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2강] 천지창조 이야기 2/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창 1,27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천지창조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이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6일 창조하시고 하루 쉬시는 걸로 나옵니다. 6일 창조하시면서 창조가 끝날 때마다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나오죠. 그런데 특별히 마지막 날 인간 창조 때는 ‘보시니 참 좋았다’가 아니라 ‘아주 많이 참 좋았다’라고 원문에는 나와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한 것보다도 당신의 모습을 닮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까지 만들어서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또 바다와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리라 얘기하시고 난 다음에 ‘참 좋았다.’ 창조주 하느님은 인간을 만들고 난 다음에 가장 흐뭇해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대하고 흐뭇해했던 또 모든 권한을 주었던 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다른 피조물은 절대로 하느님을 배반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모습을 닮게 하여 만들었던, 그리고 만드시고 난 다음에 가장 하느님이 행복해하셨던 인간이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찢어놓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삶 자체가 하느님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무언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유독 사람만이 자기를 만들어 빚은 하느님을 부정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하느님은 다른 피조물에는 주시지 않은 특별한 선물을 인간에게 주었죠. 무엇입니까? 지성과 의지와 감성입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있어도 아주 작은 이 세 가지의 특별한 선물을 인간에게만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닮은 거겠죠. 그렇지만 우리들의 지성은 불완전합니다. 우리들의 의지도 불완전하죠. 또 우리들의 감성도 또한 불안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지성이며, 완전한 의지요, 완전한 감성이지요. 하여튼 닮은 것을 떼어내 분명히 주셨는데, 그 지성으로 자기를 만든 하느님을 배반합니다. 세상에는 하느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코웃음 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작은 두뇌로 하느님을 인식하려는 것은 참 무리한 일이죠. 여러분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후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도저히 풀지 못한 것 하나가 ‘하느님은 한 분이면서 삼위’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머리 좋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되지 않죠. 어느 날 아주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서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데 조그만 아이가 모래에 조그만 구멍을 파고 바닷물을 자꾸 가져다 붓더랍니다. 작은 구멍에 물이 채워지고 나머지는 구멍 안으로 들어가질 않죠. 아이가 참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생각하며 ‘얘야, 물이 다 채워졌는데 왜 자꾸 물을 갖다 붓니?’ 하니 그 아이 하는 작은 구멍 안에 바닷물을 전부 다 집어넣으려 한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하죠. 그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깨달은 겁니다. ‘그래, 이 유한한 머릿속에 무한한 하느님을 다 인식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바보짓이냐?’ 그래서 성인은 어린아이로 변장해 내려온 천사의 가르침을 듣고 무릎을 꿇고 ‘이제는 믿을 뿐이 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머리를 써서 노력해 봐야 있는 질서를 발견할 뿐이지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신 생명의 신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 포기의 풀, 한 송이 꽃의 신비도 해명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 꽃에서 나오는 향기도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또 설령 어떤 궁금했던 것이 해명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새로운 신비 앞에 인간은 늘 서게 됩니다. 첫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나아가서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천문학적인 우주의 신비를 꿰뚫어 알아낸다는 일은 얼마나 우리 인간에게는 요원한 일인 가는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감히 정복할 수도 없는 우주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바로 하느님의 존재이시지요. 사람의 두뇌로 도저히 인식할 수 없음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라고 흔히 말합니다. ‘하느님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은 자신 영혼의 문제, 또 신앙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분명히 계시는데, ‘있다,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영혼 구령과 직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어’ 이렇게 일소에 붙여버리는 태도는 아주 경박한 태도일 겁니다. 소위 무신론자들의 입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하느님이 계시면 이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 이 될 수가 있어?’입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힘들게 살고 또 못된 사람들이 잘 되는 이치로 볼 때 하느님이 계신 세상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러면서 ‘하느님이 없다, 크리스천도 보기 싫다, 나는 절대 죽어도 크리스천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들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하느님을 알고 크리스천이 된 후 과거의 오만한 자신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다고 그럽니다. 구약성서 1장에는, 여러분 다 읽어보셨겠지만, 하느님이 천지 창조하시고 모든 동물과 식물을 만드시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제 사람을 만드셨다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27절이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해라. 그리고 바다와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우리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인간의 영에 대한 말씀이겠죠. 왜냐하면 하느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은 영이시다’라는 얘기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인간과 똑같은 얼굴을 가졌다는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영을 받은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인간의 영의 원형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전에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세상 창조 이야기를 강론에서 좀 했습니다. 어떤 꼬마 하나가 손을 들더니 ‘신부님 질문이 있습니다.’ 하더니 ‘그럼 인간을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흑인 백인 또 황색 인종 이렇게 여러 인종도 그때 만드셨습니까?’ 물어요. 그래서 제가 즉흥적인 생각을 아이들한테 농담으로 얘기했어요. ‘하느님이 인간을 진흙으로 빚으셨다는 거 알지? 밀가루 반죽해서 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구워야지요.’ ‘그래, 그래서 하느님 모습대로 인간을 진흙으로 빚으시고 난 다음에 잘 구웠지. 잘 구워졌겠다 싶어서 꺼냈더니 덜 익은 거야. 그게 백인이란다. 다시 반죽해서 오븐에 놓고 구웠어. 이번에는 잘 익었겠다 했더니 새카맣게 탔어. 그게 바로 흑인이란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경험을 잘 살려서 세 번째로 노릇노릇 예쁘게 빵처럼 구워낸 것이 바로 황인종이야. 그래서 우리 동양인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해.’
주일학교 아이들한테 그냥 즉흥적으로 나왔던 이 말이 하고 나서도 참 기가막히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가서 교포들에게 강의할 때 ‘여러분들 백인들 사이에서 차별 많이 받으시고 멸시 많이 당하시지요? 하지만 기죽지 맙시다. 창조주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 빚어 가장 완벽하게 잘 구워낸 것이 바로 우리 황인종이니까, 백인 흰 것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흑인들 힘센 것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동양 사람들이 특히 우리 한국 사람 들이 가장 우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랬더니 박수를 신나게 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자부심을 주셔서.’ 좀 전에 제가 뭐라고 그랬죠?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영을 받은, 하느님은 인간 영의 원형이다.’ 그랬습니다. 닮았다고 하는 것은 영을 닮았다는 얘기겠죠. 성지에서 매일 성지 순례 미사를 했죠. 그런데 미사 때 어떤 형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나 저와 똑같았습니다. 키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한 것 같고. 눈코입이 어찌 저렇게 닮았을까, 강론하며 그분을 볼 때마다 혹시 내 쌍둥이 있었나라는 황당한 생각도 들었죠. 미사 끝나고 그분을 보고 싶었는데, 그분이 먼저 부인과 같이 인사를 했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면서 웃었습니다. 너무 닮았다.
그분 하시는 얘기가 자기는 김웅렬 신부님이 누군지 몰랐대요. 그런데 10여 년 전 예비자 교리에 갔는데 기존 신자들이 자기에게 어떤 신부님이랑 너무 닮았다며 피정 지도도 많이 하시고 알려진 신부님이라 하더래요, 그분도 저를 보고 싶어 했고, 그러다 평화방송에 나온 얼굴을 보니 정말 많이 닮았다고 느껴졌답니다. 그리고 세례받고 난 후 별명이 ‘김웅열 신부’였대요. 열심하신 신부님이라는 소리를 듣다 보니, 별명까지 신부님 이름을 가진 내가 신부님께 누가 되지 않게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제 강론 들으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대요.
그러면서 ‘그러다 보니 말투까지도 신부님을 담게 되고 또 존경받는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저와 닮은 사제인 것뿐만이 아니라 제 삶의 멘토가 되셨습니다. 오늘 드디어 이렇게 생시에 보게 돼서 영광입니다.’라고 하셨어요. 자기를 닮은 사람에게는 친근감도 가고, 또 그 사람이 존경받고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을 닮아가려는 기본적인 욕심이 생깁니다. 어쨌든 ‘하느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라는 이 한 구절 속에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에 어쩌면 다른 모양으로도 인간을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닮은 존재로서 인간을 만드셨다. 그 뜻은 확실해졌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대로 살게 하려고 당신의 형상대로 닮게 하신 것이 아니었겠는가? 인간은 지극히 작은 존재라고 하지만 한편으론 인간의 생명은 지구보다 귀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을 가진 생명이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의 생명과 다른 동식물의 생명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동식물은 하느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인간만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도 분명히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고 인간의 사명이 제시되어 있죠. 즉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서 자연을 관리하는 일은 본래 인간의 사명이었습니다.
코끼리나 곰, 사자 같은 맹수를 힘으로는 다스릴 수 없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성경에서 다스리라고 분부했습니다. 그것은 힘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은 사랑과 지혜로 다스리도록 하라는 뜻일 겁니다. 여러분들. 종종 ‘인간답다’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 참 인간답다.’ 여러분은 어떤 뜻으로 그 말을 쓰고 계시는지요? 또 그 말을 들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성서적으로 인간답다는 것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답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어주셨으니 겸손하게 하느님을 닮은 사랑과 지혜를 가지고 자연을 다스리는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자연이 다 망가지고 있는 것 아시죠? 누가 그렇게 망가뜨렸습니까? 곰이, 늑대가, 뱀이, 새들이 망가뜨렸겠습니까? 아니죠. 자연을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될 책임이 있는 인간들이 다 망가뜨린 겁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자연 관리 사명을 얼마나 게을리하고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이 피폐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가슴 아프도록 느낍니다. 그래서 요즘은 자연에게 공격당합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자연의 관리자로 인간을 지정해 주셨는데, 인간은 산을 망가뜨리고 강과 바다도 다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맑아야 할 공기들이 다 오염이 되어 있죠.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망각하고,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결과 가지가지 공해로 번민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지구의 생명이 그렇게 오래 남아 있지 않다’라고 선언할 만큼 인간들은 땅 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사명을 가진 인간들끼리 원폭, 수폭 등의 어마어마한 무기를 가지고 파멸적인 파괴를 지구상에 가져오려고 합니다. 전 세계에 있는 그 원자탄을 동시에 누르면 정말 지구가 쪼개진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모든 종이 전부 멸망이 된다고 그럽니다. 하느님이 주셨던 하느님의 지혜와 자유 의지를 끝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사용하게 되었을 때,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자기 목을 조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느님을 배반하고는 인간의 지혜는 이미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겁니다. 구약성서에는 창조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떠나갔으며 타락하고 추한 결과를 노출한 모습이 곳곳에 그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성서는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최고의 문학이라고 호칭 받기에 부족함이 없고 지극히 드라마틱하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만드시고 난 다음에 가장 보기 좋았다고 하셨다고 한다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들의 타락은 잘못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실수로 뭔가 제대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부품을 제대로 쓰지를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분명히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을 때는 하느님의 가장 귀한 것들을 그 영에다 다 집어넣었던 겁니다.
하느님 잘못이 아니죠. 인간의 타락은 태초에 모든 것을 지으시면서 특별히 사람에게 당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면서 세상을 잘 관리하라고 다스리라고 했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그 선물을 가지고 인간답게, 인간답게는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답게라는 뜻이라고 그랬습니다만, 선용하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악용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 지구는 이제는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고, 모든 자연이 이제는 사람에게 보복하기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하느님은 인간에게 주셨지만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 자연을 오염시키는데 앞장서고 살았다고 하는 마음, 그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금부터라도 자연을 살리도록 우리들이 애써야 할 겁니다. 여러분들, 태초부터 여러분들을 사랑했습니다.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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