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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수곤의 `한밤의 사진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함수곤
한밤의 사진편지 제2008호 (13/1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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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5회 서촌 세종마을 주말걷기 후기
글 : 이순애 (운영위원, soonae1211@naver.com) 사진 : 이경환(운영위원, kwhan43@hanmail.net )
윤종영.홍종남, 김동식.송군자, 진풍길.소정자 이창조.정광자, 허필수.장정자 권영춘.신금자 박동진.방규명, 김창석.김경진 신원영.손귀연 김영신.윤정자, 함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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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 김옥연, 이순애, 안명희, 정미숙, 조순금
9월 29일 (일) 늦은 3시, 가을이 온다는 기별처럼 소리없이 내리던 비가 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사모는 특별한 모임이니까 오던 비도 멈춰주겠지. 믿는 구석이 있는 회원들 45명이 경복궁역 메트로 미술관에 모였습니다.
추석 명절 후 처음 만나는 자리라서 그런지 반가움이 더 커서 웃음 꽃과 덕담으로 실내가 시끌시끌합니다. . 이상의 집 세종대왕나신 터 ~청전 이상범 화백 가옥 및 화실 ~구립 박노수 미술관 (개관전 <달과 소년> )~ 윤동주 하숙터 ~ 수성동 계곡 기린교 ~ 서울교회~ 선희궁 터 ~ 송강 정철 집터 및 시비 ~ 궁정동 무궁화 동산 김상용,김상헌 집터 ~ 청와대 사랑채 ~ 쌍홍문터 ~ 보안여관 ~ 통의동 백송터(창의궁터) ~ 추사 김정희 집터 ~ 식당까지입니다
지난 2월 서촌∼인왕산 걷기를 한차례 한 적이 있기에 그때 걷지 못했던 골목길을 따라 서울의 뒷모습을 보려 합니다.
서촌은 경북궁 서문인 영추문 쪽에 위치해 있기에 불려진 이름인데 세종이 탄생하신 언저리라서 세종마을로 바뀌었답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서니 왼쪽에 <서울시 음식특성화 사업(시장닥터) 선정> 경축 현수막이 보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써있는 표현이 눈길을 끕니다. 시장닥터라니요?
국어교사 출신 박찬도 고문님께 살짝 자문을 구했지요. 시장활성화를 위해 처방을 하는 만능박사를 의미하나 보다고 하시더군요.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쪽집게 처방사업이겠지요. 하지만 세종마을까지 이런 사업 이름을 내걸야하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좁은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서촌에는 한옥 660채가 남아있다는데 1930년대 지어진 낡고 좁은 모습이라서 새로 개축하지 않은 집은 좀 누추하고 불편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올망졸망 잇대어 추녀를 맛대어 있어 소곤소곤 정다운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 같지 않나요?
하얀 설화초가 크게 팔을 벌리고 청보라 물망초가 가는 목을 내밀며 우리를 반겨줍니다.
삼계탕으로 유명한 음식점 <토속촌> 앞에는 아직 한낮인데도 손님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군요.
북촌에 이어 요즘 세종마을이 도보관광지역으로 손꼽히면서 큰길가는 물론 작은 골목길도 가게가 많이 생기고 손님이 북적여서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았어요.
너무 상업화에 물들어도 안 되지만 오늘같이 구름낀 날에도 활기찬 풍경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이상의 집>에 도착하니 대수선공사를 하느라 문이 닫혀있습니다. 이상이 세 살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살면서 문학세계를 만들어나간 큰아버지 집터로 등록문화재랍니다.
지난 2월에 왔을 때는 종로에 있던 제비다방을 옮겨놓은 듯 전면 통유리 창문이 인상적이었는데 통유리창문이 없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어요.
답사 중에 기어이 공사 감독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확인해 보았지요. 아휴∼통유리 창문은 그대로 살린답니다.
큰 길가 통인시장 못미쳐 <세종대왕 나신터> 자리에 닿았습니다. 통인동 137번지 일대로 서울시에서는 이 곳 일대 간판과 표지판을 한글로 바꿔 달고, '한글 마당' 과 세종대왕 생가 재현 등 한글문화관광 중심지로 가꾼답니다.
아직까지 탄생 표지석 하나만 덜렁 있을 뿐이니 바뀐 보습을 빨리 보고 싶어요.
혹시 세종이 태어나신 날이 언제인지 아시나요? 5월 15일 이랍니다. 그래서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정했답니다.
세종대왕 같은 스승이 되고 대왕을 본받자는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니 그 날이 촌지나 챙겨서 교육을 망치는 날이 되었다고 없애든가 학기가 끝나는 2월로 옮기자고 해서는 안되겠지요?
통인시장을 가로질렀습니다. 유명한 기름 떡볶이이에 과일 채소 건어물 전부침까지 없는 게 없군요. 바구니에 담긴 빠알간 고구마를 보더니 안명희 회원님이 귀엽다고 탄성을 지릅니다.
쉼터 마을정자를 지나 누하동 골목길 청전(靑田) 이상범 화백 가옥 및 화실에 들어섰습니다.
가옥의 명칭은 樓下(누하)洞天(동천)으로 신선이 사는 세계 즉 천국을 의미한답니다.
전통한옥 양식에 근대재료를 섞어 서울 경기지방의 전통적인 중상류 주택입니다. 안채안방, 대청, 행낭채, 아랫방, 부엌, 광이 있고 겹처마를 두른 기와 지붕이 맵시 있고 단아한 외관형태를 갖추고 있어요.
꽃담이 둘러있고 장독대까지 옛모습 그대로입니다. 궁궐에서나 봄직한 청전이 그린 꽃담은 십장생과 <충신>이란 글귀가 보이는데 한쪽은 시멘트로 덮여 있어 안타까웠어요. 6.25때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훼손되었다는군요.
지붕 뒤로 회화나무 두 그루와 은행나무가 우람합니다. 회화나무 잎사귀는 11월까지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고 해서 올곧은 선비의 전형으로 여겨 선비나무라고도 불린다지요.
오는 11월 3일 김창석 위원님이 창덕궁 안내하시며 회화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신다니 기대할게요.
문화재지킴이 이해경 님이 동아일보의 손기정 우승자의 일장기 말소 사건과 청전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936년 손기정선수의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마크를 삭제하여 동아일보를 발행한 장본인이 청전이랍니다.
당시 동아일보 미술기자로 연재소설의 삽화를 도맡아 그리셨다지요. 일장기 삭제 사건으로 빙허 현진건 소설가와 40여일 간 심문고초를 당하고, 동아일보는 279일간 정간되었지요.
언론계에 종사 안하기로 서약하고 풀려나서 동아일보를 퇴직하셨답니다.
정광자회원님이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와 이화백님이똑같이 닮았다고 반가워하시네요. 이창조위원장님을 찾아 확인하시려는데 어디를 가셨나요? 다음에 가족들과 꼭 들르시겠지요?
옆집은 청연山房(산방)으로 청전이 그림을 그리며 살던 화실입니다. 후진양성기관으로 운영했는데 박노수 화백도 여기서 그림을 배우셨대요. 넷째 며느리인 천금순 할머니가 소중하게 정리해놓은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셨어요.
<이집이 오래돼서 허물어지면 빨간 벽돌이라도 쌓아서 지키고 있으라>는 유언을 따르시는 하얀 머리칼 할머니 모습이 얼마나 곱고 단아한지요?
<어찌 그리 곱습니까?> 김용만 고문님이 감탄을 하시니 볼에 수줍은 미소가 가득 번집니다.
그리고는 일제 강점기 강원도에서 그리셨다는 이순신장군 영정을 꺼내드십니다.
원본은 지금 해군사관학교에 보관하고 있는데 의관을 갖춘 복장과 얼굴이 늠름하고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워요.
영정을 다 완성한 뒤에 단기연호와 필명을 써 넣었으나 왜경에서 말썽이 일어날 것이 뻔했으므로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 선생님과 의논하여 이를 영정의 뒷면에 넣고 봉함했다는 며느리 말씀에 청전의 진면목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수성동으로 가는 누상동 골목입니다. 새로 산뜻하게 단장한 한옥이 눈에 띕니다.
기와담장 중간쯤 손이 닿기 편한 곳에 30센티 정도 조그마한 쪽문이 나있습니다. 까만 철제 앙증맞은 손잡이까지 달려 있어요.
뭘까요? 빗장을 열어보니 전기계량 검침기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정작은 옛날 안방마님들의 체통을 살려주기 위한 작은 통로였다는군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도 차마 대문을 열어 볼 수 없었던 안방마님이 살며시 이 쪽창문에 귀를 바싹 붙이고 바깥 동태를 살펴볼 수 있었겠지요? 이제 용도가 바뀌었지만 바뀐 용도 또한 여간 멋스럽지 않네요.
이제 옥인동 박노수 술관입니다. 열려진 대문 곁에 사철나무가 서있고 해태상 두 마리를 통과하면 백송, 석동, 백일홍, 감나무 등 나무가 무성합니다.
개관 초 하얗게 피어 손님을 맞던 실란이 지는 대신 양란이 고개를 들고 뛰노는 사슴을 바라보듯 활활 타오르네요.
전통을 세련된 모습으로 해석해서 현대적으로 색감을 살려낸 화백은 미술관 개관을 못보고 지난 2월 타계하셨지요.
정원의 수석과 조각품, 미술품 등 1,000여점 전재산을 종로구에 기탁하자 종로구에서는 집을 새단장하여 구립미술관으로 개관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집도 1930년대 지어진 한-양 절충식 2층 가옥이었어요. 12월 25일까지 무료로 개관전 <달과 소년전> 이 열리는데
주말이라서 마당에까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현관은 포치를 설치하여 아늑하고 붉은 벽돌벽이 독특했어요.
현관 입구에는‘여의륜’(如意輪)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어요. 추사 김정희의 작품으로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만사가 뜻대로 잘 돌아간다'는 뜻이래요.
저는 개인적으로 박화백의 <부이불오>라는 수묵담채화를 좋아합니다. 정원에 핀 꽃자주 모란에 영감을 받아서 그린 작품이랍니다. 모란이 봉우리를 터뜨리려는 모습과 활짝 핀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다’는 표현이 우리 한사모가 지향하는 생각과 꼭 맞아떨어지지 않나요? 얼마전 배우 이병헌씨와 결혼한 배우 이민정씨가 박하백의 외손녀라니 가족 모두 예술적 감각을 타고났나 봅니다.
옥인제일교회 도착하기 직전 왼쪽 누상동 윤동주 하숙집터 표지판이 조그맣습니다.
수성동 계곡길을 따라 오른쪽은 옥인동이고 왼쪽은 누상동이지요. 연희전문 재학시덜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친구 정병욱과 함께 하숙한 곳입니다.
인왕산 기슭을 거닐며 <별헤는 밤> <자화상>을 쓰며 별처럼 맑은 영혼으로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고뇌를 새긴 곳이지요.
옥인제일교회 계단에서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인왕교회였는데 건물을 다시 지으며 이름도 바꿨나봐요. 영화 '러브픽션'에서 하정우가 사는 집인 '옥인연립을 지나니 수성동 계곡입니다. 어제부터 비가 내려셔 물소리가 더욱 우렁찼습니다.
옥인아파트를 헐고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산제색도>에 나온 산수화를 참고하여 수성동 계곡을 복원하였답니다. 안평대군이 말을 타고 건넜다는 기린교가 보입니다.
그림에만 있지 묻혀있던 기린교를 250년 후에 시멘트 속에서 찾아냈으니.. 위대한 그림의 힘입니다.
두쪽으로 만든 돌다리는 너무 좁아 어떻게 말을 타고 건넜을까 신기하네요. 세종대왕은 똑똑한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수성동 집에 ‘게으름 없이(匪懈·비해) 왕(형)을 섬기라’는 뜻에서 ‘비해당’이란 당호를 내렸지요.
안평대군은 자연과 예술을 즐기는 평온한 삶을 꿈꿨으나 권력싸움에 희생되어 이름대로 안평하지를 못했지요.
약간 흐린 하늘 아래 덜꿩나무 새빨간 열매가 영롱하고 보랏빛 벌개미취가 정겹습니다.
화살나무잎이 빨갛게 단풍지며 가장 먼저 가을을 알립니다. 홍종남회원님이 구름낀 날 오르는 계곡길이 환상적이라고 귀뜸해 주셨어요.
인왕아파트 흔적을 스치며 언덕배기 골목길을 돌아나옵니다 .
<어라, 경주에만 있는 줄 알았던 불국사가 이곳에도 있어요.>
옥인동 저택의 정원에는 감이 익기 시작하는데 냄새만으로 사람기척을 알았는지 개짖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2002년 대통령 후보 이회창 총재가 살던 지역인 이 일대는 송석원(松石園)길로 유명하지요. 우리가 단체사진을 찍은 옥인제일교회에서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고 나오며 진인사대천명을 말하던 이회창 후보가 떠오릅니다.
사대부는 아니었지만 송석원 주인을 비롯한 중인들은 풍광 좋은 이곳에서 시작 활동을 하며 예술을 즐겼답니다. 조선 르네상스의 한 장면이라지요?
내려온 길에서 다시 서울교회쪽으로 꼬불꼬불 언덕길을 거슬러올라갑니다. 회원님들이 땀을 훔치며 잠깐 쉬어가지고 팔을 잡아당깁니다.
그래도 골목길이 끝나고 곧 산길이 나오더니 옥류동 계곡의 별장 근처인 청휘각 표지판이 보입니다.
병자호란 때 충절과 의리의 상징이 된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후손이 살던 지역입니다. 청휘각은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이 영의정이 된 뒤에 지은 정자입니다.
메디치 가문이 없는 르네상스를 상상하기 어렵듯이 조선 땅에도 메디치가에 버금가는 예술 후견인 가문이 바로 안동김씨 김상용,김상헌 가문이었답니다.
가문은 부침을 거듭하다 순조 때 후손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 자리까지 오르지만 어쨌든 변함없이 예술을 후원했답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탄생시킨 주역도 이 가문이랍니다.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시인 사천 이병연 등 시인과 화가들이 인왕산 아래 모여 예술적 영감을 주고 받았으니
이 지역이 한국의 르네상스를 실현한 발원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이 힘든 언덕길을 굳이 올라온 이유입니다.
이제 서울교회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후원하여 세운 교회인데 1958년 머리돌이 선명하군요. 지금까지도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그때 만든 종탑이 고풍스럽고 서울 시내를 한눈에 바라보는 명소로 아는 사람만 아는 장소입니다.
종탑 아래에서 차 한잔씩을 나눴습니다.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 몇 개만 놓여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웠어요.
경복교회로 내려가는 폭좁은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아, 골목이 참 재미있네요.> 신원영위원님의 유쾌한 조크에 <나 같으면 백 번을 찾아와도 이런 골목길은 못 찾겠어.> 한상진고문님의 표현이 고맙기만 합니다.
김경진 회원님이 이렇게 불편한 곳에서 살지 않은 것도 다 남편 잘 만난 덕분이라며 은근히 김창석 영위원님을 추켜주시네요.
맹학교 정문 바로 직전 신위원님이 하트 모양 나뭇잎을 가리킵니다. 잎을 주워 냄새를 맡아보는 임정순 회원님 얼굴에 신기함이 묻어납니다. 달콤한 사탕냄새, 흑갈색 초콜릿향이 짙게 나지요? 월계수 나뭇잎입니다.
맹학교 개교 100주년을 알리는 현수막 옆 담길에는 시각장애 학생들이 새긴 점자가 나란하고 농학교 담장엔 수화 그림이 일반 학교와는 사뭇 다르다는 걸 보여 주네요. 장애는 생활하기 조금 불편할 뿐인데 우리가 너무 무심했나 봐요.
청운초등학교 교문에는 운동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습니다. 오후 늦게까지 운동회 연습을 하느라 신났던 옛추억에 잠기며
오른쪽에 세워진 송강 정철 집터 표지석과 <관동별곡> 앞부분을 새긴 시비를 관찰합니다.
이 언저리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의 집터 언저리라고 씌여있는데 <언저리>라는 우리말이 참 잘 어울리지요? 우리는 세종 탄신터에서부터 계속 언저리만 맴돌고 있으니까요.
궁정동 무궁화 동산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경찰관들이 꼬치꼬치 캐물으며 서로 바쁘게 무전 연락을 하고 동행까지 해 주십니다.
청와대 근처니 보안상 필요해서겠지요. 전 중앙정보부 안가는 <무궁화동산>으로 변모했는데 ‘정(井)’자 모양의 우물이 있어 궁정동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숨진 10.26 현장입니다. 안가 다섯 채가 들어서 있던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모두 헐렸지요.
김영삼 대통령의 치적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과연 역사를 싹쓸어 없애는 것이 능사인지는 의문입니다.
공원 안에는 김상용의 집터 표지석이 있고 곁에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의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돌아올 동 말 동하여라> 는 김상헌의 시조가 새겨져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항복하려 할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형님 김상용과 동생 김상헌 모두 우리 역사의 자존심을 살려준 용감한 형제입니다.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 김상헌과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은 격렬한 논쟁을 이어갔지요. ‘가노라 삼각산아’로 상징되는 김상헌만 우국충절이 돋보인다고 말하지만 저는 모두 나라를 생각한 충신이란 생각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대의 마음은 돌 같아 끝내 풀릴 줄 모르건만 내 마음은 고리 같아도 소신을 따랐노라.” 는 최명길,
“조용히 찾아보니 이승과 저승이 반가운데 문득 백 년의 의심이 풀리도다.” 는 김상헌.
선택은 달랐지만 후에 서로 오해를 풀고 시를 읊은 두 분을 흠모합니다.
청와대 사랑채를 지나고 해공 신익희 선생 옛집을 지나 쌍홍문터에 이릅니다.
임진왜란때 어머니를 봉양한 효자 형제 둘을 기리기 위해 만든 문이 있었대요. 효자동의 유래가 시작된 곳이지요.
경복궁 방향으로 스무걸음쯤 걸으면 연정삼계탕이란 음식정이 있어요. 연노랑 부용꽃이 큰 키를 늘이고 우리를 넘겨다보고 있는 이곳이 춘원 이광수가 살던 집입니다.
산부인과 의사 신여성 허영숙과 결혼하고 나서의 일이지요. 여성 의사 1호인 부인은 이곳에서 <허영숙산원>을 차리고 춘원을 후원했답니다.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고 춘원이 친일파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울 때는 홀로 생계를 책임졌지요. 춘원의 납북으로 생이별을 했으나 세 남매를 물리학 박사, 영문학자, 생화학자로 키워내며 눈감는 날까지 남편을 그리워했지요.
동경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춘원의 목숨을 살려내고 자녀들을 잘 키운 부인의 공을 가볍게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춘원의 민족의식을 운위하지만 그이만큼 민족애에 철저하던 분도 흔치 않다. 여러 작가들을 접할 수 있었지만 춘원은 참으로 남다르다.
신문소설을 편집국장 책상에 앉아 마감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하는데 한 번도 막히지 않고 슬슬 써내리는 문장이 한 번의 가필도 없이 정연하고 삽화가의 머리에도 선연히 그 영상이 떠올라 여간 편하지가 않았다. ”
(서양화가 이상범 회고, 동우<東友> 1963년 12월호)
옆에 있는 청와대 부속건물이 진명여고 자리라는 이창조 위원장님 설명을 들으며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 보안여관을 향합니다.
서정주가 머물며 김동리 김달진과 문예지 "시인부락" 을 만들었고 시인 묵객들이 장기 투숙을 하던 곳, 과거 청와대를 방문하려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으로 소문났지요.
길가에 바싹 붙은 여관방은 어찌나 좁은지 한 사람 눕기도 힘들 지경인데 2층집 여관에는 좁은 방이 13개나 다닥다닥 붙어있답니다.
이제 갤러리와 공방을 둘러보며 마지막 걷기 지점인 백송터로 갑니다. 어린시절 영조가 살았던 창의궁 터로 추정되는 통의동 35번지입니다.
영조는 이곳에서 평범한 왕자로 살았으나 경종이 후사가 없자 왕위에 올랐어요. 그래서 잠저가 되는 이곳을 ‘창의궁’이라고 부르지요.
영조는 장수한 왕으로 52년 동안 재위하며 궐 밖 출입도 많이 했는데, 특히 이곳‘창의궁’출입을 자주 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송이 이곳에 고택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1990년 벼락을 맞아 죽은 그루터기 옆에 네 그루의 묘목이 어느새 거목이 되고 있는데 소유주가 모두 다르군요. 개인, 서울시, 종로구청, 문화재청이 주인입니다. 이제 가장 오래된 백송은 헌법재판소 마당에 있습니다.
바싹 붙은 옆 담벼락에 <추사 김정희>라고 쓴 나무문패가 조그맣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김정희 원님이 그냥 갈 수 없지요. 그런데 걸려있는 거울 속으로 보이는 얼굴은 누구인가요? 네 악동 신원영위원님이군요.
추사 김정희의 집이 왜 창의궁 옆에 있을까 궁금하세요? 영조의 딸 화순옹주는 당시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에게 출가했는데 김한신이 김정희의 증조부이기 때문입니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모가 되는 셈이니 가계도를 잘 살펴보세요.
이제 식당 백송입니다.
대표님이 엊그제 전역하신 안철주님을 불러내셨어요. 어느새 단정하게 군복 정장으로 갈아입으셨군요. <정장을 입으니 정말 잘 생겼지요?>하고 물으니 <정∼말 얼굴이 달라보이네> 오똑한 콧날미인 임정순 회원님이 옆에서 대표님을 거드셨습니다.
<32년 7개월을 원없이 일하고 물러났습니다>
뒤돌아보는 늠름한 얼굴에 자부심과 의지가 서려있습니다. 대표님이 전역식에서 만난 합종 참모 본부 정승조 대장님이 안대령님에 관해 하신 이야기를 전하셨습니다.
전역 후에 전문분야인 정보통신 관련 사업을 할 줄 알았는데 한사모를 만나 걷기지도자 자격증을 따며 다른 길로 들어설 것 같아 서운하다고 하셨대요. 글쎄, 두 분야 모두에서 성공하실 것 같지요?
안 대령님은 회원 한 분 한분에게 다가가 준비해오신 죠니워커 위스키 한 잔씩을 따라주셨어요.
오늘 건배사는 <가로되, 사랑> <이르되, 행복>입니다. 한사모와 같이 걷고 이야기하고 밥 먹는 것, 이것이 사랑이고 행복이라는 마음에서 제가 만들었지요.
대표님이 오늘 정식 회원이 된 정인자회원님의 동생 정미숙(글라라)님과 친구 조순금(소피아)님에게 소감을 물으셨어요.
글라라님은 정인자회원님 아들인 조카 토비를 제300회 기념 걷기 행사 장소에 데려다 주기 위해 처음 참석했어요. 이제는 일요일 주말걷기가 기다려 진답니다.
약속을 잡을 때도 일요일은 항상 비워놓는 버릇이 생겼다는군요. 누구나 건강을 챙기려는 시간도, 생각도 가지고 있지만 실천이 잘 안되는데 한사모에 나오니 자연스레 실천이 된다는군요. 준비를 많이 한 듯 유창하게 발표를 하니 여기저기서 언니보다 낫다는 찬사가 들리네요.
중중장애인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소피아님은 누워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와상 장애인들이 한사모 회원들처럼 이렇게 인생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지요. 그 순간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어요.
대표님은 다비드상을 조각한 천재 미켈란젤로의 집중력에 관한 비유를 들며 말씀을 마치셨어요.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다비드상 같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가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다비드와 관련 없는 것은 전부 버렸습니다. > 놀라운 집중력으로 대작을 만든 미켈란젤로처럼 걷기와 관련 없는 것은 전부 버리고 오로지 집중해서 공을 들이는 운영위원들에게 보내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한 사람도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랍니다.
메디치 가문과 안동김씨와 예술과 후원자, 그리고 자연과의 통합을 다시 일깨운 시간이었습니다.
회원이 340여명이나 되는 <한국 교육과정, 교과서연구회> 회장이신 이경환 감사님이 <제8회 교과서의 날> 행사를 안내하십니다.
10월 5일 토요일 13시 30분 이촌동 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행사에서는 교과서와 교육과정 발전에 기여하신 윤종영고문님과 김동식고문님이 교육부 장관 공로상을 받으신답니다. 회원님들의 많은 참석을 부탁하셨습니다.
다음 걷기를 자원하신 허필수회장님께 깃발을 넘겼습니다. 올림픽 공원 걷기를 예고하시는 허회장님, 하모니카 앙상블의 일본 공연이 취소되자 그 빈 자리를 메꿔주십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이 한사모를 움직이는 바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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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수곤의 `한밤의 사진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함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