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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부산교구 가야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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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성당게시판 스크랩 가톨릭 전례 : 파스카 성삼일 / 김인영 신부 역 /
백송 추천 0 조회 44 07.04.07 09: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톨릭 자료실 > 가톨릭 전례 > 파스카 성삼일

파스카 성삼일
김인영 신부 역

I. 연례 부활 축일의 기원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요한 복음의 수난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여 니산달 14일에 부활축일을 지내던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지내던 전례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반면 공관복음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 기사는, 사도시대에 공관복음의 전통에 속한 공동체들이 거행하던 부활전례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본다.
 
부활축일에 대한 자료는 1고린 5, 7-8과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베드로의 편지는 부활 때 세례를 베푸는 기회에 한 강론이라고 여겨진다.
 
이처럼 2세기에 이르러서야 연례적 부활축일의 거행에 관한 확실한 기록을 찾을 수 있으며, 부활축일의 날짜와 전례 및 그 내용에 대해서 알 수 있다.
 
2세기 말에 소아시아의 교회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시리아와 칠리치아(Cilicia)의 교회는 주간 평일이라 하더라도 니산달 14일에 단식을 마치고 부활축일을 지내는데(이로부터 '14일주의자'라는 말이 나왔다) 사실 이날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한편 로마를 중심으로 한 다른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니산달 14일에 단식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니산달 14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부활축일을 지내고 또 그때가지 단식을 행하였다.
 
이같이 서로 다른 날에 부활축일을 지냄으로써 빅또리오 교황(189-199) 때 교회분열의 위기를 가져온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부활축일의 주된 내용을 주님의 죽음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주님의 부활로 할 것이냐가 아니었다. 이 논쟁에서 문제의 핵심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날(니산달 14일)에 부활축일을 지낼 것이냐 아니면 부활하신 날(니산달 14일 다음 주일)에 지낼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결국 파스카 신비에 대한 서로 다른 강조점과 함께, 유다교의 파스카 전통을 결정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이 분쟁의 원인이었다 하겠다.
 
이러한 분쟁은 "동방의 형제들은 로마교회와 알렉산드리아와 다른 교회들의 관행을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선언한 니체아 공의회(325)의 교령과 이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 후에 387년 끝나게 되었다. 부활축일을 주일에 지내도록 한 협정은 1582년까지 지켜졌다. 하지만 1582년에 반포된 그레고리오력(曆)이 그리이스 교회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 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예레미아 2세가 니체아 공의회에 충실한다는 이름아래 그레고리오력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이 협정이 깨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이들, 특히 갈라진 형제들이 동의한다면 부활을 정해진 주일에 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전례헌장 부록 참조).
 
부활전례는 부활전야로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테르툴리아노와 로마의 히뽈리토가 증언하고 있듯이 이 날밤 독서 후에 세례를 베풀며, 새벽녘에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 부활전야를 마친다. 부활전야 전에 단식을 하는데, 이 단식은 성금요일에 시작하여 부활전야의 성찬례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부활을 기리는 파스카 성삼일(성금요일, 성토요일, 부활주일 :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미 이를 '파스카 성삼일'이라고 이름지었다)은 니산달 14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부활을 지내던 지역에서 발달된 것이다.
 
4세기에 이르러 복음에 나오는 사화들을 실재로 거행하고자 하는 관행이 생겨나면서 성목요일에 성찬례 제정에 관한 예식을 지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후에 성목요일의 전례(주님의 만찬미사말고도 두 대의 미사가 첨가되면서)는 파스카 성삼일의 단일성을 깨뜨리면서 파스카 성삼일은 성금요일-성토요일-부활주일이 아니라 성목요일-성금요일-성토요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하였다. 이어 성금요일은 특히 중세 때 대중신심들로 뒤덮이게 되었다(예 : 십자가의 길).
 
1951년 비오 12세는 실험적으로 부활전야를 복구하였다. 1955년 파스카 성삼일의 단일성이 회복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은 부활전례가 단일성, 단순성, 내용의 풍부함을 갖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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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파스카 성삼일의 의미
 
파스카 성삼일의 전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파스카 신비의 단일성에 기초하고 있다. 마치 부활이 죽음을 전제로 하듯이 파스카 성삼일을 이루는 하루하루는 서로 다른 날들을 향하여 열려 있다. 이 삼일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성찬례가 거행되는 부활전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파스카 성삼일은 '삼일에 걸쳐 지내는 파스카'라고 정의해야만 할 것이다.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지침'1)은 다음과 같이 상세히 말하고 있다. "인류 구원과 하느님의 완전한 현양의 사업을 그리스도께서 주로 당신의 파스카 신비로 완성하셨으니, 즉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소멸하시고 당신이 부활하심으로써 생명을 되찾아 주셨으니,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삼일은 전례주년의 정점으로 빛난다. 주일이 주간의 정점을 이루듯이 부활대축일은 전례주년의 정점을 이룬다"(전례력 지침 18).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삼일은 주의 만찬으로 시작되고 부활 전야제로 정점에 이르며 부활주일 저녁기도로 끝난다"(전례력 지침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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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주님의 만찬미사 : 파스카 성삼일의 시작
 
로마전례에 있어 4세기까지는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예식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그 당시는 부활전야에 지내는 성찬례가 파스카 성삼일 동안 지내는 유일한 성찬례였다. 7세기에 들어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성목요일에 다음과 같은 세대의 미사를 거행하게 된 것이다 : 참회자들을 위한 화해미사(아침), 성유 축성을 위한 미사(정오쯤), 말씀의 전례를 생략한 채 주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미사(오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미사전례서와 전례주년을 개정할 때, 주님의 만찬미사로부터 성삼일이 시작되도록 함으로써 성금요일-성토요일-부활주일의 일체성이 다시 회복되었다. 이렇게 파스카 성삼일은 하나뿐인 파스카 신비를 역사적 차원에서 지내는 반면, 성목요일(주님의 만찬미사)은 예식(禮式)의 차원에서 파스카 신비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주님의 만찬미사를 오후에 지냄으로써 축제적인 분위기에 싸이게 된다. 이날의 성서구절들과 기도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만찬예식을 드리는 중 우리에게 전달하시어, 삶의 차원에서 교회가 주님의 수난 신비에 참여하기 위해 봉사와 형제적 친교를 이루도록 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 안에서 발을 씻겨주는 예식(세족례)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 예식은 성 아우구스티노 시대 이후로 거행된 것으로서, 오로지 주교좌 성당에서만 거행되었다가 비오 12세의 개혁(1955) 때 모든 교회가 지낼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성찬례를 마친 다음 성체를 미리 준비한 장소2)로 옮겨가는데, 이는 신자들이 자정까지 성체조배하고, 성금요일의 말씀의 전례 때 성체를 영해주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사 중의 성체공경이나 미사 밖의 성체공경의 본 뜻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무덤'이 아니라 성체를 모시고 있는 감실을 성대하게 보여 주는 것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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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성금요일 : 파스카 성삼일의 첫날
 
교회는 파스카 성삼일의 첫날인 성금요일에 성대한 말씀의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신비를 기념한다. 그 기원에서부터 완전한 단식을 거행하는 날인 성금요일에는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았다. 이미 2세기에 성 유스띠노가 말한 순서와 같이 독서들을 봉독한 다음 성대한 신자들의 기도 또는 "보편지향기도"라 불리는 기도를 바쳤다.
 
성찬례 대신 십자가 경배 예식을 거행하는데, 이 예식의 기원은 4세기 예루살렘 교회에 두고 있다.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성 치릴로와 예루살렘 여행기를 쓴 에테리아가 증언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예식은 4세기에 이미 예루살렘에 존재하였다.
 
로마전례의 옛 관습을 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영성체로 성금요일 예식을 마쳤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이래로 집전 사제만이 영성체를 하였으나, 1955년 비오 12세에 의해 이루어진 성주간 예식의 개정 때 많은 논란 끝에 신도들도 성체를 영할 수 있는 관습이 복구되었다.
 
성금요일의 예식은 사도 성 요한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십자가 신학을 드러내고 있다. 이날은 교회가 애도를 표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샘인 유혈제사(流血祭祀)를 사랑스런 마음으로 묵상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그분의 부활의 영광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런 뜻에서 "복된 수난"과 같은 전형적인 전례적 표현도 이해된다. 이 같은 구원론적 십자가 신학은 성금요일 전례에 나오는 기도문들 뿐만 아니라 특히 이날 사용되는 성서독서들 안에도 드러나고 있다 : 야훼의 종의 네 번째 노래(이사 52, 13-15; 53, 1-12); 히브리인에게 보낸 편지의 사제적 본문(히브 4, 14-16; 5, 7-9). 요한 복음에 의한 수난기(요한 18장, 19장).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성금요일에는 단식을 행하였는데, 이날 하는 단식을 의미심장하게 "파스카 단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이 단식을 부활전야의 성찬례까지 연장하여 "고상하고 감수적인 마음으로 주의 부활의 즐거움에 다다르도록" 권하고 있다(전례헌장 110 참조). 성금요일의 단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함을 드러내는 성사적 표지이다. 이미 예수께서 지적하신 대로 "신랑을 뺏기는 날" 제자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루가 5, 33-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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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성토요일 : 파스카 성삼일의 둘째 날
 
적어도 "십사일주의자"와의 문제가 있었던 시대인 2세기 이래 성토요일에는 엄격한 단식을 행하였으며, 따라서 영성체도 하지 않는, 성찬례가 없는 날이 되었다. 이날 서로 만나는 기쁨을 포기하기 위해서 모임도 갖지 않았다. 성삼일의 일체성이 사라진 오랜 기간 동안 성토요일의 본래 뜻도 상실되었으니, 이날 아침 부활전야 예식을 미리 앞당겨 거행하기도 하였다. 1955년 비오 12세의 개혁 때 성토요일의 "무성찬례"(無聖餐禮) 성격이 복구되었다.
 
이날 교회는 시간전례를 거행하기 위해서만 모일 뿐이다. 기도 중 교회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승리를 가져오는 투쟁, 영광을 가져올 투쟁 후에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쉬시는 것을 기념한다. 이날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신"(1 베드 3, 19) 구원신비를 묵상한다. 이날 교회는 "사람의 아들은 죽음을 당한 후 삼일 후에 부활하여야 한다"(루가 9, 22)는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기를 기다린다. 따라서 성토요일은 신앙과 희망의 표현인 참회로 특징을 이루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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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부활주일 : 파스카 성삼일의 셋째 날
 
처음부터 성토요일은 주일 새벽 성찬례로 끝나는 부활전야 때까지였다. 원래 이 예식은 다른 토요일의 예식과 다를 바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해당 주일의 첫 전례 거행은 전야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부활전야를 "모든 전야의 어머니"라고 부른 의미를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전례의 부활전야 예식은 본래 로마 것이 아닌 요소들의 첨가로 인하여 더욱더 화려해졌는데, 예를 들어 부활전야의 시작부분을 이루는 불과 초의 예식이 바로 그것들이다.
 
2세기 이래로 부활전야에는 세례성사를 거행하는 것이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이날 읽는 성서독서들 역시 물과 성령 안에서의 세례를 통하여 실현된 부활신비들을 예형적으로 선포하고 있다(새 세상과 새 인간의 창조, 세례, 하느님의 약속, 부활 …). 이어 성찬례를 지냄으로써 부활전야 예식을 끝맺는데, 새로 영세 받은 이들은 처음으로 성찬례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전례개혁 이후에도 부활전야는 세례성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가능하다면 세례서원의 갱신 예식만을 거행할 것이 아니라 세례거행을 실제로 거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활전야 예식은 부활의 기쁨 가운데 행해지는데, 참된 파스카 성찬례인 이날의 성찬례로 예식을 마감하기까지 절정을 향해 상승 운동을 계속한다. 불과 초의 축복 그리고 부활찬송으로 이루어진 준비예식 다음에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는데, 이를 위해 9개의 독서가 마련되어 있다. 이어 세례성사를 거행하고 성찬례가 그 뒤를 따른다. 부활전야 예식을 이루는 여러 의식들은 말씀의 선포와 입교성사를 통한 그 말씀의 실현과 함께 부활신비를 뚜렷이 드러내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부활전야 예식이 드러내고자 하는 근본 상징은, 이 밤이 "밝게 비추인 밤"이자 "낮에 의해 정복당한 밤"이라는 것이며, 여러 상징들을 통하여 은총의 삶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솟구쳐 나왔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부활전야의 성격상 밤에 전례를 지내야 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밤에서 낮으로의 바뀌는 것과 같은 실감나는 상징은 그 어떤 추상적 개념보다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서의 파스카 신비의 실체를 더 잘 표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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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성령강림
 
부활전야 때 지낸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완전히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교부들은 이 날을 "제 팔일"이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죄로 인해서 혼란된 첫 창조 때의 일주일(칠일)이 이날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 '새' 날의 기쁨을 연장하기 위해서 2세기 이래로 부활축일을 50일간 지냈다. 이 오십일 동안의 부활시기는 부활주일과 마찬가지로 축일처럼 지냈으며, 따라서 무릎꿇고 기도하거나 그 어떤 형태의 참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반포된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하고 있다 :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의 50일간은 하나의 축일같이, 하나의 '큰 주일'같이 기쁨으로 용약하며 지낸다. 이 50일간 특히 알렐루야를 노래한다(전례력 지침 22). 이 시기의 주일들을 하루의 부활주일처럼 여긴다.(전례력 지침 23). 부활시기의 첫 8일은 부활 8부로서 주님의 대축일로 지낸다(전례력 지침 24)."
 
부활시기에는 사도행전을 봉독하는데, 이러한 관습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아우구스티노가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아주 오래된 것이다. 복음은 사순절 중간 시기부터 읽어 온 요한복음을 선포한다.
 
루가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부활 제40일에 승천축일을 지낸다. 이 신비는 파스카 신비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시는 분은 성탄 때의 예수도 아니요 십자가의 예수도 아닌 부활하신 예수, 성부로부터 메시아요 주님으로 세워진 예수, 그리하여 당신의 사제직을 온전히 행사하시는 예수,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새 아담(1고린 15, 45) 예수이시다. 승천의 신비는 주님께서 세상에 대해 보편적인 왕권(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오십일 동안 파스카 신비를 축하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부활시기"(성령강림 전야미사 본기도)는 성령강림축일로 끝맺게 된다. 이 성령강림축일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며, 세세 대대로 숨겨진 신비를 모든 백성들에게 드러내고,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신앙을 고백하게"(성령강림 감사송) 한다. 이렇듯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은 '50일' 동안 지내는 신비들의 일체성을 회복시켰다. 이 같은 일체성은 7세기 이래 성령강림축일이 성령의 오심을 기념하는 대축일로 변하면서 깨졌다. 이렇게 됨으로써 성령강림은 독립적인 축일로 변모되었고 급기야 8부축일까지 만들어짐으로써 마침내 파스카 신비와 맺고 있는 일체적 관계가 끊어졌던 것이다.
 
바울로 6세의 미사전례서는 전례 각 요소들의 참되고도 풍부한 신학적 의미들을 되찾았다. 이 모든 것의 가치를 일체성 안에서 드러내도록 하는 것은 이제 사려 깊고 공부하는 사목자에게 맡겨진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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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譯註. 이 지침은 '미사전례서의 총지침'에 덧붙여 있다. 1969년 바울로 6세의 자의 교서로 반포된 이 일반지침은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까닭에, 각 수도회와 교구의 전례토착화, 축일 우선 순위, 전례주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문헌이라 하겠다.
2) 譯註. 많은 사람들이 성 목요일 미사 후에 성체를 모셔놓는 장소를 무덤제대라고 말하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개념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은 다음 날(즉 성 금요일)에나 이루어질 것이기에 무덤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고, 제대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곳이지 성체를 공경하는 장소가 아니기에 제대라는 표현 또한 옳지 못하다. 무덤제대라는 표현은 잘못된 신학에 의거한 중세 신심에서 나온 표현이므로 우리는 무덤제대라는 말보다 현양감실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A. Bergamini, 이 글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고 김인영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전례학 사전 항목입니다. 현재 전례학 동호회를 중심으로 사전 번역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수도원이나 전례학 동호회로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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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yrie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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