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과 1800년 사이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가며
음악가로서의 비참한 운명과 맞닥뜨리게 된다.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인생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두려워
여러 해 동안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1801년에 이르러서야 절친한 두 친구인 의사 베겔러와
목사 아멘다에게 고백하게 된다.
그는 베겔러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얼마나 나의 존재를 저주하였는지 모르네!
플루타르코스*가 나를 체념으로 인도해주었다네.
그러나 가능하면 이 처절한 운명과 싸워보고 싶네"
라고 말한다.
청력 상실의 시련으로 인해 베토벤은 '영웅'이란 주제에
더욱 끌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한 순간부터
항상 머릿속에 '영웅'을 꿈꾸며
비참한 자신의 운영과 싸웠을 것이다.
비참한 운명에 처한 인간을 구제할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영웅!
고통 속에 허덕이는 세상 사람들도, 병마에 시달리는 자신도
그 영웅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으리 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 당시 꿈속에 들어온 당대의 영웅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였다.
그가 보기에 나폴레옹은 시민의 대변인이자
평화의 전도사로서 폭군들을 물리치고
인간의 권리를 되찾아줄 공화주의자였다.
나폴레옹을 생각하며 베토벤은 교향곡을 작곡하였고,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1804년 12월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바친다는
헌사 부분을 찢어버렸다.
"나폴레옹은 영웅이 아니었어.
권력욕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어."
베토벤이 동경했던 '영웅'에 대한 상실감은 매우 컸다.
이후, 마음을 추스리고 그는 생애 최고의 대작에
'영웅'이라는 나폴레옹보다 더 큰 제목을 붙였다.
이렇게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이 탄생하게 된다.
'합창환상곡'(1817)의 가사를 쓴 시인 크리스토프 쿠프너
(1780~1846)가 베토벤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좋아하시는 곡은 무엇입니까?"
베토벤은 대답한다. "에로이카!" '영웅교향곡'이라는 것이었다.
'운명교향곡'일 거라고 생각했던 쿠프너는 되물었다.
"C단조(운명교향곡)가 아니구요?"
베토벤은 다시 한번 못박았다.
"아니오, 에로이카요."
1805년 4월 6일, 베토벤은 교향곡 제3번 '영웅'이
빈의 안 데아 빈 극장에서 초연하게 된다.
'영웅교향곡'은 그가 만든 생애 최고의 역작인 만큼
베토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다음날 공연이 끝난 후,
반응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 공연에 대해 라이프치히의 '알게마이네 음악신문'은
"너무 어렵고 생소하고 긴 곡이다.
전체적으로 밝아지고 투명해지고
통일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일반인들이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라고 기사를 쓴다.
사실 이 작품은 종래의 교향곡보다 두 배에 가까운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 긴 작품에 있어서 한 부분도 고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곡을 연주하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게 사실이지만, 머지않아
이 곡이 전혀 길지 않다고 느껴질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