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놓고 갈랍니다. 사회에서 이룬 재산 내가 움켜쥐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人生은 無입니다』
팔십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은 자신의 全재산 1300여억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耕岩(경암)학술상」을 제정한 (주)태양사 宋金祚(송금조·81) 회장은 부산에서 50여 년간 향토기업을 운영해 왔다. 그의 기부는 기업과 정치권 간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사건으로 인해 분노하고 맥이 빠진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宋金祚 회장은 2003년 초 부산大가 경남 양산지역의 제2캠퍼스 부지매입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私財를 기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宋회장은 2003년 10월 부지매입 비용(305억원) 전액을 기부하기로 부산大 측에 약속하고, 우선 105억원을 현금으로 기탁했다. 宋회장은 이미 기부한 105억원 이외에 50억원을 올해 기부하였으며, 나머지 금액은 2009년까지 연차적으로 기부할 계획이다.
宋회장은 『부산지역의 대표적 교육기관이 부지를 마련하지 못해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부산에서 살아온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며 기부 동기를 밝혔다.
평소 자신의 全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던 宋회장은 부산大에 私財 305억원을 기부하기로 한 지 약 20일 뒤인 2003년 11월3일 「국가의 교육과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宋회장이 당시 밝힌 기부금은 1000억원(부동산 650억원, 현금 350억원) 규모였다.
宋金祚 회장이 私財 1000억원을 추가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지역사회와 宋회장 주변에서는 반신반의했었다고 한다. 宋회장은 이후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업을 조용히 진행해 온 宋회장은 2004년 2월 「耕岩교육문화재단」을 공식 설립했다. 최근 자신의 私財 1000억원을 재단에 출연하는 절차를 마무리했다.
宋회장의 부인 陳애언(58·耕岩교육문화재단 상임이사·前 경희大 음대 교수)씨는 『회장님(陳씨는 인터뷰 내내 남편을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께서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상당수의 주위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000억원의 私財를 재단에 출연하자 그때부터 「대단한 일을 했다」, 「존경스럽다」는 등 격려의 분위기로 바뀌었으나, 회장님께서는 그런 격려조차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기자는 2004년 말 耕岩교육문화재단 관계자를 통해 宋金祚 회장 인터뷰를 요청했었다. 그러나 며칠 뒤 재단 관계자는 『宋회장께서 자신이 한 일은 세상에 널리 알릴 만한 게 못 된다고 생각한다』며 인터뷰 요청을 사양한다는 뜻을 정중하게 전해 왔다.
기자는 「耕岩학술상」에 대한 발표가 있던 다음날인 지난 8월22일 다시 宋金祚 회장 측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 다음날인 8월23일 宋회장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 『宋기자의 뜻은 잘 알겠지만, 회장님께서 워낙 자신의 얘기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는 데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기 때문에 인터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전화통화가 20여 분간 계속됐고, 결국 부인에게서 『宋회장과의 인터뷰를 주선해 보겠다』는 답을 받을 수 있었다.
단출한 사무실
宋金祚 회장과 부인 陳애언 여사의 인터뷰 장면.
지난 8월30일 오전 부산 서면로터리 도로변에 위치해 있는 (주)태양사를 찾았다. 5층 건물의 2층에 있는 (주)태양사의 문을 들어서자, 30여 평의 사무실에 10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사무실 안쪽으로는 칸막이가 설치돼 있었다. 잠시 후 50代 중반으로 보이는 부인이 기자에게로 다가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宋회장의 부인으로 耕岩교육문화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陳애언씨였다.
陳상임이사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20여 평의 공간이 나왔다. 宋회장의 사무실이었다. 공간 한쪽에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중간에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있었다. 흔한 장식용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1000억원대 재산가의 사무실치고는 너무 단출했다.
陳이사와 잠시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宋金祚 회장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宋회장은 자그마한 키에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半白의 머리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에서 宋회장에게 드리워진 팔십 연륜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다.
『宋기자, 本이 어딥니까?』
宋金祚 회장은 기자의 명함을 건네받고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대뜸 『本이 어딘가요』라고 물었다. 「恩津(은진)」이라고 답하자, 宋회장은 『一族(일족)을 만났다』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앉아 있던 부인 陳이사는 『회장님은 「恩津 宋씨」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워하실 수 없어요』라고 했다.
宋회장과의 인터뷰는 중간중간에 陳이사가 보충설명을 해주는 방식으로, 점심도 거른 채 3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宋회장은 말을 아주 아꼈다. 기자와 宋회장 간에는 긴 질문과 짧은 답변이 이어졌고, 고비고비마다 陳이사가 지원군으로 나섰다. 결과적으로 「宋金祚 부부 인터뷰」가 됐다.
宋회장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조용한 목소리로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宋회장은 겸손했다. 宋회장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얘깃거리를 유도해 내기 위해 질문을 하면 『그런 것은 뭐할라꼬!』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마다 陳이사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一族이 묻는데 그냥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라며 거들었다. 지금까지 취재하는 과정에서 「貫鄕(관향)」으로 인해 이처럼 도움받기는 처음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1300억원이라는 거금을 사회에 기부했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宋회장은 잠시 생각을 한 뒤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돈은 제 피와 땀의 결정체입니다. 어느 누군들 아깝지 않겠습니까? 저는 피와 땀을 쏟아 돈을 벌기는 했지만 그 돈을 모두 제 자신을 위해서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회장께서 가진 돈을 모두 사회에 기부하셨는데, 앞으로 무슨 돈으로 생활을 할 계획이신지요.
『(웃으며) 어디에 계시는지는 몰라도, 제 운명을 관장하시는 절대자는 저에게 85세까지는 이승에 머물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때, 저의 남은 인생이 앞으로 4년인데 그 때까지 먹고살 만큼의 돈은 남겨 놓았습니다』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회장께서 4년간 생활하는 데, 돈이 얼마나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사람과 저, 두 식구가 먹고사는 데 많은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2003년 11월 부산大에서 열린 宋金祚 회장의 대학 발전기금 출연식 기념사진.
『돈을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몇 년이나 가겠습니까』
―회장께서 85세까지 먹고살 돈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사회에 기부를 하셨는데, 부인 생각은 혹시 해 보셨습니까.
宋金祚 회장은 기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재빨리 「회장님께서 85세에 돌아가실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질문이 아니라, 부인이 걱정돼서 드리는 질문」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한 질문이 아니라는 걸 제가 압니다. 이 사람이 나보다는 더 오래 살겠지요.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宋회장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이 사람이 생활하는 데 많은 돈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재산분배 때문에 집안에 분란이 일어나는 일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회장님 가정은 그런 걱정이 없겠네요. 이미 재산정리가 끝났으니까요.
『그런 셈이지요. 돈을 한 사람이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돌고 돌아야 하는 겁니다. 돈을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그 기간이 몇 년이나 가겠습니까』
―宋회장이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부인께서는 반대하지 않았는지요.
『전혀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과 음악만 있으면 만족합니다』(부인 陳이사)
宋회장은 첫 부인이 199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뒤 주위의 권유에 따라 1995년 陳이사와 재혼을 했다. 이때 宋회장은 71세, 陳이사는 49세였다.
宋金祚 회장과 陳이사는 원래 사돈 간이었다. 陳이사의 언니가 부산 서면에 있던 순천향병원 원장의 부인이었고, 이 병원장의 사촌누나가 宋金祚 회장의 첫째 부인이다.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던 陳이사는 宋회장의 첫 부인이 사망하기 전 종합검진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을 때 병원 안내를 맡기도 했었다.
陳이사는 경희大 음대(성악 전공)를 졸업한 뒤 美國 보스턴에 있는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서 성악 석사학위를 받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음악분석학과 현대음악 연주법을 공부했다. 이후 가곡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원과 빈 음악원을 수료했다.
귀국 후 성심女大(現 가톨릭大)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陳이사는 다시 美國으로 건너가 메릴랜드 대학에서 성악연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 사범대학 성악강사로 재직했다.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 재직 중 미술교육을 전공해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보스턴·시카고·워싱턴 D.C 등지에서 10회 이상 독창회를 가졌던 陳이사는 1991년 한국으로 돌아온 뒤 호암아트홀에서 귀국 독창회를 갖기도 했다.
―전공인 음악과 좋아하는 일만 있으면 만족한다지만, 이 말은 현실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편이 평생 모은 돈을 제가 사사롭게 쓰는 것보다는 남편으로 하여금 그 돈을 국가나 사회를 위해 사용하도록 뒤에서 내조하는 게 더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宋金祚·陳애언 부부의 만남
宋金祚 회장과 부인 陳애언 여사.
이 대목에서 기자는 話題(화제)를 宋金祚·陳애언 부부의 재혼 얘기로 슬쩍 돌렸다. 陳이사는 宋회장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독신으로 지내며 음악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두 분은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까.
『제 아버지의 忌日(기일)이 8월15일입니다. 10년 전(1995년) 아버지의 忌日이어서 부산에 내려왔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거든요. 주위에서 「훌륭한 분이 있다」면서 한 번 만나 보라고 권하더군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권유가 워낙 강경해 별다른 생각 없이 회장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宋회장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까.
『회장님을 처음 만난 뒤 그냥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얼마 후 회장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에게 「오늘 아침 여섯 번째 전화를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아프고 안됐더라구요』
이때 宋회장이 陳이사의 말을 가로채 『아이다. 내가 니한테 전화번호를 가르쳐 줄 수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전화번호를 알려 줬잖아.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는 것을 보고 「니도 마음이 조금은 있는 갑다」라고 생각했지』라고 했다.
『어른이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알려 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
―宋회장께서 여러 번 전화하신 게 가슴 아파 결혼을 하셨군요.
『회장님의 외로운 부분을 제가 잘 감싸 주고 위로해 드릴 자신이 있었어요. 저는 어린 시절을 비교적 부유하게 자란 편이지만, 회장님은 어렵게 자라셨잖아요』
陳이사는 50代 후반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행동에 소녀 티가 배어 있었다.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웃을 때에는 두 손으로 입을 감쌌다. 宋회장처럼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듯, 자주 얼굴을 붉혔다. 목소리는 성악을 전공해서인지 청아했다.
『재산을 국가에 바치겠다는 게 회장님의 평소 소신』
―회장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後世가 없고, 現 陳이사와의 사이에서도 後世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後世가 있었더라도 지금처럼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자식이란 자신의 代를 이어 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중요하기는 하지요. 많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어 더 키우는 것도 좋지만, 사회에 기부해 사회공익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陳이사께서도 宋회장님의 이같은 생각에 동감하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선진국의 예가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많다고 해서 자손에게 모두 물려주거나 무의미하게 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여유가 있으면 대학이나 불우이웃 등 사회에 환원을 합니다. 특히 회장님께서 모은 재산은 회장님의 피와 땀이기 때문에 더욱 더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陳이사는 『회장님께서 저와 결혼한 직후 저에게 「나의 재산을 국가에 바치는 게 소신」이라고 했다』면서 『나도 회장님께서 근검절약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바치는 게 좋겠다고 동의했습니다』라고 말했다.
―宋회장께서 평생 모으신 재산을 대학과 사회에 기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인지요.
『2003년 부산大 관계자로부터 「제2캠퍼스를 경남 양산에 조성해야만 학교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데 예산을 확보할 수 없어 추진을 못 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예산이 부족해 나라의 동량들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부지 매입비(305억원)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요』
―부산大에 기부하기로 한 305억원 이외에 私財 1000억원을 출연해 耕岩교육문화재단을 설립했는데, 재단의 설립취지는 무엇인지요.
『제가 한평생 모은 재물을 사회 발전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뭐, 그밖에 거창한 목적은 없습니다』
매년 耕岩학술상 수여
―1000억원이란 재단출연금이 국내 최대 규모인 것 같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주위에서 그렇게들 얘기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국내 최대 규모라는 데 별다른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耕岩교육문화재단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몇 가지 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만 우선 올해부터 매년 耕岩학술상을 수여하게 됩니다. 수상자별 상금은 1억원으로 책정해 두고 있구요』
宋회장은 『인문·사회분야, 생명과학분야, 공학분야, 예술분야의 4개 분야별로 탁월한 업적을 이룬 학자와 전문가·예술가를 매년 선정, 시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평생 모은 재산을 교육문화재단에 기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요.
『제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죽으면 돈을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구요』
이때 부인 陳이사가 말을 아끼는 宋회장을 대신해 다음과 같이 기부 동기를 부연 설명했다.
『누구에게나 재산은 참으로 소중할 것입니다. 재산을 모으기 위해 들인 희생과 노력을 생각하면 선뜻 사회에 환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人之常情(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재산을 향유하고 세습하기보다는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아름답고 더욱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陳이사는 『회장님은 소박·근면·성실하며 절약과 자기 절제력이 무척 강한 분』이라며 『늘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경제와 과학기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私財를 출연하시는 데 대해 저도 적극 찬성했다』고 했다.
―「耕岩」은 宋회장님의 號(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누가 지어 준 것입니까.
『부산지역 대표적 문학가 樂山(요산) 金廷漢(김정한·작고) 선생께서 지어 주신 것입니다. 樂山 선생께서 생존해 계실 때 자주 뵙곤 했습니다.
하루는 樂山 선생께서 「宋선생도 이제 號가 있어야 되겠는데, 자네는 부지런하니까 어려운 일도 많이 해야지. 돌을 부지런히 깎아 반석을 만들라는 뜻에서 耕岩이라고 하면 되겠네」라고 하시더군요』
『재산은 소중하지만 세습은 안 된다』
宋金祚 회장이 2003년 11월 부산大로부터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는 장면.
―흔히 자수성가한 분들은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돈을 모았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회장님의 경우는 어떠한지요.
『아이고 뭐, 저도 그런 분들처럼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것 입고서야 어떻게 직원들 월급 주고 돈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특별히 어떤 것을 먹고 싶다거나 입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몸도 비교적 건강한 편이구요』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밴 회장께서 승용차는 독일제 벤츠를 사용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운영해 온 회사 중 (주)태양사는 양식용 스푼이나 나이프 등을 만드는데, 전량 독일에 수출했습니다.
독일 수입업체 회장이 한국을 방문할 때 국산 승용차로 공항에 마중을 나갔습니다. 이분이 하루는 「우리가 많은 물건을 사 주는데, 독일 승용차 한 대도 사 주지 않느냐」고 해 벤츠 승용차를 처음 구입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중고 벤츠 승용차를 구입해 15년을 사용했습니다』
『승용차는 최소한 15년 이상 탄다』
―그 이후 계속 벤츠 승용차를 사용해 오셨군요.
『중고 벤츠 승용차가 너무 낡아 운용할 수 없게 돼 다시 벤츠 승용차를 구입했죠. 이때는 중고가 아닌 새 차를 구입했어요.
저는 평소에는 이 차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날이나 외국 손님이 올 때만 사용했습니다』
―평소에는 어떤 승용차를 사용했습니까.
『뭐, 특별히 가리지 않습니다. 트럭을 타고 다닐 때도 있고, 국산 승용차를 탈 때도 있구요』
―두 번째로 구입한 벤츠 승용차는 몇 년을 타셨습니까.
『근 10년 탔을 겁니다』
宋회장에게 「구두를 사면 얼마 동안 신느냐」고 묻자, 『그건 제가 얘기하지요』라며 부인이 설명을 했다.
『제가 회장님과 결혼했을 때, 회장님은 너무 오래된 구두를 신고 있었어요. 구두를 새로 사자고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집을 피우세요. 구두 끈 갈고, 떨어진 부분은 다시 꿰매 신더군요. 한 10년 신었을 겁니다』
陳이사는 『처음 시집 와서 살림을 챙겨 보니까 회장님의 양복이 오래돼 너덜너덜하더라』며 『그래서 제가 고집을 부려 양복 몇 벌을 새로 마련했다』고 했다.
―회장께서는 중요한 거래선 사람들과도 자주 만날 터인데 왜 너덜너덜한 양복을 고집하시는지요.
『양복이야 다 떨어질 때까지 입는 것 아닙니까? 얼마든지 입을 수 있는데도 왜 새 양복을 삽니까. 양복점에 가서 양복을 맞출 시간도 없었구요』
宋회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슬쩍 부인 자랑으로 말꼬리를 돌렸다.
『사실, 이 친구(陳이사)를 만난 뒤로부터 가끔은 좋은 옷도 얻어 입습니다. 먼저 간 처는 그런 것을 잘 못했어요. 저도 관심 없었구요』
陳이사는 『100만원 상당의 명품 브랜드 양복을 한 벌 사 드리려고 하니까, 「난 안 한다. 서면시장에 가면 10만원만 줘도 좋은 양복 천지인데…」라며 반대를 해 좋은 양복을 살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陳이사는 宋회장이 스스로 말을 하기 곤란한 부분에 대해서는 숨김없이 대변인 역할을 했다.
『당신 눈에는 모차르트만 보이지만, 내 눈에는 돈이 보인다』
2004년 부산大 본관 앞에 세워진 자신의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宋金祚 회장.
『돌아가신 사모님은 독실한 佛子였어요. 오로지 절에 가서 회장님 사업이 잘 되기만을 기도하셨습니다. 회장님 자신도 입는 것과 먹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사모님의 내조는 절에 가서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간혹 「나는 늘 음악이 좋아서 죽겠는데, 당신은 어때요」라고 물으면, 「너는 모차르트인가 뭔가만 눈에 보이지만, 나는 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마당에 돈이 보인다」고 해요. 그 정도로 사업에만 몰두하시는 성격이세요』
―金宇中(김우중) 前 大宇그룹 회장도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눈에 돈이 보인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
『金宇中씨는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 분이 부산에서 처음 봉제업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사업관계로 그분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대한민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사업 때문에 고민과 노력도 많이 한 분입니다』
―그 당시 회장님과 金宇中 회장 두 분 중 누가 사업을 더 크게 했습니까.
『저는 상대도 안 됐지요. 그분은 정말 사업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생각은 언제 하셨는지요.
『나이가 팔십이 되면서부터 사업을 접기 시작했어요.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요. 몸도 아팠구요.
그래서 제가 이 친구(부인)에게 「내가 얼마 못 살 테니까 조금 있는 부동산하고 돈 몇 푼 있는 것으로 재단을 하나 만들라」고 했지요. 내가 일찍 죽더라도 재산을 다른 데 주지 말라는 얘기도 했어요』
―사업을 하면서 1985년 학교법인 「태양학원」을 설립, 1987년 「경혜女高」를 세우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요.
『뭐, 약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宋회장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자, 陳이사가 설명을 해주었다.
『돌아가신 사모님께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셨습니다. 사모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회장님은 「여성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지만 국가가 잘 된다」는 생각을 늘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산지역에서도 가장 낙후된 북부지역에 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신 것이지요』
陳이사는 『경혜女高 설립 당시 자금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직접 공사감독을 하기 위해 공사현장에서 숙식을 했다』며 『무슨 일이든지 본인이 직접 현장에서 지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경혜女高는 陳이사가 재단 이사장 대행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 내가 얘기할게』
陳이사는 『「마무리를 잘 하려면 재단을 하나 만들되 부산에서 하자. 기부를 하는 것도」 그래서 제가…』라며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宋회장이 『가만히 있어. 내가 이야기할게』라며 말을 가로챘다. 宋회장이 인터뷰 도중 자신이 스스로 말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몸이 아파 서울 삼성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이 친구(부인)가 「부산大 측에서 부지를 마련하는 데 돈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도와주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당시 부산大 측에서는 「200억원 정도 기부해 주는 독지가가 있으면, 학교 앞 거리 명칭을 기부자 이름으로 하겠다」는 방안을 가지고 있었어요.
저는 학교 앞 거리에 제 이름 붙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100억원 정도 기부하려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로부터 학교 부지 매입에 대한 학교 측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 듣고는 기부금이 305억원으로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陳이사가 다시 말을 이어 받았다.
『제가 회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美國을 욕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좋은 점은 배워야 한다. 美國에서 정말 돈 많이 번 재력가는 자기 자식이나 마누라에게 재산을 주지 않고 대부분 사회에 기부를 한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
회장님께서는 당초 재산을 저에게 물려 주려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회장님께서 평생 모은 재산을 제가 물려받으면, 그것은 회장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耕岩교육문화재단에 출연한 1000억원은 어떻게 조성하신 것인지요.
『제가 가지고 있던 650억원 상당의 부동산과 현금 350억원을 출연했습니다』
―출연하신 부동산은 어떻게 평가한 것입니까.
『감정가격이 650억원이었으니까, 실제 시중 가격은 그보다 조금 높겠지요. 제가 가지고 있던 부동산을 대부분 재단에 출연하게 된 것은 이 친구(부인)가 「나는 주지 말고 다 넣어라. 그렇게 하면 나 주는 것과 똑같다」고 하더군요. 정말 욕심이 없는 친구입니다』
『재혼하고 망고와 거봉 포도 처음 먹었다』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 소재 자택 정원에서.
―(陳이사에게) 회장께서 좋아하는 음식이나 과일은 어떤 것입니까.
『「이런 것을 먹고 싶다거나」 하는 건 없으세요. 제가 좋아하는 과일이 망고입니다. 美國에서 즐겨 먹었죠. 그래서 결혼하고 난 뒤 회장님께 망고를 드렸더니, 「맛있네」 하시더라구요. 그때 망고를 처음 드신 것이지요. 거봉 포도도 저와 결혼을 해서 처음 드신 것이지요?』
宋회장은 陳이사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그저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회장님과 첫 부인 사이에 왜 자식이 없었습니까.
『글쎄요, 저나 집사람 모두 건강에는 별 이상이 없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제가 한창 사업을 할 때 집에 잘 들어가지 못했어요. 1주일이나 10일, 어떤 때에는 한 달씩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먹고 잤지요』
陳이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별은 봐야 별을 따지요. 안 그래요?』
―일부에서는 회장께서 자식이 없기 때문에 재산을 사회에 기부할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할 수 있겠군요.
宋회장 대신 陳이사가 대신 말을 이어갔다.
『회장께서는 어릴 때부터 돈을 벌면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를 위해 좋은 일에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저와 결혼을 한 직후 회장께서는 「나는 전 재산을 국가에 바칠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人生은 無입니다』
―팔십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후회되는 일은 없으셨습니까.
『별다른 후회는 없습니다만, 「人生은 無다」, 「정말 잠깐이구나」, 「하고자 했던 일들을 다 못하고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한심하기 그지없지요』
―죄송스러운 질문입니다만, 돌아가신 뒤 회장님의 장례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肉身(육신)은 화장을 하고 뼛가루는 뿌리면 그만이지요. 인간이란 이승으로 왔다가 결국은 흙이 되는 것 아닙니까. 결국은 無입니다』
그러나 陳이사는 『(宋회장을 화장하는 데 대해) 나는 반대한다』면서 『좋은 자리를 미리 마련해 놓을 생각』이라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宋회장께서는 耕岩교육문화재단이 앞으로 어떻게 운영될 것으로 보십니까.
『제가 대충 생각해 보기로는 인간이 한 번 태어나서 죽고 나면, 그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는 기간이 50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재단은 50년, 100년, 그 이후에도 잘 유지될 것으로 봅니다. 우리에게도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 같은 훌륭한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50년 뒤에는 耕岩교육문화재단과 함께 회장님의 이름도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뒤에 누가 재단을 맡을지 모르지만,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봅니다』
―그같은 생각을 하시면 섭섭한 마음도 들겠습니다.
『전혀 섭섭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故人에 대해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 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는 헛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宋회장에게 「앞으로 국내는 물론 외국에 가보고 싶은 곳이 없느냐」고 묻자 한마디로 『없다』고 했다. 부인 陳이사는 『회장님은 지난 10여 년 동안 관광여행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안한 질문입니다만,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회장께서 지금 돌아가신다고 가정할 때, 어떤 유언을 하시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태어나 반드시 한 번은 죽는데, 유언이라고 달리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저 「행복하게 살아라」 하는 거죠』
陳이사가 宋회장에게 『누구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냐』고 묻자, 宋회장이 한 마디 툭 뱉었다.
『니한테지』
『내 유언은 그저 「행복하게 살아라」』
―회장께서는 이미 많은 정리를 하신 셈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셈이네요』
宋金祚 회장은 자신의 교육관 중 일부를 밝혔다.
『국내에 살거나 외국에 살거나 한국 사람은 긍지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육도 그런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스위스·일본·독일 등 교육 선진국 국민들을 보세요.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합니까. 우리나라 국민들도 이런 나라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교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회장님의 어린 시절과 사업하신 얘기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고향은 경남 양산입니다만, 과거에는 경남 동래군 철마면이었습니다. 저는 8남매 중 다섯째입니다. 남자로는 막내이구요.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어릴 때 가정환경이 부유하지는 않았겠습니다.
『무척 어려웠지요』
―학력은 어떻습니까.
『소학교(초등학교) 나왔지요. 그리고 부산으로 와서 상업학교를 졸업했구요』
―경남 양산에서 언제 부산으로 오셨는지요.
『열일곱 살 때 부산으로 왔습니다』
宋회장이 기자의 질문에 단답형으로 답하자, 陳이사가 『형님들은 日本에서 공부하고 그랬잖아요. 가족 얘기가 재미있는데, 좀 자세하게 말씀드리세요』 했다. 그러자 宋회장은 『그런 것은 뭐 할라꼬』라고 받았다. 陳이사도 물러서지 않고 『그래도, 恩津 宋씨, 一族을 만났는데, 얘기 좀 하세요』라고 했다.
宋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기자의 명함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는 기자에게 『大田에도 가봤습니까?』라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충청도는 恩津 宋씨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고, 先山도 있는 곳이다.
宋회장은 기자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기자는 『경북 金泉』이라고 답했다. 기자와 宋회장의 역할이 순간 뒤바뀌었다.
宋회장은 『아, 金泉?』이라며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임진왜란 때 先代 할아버지께서 임금님의 경호무관으로 직무하다가 전사하셨습니다. 그 후 우리 집안은 東萊府(동래부: 오늘의 부산)로 내려와 살아왔습니다. 제가 우리 집안이 동래로 온 이후 13代孫입니다』
―17세 때 부산으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日本人이 경영하는 약품회사에 취직을 했고, 야간 학교도 다녔습니다』
陳이사가 『우체국에도 다녔잖아요. 그때 우체국장 딸하고 연애한 얘기도 좀 해주세요』라고 하자, 宋회장은 『뭐 할라꼬』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陳이사가 『재미있잖아요. 얘기해 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一族이 묻는데…』라고 하자 宋회장은 못 이기는 척하고 그때 얘기를 들려주었다.
『별 얘기를 다하라고 하네. 제가 부산의 우체국에 근무하던 중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체국장 딸하고 연애를 했는데, 그 집안에 남자가 없었어요. 해방 후 우체국장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데, 저보고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그러나 조선 사람인 제가 왜 일본에 가서 살겠습니까? 만약 갔다면 큰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안 갔죠. 이게 전부입니다』
―사업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해방이 된 뒤 약품도매상 면허를 받아 부산 서면에서 약품 도매상을 시작했습니다. 매출도 꽤 괜찮은 편이었어요. 양산에서 처음 부산으로 나와 약품회사에 다녔던 것이 약품도매상을 하게 된 계기인 셈이지요』
약품 도매상으로 사업 첫 시작
宋金祚 회장의 40代 때 모습.
―돈이 없었을 텐데, 사업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는지요.
『제가 약품회사에 근무할 때 병원과 거래를 했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을 하던 분이 아마 저를 좋게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宋회장은 박기출씨의 도움으로 약 30평 규모의 단층 건물에 약품도매상을 열었다. 도로를 낀 앞쪽에는 가게를, 뒤쪽에는 단칸 살림집을 차렸다고 한다. 宋회장은 이곳에서 약품도매상을 6·25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계속하다, 6·25가 나자 징집돼 경남 진해에서 1년6개월간 복무했다.
자신의 軍 복무 얘기를 하던 宋회장의 눈시울은 어느새 젖어 있었다. 기자가 『軍 복무와 얽힌 사연이 있군요』라고 하자 宋회장 대신 陳이사가 그 사연을 들려주었다.
『회장님께서 軍에 입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께서 양산에서 입대장소인 부산까지 고무신을 신고 걸어오셨더래요. 어머니가 굉장히 활달하고 사업가 기질을 가지고 계셨다고 해요.
어머니는 평소에도 회장님을 보고 「너는 성공할 거다. 내가 죽으면 제사는 네가 지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 제사를 막내아들인 회장님께서 모시고 있습니다』
陳이사는 여기까지 말을 한 뒤, 宋회장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인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宋회장의 젖은 눈시울은 좀체 마르지 않았다. 宋회장은 눈을 들어 사무실 천장을 두세 번 올려다본 뒤 말을 이어갔다.
『제가 軍에 입대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먼 길을 걸어서 집합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제 옷소매를 붙잡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너에게 고기도 사 먹이고 싶은데, 돈이 없구나.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군대를 보내서 내가 마음이 아픈데, 죽어서 오지 말고 꼭 살아서 돌아오너라」』
『군대 면회 온 어머니께 곰탕 한 그릇 사드리지 못해 땅을 치고 통곡했다』
宋회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던 陳이사의 얼굴에도 웃음이 멈췄다. 陳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軍 복무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진해로 찾아오셨더래요. 그런데 돈이 없어 어머니께 곰탕 한 그릇 사 드리지 못하고 그냥 되돌아가시게 하고서는 군부대로 돌아와 땅을 치며 울었답니다.
회장님께서는 이때 「앞으로 반드시 돈을 벌어 어머니를 잘 모시겠다」는 결심을 하셨고, 이 결심이 회장님의 생활신조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어머니」란 낱말이 들어간 노래만 나오면 눈물을 뚝뚝 흘리시곤 합니다』
―회장님의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제가 군대에 갔다 온 뒤 사업에 몰입하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 25세이었고, 어머니의 연세 51세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당시 동래에서 살고 계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 돌아가셨지요』
사업 초창기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陳이사가 宋회장을 대신해 말했다.
『회장님이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혼자서 자취했는데, 밥을 한 번 해놓으면 사흘 동안 고추장만으로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쌀밥이 아니라 보리밥이었답니다』
宋金祚 회장은 약품도매상이 순조롭게 운영이 되면서 약간의 돈이 모이자 막걸리를 제조하는 양조업을 시작했다. 양조업은 의외로 잘 돼 부산지역 여러 곳에 탁주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宋회장은 양조업을 하면서 이 사업과 연관이 있는 곡물도매상과 정미소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회장께서는 결혼은 언제 했는지요.
『28세에 했습니다. 중매결혼이었는데, 당시 그 사람은 부산 성남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陳이사가 다시 대변인 역할을 자임했다.
『회장님을 중매하신 분은 회장님 前 부인의 고모부였습니다. 결혼할 당시에는 돈도 좀 벌어서 회장님께서 지프차를 타고 다니셨을 때라고 들었습니다. 처고모부께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회장님을 지켜보니까, 키는 작지만 똑똑해 보여 중매하셨답니다』
宋회장이 갑자기 陳이사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무슨, 니가 뭐를 안다고, 그런 거는 쓰지 마세요』
『새벽 4시에 일어나고, 밤 12시에 잔다』
―宋회장님의 사업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가 하는 사업과 연계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전문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세금은 잘 내야 합니다. 사업가에게 세금을 큰아들과 같은 것입니다』
―사업 시작할 때 하루 몇 시간쯤 잤는지요.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통행금지가 풀리면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밤 10∼12시께 잠자리에 들지요』
―수산물 수출사업도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당시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께서 전국의 양조업자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양조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유지다. 이런 분들은 앞으로 수출에 기여를 하거나 생산업을 하는 게 국가를 위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고심한 끝에 오징어를 일본에 수출하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 아무리 생각해도 수출할 만한 물건이 없었습니다』
일본에 오징어 1차 가공해 수출
宋金祚 회장에게 양복을 입혀 주고 있는 부인 陳애언 여사.
宋회장은 오징어를 1차 가공해 日本에 수출하면서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는 원가의 2배 정도의 가격에 수출을 했지만, 日本에서 올림픽이 열린 1964년에는 원가보다 10배 이상 높은 가격으로 수출을 했다고 한다.
오징어 가공공장은 강원도 속초에 있었는데, 종업원이 1000명에 달했다. 이때 「강원도 처녀들은 宋회장의 오징어 공장에 다 모인다」는 말도 생겨났다고 한다.
『오징어 공장을 운영할 때 부산과 속초를 비롯해 전국을 쉴 틈 없이 다녔습니다. 비포장 도로를 바쁘게 다니다가 지프차가 뒤집어져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지금의 (주)태양사는 어떻게 설립했나요.
『제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약품도매상의 商號(상호)가 「태양상회」였습니다. 그 이후 정부에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때 정부 정책에 부응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 상공부(現 재정경제부)에 「뭘 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하기도 했죠. 그러다가 서양에서 사용하는 식기를 생산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양식기 제조회사인 (주)태양사를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식기는 어느 나라 국민이든지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최소한 망할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다음은 어떤 사업을 하셨습니까.
『봉제공장을 했습니다』
―시류에 맞춰 사업계획을 잘 세우신 것 같습니다.
『네, 봉제공장을 하면서 플라스틱 성형 제조업을 시작했습니다. 에어컨·컴퓨터 등 전자관련 제조업과 함께 인라인 스케이트도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직원을 3000명 가까이 고용했었지요』
소주 한 잔, 노래 한 곡에 스트레스 풀어
―사업을 하실 때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셨습니까.
『뭐, 별다른 것이 있나요. 그거 소주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부르고는 자는 것이지요. 다음날 또 일을 해야 하니까요. 저는 항상 사업도 시대에 맞는 것을 해야지만 낙오자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량은 얼마나 되셨는지요.
『잠자기 전에 소주 한 병 정도 마시고 그랬지요. 그러면 일단 일을 잊어버리고 잠잘 수 있지요. 그런데, 별걸 다 묻고 그러시네』
陳이사가 즉각 개입했다.
『宋씨 一家인데 안심하고 말씀하세요』
―宋회장님의 사업 성공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업무는 직원들에게 일임을 하지만, 자금 및 자재의 흐름은 항상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면 회사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00억원대의 재산은 어떻게 모았는지요.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고 모았죠. 약국·약도매·탁주공장·정미소·제조업 등을 하면서 한시도 한눈을 판 적이 없이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해 온 결과이겠지요』
기자는 陳이사에게 『요즘 宋회장께서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주느냐』고 물으니, 묵묵부답이다. 많지는 않은 모양이다. 陳이사는 『회장님은 절약이 몸에 밴 분』이라며 『세수한 물은 세숫대야에 모아 두었다가 화장실용으로 사용하고, 겨울에도 찬물로 세수한다』고 했다. 陳이사는 『회장님께서는 겨울에도 어지간히 춥지 않으면 보일러는 가동하지 못하게 한다』며 『그 같은 회장님의 절약정신 때문에 겨울에 감기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회장님께서는 한 달 용돈으로 얼마를 쓰십니까.
『아는 분이 오시면 식사 대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밥을 사야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얻어 먹어서는 안 됩니다』
―주로 어떤 음식을 사 주시는지요.
『자장면도 맛있고, 곰탕도 맛있지요』
陳이사는 『회장님께서 친분 있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자장면만 사 주셔서 그분들이 싫어한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요즘에는 삼계탕도 사 주신다』고 했다. 宋회장은 『불고기도 사준다』며 陳이사의 말을 바로잡았다.
―회장님은 애정 표현을 어떻게 하십니까.
『기사로 쓰면 안 되는데… 기분이 좋으시거나, 술을 한잔 드시면 「요즘 내가 니 때문에 이렇게 호강한다. 내가 이렇게 호강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말씀도 간혹 하십니다』(陳이사)
『후회 없는 人生을 살았다』
기자가 宋회장에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宋회장의 답변은 역시 짧고 명확했다.
『예!』
시계 바늘이 오후 2시35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宋회장과 자리를 마주한 지 어느 덧 3시간여가 흘렀다. 陳이사는 『宋회장이 언론과 인터뷰한 것도 처음이고, 누구를 만나 장시간 얘기한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陳이사는 『여보, 모처럼 집안 분을 만났으니, 맛있는 점심을 사 주시면 안 되겠어요』라고 하자, 宋회장은 『그러지 뭐』라고 했다. 이날의 점심 메뉴는 그동안 宋회장에게 자장면만 얻어 먹었던 사람들을 위해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宋회장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全재산을 사회에 다 내놓았는데, 정말 아깝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宋회장의 답변은 짧았다.
『뭐가 아깝습니까?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거죠』
부산지역 개인소득 랭킹 1위를 수년 동안 유지했던 宋金祚 회장은 이미 無所有(무소유)의 마음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첫댓글솔직히 난 이런 기사의 글을 읽으면 감동이 밀려오는게 아니라 짜증부터 난다. "고생해서 번돈 이지만 내돈이 아니므로 전부 대학 발전을 위해 기부하여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 다 공부시키겠다." 뻔한 스토리다. 진짜 감동이 없다. 그놈의 공부공부 공부못해 안달난 놈만 대우 받는 사회다.
먹을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 공부는 오히려 사치스러워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 ,인간의 기본 욕구 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탈탈 털어 교육재단에 기부하는 돈의 10분지 1도 아까운 모양이다. 아마 이미 낙오된 사회부류에 대하여 그 잘난 구제(?)도 힘든 모양이다.
이게 뻔한 스토리였군요? 한 노기업인이 생애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는데 그 가치를 줄세워 측정한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가치 판단의 근거 대상부터 잘못 짚고 있는 건 아닐까요. 송금조 회장의 선행이 자칫 왜곡될 것 같아 글을 옮긴이로서 가슴이 쓰리군요.
자본주의에서 기부문화라는 것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내가 벌어서 남에게 준다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죠. 특히 미국처럼 자본주의(?)가 완벽한 나라는 더욱더 기부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죠. 반면에 우리나라는 괭장히 인색하고 어찌보면 주변 눈치보면서 어쩔수
없이 수재민돕기, 불우이웃돕기 기타등등 자신이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경우가 드문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국과 한국의 기부문화는 달라야 한다. 왜? 미국이라는 나라는 셰계의 많은 나라에서 그래도 유능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구성된 나라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이제껏 미국식 기부문화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다른나라와 경쟁하기 위해서 교육에 기부하고 거기에서 유능한 인재가 나와 국부를 창출하면 더말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만년을 같이 동고동락한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사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적자생존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빈약한 사회복지 단체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아이들, 경쟁체제에서 자신의 꿈조차 사치스러운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를 줄 수 있는 마음과 후원이 상류층에서 많이 나오는 것이 우리나라의 진정한기부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나누는 이의 뜻에 맞게 사용되는게 바람직하다 생각합니다. 물론, 생활속의 나눔이나 젊은 세대의 나눔이 더욱 필요하고 그에 따라 도움이 가난한 이들중에서도 많이 받는자와 적게 받는자의 불균형 감소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지만요. 그것은 언론과 시민의식 그리고 젊은 이들의 몫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부" 라는게 사심없이 진행되면 더 없이 좋겠지만 생색이됐건..광고성이건 강제성이건 기부행위자체를 높이 평가해줘야 할것입니다. 여하한 기부라도 그것은 어려운 결심인데 이것저것 간섭에다 비하하려는 사고는 옳지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바로 한국의 기부문화를 퇴보시키는 주범이 아닐까요...
첫댓글 솔직히 난 이런 기사의 글을 읽으면 감동이 밀려오는게 아니라 짜증부터 난다. "고생해서 번돈 이지만 내돈이 아니므로 전부 대학 발전을 위해 기부하여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 다 공부시키겠다." 뻔한 스토리다. 진짜 감동이 없다. 그놈의 공부공부 공부못해 안달난 놈만 대우 받는 사회다.
먹을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 공부는 오히려 사치스러워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 ,인간의 기본 욕구 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탈탈 털어 교육재단에 기부하는 돈의 10분지 1도 아까운 모양이다. 아마 이미 낙오된 사회부류에 대하여 그 잘난 구제(?)도 힘든 모양이다.
김혜자님의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가 오히려 1300억원보다 더 가치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낀 기사이다. 앞으로는 사회복지재단에 이런 돈을 쓰겠다는 기사가 내 가슴에 왔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게 뻔한 스토리였군요? 한 노기업인이 생애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는데 그 가치를 줄세워 측정한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가치 판단의 근거 대상부터 잘못 짚고 있는 건 아닐까요. 송금조 회장의 선행이 자칫 왜곡될 것 같아 글을 옮긴이로서 가슴이 쓰리군요.
2년전 1차 현금 기탁 후 시민단체와 자선단체등에서 '더 의미있는 일에 돈을 쓰도록 해주겠다'고 송회장을 비롯 부산대와 기자에게 연락이 빗발쳐 송회장이 칩거했던 씁쓸한 사실이 떠오릅니다.
우선 "소년"님께 오해아닌 오해성 글을 쓴 것에 깊은 사과를 드리고 시작하게씁니다. 댓글을 달면서 저 두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올린 글이고 저의 생각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싶어서 약간의 극단적인 단어도 동원하였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기부문화라는 것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내가 벌어서 남에게 준다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죠. 특히 미국처럼 자본주의(?)가 완벽한 나라는 더욱더 기부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죠. 반면에 우리나라는 괭장히 인색하고 어찌보면 주변 눈치보면서 어쩔수
없이 수재민돕기, 불우이웃돕기 기타등등 자신이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경우가 드문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국과 한국의 기부문화는 달라야 한다. 왜? 미국이라는 나라는 셰계의 많은 나라에서 그래도 유능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구성된 나라입니다.
그런 관계로 구성된 나라에서의 기부라는 것은 당연히 영원한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교육이라는 것에 재투자할 수 밖에 업는 것이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미국의 기부는 적자생존이 철저히 드러난 기부라는 것이죠.
반면에 우리나라는 이제껏 미국식 기부문화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다른나라와 경쟁하기 위해서 교육에 기부하고 거기에서 유능한 인재가 나와 국부를 창출하면 더말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만년을 같이 동고동락한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사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적자생존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빈약한 사회복지 단체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아이들, 경쟁체제에서 자신의 꿈조차 사치스러운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를 줄 수 있는 마음과 후원이 상류층에서 많이 나오는 것이 우리나라의 진정한기부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소년님 말씀 대로 가치판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저 같은 경우 감동이 안오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돈 1천억이 넘는 것 대학교에 주는 것보다 사회복지 단체에 기부하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정말 안타까운 마음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짜증나면 그럼 본인이 짜증안나는 기부를 해보시죠..정말 어려운 결심입니다
레드다이어리님 말씀 잘 읽었습니다. 심성이 선하신 분 같군요.
그런 큰돈을 기부할수 있다니 부럽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제가 "여양 진"씨이고, 제 와이프가 "은진 송"씨인데, 그리고 송사장님은 나중에 제가 하고 싶은 일과 비슷한 일을 이미 하고 계시고, 마치 인연 같군요. 글 올려주신 21세기 소년님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건 내가 가진 것을 나눈다는 것은 귀한 일이리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나눔의 문화는 초보수준이라고 하지만, 밥을 굶고 생계를 걱정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분들이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나누는 것이니
나누는 이의 뜻에 맞게 사용되는게 바람직하다 생각합니다. 물론, 생활속의 나눔이나 젊은 세대의 나눔이 더욱 필요하고 그에 따라 도움이 가난한 이들중에서도 많이 받는자와 적게 받는자의 불균형 감소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지만요. 그것은 언론과 시민의식 그리고 젊은 이들의 몫이리라 생각합니다.
레드 다이어리님 말씀이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돈이 있음에도 한푼 기부하지 않는 사람들보다야 장학금이라도 한 푼 더 주시는 분들이 한분이라도 계신 것이 더 낫지요...
그렇습니다.. "기부" 라는게 사심없이 진행되면 더 없이 좋겠지만 생색이됐건..광고성이건 강제성이건 기부행위자체를 높이 평가해줘야 할것입니다. 여하한 기부라도 그것은 어려운 결심인데 이것저것 간섭에다 비하하려는 사고는 옳지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바로 한국의 기부문화를 퇴보시키는 주범이 아닐까요...
비자금 만들어 놓고 걸려도 배째라 하는넘들도 세상 천지인데요 이정도면 존경받고 박수 받을일 아닌가요 이공 전 솔직히 살작 감동 햇는데 ㅋ
지금 이 부부가 기부한 돈을 부산대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해서 소송중입니다. 안타깝네요..