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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2/ 분별심이라는 환상의 병을 분별심이라는 환상의 약으로 치료한다
2. 증시랑에게 답함(1)
편지를 받아 보니 어릴 때부터 벼슬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큰 스승을 찾아뵙다가 중간에 과거와 혼인, 벼슬하는 일 때문에 세속 생각과 습관에 빠져서 순수하게 한결같이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큰 죄라 하였습니다. 또 무상한 세간이 여러 가지 허망한 환상이어서 한 가지도 즐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이 일대사인연을 참구하고자 한다 하시니 제 마음에 매우 흡족합니다. 이미 선비가 되었기 때문에 봉급을 받아 생계를 해결해야 하고, 과거와 혼인과 벼슬살이도 세간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 작은 잘못으로 큰 두려움을 냈습니다. 시작 없는 오랜 세월부터 참된 선지식을 섬기고, 깊은 반야의 지혜를 익히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이 말한 큰 죄라는 것은 성현도 또한 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헛된 환상이며 구경의 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능히 마음을 진리의 문안으로 돌려 지혜의 물로써 먼지로 오염된 때를 씻어 버리고 깨끗하게 스스로 머물러야 합니다. 바로 한 칼로 두 동강을 내고 다시는 상속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반드시 앞도 생각하지 말고, 뒤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미 헛된 환상이라고 말한다면, 지을 때도 또한 환상이며, 받을 때도 또한 환상이며, 지각할 때도 또한 환상이며, 미혹하여 넘어질 때도 또한 환상이며, 과거ㆍ현재ㆍ미래도 다 이 환상입니다. 오늘 잘못을 알았다면 환상의 약으로 다시 환상의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병이 나아서 약이 필요 없게 되면 그 전과 같이 다만 옛날 사람입니다. 만약 특별히 사람이 있고 별도로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삿된 마군인 외도의 견해입니다. 당신은 깊이 생각하여 다만 이와 같이 공부해 가되 때때로 고요할 때에 수미산, 방하착의 두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바로 착실하게 공부를 해 갈지언정 이미 지나간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또한 결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하고 두려워하면 곧 도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다만 모든 부처님 앞에 큰 소원을 세우기를 ‘이 마음이 견고해서 영원히 물러나지 않고, 모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거하여 선지식을 만나서, 한 마디 말 아래 생사를 한 순간에 잊고,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지혜를 깨달아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를 갚게 해 주소서’ 하십시오. 만약 이와 같이 하기를 오래오래 하면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보지 않았습니까?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따라서 보리심을 내어 점차 남쪽으로 가서 110개의 성을 지나서 53선지식을 참례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미륵보살이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지내온 여러 선지식으로부터 얻은 가르침을 한 순간에 잊어버렸습니다. 다시 미륵보살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문수보살을 뵙고자 생각했는데 이에 문수보살이 멀리서 오른손을 펴서 110유순을 지나서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야, 만약 믿음을 잃었다면 마음이 용렬하여 근심하고 후회하며, 공덕의 행위를 갖추지 못하고 정진도 하지 않아서 마음이 한 선근에 집착하며, 적은 공덕에 문득 만족했을 것이다. 옳은 방법으로 실천과 원력을 발하여 일으키지도 못하며, 선지식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고 이와 같은 법성과 이취와 법문과 실천과 경계까지도 통달하여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주변지와 종종지와 근원을 다한 것과 통달하여 아는 것과 취입과 해탈과 분별과 증지와 획득도 다 능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문수보살이 이와 같이 선재동자에게 보였는데 선재동자는 바로 한량없는 법문을 성취해서 한량없이 큰 지혜와 광명을 갖추었습니다. 보현보살의 세계에 들어가 한 생각 가운데서 삼천대천세계의 작은 먼지 수만큼의 모든 선지식을 다 만나보고 다 친견하며 공경하여 섬기고 그 가르침을 받아 실천하여 불망념지로 장엄 해탈을 얻었습니다. 보현보살의 털구멍 세상에 들어가서 한 털구멍에 한 걸음을 옮기되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진수의 부처님 세계를 지나서, 보현보살과 같으며 모든 부처님과 같고 둘이 아니며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때가 되어야 비로소 삼독을 돌이켜 삼취정계를 이루며, 육식을 돌이켜 육신통을 이루며, 번뇌를 돌이켜 보리를 이루며, 무명을 돌이켜 큰 지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한 꾸러미의 일들은 다만 당사자의 마지막 한 생각 진실한 것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이 한 번 손가락을 퉁기는 사이에 오히려 선지식으로부터 증득한 삼매도 한순간에 잊어버렸는데, 하물며 시작 없는 허위와 악업과 습기이겠습니까? 만약 앞에 지은 바 잘못을 실제로 여긴다면 지금의 눈앞의 경계도 다 실제로 여길 것이며, 관직과 부귀와 은애도 다 실제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것들을 실제로 여긴다면 지옥과 천당도 또한 실제이며, 번뇌와 무명도 실제이며, 깨달은 법문도 실제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견해를 갖는다면 미래를 다하더라도 다시 어떤 사람도 부처님 가르침에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의 갖가지 방편이 도리어 망어가 될 것입니다.
받아 보니, 당신이 편지를 보낼 때에 모든 성인을 위하여 향을 사르고 멀리 암자 쪽으로 예배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대의 정성스런 마음이 지극히 간절합니다. 서로 떨어진 거리를 비록 많이 멀지는 않지만 만나서 말하지 못했으므로 뜻 따라 손 따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지럽게 쓰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비록 번거로우나 또한 성의와 지극한 마음에서 나와서 감히 한 마디의 말과 한 글자도 서로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또 기억해 보니 선재동자가 적정바라문을 만나고 성어해탈을 얻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보살이 아뇩보리에서 과거에도 이미 물러남이 없었고, 현재에도 물러남이 없으며, 미래에도 물러나지 않아서 구하는 것을 이루지 않음이 없었던 것은 다 성실함이 지극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이미 대나무 의자와 포단으로 친구를 삼는다고 하니, 선재동자가 최적정바라문을 만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운문에게 편지를 보낼 때 모든 성인을 대하고 멀리서 예배를 한 뒤에 보낸 것은 다만 저를 믿은 것이니, 이것은 정성이 매우 지극한 것입니다. 다만 자세히 들으십시오. 다만 이 같이 공부를 해 가면 아뇩보리를 틀림없이 원만히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서장 2 - 증시랑에 대한 답서(1)
여래의 말은 분별심 치료하는 방편
“다만 세간의 일은 헛된 환상일 뿐 구경법(究竟法)이 아님을 알아서 마음을 이 선문(禪門)으로 돌려 지혜의 물로써 더러운 때를 씻어내고 스스로 깨끗하게 머물며, 단칼에 끊어버려서 다시는 헛된 환상을 이어가지 않을 수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니 앞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헛된 환상이라고 한다면, 업을 지을 때도 환상이고 과보를 받을 때도 환상이며, 깨달을 때도 환상이고 어리석을 때도 환상이며,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환상이니, 이제 이러한 잘못을 알았다면 환상의 약으로 다시 환상의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병이 나아 약을 치우면 여전히 다만 옛날 그 사람일 뿐입니다.
만약 따로 사람이 있고 법(法)이 있다면 이것은 삿된 외도의 견해입니다. ”
만물의 실상(實相)은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실상을 보면 중생이 곧 부처요 번뇌가 곧 보리이다." 이것이 바로 육조 혜능이 <단경>에서 강조한 불이법(不二法)이며, 유마 거사의불이법문(不二法門)이며,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진실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본래 해탈해 있는 것이지 해탈할 가능성을 지닌 속박된 존재가 아니다.
다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찾는다’ 느니, ‘아쥬냐닷타가 자기 얼굴을 찾아다닌다’느니 하는 비유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번뇌에 싸여 윤회하는 중생이라고 여기는 것은 분별심의 작용에 의한 환상 이지 실상이 아니다.
분별심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지화 관념화되어 과거·현재·미래가 있고, 중생과 부처가 있고,업과 과보가 있어서, 삼라만상이 모두 분별되고 대립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이들은 모두 한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환상이다.
그러므로 선의 공부란 이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을 위주로 한다.
그러나 분별심이라고 하여 이 마음밖에 따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이 마음의 작용이다.
즉 분별심을 내려놓는다고 하여 내려놓을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실상에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데, 분별심이라는 환상의 병 때문에 스스로를 고통스런중생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분별심을 내려놓는다는 것도 이미 중생과 부처, 미혹과 깨달음, 분별심과 무분별심을 나누고 있는 분별심에서의 말이다. 그렇지만 분별심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실상을 알 수가 없으므로 분별심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분별심이라는 환상의 병을 분별심이라는 환상의 약으로 치료한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금강경>에서는 여래가 하는 모든 말은 방편일 뿐이라고 한 것이다.
여래의 말은 진리가 아니라 환상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환상의 약일 뿐이다.
환상의 병을 환상의 약으로 치료하였으므로, 치료하고 난 뒤에도 달라진 무엇은 없다.
물고기가 본래부터 물 속에 있었음을 알았다고 무엇이 달라지며, 아쥬냐닷타가 제 얼굴이 있음을 알았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러므로 병을 치료한 뒤에도 여전히 옛날 그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분별심은 어떻게 되었는가? 분별심도 여전하다.
다만 이제는 분별심의 실상을 알아서 내려놓았으므로 더 이상 분별심의 노예가 아니라는 점이다르다.
혹자는 분별심을 내려놓는다는 말이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분별 없이 막된 행동을 하는 것이라든지 아무 생각도 없는 고요함으로 오해하지만, 이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분별 없는 막된 행동이나 생각 없는 고요함은 무분별이라는 분별심에 빠져 있는 것일 뿐이다.
진정으로 분별심을 내려놓았다면 이제 분별심의 정체를 알고 있으므로 이전보다 훨씬 더 적절히 분별 할 수 있게 된다.
이전은 분별심의 노예가 되어 영문도 모르고 분별심에 끌려 다녔다면, 이제는 분별 심의 주인이되어 분별심을 적절히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이란 다만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뿐 이다.
그 밖에 따로 진리를 얻는다든지,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무슨 진인(眞人)이 된다든지 한다면, 이것은 모두 이법(二法)이요 유위법(有爲法)으로서 바른 진리가 아니라 외도(外道)의 견해이다.
첫댓글 분별의 환상 꿈에서 깨어남은 분별의 양변을 쌍차쌍조하여 원융함으로 정견한다. 양변의 연기실상 공성실상을 보아 쌍차하고 나서야 머문바 없는 마음을 내니 비로소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산은 푸르고 물은 흐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다석 선생은 「이 상대세계에 머무르지 않는 참나인 얼나에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 이 말 한 마디만 잘 알면 해탈할 수 있고 구원받을 지경에 갈 수 있다.」말씀 한 바 있듯이 장로님 역시 서장 2장의 분별심이라는 환상의 병을 깨어남을 " 분별의 양변을 쌍차쌍조하여 원융함으로 정견한다."하심에 이해가 같으심을 알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