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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동료들과의 동행
직장이라는 것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성인에게 있어서는 한 사람의 팔 할 이상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지표로 여겨진다. 이 세상에는 약 2만여 개의 직업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어릴 때는 그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적어도 백여가지의 직업 중 하나를 내 희망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장래 희망에 대한 숙제를 제출할 때면 반 아이들 머릿수 만큼이나 다양한 직업군이 나왔고 그것은 그런대로 아이들의 현재 성향이나 재능과 걸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스무 살이 넘어가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두 세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전문직, 회사원, 공무원, 자영업 중 자신이 진입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집단을 선택해 그 거대한 관습과 가치관에 편입되는 것을 뜻할 뿐 내 아이덴티티의 자연스러운 발현과 성취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내 제2의 인생이 의외로 시시하고 얼떨결에 선택이 되었고, 그렇게 선택된 직장의 현실 역시 아직 자신에 대한 환상을 간직하고 있는데다가 미디어에 현혹되어 있는 젊은 사회 초년생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해 보여 자괴감이 드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해 4명이 앉아 있는 좁은 사무실이 그 첫 번째 요인이요, 영수증을 종이에 붙이는 것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업무라는 것이 두 번째 요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직장을 그만 두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괴로움을 느낀 적도 없고 사실 첫해에는 업무의 매뉴얼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직장의 온갖 오만한 사람들, 불합리한 사람들이 주는 스트레스도 하룻밤 뒷담화면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고 깊은 고통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참기 어려웠고 내 직업에 대한 참담함까지 느끼게 했던 것은 때때로 해야만 했던 원치 않는 ‘동행’이었다.
초등학교에는 한 달에 한 번 ‘건강의 날’이라는 게 있었다. 교직원들에게 반일 놀 수 있는 구실을 공식적으로 만들어준 날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아직도 그 의미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 날이면 교사들은 모두 2시쯤 퇴근해 각자의 시간을 즐겼으나 우리 행정실은 급식실의 영양사, 조리사들과 의기투합해 야유회를 가곤 했다. 평균 연령대는 48세 정도 되었을 것이고 나를 제외하면 가장 젊은 사람은 43살이었다(당시의 나는 28살). 조리사 아주머니가 ‘영광에 가서 회를 먹고 싶다’라고 하면 그것이 이번 건강의 날의 주제가 되었다. 누군가의 SUV에 6명이 한꺼번에 탔고 막내인 나는 알아서 가장 불편한 가운데의 폭 튀어나온 자리에 앉았다. 행여 몸이라도 닿을까 흔들거리는 차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리를 곧추 세워 중심을 잡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차에서의 선곡은 주로 우리 행정실 최고령자인 선생님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가수 이름이 홍빈이든가 훤빈이든가, 아무튼 무슨 빈이었고 고속도로 음악의 황태자라고 했다. 시작과 끝이 뚜렷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전부 녹음을 끝낸 듯한 비슷한 노래들이 쉴 틈 없이 귓가를 때리고, 나를 둘러싼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이 노랫소리를 뚫고서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듯 가수의 목청을 이기기 위해 저마다 핏대를 세웠다. 싫어하는 노래, 듣기 싫은 고성의 사투리가 내 몸에 침투해 모든 혈관을 서로 묶어 풀 수 없는 매듭을 만드는 기분이었으며 나는 울고 싶을 만큼의 지겨움과 혐오감과 이 차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버리는 것 이외에는 탈출할 길이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구토할 지경이었다. 차에서 내리면 대개 이름도 외양도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무슨 절에 가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그들과 떨어져 걸으면서 끓는점의 임계에 도달한 분노를 조금은 식힐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이번 건강의 날 아이디어를 낸 아주머니가, 절에 들어가 봤자 아무 것도 볼 것도 없고 의미도 없으니 빨리 회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참고로 지금 시간은 4시다. 회를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남편이 처가에는 고등어를 보내고 시댁에는 회를 보내 싸우기라도 한 건지 가히 엄청난 집착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떨어져 걸을 수 있는 조금의 휴식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다시 차에 실려 횟집으로 향했다. 당연히 손님이 아무도 없다. 회 몇 접시와 소주와 복분자를 시킨다. 나는 그들과 회식을 할 때 술을 따라주면 대개 그냥 마신다. 맨 정신으로 앉아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냥 같이 미쳐버리고 싶지만 내 몸은 그것조차도 허락하지 않고, 더욱 또렷하고 강렬해지는 증오심에 두통과 복통만 추가될 뿐이다. 신기하게도 그들과의 회식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렇듯 모든 정황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들이 술자리에서 했던 대화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글의 생동성을 위해서 한 마디라도 그 때의 대화를 재현해보고 싶지만 슬프게도 아무런 기억이 없고 비슷하게 복원할 수조차 없다. 그 만큼 아무런 내용도 가치도 재미도 없었던 것이다(나는 영화도 너무나 재미없게 보면 졸지 않았음에도 주인공의 직업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직장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배우자 아닌 이성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을 획득한 중년의 남녀들이 불륜으로 지적받지 않을 정도의 수위를 노련하게 지켜가며 질펀한 농담을 주고받았다는 정도의 기억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즐거운 척하는 예의조차 갖추기 싫을 만큼 지칠 때는 아무한테나 카톡을 걸어 이 고통스러운 순간의 한줄기 빛이 되어주기를 간청(구걸)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껏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신나게 놀던 그들은 남자친구와 카톡하는 거냐는 둥의 질문 세례를 쏟아 부으며 그들이 형성한 분위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고 싶은 나의 시도를 완벽히 차단해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면 어찌어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시간도 끝이 나고 학교 주차장에 돌아오니 벌써 9시가 넘었다. 다른 교직원들은 2시쯤에 퇴근하여 밀린 은행 업무를 보든지 평일 낮의 한가로운 영화관을 즐기든지 집에서 휴식을 취하든지 했을 것이다. 나는 회를 가장 많이 먹고 얼굴에 기름기가 돌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 그 아주머니를 보면서, 왕복 3시간의 거리를 달려 회만 먹고 돌아오는 따위의 계획을 그다지 친분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관철시킬 수 있는 그 자신감이 가히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낯선 사람들과의 동행
때로는 낯선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일시적으로 모이고 해산하는 자리에 참여할 일이 생긴다. 나는 그 속에서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다지 옳은 생각은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 인간관계란 이후 내 인생에서 어떤 형태의 변수로든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의미가 있다. 고로 다시는 만날 일 없고 지인을 통해서 소식을 들을 일도 없는 처음이 곧 마지막인 사람들에게는, 소위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 소모에조차 인색해지고 만다. 그래서 나는 주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그들이 제의하는 모든 모임에 불참석하고,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건성의 대답을 하고, 함께 이동할 때는 이어폰을 낀다. 사교라는 적성에 안 맞는 과업을 잠시 내던지고 본연의 무례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그 어떤 돈 드는 여행이나 쇼핑보다도 효과적인 휴식이었다. 그러나 무례함으로 중무장하여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 무례함을 무기로 그 중무장의 틈새를 파고드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걸 깨달은 것은 지난 여름 1박 2일 제주도 출장 때였다. 각 시도 교육청에서 한 두 명의 업무 담당자들을 모아 제주도 리조트에서 개최하는 전국 단위의 워크숍이었는데, 첫날은 실내에서 강의를 듣고 둘째 날은 제주도 유적지를 탐방하는 일정이었다. 강의 시간에는 뒷자리에 죽은 듯이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빠져나가 산책을 하는 식으로 첫날을 보냈다. 둘째 날 역시 그런 식으로 존재감을 완전히 최소화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가 버스를 타야할 때만 일행이라는 것을 어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혼자되어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 멋대로 동정해 쓸데없는 동행을 제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 폭포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웬 남자가 다가와서 어느 교육청에서 오셨냐고, 아까 보니까 혼자 사진 열심히 찍으시던데 그 교육청에서 혼자만 오신 거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기는 교육부 소속이라고 했다. 나는 긴 대화가 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코대답을 하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 때 같은 교육부 일행 두 명이 그 남자에게 다가왔다. 젊은 여자와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중년 남성은 그들의 상사로 보였다. 그 셋은 주최 측 직원으로서의 넘치는 책임감을 갖고 혼자 겉도는 불쌍한 나를 챙겨주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나는 졸지에 그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고, 버스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여자는 나에게 결혼했느냐며, 안했으면 애인은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없다고 대답하면서도 이 여자가 이렇게 묻는 이유도 내가 대답하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그러더니 그 여자는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처음에 내게 말을 걸었던 남자도 마침 총각이니 둘이 데이트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호들갑을 떤다. 그래도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으니 싫다고 잘라주지는 못했지만 네 말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소리라는 내 의사를 어정쩡한 웃음으로 대신하면서, 약 2시간 뒤면 다시는 볼일 없는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내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때 곧 식당으로 이동할 시간이니 주무관님(나)이 빨리 버스에 타셔야 한다고 헐레벌떡 전하러 온 다른 교육부 직원의 말이 구원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여자는 이왕 이런 곳까지 왔으니 최대한대로 보고 가는 게 좋지 않겠냐면서 우린 더 구경하다가 여기 주무관님은 우리 차에 태워서 뒤따라 가겠다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의 의견을 묻는 과정을 생략하며 대답했다. 점심식사를 끝으로 해산하는 일정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내 식사시간을 늦추다 못해 퇴근 시간까지 늦추어버린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짓거리를 한 것이었으나 나는 정말 아무 의견도 없는 등신처럼 그들을 따라 무슨 기념관도 들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아무런 역사적 증거도 없고 그 지역의 관계자가 아니면 누구도 모를 것 같은 전설에 근거하여 졸속으로 지은 기념관을 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며 그 곳에서 간만의 관광객을 만난 가이드의 신이 난 수다를 듣는 것도 질색이었다. 그 여자는 마치 모든 행사마다 담임 옆에 꼭 붙어 있는 얄미운 반장 여자애처럼 상사 옆에 찰싹 붙어 가이드의 말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경청하며 추임새까지 넣어주고 있었고, 나는 홀로 전시관을 최대한 천천히 3바퀴 돌아도 여전히 진행 중인 가이드의 설명과 그 둘을 뒤로 하고 빠져 나와 빠삐용 같은 심정으로 망망대해를 넋 놓고 바라봤다. 아무 죄 없이 나와 엮인 남자 또한 지겨운지 애꿎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밖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그 여자는 기어이 그 설명을 다 듣고 자기 원대로 한 것이 즐거운지 웃는 얼굴로 미적미적 기어 나왔다. 그래,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가자. 지금 버려진 30분이 살면서 언젠가는 절약될 때도 있겠지. 해방의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기쁨 때문인지 모든 것을 용서해주고픈 관대함이 분노를 차분히 식혀주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남자가 차를 가지러 주차장으로 뛰어간 사이 그 여자는 마치 모레시계를 뒤집듯 평정을 되찾아가고 있던 내 기분을 간단히 뒤집어 버렸다. ‘주무관님, 남자친구 정말 없죠? 우리 ㅇㅇ, 진짜 괜찮은 애에요. 아 맞다. 걔 차에 명함 있을 텐데. 명함 하나 달라고 할게요. 한 번 만나보세요.’ 나는 이 재수 없는 여자가 아까 했던 말이 그냥 꺼내본 농담이 아니었음에 놀라서, 거짓말을 해서라도 선을 그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저, 사실은 남자친구 있어요.’ ‘아...어머 그랬구나, 아쉬워라.’ 됐다. 이제 이 여자 입을 막아 놨으니 고개 쳐박고 밥 먹다가 집에 가면 된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 남자가 차를 가져 왔다. 그런데 차 안에서 이 여자가 하는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주무관님 부모님이 제주도에 사셔서, 오늘 바로 안 올라가고 주말에 여기 계실거래. 너도 주말에 여기 있을 거잖아. 둘이 내일 데이트하면 되겠다. 주무관님도 부모님이랑만 있지 말고 내일 잠깐 나와서 얘랑 데이트 하세요. 야, 밥은 네가 사야 되는 거 알지? 처음엔 이 여자가 알츠하이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에서도 어떤 납득 가능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찾지 못하자, 살다보면 고의가 아닌데도 모든 말과 행동이 나를 화나게 해 죽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존재를 때때로 마주치게 되는데 이번에 그런 존재와 조우하게 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거기다 스팸 광고 전화의 여자 상담원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조곤조곤한 서울 토박이 말씨가 이미 분노를 더 담아낼 공간이 없는 내 위태로운 정신을 툭툭 건드리는 것 같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웃어주는 것도 포기하고 분노가 터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감춰 버렸다. 식당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사를 끝내 각자 알아서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4명이 한 상에 앉았고 나는 먹기 위해서만 입을 벌렸다. 재수 없는 여자는 나와 그 남자의 만남을 밥상머리 화제로 올려놓고 아직도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나는 내가 언제부턴가 웃지도 않고 반응도 하지 않고, 나름대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중이라는 것을 그 여자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슬펐다.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떠밀리다시피 하여 내게 명함을 주었고, 나는 집에 오자마자 그 명함을 잊어 버렸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 얼굴을 보자 어디에도 표출되지 못한 분노가 방언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생각이 떠오르면 평온했던 하루를 바로 잡쳐버릴 수 있을 만큼의 불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절실히 깨닫는다. 내가 동행을 바라는 사람은 언제나 내게 등만 보이고 있고, 그러다 보면 원치 않는 사람들과의 동행에 휩쓸려 가게 된다. 바로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종교와의 동행
나와 우리 가족들은 교회 생활을 상당히 오래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겉돌지 않고 착실히 친목활동을 한 때가 아닌가 싶다. 아마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들 우리 핏줄 공통의 본성인 내향성과 게으름을 억누르며 집단에 투신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교회는 일단 표면상으로 사랑이 넘치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던진 그 수많은 무리한 요구 중 그나마 흉내라도 내볼 수 있는 것이 ‘네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제 생각이 어떤지와는 관계없이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최대한 다정한 말과 표정으로 서로를 대하고, 엄정한 평가나 혹독한 경쟁 없이 모든 행사가 철저하게 화합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면 예수가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당시 내가 초등학생이었다고 해서 이런 현상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 승부욕 이외의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듯 이기기 위해서라면 여자들이라도 서슴없이 때리곤 했던 그 나이대 남자애들과 달리 ‘여자’라는 존재를 구별해서 대해주는 젊은 전도사 오빠들의 성숙한 매너는 초등학교 여아들에게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그렇기에 나를 비롯한 어린 소녀들은 체면을 차려야 하는 언니들과 달리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멋진 오빠들에게 애정을 표출하며 초기 단계의 연애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교회 오빠’라는, 이제 거의 대명사화된 듯한 이 신조어는 나와 같이 어린 시절을 교회에서 보낸 수많은 여자들의 공통된 경험을 기반으로 탄생한 것이다.
교회만큼 나에게 많은 동행을 강요한 장소는 없었다. 그 곳은 일요일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일상이 교회에 예속되길 요구했다. 그러나 어릴 때는 친목활동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교회의 그런 행사들에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즐기면서 참석했었다. 아주 특별한 위인이 될 떡잎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배려와 예의라는 것과 담을 쌓고 철저히 자신의 욕구에 따라서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며, 그런 존재들이 모여 있는 초등부는 청년부, 성인부와는 달리 종교적인 색채를 꾸밀 줄조차 모르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은 학교, 학원, 교회 등 모든 곳을 똑같은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다. 모인 목적에 따라서 자신들을 가장하는 법도 모르고 애초에 목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로 출석을 빠지지 않고 하거나 성경공부 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에 답했을 때 주어지는 달란트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벽에 붙어 우리들의 달란트 적립 현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큰 대자보는 은근히 압박감을 주었고, 경쟁을 부추겼다. 학교처럼 패가 갈렸고 험담, 따돌림, 욕설, 폭력, 고자질이 난무했고, 고자질을 처리하는 선생님은 늘 예수님의 사랑을 강조하시며 싸운 당사자들에게 서로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화해하라고 시키셨지만 그런 닭살 돋는 짓을 따르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성경 공부를 할 때면 선생님의 말에 하나부터 열까지 토를 달며 미래의 니체나 도킨스를 꿈꾸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날카롭고 정곡을 찌르는 것은 당연히 없었고 듣는 사람을 몹시 짜증나게 하고 반항에 동조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선생님을 동정하게 만드는 유치한 트집 잡기가 대부분이었다. 종교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반항이 곧 강함의 상징이 되는 그 나이대 아이들의 영웅 심리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교회가 체벌이 없다는 점을 악용한 다소 비겁한 영웅 심리였다. 동요처럼 지어진 찬송가를 율동과 함께 하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2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 가사와 율동이 간간이 생각난다. 여름 성경학교에서는 오로지 계곡에서 입술이 파래지도록 놀았던 것과 우리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집사님들이 차려 놓으셨던 간식만이 기억난다. 그 외에도 가족 찬양 대회, 성경 암송 대회, 달란트 장터 등등 무수한 행사들이 있었고 거기에는 언제나 적절한 경쟁과 상품이 따라 붙어, 여기가 교회라는 사실을 망각한 아이들이 훌리건처럼 돌변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일시에 소개해주고, 각종 대회, 행사, 종교의 이름 아래 정당성을 획득한 애정이 넘치는 말과 스킨십 등 친해질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해주는 교회라는 곳은 현대 사회의 인간의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최적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비록 인간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으레 있기 마련인 단점들은 다 있었을지라도 성적과 체벌 없이 듣기 좋은 말과 게임과 친구들만이 가득했던 교회를 학교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종교적 장소를 편안하고 즐겁게만 느끼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교회들이 정말 참된 예수의 정신을 가르치고자 했다면 한국 기독교는 지금처럼 세를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단체생활에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초등학생 때의 나를 생각하면 과연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신기하다. 아직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았고 삶의 모든 결정권이 부모님에게 맡겨진 어린아이였기 때문일까. 그래서 초기 발달 단계가 얼추 끝난 중학교 즈음 불행히도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정체성이 결정되어버렸을 때는 신기하리만치 교회의 모든 행사에 불참하고, 심지어 일요 예배 후 점심을 먹고 가라는 목사님의 권유까지도 질색할 정도로 교회와의 동행을 거부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 곳의 전도사라는 사람이 중등부 성경 공부에서 나에게 했던 ‘유라야, 정말 아름답다. 사랑한다.’라는 말이 친목을 위한 교회 특유의 유별난 화법이라고 이해하기에도 너무나 혐오스럽게 느껴졌을 때 나는 교회와의 동행이 완전히 끝났음을 느꼈다. 지금은 신부님에게조차 나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첩보작전처럼 미사만 드리다 사라지는 성당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종교인들과의 동행이 전혀 없는 것은 나태와 자기 정당화만을 키우는 것임이 근래 나의 미사 참석률을 통해 점점 명백해지면서, 이제는 그 때의 동행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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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 내가 동행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아니면 고독을 축복으로 여길까 고민하곤 합니다.
유머가 적절히 구사된 재미있는 글이었다. 싫든 좋든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동행해야만 하는 존재들인 것 같구나. 보다 원할한 전달을 위해서 몇 번이고 시일을 두고 퇴고할 것! 최고!
글을 읽다 한참 웃었다. 글을 재미있게 잘 쓰는구나. ^^
엄마가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