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축학교 아카이빙북>, 2016년
전태일의 청옥고등공민학교 _ 맹문재
1.
전태일은 1963년 5월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청옥고등공민학교는 대구의 명덕국민학교 안에 임시 교실을 두고 있었습니다. 전태일의 남동생인 전태삼은 근래에 청옥고등공민학교의 임시 교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원래의 자리에서 옆으로 이전되었을 뿐 여전히 남아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명덕초등학교의 현재 주소는 대구시 중구 남산로2길 125(남산동)입니다.
청옥고등공민학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민학교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민학교는 1946년 5월 ‘공민학교 설치 요강’이 제정되어 정규 교육기관으로 인정되면서 추진되었습니다. 공민학교는 소년과·성년과·보수과를 두었는데, 소년과는 입학 자격이 13세 이상이어야 하며 수업 연한이 2, 3년이었습니다. 수업 과목은 공민, 국어, 국사, 지리, 산수, 이과, 음악, 체조, 가사, 재봉 등으로 당시의 초등학교 과목과 동일했습니다. 성년과의 입학 자격은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18세 이상의 자로 수업 연한이 1, 2년이었습니다. 주로 공민, 국어, 산수를 배웠습니다. 보수과의 입학 자격은 13세 이상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자였습니다. 수업 연한은 1년이었고, 수업 과목은 공민, 국어, 국사였습니다. 보수과는 훗날 고등공민학교로 개편되었습니다.
1949년 12월 교육법이 제정·공포되면서 공민학교의 성격과 수업 연한 등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공민학교의 목적으로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령을 초과한 자 또는 일반 성인에게 국민 생활에 필요한 보통 교육과 공민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또한 수업 연한을 초등학교 의무교육 기간의 절반인 3년으로 정했습니다. 그리하여 1947년 8월 당시 학교 수는 1만 5,506개였고, 학생 수는 84만 9,008명이었습니다. 1950년에는 학생 수가 100만 명을 웃돌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지만 1950년대 이후 의무교육이 강화됨에 따라 학생 수가 해마다 줄어들어 1978년에 이르러서는 1,000명, 1983년에는 224명으로 감소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 이르러서는 학교 수 1개, 학생 수 195명만 남게 되었죠.
고등공민학교는 공민학교에 설치되었던 보수과가 1948년 고등공민학교 규정에 따라 개편·발족된 것입니다. 입학 자격은 초등학교 또는 공민학교를 졸업한 자로 중학교 단계의 보통 교육과 공민적 사회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지역의 유지 또는 독지가에 의해 운영되어 구제적인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었으나, 1949년 교육법이 제정·공포되면서 법적인 교육기관이 되었습니다. 고등공민학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쇄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어 1955년에 이르러서는 학교 수 561개, 학생 수 6만 8,086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정부는 고등공민학교 진흥책으로 입지 조건이 좋고 여러 가지 조건을 구비한 학교를 선정해 공립으로 개편했습니다. 1959년에 이르러서는 학교 수 296개에 학생 수 3만 3,665명, 1983년에는 학교 수 48개교에 학생 수 4,946명으로 감소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학교 수 7개, 학생 수 418명이 남았습니다. 의무교육이 중학교까지 연장됨으로 인해 고등공민학교의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하기 때문에 공민학교는 물론이고 고등공민학교의 교육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2.
전태일은 1948년 8월 24일 대구에서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아래로 태삼, 순옥, 순덕이라는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전태일이 대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근래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조영래 변호사가 저술한 『전태일 평전』이나 민종덕 전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이자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이 기록한 『어머니의 길』에 따르면 대구에서 옷을 만들어 팔던 전태일의 아버지는 사업이 실패하자 부산으로 이사했습니다. 전태일의 나이 3살 때였죠. 아버지는 자갈치시장 피복상에 취직을 했지만 생활이 어렵다 보니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미군 부대에 일자리를 얻었어도 산비탈에 올라가 천막을 치고 살아갈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 대구에서 찾아온 할아버지가 아들의 형편을 보고는 손자 전태일을 데려가게 됩니다. 그 후 아버지가 술을 줄이고 일에 매달리면서 가족은 산비탈 천막촌에서 나와 범일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5살 된 전태일이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부산으로 돌아온 때였죠. 그렇지만 그 이듬해 창고에 쌓아둔 물건들이 못 쓰게 되어 하루아침에 집안이 기울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구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남의 집 대문 앞이나 골목길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갔죠. 그러다가 아버지가 남대문 육교 근방에 천막을 쳐 그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팥죽을 끓여 팔며 식구들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해 천막집까지 빼앗기게 되자 가족은 이번엔 미아리 공동묘지 근처로 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강도가 들어 다시 도동으로 옮겨야 했죠. 그 무렵 아버지는 평화시장 제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봉틀 한 대를 사서 집에서 옷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일이 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재봉틀을 20대나 들여놓고 단체복 주문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4·19혁명 직전 품성이 좋지 못한 친구가 술에 취한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져 돈 받을 증서와 도장을 훔쳐 달아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바람에 납품한 단체복 값을 수금하지 못하고 빚잔치에 재산을 다 날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심한 충격을 받고 삶의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폭음은 심해졌고, 집도 이태원 산마루의 판잣집에서 다시 용두동 개천가의 천막촌으로 옮겨졌습니다. 전태일은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을 거쳐 남대문국민학교에 편입해 다니고 있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인해 4학년 초에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전태일은 전태삼과 함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삼발이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장사가 안 되서 미수금을 갚을 길이 없자 어린 나이에 겁이 나 그만 가출했습니다. 대구로 내려갔지만 달리 갈 데가 없어 다시 서울로 돌아와 구두닦이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몸을 추스를 수도 없어 또다시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1962년 그의 나이 14세 무렵이었습니다. 전태일은 영도다리에서 떠내려 오는 양배추를 보고 건져 먹으려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구조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영천까지만 가는 것이어서 할 수 없이 대구의 외갓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집안 식구들이 대구로 와 있다는 얘기를 외할머니로부터 듣게 됩니다. 대구에 있는 삼촌이 서울에 올라가 굶고 있는 전태일의 가족을 데리고 내려온 것입니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동생이 마련해준 재봉틀 1대에 매달려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전태일은 그러한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부가 하고 싶어 열다섯 살에 청옥고등공민학교 야간부에 입학한 것입니다.
3.
전태일은 수기에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닌 시기를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회상했습니다. 학교에 다닌 기간이 비록 1년도 못 되었지만 전태일은 학교에서의 공부를 통해 자유와 사랑의 가치를 나름대로 체득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생전 처음으로 가진 즐거움이었습니다.
실제로 전태일이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그만둔 학력이어서 기초 지식이 부족한데다가 아버지의 재봉 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편하게 다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등공민학교에서 실장이 되었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열린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등 학교생활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태일은 집안의 일을 중요하게 여긴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던 전태일은 고학을 결심하고 가출했습니다. 아버지가 만든 잠바 8장을 들고 남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서울로 간 것입니다. 서울에 도착한 전태일은 동대문시장에 가서 잠바를 팔아 사과 궤짝 12개를 사서 개집 같은 집을 지어 파고다공원 뒤 낙원시장 담 옆에서 자면서 고학을 했습니다. 낮에는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으며 밤에 공부를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배고픔과 동생의 아픔으로 인해 그 생활을 오래 할 수 없었습니다. 전태일은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전태일이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행복했던 모습은 “그렇게도 마음 설레면서 기다리던 체육대회가 경대 사대에서 열리는 날이 온 것이다. 너무 흥분한 나는 4시도 되기 전에 일어나서 준비운동을 하고 부엌에서 설쳤다.”라고 수기에서 쓴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배우는 즐거움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지 공부를 끝까지 해서 지금도 서울에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을, 그리고 거리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5원의 동정을 받고 양심까지도 다 내어 보여야 하는 언제든지 밑지는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리라”(「전태일 수기」)는 다짐을 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열악한 노동자들의 실정을 알리며 분신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그의 외침은 비참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비로소 세상에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이 자신이 처한 삶의 형편을 자각하고 노동운동을 시작하는 계기와 아울러 정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듯 시대와 사회를 일깨운 전태일의 사고와 행동은 평화시장에서 함께 일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청옥고등공민학교의 배움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 사진 설명
1963년 전태일이 다닌 청옥고등공민학교 임시 교실이 있던 대구 명덕초등학교의 모습.
2015년_12월(전태일 청옥고등공민학교)교정.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