]에서 하늘로 오른단 말인가 ? 태산[泰山]을 중심으로 인근[隣近]의 곳곳에는,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증명[證明]할 수 많은 고대[古代]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그늘에 가리워져 있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유명하다는 곳만 찾아다니니 소중한 역사[歷史]의 숨결과 역사[歷史]의 보물[寶物]를 알 턱이 없는 것이다.
태산[泰山]이 있는 지역은 본래 산동성[山東城]이 아니다. 명[明]나라의 산동[山東] 포정사[布政司]가 요동[遼東]을 관할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황도[皇都]와, 고려[高麗]의 황도[皇都]가 자리잡은 지역이 분명해 지는 것은 미명[微明]의 어둠을 뚫고 새벽이 밝아지는 것과 같으리라.
제남[제남]의 동남[東南]쪽 약 20Km 에 위치하고 있는 칠성대[七星臺]가 있는 제[齊] 장성[長城]이라고 부르는 이곳의 산세[山勢]와 지형[紙型], 지리[地理], 성곽[城郭]의 구조, 환경[環境]등은 정조[正祖] 임금의 기록[記錄]과, 계곡선생문집[溪谷先生文集]의 남한성기[南漢城記]와 일치하고 있다. 또한 돌과 흙으로 축조[築造]한 고대[古代]의 성터의 흔적[痕迹]과 유지[遺址]가 현재에도 상당수 많이 보존[保存]되고 남아 있어서, 전해오는 기록[紀錄]들이 사실[事實]임을 증명[證明]하고 있으니 더 논[論]해서 무엇 하겠는가 ?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이렇게 처참히 무너지고 왜곡[歪曲]되었으며, 조작[造作]되고 변질[變質]되어 있는 것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읽어 가다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무엇하나 지금의 한국[韓國]의 지형[地形], 지세[地勢], 지리[地理]와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실정이 이러한대도 반도[半島]가 대대로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었다고 우긴다면, 그러한 자들은 분명히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歷史]가 무너진 민족[民族]은 자아[自我]를 상실[喪失]하게 될 것이며, 자아[自我]를 상실[喪失]한 민족[民族]은 더 이상 주권[主權]을 가진 국가[國家]라고 할수 없는 것이다. 오늘도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現實]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歷史]가 무너진 민족[民族]의 일면을 보는 것 같으니 어찌 탄식[歎息]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자아[自我]를 잃어버리게 하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의 폐해[弊害]는, 알게 모르게 국민[國民]들의 정신[精神]속에 스며들어 국민[國民]의 정신[精神]을 무너트리고, 국가[國家]의 정체성[正體性]이 소멸[消滅]되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國家]의 정도[正道]가 무너지며, 자라나는 후세[後世]들의 정신[精神]을 무너트려, 천하[天下]를 웅위[雄威]하고 천하[天下]를 호령할 혼[魂]과 얼의 싹을 자르게 되는 것임을 명심[銘心]해야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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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병자호란!
이것에 대한 상세한 원전의 기록을 구성해보고 싶었는데,.........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조선사의 진실은 언제 밝혀질 것인지를 논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성원하고, 많은 분들이 공부하며, 연구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오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늘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주 뵙기를 청합니다.
수고하신 력작 감사드립니다 탁마상성의 의미에서 다음의 말 씀 을 드려 봅니다 강화도 고려의 강화도는 왕건의 무덤이 있는 사천성이고 이곳이 충청도입니다 산동성 밑에 있는 제남은 제주의 남쪽으로 이곳도 강도인데 인조의 삼전도 치욕의 장소는 이곳이고 험한 제세를 이용하여 한판 붙어 보려고 남한산성으로 전장을 옮긴 것 입니다 강도는 남한산성을 경유하여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글로 이 정황을 확인 해 봤으면 하는 생각 입니다
위 글에서 남한산성의 하천들이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니 지나가 틀림없고 깍아지른 천험이라 하니 한반도 남한산성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화도는 호북성이나 강소성의 장강연안(주변)이 아닌, 사천성에 있었다는 이야기인가요? 고려 태조의 릉인 "영릉"은 사천성 성도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병자호란의 기마대가 남하하는 것에 대해, 몇 번 우리 카페에서 언급한 기억이 있는데, 사실 기병들이 남하하는 과정의 모순점이 아주 많습니다. 수십정도의 기마가 숨어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수천, 수만의 기병이 달릴 때는 말 그대로 모래폭풍처럼 먼지와 소음이 요란하며, 각 현이니, 진이니, 역참이나 거미줄과도 같이 짜여 있었던 것이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는데........참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사견입니다만 병자호란은 있었지만 실록에서 말하는것은 완전 날조된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을 대륙에다 놓고 병자호란을 생각해보면 시공간적인 의문이 꼬리를 뭅니다. 임진왜란때 몽진한 선조는 조선 각성에 파발을 띄워 병력을 징발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글고 실제 각 지방에서 군대가 올라옵니다. 말탄 원숭이부대도 있고 해귀도 보입니다. 이랬던 조선이 많지도 않은 칭나라군대에 항복해서 삼전도에 머리를 치박는 치욕을 비석과 동판화로 보존하고 있는것자체가 임진왜란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것이지요. 인조도 선조처럼 조선팔도 사방의 각성에 병력을차출해서 항전을하면 충분히승산이있을텥데요....
말탄 원숭이부대...해귀(흑인잠수병)...이건 명나라가 파견한 군대중 서남방 용병으로 전 아는데요...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것일까요? 즉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절에 연왕(燕王)으로 멀리 있었던 인조가 서북도서인(북청인을 포함)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사건이 "인조반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한마디로 말하면 황권싸움(권력투쟁)이지요. 광해군이 남한산성까지 가서 항전할려고 했지만 결국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합니다. 승리한 인조는 "천계"란 년호를 쓰며 화려하게 새시대를 엽니다. 광해군 이하 열족들은 거의 죽는다고 봅니다. 명사에는 명나라 마지막 임금이 자결한다고 나오는데 그분이 광해군일 가능성 있습니다. 명사에 보면 당시에 가뭄으로인육을먹는지방도 있고 지진으로많은목숨을 잃는곳도 있고해
저도 오늘 병자호란 부분을 좀 공부해 보니...
실록대로면...대부여님 말씀의 정반대입니다.
광해군이 강홍립에 언질하여 명나라를 돕는척 하다 대새를 보아 청에 귀순해 청나라를 돕고...
이에 대명국을 배신한 강홍립은 역적으로 조선사대부들과 대신들에게 성토당하고...
임금인 광해에게 은근히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이 분위기를 이용해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퇴위기킨겁니다.
정묘호란은...
이 광해군을 퇴위시킨 인조의 반란에 분개한 강홍립과 그가 이끈 조선군...
청나라와 연접한 여진족이 많은 북계(함경도)의 조선군사와 주민들이 인조에 반심을 품고
청나라군을 끌어들이면서 시작돼고...
병자호란 자체도 함경도내 여진족계 조선인들의 내응으로...
여진군은 실로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서북경계를 무사통과하며 인조가 준비할 틈도 없었던게 주 패인입니다.
그런데 당대 사서들을 보면...
주뎅이만 살은 조선대신들의 행태는 현재의 딱 대한민국 정치인들 판박이고...
준비를 100년 했다 처도 필패할 수 밖엔 없었습니다.
실제로도 정묘호란 후로 10년을 인조가 나름 칼을 갈았다지만...아주 속수무책 당한거고여...
강단사학도 우리의 수치라서 그 대목은 오히려 대충 둘러대지만...
실록을 보면 볼수록...더 처참하고...인조와 대다수 대신들은 충분히 비겁했습니다.
홍익환등 세명의 척화신들이 당당하게 자청해 끌려가 살려 준대도 굴복치 않다 죽은것 외엔여...
홍익환이 화끈하게 죽더라고여...
서 민심이 이반되고 이괄이 난을일으키고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멀리 연왕으로 봉해 있었던 인조가 무력찬탈을 꿰했던것이 인조반정이고 북청인들을 등에 업고 권력을 쟁취했기땜에 나라이름도 대칭국으로 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부분에서 일제때 많은 왜곡과 날조가 있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조선을 분리하면서 칭나라를 만들수 있는 구실이 되니까요. 명사에는 이자성의 난으로 되어 있지만 조선사나 명사나 당시사회가 어지러웠던것은 사실인것같습니다.
이괄의 난이 있었을당시 명나라에는 이자성의 난이 있었는데 그시대의 산동성 지방지를보면 지진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또 가뭄으로 먹을것도 없는때에 중앙정부에서는 세금을 걷으러 군대가 오니 백성들은 죽을맛이었고 때마침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수 많은 양민들이 도륙되고 빼앗기고 해서 민심이 이반된것은 확실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쿠테타가 일어나는것은 밥통님을 보면 알수 있듯이 인조가 한건한것이겠죠. 즉 서북도서인들(북청인들포함)의 반란으로 중앙권력의 중심세력이 바뀐겁니다. 이와중에 그들은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것이지요. 마치 고구려때 련개쏘문이 영류왕을 쪼까내고 "보장제"를 세운것과 같다봅니다.
대부여님 역시...조선이 명나라고 천자국이였다 보시는군여...
실록들 보면 볼수록...조선의 명에대한 사랑과 번국으로서의 충성은 눈물겹습니다.
그런 실록들을 일제가 고 짦은 시간내에 모조리 다 디테일 하게 왜곡했을 짬이나 있었을까요...
왕조실록과 지리서 각 집안 족보들...독립을위한 민족주의사서들...등등 대표적인것들 왜곡&파기에도...
엄청난 기간과 인력이 소요됐을테니...대표적인 것들만 완벽하게 했고...
나머지 사서들은 핵심들만 건드렸을 수 있습니다.
대부여님의 이 부분 사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 사건과 시기가 겹치는 것은 이조후기사 와 일본사도 많은 부분이 같은 사건 같은 시기로 나옵니다 역사는 지배자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기에 같은 시기에 같은 사건에서 우두머리들은 모두 그 사건은 내가 주인공이라고 내세울 겁니다 이런 경우 양쪽을 모두 인정해야지 어느 한쪽은 짝퉁이요 허구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북한의 김성주가 김일성의역사를 자기것으로 하는 예를 생각해 보면 조선사 나 명사가 곁치는 부분도 김일성 = 김성주의 사레 와 같은 것일겁니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통일왕조였습니다. 서북도서인 즉 관서지역과 하남 및 강남지역은 그 역사와 배경이 사뭇 다릅니다. 그러니 남쪽지방 사람들 입장에서는 서북도서인(북청인들포함)들이 변란이라도 일으키면 오랑캐라고 욕을 해도 이상할게 하나 없다고 봅니다. 땜에 중원과 먼 지방의 언어가 달라서 이문관을 두었다는것은 다아는 일이고 해서 언어가 다르지만 풍속은 같기에 서로 어울리고 부대끼며 살앗던것이겠지요. 칭나라도 바로 중원과 언어가 다른 족속들인디 호란으로 정권을 잡고부터 즈들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겁니다. 모두다 조선의 한 울타리입니다. 고로니께님의 많은 이미지 삽화를 보면 알수있습니다.
중요한건...조선의 조대명이 명(明)이라면...
조선왕의 사신등이...명나라인들과 역관을 통하거나 필담으로만 대화한단건 모순이 됍니다.
통치자들끼리나 중앙관료들끼리도 언어가 필담이나 통역만으로 통하는 나란...다른 나라일 뿐입니다.
모든 기록이 다 그렇게 나오는데...그걸 일제가 다 디테일하게 완벽히 조작했을 시간은 전 없었다 봅니다.
태조 리성계의 둘째 아들 리방원도 황제가 되기전까지는 "련왕(燕王)"에 봉해져 있었다는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칭나라애들이 지네들 족보를 백산말갈,흑수말갈까지 치고올라가는것인디 그곳은 바로 고구리와 부여 글고 발해 요, 를 지기들의 역사라고 보는것이겠지요. 이것은 남쪽나라의 력사와는 다르죠.
이성계때는 천산(燕지역)넘어 카자흐 우즈벡까지도 후리고 다녔다고 보이니...
북원의 멸망이훈 연경지역 넘어 중가르 쪽 길은 아마 고려가 잠시 점령했던 무인지경엿을 수도 있다 봅니다.
그러나 연왕(燕王)이 이방원의 직책였단 사서는 없는걸로 압니다...?
명태종이겠져...
그러나 명과 조선의 역사가 판박이...티무르제국과 또 판박이 ..연왕과 이방원 쇼호르의 왕자의난이 판박이...
이런 이유로...명사의 연왕이란 자와...티무르 아들 쇼호르는....공히 이방원의 얘기라 봅니다.
문젠 무굴지역인 중앙아의 역사를 중원으로 왜곡하려니...무굴(明)이 대륙조선(현 중원)으로 크로스돼며...
뒤죽박죽 돼는 이치라 봅니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 사서상의 엄연한 서토의 이민족나라 명나라(무굴제국)...그 나라가 조선의 속국(제후국)이라면...
대륙조선은 천자국일 수 있습니다.
아주 아주 희박한 확률이지만...그 가능성도 항시 열어놓고 공부해 보겠습니다.
환국고려님 글 잘 봤습니다.
저도 전부터 강소성 강도가 강화도라 했는데...지금은 조금 자신이 없습니다.
아무리봐도 무안(한양)...한수(漢水),,,한강대교...한중...이 지명이 중복돼는 양자강의 서북상류인...
한수(漢水)줄기중...한중이나 안강시 일대 어디가 한성같고...
그 동남의 쉰양(旬陽)현 태극성 이란 고성이 남한산성 같습니다.
원조 강화나 강도도...어쩜 동정호쪽일 수 있단 요즈음의 막연한 예상입니다.
실록상엔 한양에서 너무 가깝게 나오거든여...
그러나 환국고려님 말씀대로...강도(강화도)는...강소성 강도가 강력한 후보지로 봅니다.
상식적으로..서북오랑케들이 내려오면...동남 쪽으로 도망가야하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