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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0원에 '건축학개론'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보았다.
공짜로 다운로드 할 수 있는 곳도 있다는것도 알지만 휴대폰 T Store에서 내려받았다.
첫사랑의 아픔과 아련함을 15년 만에 일깨어 주는 내용이다. 꽤 잘 만든 영화다.
영화 '건축학개론' 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대학교 2학기 교양강좌 '건축학개론' 수업을 듣던 어느 음대 신입생 여학생과 교수간의 대화가 나온다.
교수는 서울 시내 대형 지도를 강의실 칠판에 붙여놓고 모든 수강학생들이 나와서
자기가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학교까지 다니는 노선을 빨강 사인펜으로 줄을 그어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지나며 보는 집, 건물, 터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라는 거다.
생활 주변의 건물,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이 '건축학개론'의 시발점이라고 하면서.....
제주도 출신의 음대 1학년 여학생이 나와서 지도위에 성북구 '정릉'을 출발지로 찍을때 교수가
학생은 정릉에 사느냐고 묻는다. 여학생이 그렇다고 답하자 다시 교수가 물어본다....
"그런데, 정릉이 누구의 능이지?"
여학생은 제주도 출신이다.
그녀는 교수에게 이렇게 답한다...
"정조?,,,,, 정종?,,,,,. 정약용 ?....."
그러자 많은 수강 학생들이 엄청 웃어댄다....
제주도 출신 여학생이 서울에 산재한 여러 왕릉에 누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정약용 이라.... ㅎㅎㅎ. 너무 심했다......
(정약용 묘소와 그의 생가를 복원한 여유당은 양평 부근 양수리에 있다. 서초동 교대역옆 맛집 '기와집 순두부' 본점이
그 부근에 있다.) 문화유산 답사기라도 읽었더라면 알았을텐데......
(영화 속 제주도 출신 음대 신입 여학생이 이 영화 '건축학개론' 의 주인공이다)
서울 주변엔 왕릉이 참 많다.
이조 초대왕 태조 이성계의묘는 구리 동구능 건원릉에 있고
2대왕 정종(이방과)는 왕비 정안왕후 김씨와 함께 경기도 개성군 후릉에 모셔졌다. (현재 북한 소재지)
3대왕 태종(이방원)은 양재동에서 성남, 분당으로 넘어가는 길목 내곡동 부근 헌인릉에 있다.
서울 강남구 소재 선릉에는 9대왕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가 있고,
서삼능, 서오능 등에도 왕들과 여러 왕비, 계비들의 묘소가 있다.
이조 왕중 가장 잔인한 살륙자로 꼽히는 세조(수양대군)의 능은 경기도 포천 광릉에 있고
세조가 죽이라는 명을 내렸던 한많은 삶을 살다 간 그의 조카 단종은 저 멀리 강원도 영월 땅 장릉에 있다.
잘 아시다시피 세종대왕 묘소는 여주 영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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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貞陵) 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이다.
정릉은 사적 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지금의 서울 정동에 있던 능을 옮겨 놓은 것이다.
서울 성북구 정릉 삼거리에서 아리랑고개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 50m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돌아드는
비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골목 끝에 매표소가 나오고 매표소를 지나 좀더 올라가면
조선 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 강씨를 안장한 정릉(貞陵)이 나온다.
그런데 원래 정릉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그동안 신덕왕후의 정릉은 막연하게 서울 한복판인 지금의
문화체육관 인근 또는 영국 대사관과 성공회 자리 부근으로 추정돼왔다. 그러나 신덕왕후의 능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서울 중구 정동 소재 주한 미국대사관저 영내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는 미 대사관저 뒤편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취현방(聚賢坊)'이라 불렀다.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가장 억울하고도 원통했던 왕비를 들라 하면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와
문종비 '현덕 왕후'를 꼽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자신의 능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도 부족해서 자식들마저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비들이었다.
신덕왕후는 1396년(태조 5) 8월 13일 병환으로 승하한다.
사랑하던 신덕왕후를 잃은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에 능역을 조성하고 그의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해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한다.
그러나 원래 잘 조성된 정릉은 3대왕 태종(이방원)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게 된다.
태종은 태조가 승하한 다음해인 1409년 2월 23일 정릉을 도성 밖 양주 사을한록(沙乙閑麓·현 서울 성북구 정릉동)
으로 옮긴다. 그는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해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고, 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태종은 목재나 석재들은 외국사신이 묵는 태평관을 짓는데 쓰게 하도록 했으며,
"석인(石人)은 묻고, 봉분은 깎아버려 무덤의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명을 내려, 능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됐다.
원래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 사이에 난 아들 방석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죽였다. 이방원은 자기가 왕권에 욕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바로 위 형이 왕위를 물려받게하여 조선 2대왕 정종이
되도록 한다. 그런 다음 정종이 단명으로 물러나고 3대 태종에 즉위하였으니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은 머리를 잘
굴린 인간이었다. 조선왕조 초기부터 이복형제 왕자들간에 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골육상쟁이 벌어졌으니 참으로
아름답지못한 왕조가 아닐 수 없다.
정릉은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87-16 (성북구 능길74) 에 소재한다. 같은 발음의 다른 능 정릉(正陵)은 고려 공민왕의 왕후인
인덕왕후(노국 대장공주)의 능으로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에 소재한다.
신덕왕후 강씨는 황해도 곡산(谷山)출신인데,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이었다.
왕비 강씨는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로 집안에서 사랑을 받았으며, 장성하면서 정숙하고 지혜가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신덕왕후가 젊었을 때의 일화다.
강씨의 집은 곡산군의 깊은 산속인 운중면(雲中面)의 용봉(龍峯)아래 용봉동에 있었다.
강씨가 처녀 시절 때의 일이다.
집 앞 용연(龍淵) 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청년장교 이성계를 만나게 되었다.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못가를 찾았다.
"처자, 미안하오만 내게 물 한모금 떠 주겠소?"
"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처자는 바가지에 깨끗한 물을 떠서 버들잎을 띄워 그에게 바쳤다.
이성계는 이상히 여겨 처자를 쳐다보자,
"장군께선 사냥을 하시다가 구갈이 심하여 소녀에게 물을 청하신 것 같은데 급히 물을
마시면 좋지 않을까 하옵니다. 버들잎을 불어 가면서 천천히 마시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처녀의 예지에 감동하여 그 집을 찾게 되었으며, 그 후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됐는데
이 처녀가 바로 그의 제2왕비인 신덕왕후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때 본처는 이미 죽었기에......
이러한 지덕을 갖춘 신덕왕후였던 만큼 태조를 도와 국가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태조가 조선왕조를 창건할 때에도 내조의 공이 컸던 것이다.
신덕왕후가 태조5년(1396) 8월 13일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매우 슬퍼하여 조회와 시전을 4일간이나 정지하고
백의로 친히 나가 능지까지 구하였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지금의 안암동이었으나 묘소 조성시 물이 솟아나와 산역을 중지하고,
취현방(聚賢坊) 북원 지금의 정동 4번지 -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정하고 능호를 정릉이라고 했다.
신덕왕후 강씨는 생전부터 불교를 믿는 마음이 두텁기도 했지만 고려시대부터 능침(陵寢) 근방에는 원찰을
세워 아침 저녁으로 향화를 드리는 예가 있었으므로 흥천사 (興天司)를 세워 수호하게 하였다.
또한 이 흥천사에는 신덕왕후의 딸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삭발을 하고 여승으로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 세조7년(1461)에 주조된 흥천사의 동종은 그후에 여러 곳에 옮겨졌다가 지금은 덕수궁 안에 걸려 있다.
높이가 2미터 82센티미터, 구경이 1미터 70센티미터나 되는 이 동종은 신라 종이나 고려 종과는 달리 중국 종을 닮은
소위 조선조 종의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9년(1409)에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졌는데, 그 원찰인 흥천사의 동종이
세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능은 옮겨졌으나 흥천사는 그후 오랫동안 존속되었다가
중종5년(1510)에 화재로 소실된 듯하고, 동종은 광화문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겨야 한다는 논의는 태종9년 2월에 의정부에서 올린 상소에서 시작됐다.
"유명의 관계가 이치는 비록 하나이지만 나누임이 다른 것이며, 고금을 통해
상고해 보건대, 무릇 제왕이라 할지라도 그 능침을 도성 안에 둔 일이 없사옵니다.
하온대 태조대왕의 계비이신 신덕왕후의 정릉이 유독 성내에 있으니 미편함이 심한 줄
아옵니다. 더구나 정릉은 중국의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 가까운 곳에 있어 예를 그르칠까
두렵사옵니다. 청컨대 도성 밖에 길지를 택하여 천릉케 하옵소서."
태종은 게모격인 신덕왕후 강씨에 대해서는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태조의 제1왕비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소생인 태종 방원(芳遠)은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불평을 품고, 방석이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과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을 제거한 일이 있었다.
태종은 의정부의 계청이 있자 정릉을 문 밖으로 옮기라고 했다. 이때 택지된 곳이 동소문 밖 사을한리(沙乙閑里)였다.
태종은 정릉의 천묘가 있은 지 한 달이 지난 그해 4월에는 능의 정자각(丁字閣)을 헐어서 태평관의 북루 3칸을 짓고, 태종
10년(1410)여름에 큰 장마가 져서 청계천이 범람하고 그때까지 토교(土橋)였던 광교가 무너지자 정릉 구기의 석물을
실어다가 광교를 돌다리로 놓게 하였다.
특히 광교 남북의 석축을 쌓은 열두 개의 신장석(神將石)은 정릉을 만들 때 제주목사 여의손(呂義孫)이 일류 석공들을
시켜 만들었던 문화재급의 아름다운 조각품이었는데 광교의 석재로 쓰이다가 1953년의 복개공사로 땅속에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신덕왕후의 정릉이 도성 안에 있었던 것은 겨우 12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정릉의 소재를 의미하는 정릉동의 지명은 정동
(貞洞)으로 변하여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정릉을 동소문 밖 사을한리로 옮긴 후에는 수백 년 동안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무명총과 같이 되었으니, 이곳의 지명이 정릉동으로 부르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또한 그후 종묘에는 태조의 신위와 함께 신의왕후 한씨의 신위만을 배위로 모시고
능묘에 관원을 파견해서 제사를 드리게 하던 의례까지 폐지하니 직손이 없는 정릉에는
때로 왕족의 부인들만 찾을 뿐, 분묘에는 풀이 무성하고 석물은 무너져 일반 사람들도
그것이 누구의 묘소인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졌던 정릉이 다시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선조(宣祖)때에 이르러서였다.
선조14년(1581)의 일로서 정동으로부터 사을한리로 옮긴 지 1백70년이 지났을 때였다.
선조의 선왕 능행이 있던 날, 함경도 덕원(德源)에 사는 강순(康純)이란 사람이 어가 앞에 나타나 소장(訴狀)을 올렸다.
소장에는,
"신은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으로 이미 군역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능묘를 봉사하는 사람들의 예에 의해 군역에서 면제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라고 했다.
이런 일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덕왕후의 능을 복원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으며 특히 율곡 선생은,
"신덕왕후 강비는 마땅히 태조대왕과 함께 모셔야 할 분인데 아무 까닭없이 제사하지 않는 것은 이는 윤리기강에
관계되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속히 능침을 수복하고 존중하는 행사가 있어야 할줄 아옵니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모두 옳다고 하여 비로소 예관으로 능을 찾게 했는데,
능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 아차산 안팎을 두루 답사하였으나 좀처럼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글 가운데서 '정릉조천제문(貞陵造遷祭文)'을 발견하여 이것을 근거로 사을한리에
있는 묘소 부근을 파서 지석(誌石)으로 정릉임을 확인하였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태묘에 신의왕후와 같이 모셔야 한다고 했으나 한쪽에서는
제후는 두 번 장가를 들지 않으니 운운하며 시행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한식절에 제사를 지내는 일만 결정하였다.
그후 현종(顯宗)10년(1669),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의 계청에 의해서 종묘에 배향하게 되는데
당시 송시열은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대왕의 왕비입니다. 강비께서 돌아가신 뒤에 정릉에 장사지내고
국례를 고려의 제도에 따라 조석으로 재를 베풀었는데 태조께서는 강비를 간절히 추념하시어 언제나 정릉에 재 올리는
종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수라를 들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능이 매몰되어 신의왕후의 제릉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종묘에 배향되지 못하였으니 예로 보아 어떨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고려때에는 경처(京妻)와 경외처의 제도가 있었던 까닭에 태조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신덕이 경처가 되고 태조가 은례를 다하셨사온데 지금까지 태묘에 배향치 못한 것은 진실로 미안한 일이옵니다.
일이 매우 중대하오니 널리 조정의 신하들과 의논하시어 봉하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왕은 예조참의 이준효(李俊孝)로 하여금 현상을 조사케 하여 능의 수봉은 물론 재실을 중건하여 왕비의 능침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6.25동란 때, 정릉 근처에서 조선조 마지막 황후인 순종비(純宗妃)윤황후가 약 7년간이나 은거한 일이 있었다.
조선조 최초의 왕후의 능과 바로 그 옆에서 조선조 마지막 황후가 은거하였다는 것도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지금 돈암동에 있는 신흥사는 절보다 그 아래 밀집한 회갑 연회장으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 절은 본래 정동에 있던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의 후신으로 볼 수 있다.
태종9년 정릉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부터 흥천사는 점차 황폐해지고 그대신 성 밖의 정릉 옆에 조그마한 신흥암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뜻은 새로 지은 흥천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현종10년에 정릉을 수봉하고 부근에 정자각.안향청.전례청 등의 건물을 짓고 보니 작은 암자 신흥암이 능의
원찰로서는 너무 초라할 뿐 아니라, 또 너무 능에 가깝게 있으므로 함취정(含翠亭)자리로 옮겨 지었다가 정조(正祖)18년
(1794)에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정릉의 상설제도는 뒤에 영월 단종의 장릉을 조성할 때 참고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최초의 국모가 자신의 아들을 왕자로 만들려는 과욕을 부려 오히려 자식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본인의 무덤마저 파헤쳐지고 옮겨지는 수모를 겪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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